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난 천천히 한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그 와중에 나를 가로막는 이는 없었다.
보아하니 병사들은 아직도 이렌과 바하토프와 싸우고 있는 것 같고, 내가 가는 방향은 바크란의 처소가 있던 곳이라 일반 시민들은 살지 않는다.
지금은 도시의 소란 탓에 평소에 머물던 병사들마저 다 외곽으로 빠져나갔으리라.
나는 파괴된 도시의 잔해를 따라 쭉 걸었다.
이 도시의 깊숙한 곳을 향해서.
걷고, 또 걷고.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푸른색의 수정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바닥과 합쳐진 것처럼 땅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본래는 건물 안에 위치하고 있었을 텐데, 바크란과 내가 싸우던 여파로 건물이 무너진 것 같았다.
주변에 건물의 잔해들이 널려 있었으니까.
나는 그것에 손을 올렸다.
“막아! 저쪽이다!”
“엄마!”
“어떻게, 어떻게 인간이 여기를?”
“살려 줘!”
“으아아아악!”
문득 귓가로 도시의 소음이 들려왔다.
주로 들리는 소리는 병사들과 이렌들의 전투 소리였지만, 가끔 그 사이로 일반 시민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수정구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고민이 되긴 했지만, 나는 강하게 힘을 주었다.
이 도시의 주민들은 어차피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마치 꼭두각시의 인형처럼 정해진 삶을 반복할 뿐.
파슥-
수정구가 순식간에 가루가 되었다.
그리고 도시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
“대, 대장님. 저…….”
“무슨, 무슨 일이.”
“우욱.”
나는 등을 돌려 도시를 바라보았다.
샤아아아아아-
그것은 기묘한 광경이었다.
조금 전까지 열심히 달리던 병사들도,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던 가족들도. 모든 것들이.
집도, 성벽도, 망루도. 이 성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가루가 된다.
“주인님!”
“대족장님!”
저 멀리서 이렌과 바하토프가 나에게 달려온다. 그 한참 뒤에는 마틴의 모습도 보였다.
“기다려라. 아직 끝이 아니니까.”
다가오던 일행은 내 말에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우선 멈춰 섰다.
그그그그긍-!
내가 말한 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변화가 시작되었다.
땅이 거칠게 진동하더니 갑자기 가루가 되어 버린 도시의 터에서 무언가가 솟아 오른 것이다.
그것은 작은 신전 같은 모양새였다. 사방이 기둥으로 둘러져 있고 뻥 뚫린 모양새.
곧 그리고 그 안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한 명이 아니었다. 족히 스무 명은 돼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석인이 아니라 멀쩡한 피부를 가진 사람들.
“여, 여긴 어딥니까?”
그중에서 회색빛의 머리칼을 가진 노인이 앞에 나서서 내게 말을 걸었다.
“바하렌이다.”
“바하렌?”
노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동요가 일었다.
나는 그들을 보며 소년에게 해 줬던 말을 똑같이 해 주었다.
“지금은 대륙력 501년이다. 너희들은 500년 만에 일어난 거고.”
* * *
그 후로 한참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들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지금은 한쪽에 저희들끼리 모여 있었다.
반면에 마틴은 우리의 뒤에 앉아서 그들을 떨리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자신 말고도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사실 그에게 이야기할 땐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들은 없다는 것처럼 이야기했었다. 확실한 표현을 피하면서 말이다.
내가 그랬던 이유는 바로 저 마틴의 표정에 드러나 있다.
혼란스럽겠지.
그만큼 충격도 받았을 거다.
바로 내가 원했던 소년의 반응이었다.
너무 잔인한 행동이고, 만약 저 소년이 평범한 아이였다면 이렇게 할 필요는 없었겠지만…….
“저들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곰곰이 생각을 이어 가고 있는데, 바하토프가 슬쩍 다가와서 내게 물었다.
“그, 아무래도 같이 가긴 힘들지 않겠습니까? 여기 막 위험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녀석은 횡설수설하며 말했지만, 결국 의도는 뻔했다.
괜스레 짐덩이를 붙이고 싶지 않은 거겠지.
나는 그를 슬쩍 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이 타이밍은 좋아가지고.
“기다려 봐.”
“예, 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저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이쪽으로 모여 보세요!”
“알겠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몸을 일으켜 내 앞쪽으로 와서 섰다.
처음 나에게 말을 걸었던 노인이 맨 앞에 섰다.
아까 전 얘기를 나눠 보니 잠들기 전의 기억이 거의 없는 것 같은데, 그들은 자연스레 노인을 따랐다.
아마도 과거에 이 무리를 이끌었던 사람이고, 그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남아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난 그들을 찬찬히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현실적으로 여러분들과 같이 가긴 힘듭니다.”
그들이 순간적으로 동요하는 게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저희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 석인들과 싸울 겁니다. 다른 사람들을 지키며 싸울 환경도 안 되고, 도리어 여러분 때문에 위험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내 말이 이어질수록 사람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나는 힐끔 이렌과 바하토프, 마틴을 보았다.
바하토프는 자신의 설득이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다.
저 나쁜 새끼. 흑마법이 문제가 아니라 저놈은 심성 자체가 글러 먹었다.
다음에 또 날 잡고 정신교육 좀 해야지.
그 옆에 있는 이렌은 딱히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흔들림 없는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그냥 내가 말하는 내용과 상관없이 내 결정을 존중한다는 의미이겠지.
마지막으로 마틴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나는 후읍,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사람들을 보았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여기 남아 주어야겠습니다.”
저들에겐 마치 사형선고 같은 말이었으리라.
아까 전 대화를 나눌 때 이곳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미 말해 주었다.
바하렌이 무너진 이상 다른 도시, 나아가 왕도 그것을 알아차렸을 거다.
지금은 아무런 반응도 없다지만 곧 군대가 몰려올 거라는 건 예정된 수순이니, 이들이 여기 남아 있다면 그 이후의 결과는 뻔했다.
살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이 지하에서 어디로 도망친단 말인가.
스무 명 가까이 되는 무리라고 해도 통로에 지나다니는 석인 두세 명만 만나도 전멸할 텐데.
“알겠습니다.”
하지만 노인은 그저 고개를 수그렸다.
간단한 이유다.
저들은 약하고, 나는 강하니까.
우겨 봤자 소용없을 거란 걸 아니까 수그리는 거다.
그나저나 바하토프 저 새끼 실실거리는 거 겁나 마음에 안 드네. 다음이 아니라 조금 있다 꼭 정신교육 좀 해야겠다.
여하튼 이대로라면 그대로 상황이 끝날 거다. 아무 일도 없다면.
“잠시만요.”
하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큰 목소리로 말했다.
“왜?”
난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저들을 데려가 주세요.”
어느새 단단한 눈빛을 하고 있는 마틴을.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나는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마틴은 순간 움찔했지만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그러고 싶으니까요.”
나는 그의 당돌한 말에 푸흐-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무슨 뜻이냐?”
내 말에 반박하길 기대하긴 했지만 이렇게 당돌하게 나올 줄이야. 제법 마음에 드는 태도였다.
하지만 곧 바로 표정을 굳히면서 녀석에게 물었다.
“만약 저들을 데리고 가지 않는다면 제가 저들과 같이 갈 거니까요.”
“그게 해결책이 될 것 같아? 석인들을 피해 다니고, 숨고, 도망 다니고. 그렇게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식량은 또 어떻게 할 거고? 다 같이 사이좋게 아사나 할 생각이냐?”
마틴은 이를 악물며 나를 노려봤다. 좋은 표정이었다. 결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
“그러면 당신은요? 저 없이 계속해서 나아갈 생각입니까? 물론 그럴 수는 있겠죠. 당신네들은 강하니까. 하지만 그건 저들을 데려가는 것보다 하책이 아닙니까? 저들을 데려가서 위험 요소가 생기더라도 제가 없는 것보단 덜할 테니까요.”
잘게 떨리는 목소리. 마틴도 이 말을 하는데 많은 용기가 필요했음을 보여 준다.
옆에서 나와 마틴의 언쟁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도 그리 밝지 않았다.
내가 갑자기 기분이 나빠져 자신들에게 피해가 오진 않을까. 그렇게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다.
마틴의 말에 반박하자면 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난 슬슬 한 걸음 물러났다.
내 목표는 녀셕을 의지를 꺾는 게 아니라, 녀석을 강한 힘으로 두드려 더욱 단단하게 만들려는 것이니까.
하지만 난 부러 질문을 하나 더 던졌다.
“만약 내가 기분이 나빠져서 그냥 저들과 너 둘 다 버리고 간다면 어떡할 생각이지?”
마틴은 내 말에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만점은 아니지만 훌륭한 대답이었다.
“좋다. 그러면 모두 짐을 챙겨라.”
나는 툭 말을 내뱉었다.
우리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늦게 오면 안 데려갈 테니.”
그리고 휙 몸을 돌려서 앞으로 걸어가자 뒤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주, 주인님.”
바하토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내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닥쳐라. 맞기 싫으면.”
하지만 내 말 한마디에 바로 깨갱 하는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고개를 수그렸다.
아직 소년으로밖에 안 보이는 마틴.
그러나 그는 강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잠시 기억을 잃고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뿐.
이 던전을 깨기 위해서라도, 즉 나를 위해서라도 그는 다시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정작 그가 그것을 원하는지 아닌지는 나도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어쩔 수 없다.
이게 최선의 공략법이니까.
* * *
사람이 스무 명이 늘어났지만 위험한 상황은 없었다.
애초에 내가 했던 말은 마틴에게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했던 것일 뿐, 실제로 위험한 일이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했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침입자들을 배제해라!”
“왕국의 백성들을 위협하는 적에게 죽음을!”
저 맞은편에서 돌 갑옷을 거친 석인들 수십이 달려든다.
그에 맨 처음 반응한 건 바하토프.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손을 앞으로 내밀며 소리친다.
“어둠의 창이여!”
창 모양의 마력이 허공에 뭉쳐들더니 그대로 앞으로 쏘아져 나간다.
“크아악!”
“크윽!”
마법 한 방에 두 명의 병사가 가루가 되어 스러졌다.
그러고도 마법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다른 병사들에게 달라붙어 그들의 움직임을 둔화시켰다.
얼마 전, 바하토프의 경지가 오르며 새로 터득한 마법이었다.
그리고 나와 이렌은 이미 창이 쏘아지기 전부터 녀석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꽈앙!
이렌도 이제 제법 검이 익숙해진 건지 유려한 몸놀림으로 석인의 목을 쳐 올렸고.
나는 한 방, 한 방에 대가리를 깨부쉈다.
이렇게 대가리 부수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나는걸.
“크으윽. 원, 원통하다.”
맨 뒤에서 대장 노릇을 하던 기사까지 죽이고 나니 상황이 정리되었다.
마틴과 사람들은 그 모습을 그저 경외심 어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마틴, 얼마나 남았지?”
나는 몸에 묻은 가루를 대충 털어 내며 마틴에게 걸어갔다.
마틴은 잠시 눈을 감고서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 입을 열었다.
“거의 다 왔습니다. 아마도 가는 길에 병사들도 없을 겁니다.”
“그래.”
우리들은 지금 1단계인 바하렌을 넘어서, 2단계에 진입한 상태다.
하지만 아직 적들의 수준은 비슷비슷하다. 지도상으로 보면 1단계를 아직 완전히 벗어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통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고, 거의 다 왔다면서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고 마틴을 몇 번 구박하고 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입니다. 당신이 말했던 곳.”
마틴은 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걸을 수록 통로의 천장은 점점 높아졌었고, 지금은 고개를 들어서 봐야 할 정도로 높아진 상태였다.
그리고 마틴이 가리킨 곳에는 그 통로를 전부 가로막는 문이 있었다.
“소명의 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