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소란이 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대경실색하며 놀란 병사들은 저들끼리 뭐라 뭐라 떠들더니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저렇게 대화를 하는 것만 봐도 기존 병사들과의 차별점을 알 수 있다.
그전에 만났던 놈들이라면 대화는커녕 성문을 열고 달려들었을지도.
“이곳이 어딘 줄 알고 이러는 거냐!”
앞으로 나선 놈은 위협적으로 활을 겨누며 크게 소리쳤다.
난 그에 맞서 창을 아래로 찍었다.
콰르릉-!
창에서 뻗어 나온 전격이 땅을 타고 전방으로 퍼져 나간다.
성벽을 뚫고 저들을 공격할 의도는 아니었다. 그 정도의 위력도 아니었고.
그저 놈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용도다. 난 눈을 부릅뜨며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바하렌!”
이 도시의 이름. 그리 작은 규모는 아니지만 주둔하고 있는 병력이 위협적인 수준은 아니다.
게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모를까, 우선 눈에 보이는 점은 크게 다른 게 없다.
나는 이어서 놈들에게 소리쳤다.
“탐욕과 죄악의 도시. 인간 사냥의 선봉에 섰던 협잡꾼이 다스리는 도시!”
이 왕국의 어느 도시가 안 그러겠냐마는, 이곳은 유난히 심한 편이었다.
병사나 백성들보다는 이 도시 권력자의 영향이 컸다.
그는 석인이 되기 전부터 성정이 잔악하고 기회주의적인 면모가 강했었으니까.
본래 그는 이 도시의 병사를 관리하는 장군이었다.
왕국이 지하로 가라앉은 후 그는 앞장서서 인간 사냥을 했고, 그 공으로 본래의 성주를 밀어내고 이 도시를 다스릴 권한을 얻었다.
또한, 가장 중요한 건.
‘그놈이 게임에선 네임드몹이었지.’
큰 규모만큼 네임드몹도 많은 편이었다.
이 도시의 주인도 만약 필드에서라면 필드 보스 판정을 받을 만큼 강한 놈이었다.
‘그만큼 보상도 쏠쏠했단 말이지.’
나는 창을 빙빙 휘두르다가 기습적으로 성벽 위로 번개를 쏘아 보냈다.
후우웅- 쾅-!
벼락이 내리꽂힌 성벽 일부가 부서져 내렸다.
마침 그쪽에 서 있던 병사 한 명이 털썩 주저앉은 게 보였다.
“네놈들의 주인은 겁쟁이냐! 우린 고작 네 명인데 뭐가 무서워서 그러고 있지?”
만약 내가 무력을 보이지 않았다면 놈들이 바로 튀어나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딱히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삼 일이나 걸려 가며 최대한 기운을 쓰지 않으며 아꼈던 건 지금 이 순간을 위한 것이니까.
뭐, 이렌과 바하토프 둘의 실전 감각을 끌어올리려고 자제한 것도 크긴 하지만.
내 힘의 원천은 뇌령. 긴 싸움에도 쉽사리 지치지 않지만 결코 무한한 힘은 아니다.
어느 정도 소모하면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시간을 단축할 방법이 있다.
본래 내게는 몹시 어려운 방법이 아니었지만, 이곳에선 힘들었다.
동료도 셋인 데다가 상대는 감정이 거의 거세된 병사들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성벽 위에 있는 병사들과 안쪽에 있을 석인들은 다르다. 그들의 몸은 돌이지만 마음마저 아예 굳어 버린 건 아니었으니까.
힘의 원천 뇌령. 그리고 뇌령의 원천은…….
‘신앙. 그리고 경외심.’
신앙. 신앙은 이곳에선 힘들다. 내 편은 고작 세 명. 아니, 소년을 제외하면 두 명이다.
힘을 빠르게 회복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경외심.
낯선 이들에게 가장 쉽게 경외심을 끌어올릴 방법은 뭘까?
“뇌룡 질주.”
나는 기운을 끌어올리며 허공으로 몸을 띄워 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광전사를 발동했다.
강한 해방감과 함께, 전신을 감싸고 있는 전격보다 더 짜릿한 쾌감이 밀려온다.
도덕심은 저 아래로 가라앉고 본능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평소엔 힘에 고취되는 걸 피하는 편이었으나 지금은 딱히 그럴 생각이 없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공포였으니까.
휘이이익-!
재차 뇌룡 질주를 써서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순식간에 성벽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지막 행동. 나는 한쪽 손으로 반대 손의 팔찌를 해제했다.
[봉인의 팔찌를 해제했습니다]
[모든 전력의 70%가 상승합니다]
기운을 끌어올리고, 광전사를 사용했을 때와는 비교가 안 되는 고양감이 끓어오른다.
그야말로 무한한 해방감.
압도적인 희열.
콰앙-!
얼이 빠져 있던 병사 한 명을 그대로 발로 걷어차며 성벽 위에 착지했다.
이런 순간까지 수련을 한답시고 힘을 억제할 생각은 없다. 빠르게 뚫고 나가야 할 지점은 그렇게 하는 게 나으니까.
몇십 명이나 되는 석인 병사들이 한순간에 날 바라봤다.
평소라면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르는 시선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겐 저들의 눈에 서린 공포가 기쁨이 되었다. 저들에게 남아 있는 적개심과 용기를 부수고, 산산조각 내 주고 싶다.
“하아아아아압!”
창을 힘차게 바닥으로 내려찍었다. 전격이 성벽의 바닥을 따라서 양쪽으로 좌르륵 퍼져 나간다.
단순한 기운의 응용이 아니라 스킬 ‘쇼크웨이브’다.
똑같은 기운의 양이라도 더욱 넓고 강력하게 퍼져 나간다.
근거리에 있던 병사들은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가루가 되었다.
“그그그그그극!”
운 좋게 멀리 있던 병사들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몸을 벌벌 떨었다.
난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이런 것에도 못 버티는 이들에겐 관심 없다.
“이놈!”
귀로 꽂히는 고함을 듣고서 씩 웃었다.
성벽 위에 딱 한 명. 몸 곳곳이 그을린 것 빼곤 멀쩡해 보이는 석인이 있었다.
“건방지게 알량한 힘을 믿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구나!”
“그건 나보다 강한 놈이나 할 말이지.”
“이, 이!”
“닥치고 덤벼.”
난 그렇게 말하며 근처에 아직 살아 있는 병사 하나를 성벽 밖으로 걷어차 버렸다.
여전히 몸을 벌벌 떨고 있던 병사는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그대로 추락해 산산조각이 났다.
그걸 지켜본 석인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바로 달려들었다.
석인의 무기는 검이다.
자신의 몸만큼이나 커다란 대검.
그는 위로 들어 올렸던 검을 쏜살같이 나에게로 내려찍었다.
쾅-!
하지만 검은 애꿎은 바닥만 내리쳤다. 그래도 그 위력은 만만치 않아서 성벽 일부를 그대로 무너트렸다.
“어이구. 성벽을 이렇게 부숴도 되는 거야?”
“닥쳐라!”
물론 틈틈이 비아냥거리는 건 까먹지 않았다.
대검이 횡 방향으로 바닥을 쓸 듯이 낮게 날아왔고, 슬쩍 뛰어서 피하자 그대로 각도를 틀어 사선으로 베어 왔다.
보통의 사람이 했다면 그대로 관절과 근육이 나갈 만한 기예였다.
저만한 위력과 무식한 무기를 들고 도중에 방향을 틀다니.
후웅-!
그러나 여전히 검은 허공만을 베었다.
패도적이고, 위협적인 검이다.
대검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한 속도였고.
아마 이렌이라고 해도 쉽지 않을 상대였다.
마침 석인의 대검이 다시 한 번 나에게 날아들었다.
“야.”
쿵!
그리고 난 그것을 창으로 중간에 멈춰 세웠다.
“너 왜 이렇게 약하냐?”
이렌이나 트렌에게라면 힘들었을 상대다. 하지만 힘들었어도 이겼겠지.
크룩이나 케륵이라면? 여유롭게 죽였을 거다.
그리고 나에겐.
‘시시해.’
하품이 나올 정도의 상대였다.
대검이 허무하게 가로막히자 당황하는 놈의 얼굴이 보였다.
난 창을 그대로 반 바퀴 회전시키며 놈의 무기를 크게 튕겨 내었다.
힘도 어찌나 약한지 별다른 저항도 못 한다. 팔이 크게 들린 그의 몸통에 가볍게 창을 찔렀다.
콰가가가각-!
창극이 돌로 된 몸을 파고들고 전격은 게걸스럽게 그의 몸을 파고들었다.
“이럴 수……!”
콰아아아아앙-!
남자의 몸이 그대로 터져 버렸다.
이름도 모르는 석인은 마지막 말도 끝맺음하지 못하고 가루가 되었다.
“후우.”
기대와 달리 실망감이 더 큰 상대였다. 그래도 그렇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성벽 아래.
쭉 늘어져 있는 주택에 잇는 창문 사이에서, 미처 집에 들어가지 못한 주민들에게서.
그리고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는 병사들에게서.
공포와 경외심이 물씬 피어오르고 있었으니까.
그와 동시에 아까 전 마음껏 낭비했었던 뇌령의 기운은 계속해서 차오르고 있었다.
저들이 느끼는 감정이 내게 힘이 되어 주리라곤 그들 자신은 절대 모르겠지.
나는 성벽 위를 슥 훑어보았다.
슬슬 전격에 마비되었던 병사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일일이 상대하는 것도 그리 힘든 일은 아니겠지만.
‘그럼 재미가 없지.’
여전히 붉게 달아올라 있는 시야는 나를 끊임없이 부추겼다.
창을 들어 올리고.
한순간에 막대한 기운을 끌어 올리며 최근 새롭게 얻은 기술의 이름을 떠올린다.
‘뇌룡섬!’
창이 한 줄기 벼락이 되어 성벽을 파고들었다.
쿠르르르르르릉-!
처음엔 미약한 진동이었다. 그러나 푸른 전격에 휩싸인 성벽은 곧 그 속내를 드러내었다.
콰르르르르릉-!
석벽 사이로 번쩍번쩍 번개가 치고, 바윗덩이가 쏟아져 내린다.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은 저항할 틈도 없이 무너지는 성벽에 휘말렸고, 그대로 짓눌려 가루가 되었다.
성벽 근처에 있던 주택과 가까이 와 있던 병사들의 일부도 떨어져 내린 바위에 그대로 깔려 버렸다.
난 공중에 몸을 띄운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거창하게 벌어진 파괴의 현장이 보기 좋긴 했지만 뭔가 아쉬웠다.
이왕이면 큰 거 하나 더 써서 혼란을 가중시키는 게 좋지 않을까?
지금 차오르는 속도라면 큰 기술을 써도 금방 회복이 될 텐데.
난 슬쩍 창을 들어 주택가를 겨냥했다.
막대한 기운이 다시 한 번 창에 모여들었다.
“주, 주인님!”
그때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님이라고 하는 걸 보니 바하토프일 거다.
그냥 무시했다. 아니, 무시하려 했다. 뒤늦게 내 주위를 감싸는 청량한 바람이 없었다면.
상쾌한 향이 담긴 바람이 내 코끝을 간질였고, 나는 그제야 살짝 흥분을 가라앉혔다.
“괜찮으십니까?”
이번엔 지척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도 고개를 돌렸다.
“이렌.”
“말씀하셨던 게 있어서 그대로 했습니다. 혹시 방해됐다면 죄송합니다.”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껏 달아올랐던 흥분이 확 가라앉긴 했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냐. 잘했어.”
안 그래도 이렌에게 미리 부탁했었다.
혹시 내가 과하게 흥분한 것 같으면 진정시켜 달라고.
필요해서 광전사를 쓰긴 했지만 아무래도 오랜만에 사용하는 거라 살짝 불안했었다.
“그건 그렇고, 너희들도 슬슬 준비해 둬. 병사들을 상대하는 건 너와 바하토프의 몫이다.”
“알겠습니다.”
이렌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바닥에 있는 바하토프의 곁으로 내려갔다.
나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흥분이 가라앉긴 했지만, 광전사 특성을 해제한 건 아니다.
내 힘에 내가 휘둘릴까 봐 겁나서 사용 못 하는 건 너무 꼴사납지 않나.
본래 이 던전에서 광전사 특성을 컨트롤하는 것도 수련할 생각이었으니 초반에 이렇게 실수를 한 건 어찌 보면 좋은 일이었다. 다음엔 더 조심할 테니까.
“하압!”
아래에선 슬슬 바하토프와 이렌이 성 안에서 몰려나온 병사들과 맞붙고 있었다.
살짝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바하토프에게도 마음에 안 들면 아예 영원히 빛의 고리를 채워 둔다고 했더니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싸우고 있다.
역시 노오오오력이 중요하다. 노력하니까 저렇게 잘 싸우잖아.
“근데 언제 나오려나.”
난 창을 휘휘 돌리며 성의 가장 안쪽을 노려보았다.
이런 소란에도 정작 성의 안위에 가장 신경 써야 할 놈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이쯤 놈이 튀어나와 줘야 하는데
‘이 정도쯤은 괜찮겠지.’
난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톡톡 두드리다가 결심을 굳혔다.
허공을 박차고서 성의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지고 곧 목표물이 눈에 들어왔다.
난 대충 위치를 가늠하고서 그대로 창을 내리꽂았다.
꾸와아아아아아앙-!
이 도시에서 가장 화려했던 건물이 일격에 무너져 내렸다.
바로 이 도시의 성주가 기거하는 건물이었다.
“어떤 놈이냐!”
반응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튀어나왔다.
건물의 잔해를 해치고 튀어나온 곰 같은 사내를 마주하며 난 환하게 웃었다.
“나다. 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