78화
“왼쪽 성벽 막아!”
성은 한밤중에도 훤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
이곳저곳에서 악을 쓰는 소리와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고블린, 오크, 인간이 뒤섞인 병사들은 창을 들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마물들을 저지한다.
“3번 궁수대! 발사!”
“발사!”
또한, 활을 든 궁수들도 열심히 성벽 바깥을 향해서 시위를 당겨 댄다.
크아아아아-!
그러나 가끔은 촘촘한 병력을 뚫고 기어코 성벽을 올라오는 마물들이 있었다.
“헬리온! 헬리온이다!”
온몸이 새카맣고, 마치 올챙이와 같은 형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크기가 곰보다 크며 다리, 네 개가 달려 있다는 점.
쩌어억-!
게다가 비정상적으로 큰 입을 벌리니 그 안에는 톱날 같은 이빨이 가득했다.
“피, 피해!”
해당 지점을 맡고 있던 4등급 사제가 비명을 지르듯 명령한다.
그는 오크로서 일개 병사였지만 얼마 전 4등급 사제, 군대로 치면 ‘십부장’의 지위를 가진 이였다.
사제는 병사들을 물리면서도 자신은 커다란 전투 도끼를 들고서 헬리온을 마주하고 있었다.
끼이이이이이-!
헬리온은 기이한 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사제를 향해 입을 들이밀었다.
사제는 황급히 왼쪽으로 몸을 꺾으며 도끼를 휘둘렀다.
카가가각-!
헬리온의 이빨과 도끼가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를 낸다.
“이런…….”
사제는 한 번의 충돌로 자신의 부족함을 느꼈다.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도끼는 한 번에 날이 나가 버렸다.
끼이이이-!
헬리온은 마치 사제를 비웃듯 몸을 들썩이더니 삽시간에 몸을 움직였다.
사제도 놈이 다시 달려들 거란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예상하지 못한 건 헬리온의 기묘한 몸놀림이다.
놈은 왼쪽의 벽을 밟아 사선으로 뛰더니 그대로 허공으로 몸을 날린 후 위에서부터 사제를 덮친 것이다.
쩌억-!
순식간에 사제의 몸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도끼로 쳐 낼 수 있는 각도도, 피할 만한 범위도 아니었다.
‘벼락 신이시여.”
그는 입술을 꽉 깨물며 도끼를 잡은 손아귀에 꾹 힘을 주었다.
후웅!
도끼를 그대로 위로 날려 보낸다. 도끼가 헬리온의 입안에 들어가고, 놈의 입도 점점 가까워져 사제의 머리통에 근접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번쩍이는 광채가 날아들었다.
콰아아앙-!
헬리온의 입이 강제로 닫히며,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입안에 들어갔던 도끼의 날이 바깥으로 뚫고 나온다.
바닥으로 떨어지던 헬리온의 몸이 다시 위로 치솟는다.
사제는 뒤늦게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오른손에 은빛으로 빛나는 건틀릿을 끼고 있는 오크.
뒷모습이었지만 절대 모를 수가 없는 모습이다.
“대사제님!”
“크루룩.”
크룩은 마치 대답을 하듯 거친 탁음을 내더니 한 번 더 주먹을 뒤로 당겼다.
축 늘어진 채로 떨어지고 있는 헬리온.
놈의 몸통에 크룩의 주먹이 꽂힌다.
투콰앙-!
그 한 방에 헬리온의 몸이 성벽 바깥으로 쏘아져 날아간다.
크룩은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뒤를 돌았다.
“크룩. 너는 사제… 음. 벨트던가?”
“벨콘입니다!”
사제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크룩은 흠. 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조금만 더 힘을 내도록. 곧 있으면 해가 뜬다.”
“예, 예! 크루루. 감사합니다!”
“그래. 수고하도록. 크룩.”
사제, 벨콘은 감격한 눈으로 크룩을 보더니 다시 주먹을 꽉 쥐며 주변의 병사들을 통제했다.
크룩은 계속해서 걸으며 굳은 얼굴로 성벽을 둘러보았다.
전황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다.
가끔 성벽에 오르는 마물도 있긴 했지만, 그건 극히 소수.
성벽 바깥에는 이전엔 없던 성벽이 몇 겹이나 둘려 있었다.
바로 탈로스가 마물들이 오기 전 오브를 이용하여 만들어 둔 방어 시설이었다.
헬리온처럼 벽을 자유자재로 기어 다니는 마물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바깥의 벽을 넘기도 전에 창이나 활에 맞아 바닥으로 쓰러졌다.
“크루룩.”
하지만 무조건 긍정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크룩은 한창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는 케륵에게로 찾아갔다.
“크루룩. 곧 있으면 해가 뜬다.”
“알고 있다. 케르르를.”
케륵또한 표정이 그리 좋진 않았다.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런 식으로 보름이라.”
그래. 오늘 하루는 곧 끝이 난다. 그러나 이건 결코 하룻밤이 끝이 아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앞으로 보름.
대족장의 말에 따르면 자그마치 보름 동안이나 이런 공격이 이어진다고 했다.
케륵은 복잡한 눈빛으로 성벽을 올려다보다가 곧 고개를 흔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우측! 3번 창병대 빠지고 5번 궁수대 투입하라! 케르륵!”
그러고서 다시 병사들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 * *
명월(暝月).
마물들의 이빨은 폴그룬만을 향한 게 아니었다.
큰 도시, 작은 도시, 심지어 자그마한 마을이나 산까지.
딱히 공통점을 찾아볼 수 없는 곳들이 연이어 습격을 받았다.
그나마 억지로라도 공통점을 꼽자면 최근에 갑작스레 두각을 나타낸 이들이 있는 곳이라는 것.
어디에서 온 것인지, 누구인지, 무얼 하던 사람들인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남들과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강해지고, 명성을 떨치고, 높은 지위를 얻었다.
바로 자신을 ‘플레이어’라고 말하는 이들이었다.
* * *
바하트리스 공국.
볼테른 제국에 속한 공국이자 멜리움 왕국의 오른편에 있는 나라다.
그곳의 수도에 있는 회색빛의 건물. 현판에는 ‘바하트리스 모험가 협회’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평소에는 시끌벅적한 분위기의 장소지만, 오늘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
그 원인은 바로 한 남자.
회색빛의 머리칼에 눈가엔 범처럼 흉흉한 기색이 어려 있다.
그는 침중한 기색으로 다리를 까딱이다가 입을 열었다.
“화린 파티의 소식이 끊겼다고?”
“예, 예. 어제 임무를 나갔다가…….”
“마물에게 당했을 수도 있겠군.”
그는 단정적인 어조로 뇌까렸다. 바로 옆에서 말을 했던 남자는 눈치를 보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그, 자, 잠깐 소식이 끊긴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철급 용병인 화린이 있는데 고작 마물에게 당했으리라곤.”
“글쎄.”
회색 머리의 남자는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명월(冥月이 시작됩니다.)]
[15일 동안 마물의 공세가 이어집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군.”
* * *
“사제님. 괜찮으십니까?”
“예. 아직 괜찮습니다. 다음 부상자에게 인도해 주세요.”
곳곳에 임시 막사가 설치된 곳.
그곳에서 회색빛의 로브를 걸친 여자가 남자의 안내에 따라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다.
어젯밤, 동부전선으로 향하던 지원 병력이 마물들에게 야습을 받아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포기하지 마세요. 여기! 붕대를 더 가져와 주세요!”
신음하고 있는 병자들의 고름을 닦고, 붕대를 감고, 부상을 살피는 여자.
그녀가 걸친 로브에는 둥그런 반원과 막대 두 개로 이루어진 문양이 그려져 있다.
바로 자애와 헌신의 신 ‘레살라’의 문양이었다.
그녀는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병자를 보살피고 있었다. 그야말로 레살라의 사제 같은 모습이었다.
겉보기로는.
“형제님! 눈을 감으시면 안 됩니다!”
“으… 으.”
심각한 상처를 입은 병사가 신음을 흘리고 있다. 여자는 그의 손을 꽉 잡고서 간절한 어조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끄으… 윽.”
그러나 곧 그는 숨을 거두며 축 늘어졌다.
여자는 입술을 깨물며 남자의 손을 꽉 잡았다.
“레살라시여, 이 용맹한 병사의 영혼을 받아 주소서.”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여자의 표정은 병사의 죽음에 안타까워하는 모양새였지만.
‘악령의 우두머리이자 칼의 왕이시며, 복수하는 이의 귀공자이고 정욕의 마신이시여.’
그녀가 속으로 말하는 걸 들었다면 모두 다 기겁했을 것이다.
‘당신에게 또 한 명의 영혼을 바칩니다.’
남자의 몸에서 푸른빛이 빠져나와 여자의 몸에 빨려 들어간다.
여자는 여전히 안타까운 표정을 유지하며 기도를 끝맺음했다.
“레살라 님께 이 기도를 올립니다.”
‘아스모데우스 님께 이 기도를 올립니다.’
진서연은 그렇게 명월을 맞이하고 있었다.
* * *
우웅-
품속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나는 눈을 뜨며 바로 속에서 구슬을 꺼내 들었다.
-대족장님! 케륵입니다!
연결하자마자 케륵이 말을 걸어왔다.
“상황은?”
-다행히 약간의 부상자를 제외하고는 거의 피해 없이 끝났습니다. 탈로스가 설치한 벽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후우. 다행이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벽에 등을 기댔다.
시간이 촉박했을 텐데도 흩어져 있던 인원들을 늦지 않게 폴그룬 성으로 모았다고 한다.
피해도 없다고 하니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난 다시 표정을 굳히며 말을 전했다.
“이제 겨우 첫날밤일 뿐이다. 펜리르와 탈로스는 계속해서 힘을 아껴 두라고 해. 이전에 말했듯이 공세는 갈수록 거세질 거다. 최대한 자원을 아껴 가며 사용해야 해.”
-예!
첫날이다. 이번엔 피해 없이 막아 냈지만, 내일, 그리고 그다음 날. 또 그다음 날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알겠다. 너도 피곤할 텐데 너무 무리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해.”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케르륵.
그 말을 끝으로 통신이 끝났다.
계획이 어그러졌다.
본래는 아주 여유를 가지고 진행하려던 던전 탐사였지만.
‘본래 잡았던 계획은 최소 이 주 정도.’
2단계부터 5단계. 즉, 최종 보스를 잡는 것까지 이 주를 잡았다.
하지만 명월이 뜬 이상 최소 마지막 날인 보름이 되기 전엔 이곳을 나가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단계, 삼 단계의 경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는다는 것.
일 단계처럼 수련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여유를 부리지 않는 이상, 본래 계획보다 시간을 많이 단축할 수 있을 거다.
문제는 사 단계.
그곳의 경우는 어떻게 시간을 줄일 방법이 없다.
결국, 목표는 이삼 단계를 최대한 빠르게 돌파하고 사 단계에 진입하는 것.
나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으로 나가니 엘 리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이곳에 머무른 지 딱 하루다.
본래 이틀을 쉬고 가려고 했지만, 여유 부릴 시간이 없다.
나는 엘 리에게 말했다.
“엘 루님에게 데려다주십시오. 당장 할 말이 있습니다.”
눈 위로는 여전히 불투명한 창이 겹쳐 있다.
[명월(冥月)이 시작됩니다.]
[15일 동안 마물의 공세가 이어집니다.]
이제부터는 속전속결이다.
엘 리도 나와 엘 루와의 대화를 들었기에 별말 없이 나를 그에게로 안내해주었다.
전과 같은 방식으로 엘 루의 집에 도달하자 그가 바로 나를 반겼다.
“표정을 보아하니 큰일은 없었나 보군.”
“예. 다행히도 늦지 않게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엘 루가 미리 명월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다면 큰일이 났을 수도 있다.
시스템 메시지는 오늘 아침, 해가 뜰 시간쯤에야 뒤늦게 나타났었으니까.
나는 엘 루가 가리킨 의자에 앉아 그를 보았다.
“꼭 할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밤을 지새우며 정리한 생각을 그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