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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유료템으로 캐리한다-77화 (77/170)
  • 77화

    나는 굳은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머리칼과 허리까지 내려온 수염이 하얗게 센 엘프.

    그는 현묘함이 깃든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엘 루라고 하네. 이쪽으로 앉게나.”

    나와 이렌은 그의 손짓을 따라서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그는 나무로 만든 잔에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액체를 따라 주었다.

    엘 리는 늙은 엘프의 뒤에 가서 시립했다.

    “한번 마셔 보게나. 향이 아주 좋은 것이네.”

    나는 조심스레 잔을 들어서 입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뿜을 뻔했다.

    “…이거, 술입니까?”

    “그렇네. 맛도 괜찮지 않나?”

    그는 씩 웃으며 잔을 쭉 들이켰다.

    분명 향이 좋긴 했다. 문제는 도수가 족히 60도는 넘길 것 같은 독주라는 게 문제지.

    이곳에선 기껏해야 10도를 조금 넘기는 술들을 먹어 왔기 때문인지 더욱 독하게 느껴졌다.

    목구멍이 완전히 타들어 가는 거 같다.

    “맛이 좋군요. 그런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는 대충 입만 적신 다음 잔을 내려놓으며 본론을 털어놓았다.

    벼락 신의 사도.

    마경과 지금 본진 일대엔 나에 대한 소문이 쫙 퍼졌다지만, 이런 곳에서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호칭이다.

    무엇보다 내가 알기론 이 엘프 마을도 지하 왕국과 함께 몇백 년을 외부와 접한 적이 없던 거로 아는데.

    “무엇을 말인가?”

    하지만 엘 루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말투로 나에게 되물었다. 그리고 다시 내가 질문을 하기 전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왠지 불안함을 느꼈다.

    분명히 현묘함이 느껴지던 그의 눈빛이 서서히 다른 뜻을 담기 시작한 거다.

    저 눈빛은 예전에 많이 봐서 알고 있다.

    친구 중 툭하면 장난을 걸어 대는 놈이 있었는데, 그놈이 항상 저렇게 어떤 장난을 칠까 하고 고민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자네가 엘 리의 뒤태를 흘끔흘끔 보던 것 말인가?”

    제기랄. 현묘함은 개뿔.

    난 슬쩍 엘 리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녀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요. 어떻게 제가 벼락 신의 사람인 걸 알고 있나 물어본 겁니다.”

    “지금 자네 입으로 벼락 신의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나.”

    엘 루는 자신의 잔에 또다시 술을 죽 따르더니 한 번에 들이켰다.

    자세히 보니 본래 회색빛이던 그의 낯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장로님. 외부인 앞에선 술을 자제하심이…….”

    “어허. 술이라니. 이것은 우리 아버지가 내려주신 성스러운 물이란 걸 모르는 게냐.”

    조금 전에 네 입으로 술이라고 했잖아.

    엘 리는 약간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과거에 게임에서 그를 못 본 건 보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보여 주기 부끄러워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건 그렇고, 자네는 벼락 신의 음성을 들은 적이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엘 루가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물어 왔다.

    나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벼락 신을 어떻게 아는 겁니까? 무언가 알고 있는 게 있는 겁니까?”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과거 게임을 즐겼었던 나조차도 벼락 신에 대한 건 이곳에 떨어진 이후에야 알았다.

    심지어 본래 벼락 신을 섬기던 고블린 부족조차도 자세한 건 모르는 실정이었다.

    아마도… 과거 기억에서 보았던 것처럼 한번 맥이 거의 끊겼었기 때문이겠지.

    “흐음. 자네는 하얀 신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가?”

    그는 어느새 장난기를 싹 거둔 표정이었다.

    나는 당연히 모른다고 대답하려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멈칫했다.

    “아예 모르는 건 아닌가 보군.”

    엘 루는 그런 나를 보더니 씩 웃었다.

    “아닙니다. 하얀 신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군요.”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짚이는 게 아예 없진 않은 거 아닌가?”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엘 리를 지나쳐 뒤쪽의 벽으로 걸어갔다.

    “사실 하얀 신이라는 이름도 본래의 이름은 아니시네. 그분은 이름을 잃으셨지.”

    그리고 벽면을 툭툭 친다. 그러자 벽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이 스르륵 움직이더니 하나의 초상화를 만들어 냈다.

    분명히 내가 본 기억이 있는 얼굴이었다.

    “사도여, 이 얼굴을 본 적이 있는가?”

    잠시 고민했지만,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있습니다.”

    “그럴 것 같았네.”

    그가 다시 지팡이를 툭툭 치자 나무들이 움직이더니 곧 그림이 자취를 감추었다.

    “이곳은 잊힌 신의 유적일세.”

    엘 루는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여기를 찾은 후 우리는 이곳에 정착했다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정착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만.”

    나는 무어라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는 고개를 젓더니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가끔씩 꿈을 꾸었네. 자네에 대한 꿈을. 얼마 전엔 자네가 이곳으로 오리란 것을 보았었고.”

    “꿈이라. 그것도 당신의 능력입니까?”

    “이 노인의 보잘것없는 잔재주일 뿐이지.”

    “그렇군요.”

    그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서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선 계속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네.”

    “하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이 엘프 노인이 말한 정보 하나하나가 심상치 않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이자에게 내가 뭐라 강요할 처지는 아니다.

    막말로 내쫓기라도 하면…….

    “시간이 없는 건 내가 아니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물러나려다가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예?”

    “말 그대로네. 부족과 연락할 수 있는 신물을 가지고 있던 것 같던데. 당장 그들에게 연락하게나.”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그가 슥 손을 들자 손끝에 그림자가 모여들더니 어떠한 형체를 만들었다. 마치 홀로그램처럼.

    “마물들?”

    “현재 대륙에 검은 달이 뜨려 하고 있네. 이곳은 지하에 있어 그나마 괜찮지만…….”

    그의 손 위 그림자는 마물이 마치 검은 파도처럼 어딘가로 몰려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획 보이는 시점이 바뀌더니 하늘을 보여 준다.

    나는 그걸 보자마자 기함하며 외쳤다.

    “명월(暝月)!”

    “그렇네.”

    엘 루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도 자네에게 꽤 관심이 많네. 알고 이곳을 찾아왔든, 모르고 찾아왔든 도움을 줄 생각도 있지.”

    엘 루는 손을 휘적여 그림자를 흩어 버리며 나를 똑바로 보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권속들의 안위를 신경 쓰게나.”

    “어째서 명월이 갑자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딱 한 가지는 말해 주지.”

    깊게 가라앉은 루의 눈이 나를 똑바로 마주하고.

    “이제 멈춰 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할 걸세.”

    나는 멍하니 그를 보았다..

    명월 현상.

    게임의 대규모 이벤트 중 하나이자, 유저들 사이에선 ‘초보자 학살 이벤트’라고 불리던 것이다.

    ‘대륙에 검은 달이 떠오르면, 어둠의 권속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보름 동안 이어지는 명월 아래에서 끝없이 싸우고, 살아남아 승리를 쟁취하라.’

    이를 테면 일종의 몬스터 웨이브.

    사전 예고 없이 시작된 데다가 몬스터가 아닌 ‘마물’들이 몰려든다는 점 때문에 꽤나 많은 도시, 성이 피해를 입었던 이벤트다.

    그때 유저 사이에선 메인 시나리오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돌았다.

    그러나 아무런 전조도, 관련 퀘스트를 한다던 사람도 없어서 이벤트라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었다.

    나는 몇 번 입을 떠듬거리다가 고개를 휘젓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더 물어보고 싶지만 우선 부족원들에게 연락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의문은 의문이고, 지금 당장은 소식을 전하는 게 먼저다.

    엘 루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게나. 나야 남는 게 시간이니. 천천히 기다리겠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바깥으로 나갔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남아 있길.

    * * *

    “대사제님!”

    “케륵?”

    케륵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쪽엔 고블린 하나가 열심히 뛰어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성벽에서 경계를 서는 병사였다.

    케륵은 병사가 숨을 고르길 잠시 기다렸다가 물었다.

    “무슨 일인가. 케륵.”

    “케흑. 하, 하늘이 심상치 않습니다. 갑자기 구름이 끼면서 해가 가려지더니 점점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흠. 나가 보지.”

    케륵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신전의 바깥으로 나갔다.

    으레 그렇듯 어두운 구름이 낀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지만.

    “케, 케륵. 달?”

    그는 완전히 밤이 되어 버린 하늘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고작 해가 가려지고 그런 수준이 아니었던 거다.

    케륵은 하늘에 요사스러운 빛을 내뿜고 있는 달을 보며 바로 얼마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갑자기 해가 지고, 밤이 되며, 하늘에는 검은빛의 달이 떠오를 거다. 그러고 나면 사방에서 괴수들이 몰려들 테니 지금 당장 부족원들을 모두 모아 방어 준비를 하고 있어.’

    “케륵! 당장 트렌, 인간 간부들에게 전해라! 이곳으로 모이라고!”

    “알겠습니다! 케흑.”

    고블린이 빠르게 달려가더니 주변의 다른 부족원들을 붙잡고 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케륵은 초조한 눈빛으로 하늘을 다시 한 번 올려다보았다.

    “크룩. 저게 대족장님께서 말씀하신 건가?”

    그런 케륵의 뒤에서 크룩이 나타났다.

    어느새 갑옷까지 착용하고 손에는 건틀릿을 낀 상태로.

    케륵은 그제야 자신도 영령을 소환했다. 그러자 그룬이 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룬은 나타나자마자 하늘을 보더니 깜짝 놀라 소리쳤다.

    -정말 재앙의 달이 떠올랐구나!

    재앙의 달. 대족장이 말했던 ‘명월’. 그룬은 그것을 재앙의 달이라고 했었다.

    케륵도 직접 하늘을 보고 있자니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알 것 같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매슥거리고 불안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헉, 허억. 부르셨습니까!”

    이내 인간 사제들과 트렌도 신전의 앞으로 달려왔다.

    그들도 오면서 하늘을 본 건지 낯빛이 그리 좋진 않았다.

    “그룬 님도 병력 배치하는 걸 도와주십시오. 케륵. 보름 동안 쉬지 않고 싸워야 할 겁니다.”

    먼 곳에 떨어져 있는 대족장의 말이었지만 그 누구도 의구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저 명령을 따를 뿐.

    “인간 사제들은 당장 전투를 하지 못 하는 인원들을 본 신전의 1층으로 모아라. 그리고 다른 사제들과 협력하여 그들이 불안함을 느끼지 않게 지키고.”

    “알겠습니다!”

    모두 바삐 움직였다.

    여러 군데 흩어져 있던 부족원들이었지만, 그들은 본래 하나.

    다들 언제 떨어져 있었냐는 듯 어색함 없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크룩과 케륵은 신전의 앞에 서서 무거운 눈빛으로 성을 내려다보았다.

    족히 수천은 넘는 인원들이 신전과 성벽, 병영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 가며 움직인다.

    그리고 그들이 그러는 동안 성벽의 바깥에서도 슬슬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신이 칠흑빛인 괴수들.

    마물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들은 마치 홀린 듯이 성을 향해서 몰려들고 있었다.

    마치 불에 달려드는 나방처럼.

    “짐승들이 겁도 없이 몰려드는군. 크르룩.”

    “케를. 불길해. 아무리 마수라도 일말의 이성은 있을 터. 이렇게 떼로 몰려들 놈들이 아닐 텐데.”

    “크룩.”

    크룩은 흥 콧김을 내뿜더니 팔짱을 꼈다.

    당장이라도 밖으로 달려 나가고 싶었지만, 그는 그저 마뜩찮은 표정으로 성 바깥을 내려다볼 뿐이다.

    이 밤은 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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