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으아아아아!”
장렬한 함성과 함께 앞으로 쑥 내달리는 남자.
바로 바하토프다.
“죽어! 죽으라고!”
봉을 하나 들고 있는데, 그것에는 찬란한 푸른빛이 덧씌워져 있었다.
그가 봉을 휘두를 때마다 상대인 석인 병사들의 몸이 푹푹 파인다.
처음엔 뒤에서 보조하는 역할을 주로 했던 그였지만, 이 던전에서 머문 날이 삼 일을 넘어간 지금 시점에선 이렌만큼이나 용감하게 앞에서 싸우고 있다.
내가 억지로 시킨 거지만.
이렌은 바하토프의 앞에서 그보다도 더 용맹하게 창을 휘둘렀고, 전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끝났다.
이번 석인 병의 인원은 열하나. 사흘 전에 상대했던 열셋의 병사보다는 둘이나 적은 인원이지만 만만한 전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둘은 내가 빠졌는데도 오 분 만에 열하나의 병사를 정리했다.
“헉, 허억. 끝냈습니다!”
이런 급작스러운 전력 상승엔 이유가 있다.
“그래. 가까이 와.”
이렌도 실력이 많이 늘긴 했지만 가장 큰 변화는 바하토프의 태도.
애초에 바하토프의 전력은 절대 약하지 않다. 마법의 조예도 깊은 데다가 적재적소에 맞는 마법을 잘 사용한다.
그런데도 그는 케륵이나 크룩은 둘째치고 이렌이나 트렌한테 마저 힘을 못 썼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극도로 자신의 몸을 아끼면서 싸웠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다칠라 치면 시전하던 마법까지 캔슬해 버리고 바로 꼬리를 만다. 과감하게 찔러 들어가는 건 생각도 못 하는 일이다.
또한, 이 세계에서 마법사는 몇몇 특정한 마탑을 제외하고는 원거리 타격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라 자신의 몸에 보조 마법을 두르고 근접전투까지 불사하는 전투법을 구사한다.
나는 던전에서 석인들을 상대하면서 바하토프가 과하게 몸을 아낀다는 걸 확실하게 깨달았고, 곧 해결 방법을 고안해 냈다.
“빛의 고리 해제.”
내가 바하토프에게 손을 뻗자 그의 목 주위에 하얀색의 고리 같은 게 한번 환하게 빛나다가 사라졌다.
“휴우.”
바하토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축 늘어트렸다.
‘빛의 고리.’
이게 내가 생각해 낸 방안이다.
빛의 고리는 포인트 상점에서 판매하는 물건 중 하나로, 어떤 대상에게 사용 시 조건을 걸어 두고서 그것을 어기면 목숨을 앗아 가는 물건이다.
사용할 수 있는 대상이 극히 제한적인 데다가 죽이는 거 말곤 다른 벌을 적용할 수 없기에 이번에 처음 써 보는 물건이다.
바하토프에게 적용했었던 빛의 고리의 조건은 ‘전투 시 조금이라도 자신의 안위를 생각해 몸을 사리거나 소극적인 모습을 보일 시 발동’이다.
총 열 번의 전투를 잘 수행하면 해제해 준다고 했고, 이번이 그 열 번째라서 해제해 줬다.
“좋아. 그럼 좀 쉬자. 근처에 방이 하나 있다고 했지?”
“네. 저기 앞쪽에 있어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서 있던 소년은 내 물음에 손을 뻗어 앞을 가리켰다.
우리는 소년을 따라서 움직여 그가 벽에 손을 올리는 걸 지켜봤고, 곧 작은 진동이 일더니 벽과 바닥이 뒤집혔다.
쿠웅.
곧 작은 방이 나타났다.
“이건 여전히 적응이 안 되네요.”
이렌은 고개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그리 편하진 않지.”
이동할 때마다 꼭 속이 뒤집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도 통로에서는 편하게 휴식을 취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
“그럼 바하토프가 식사 준비를 하고 우리는 좀 쉬자.”
“네!”
“식사는 오랜만에 그걸로 준비해.”
“아! 알겠습니다.”
예전이라면 바하토프는 눈치를 보면서도 은근슬쩍 불만을 표했을 텐데, 지금은 빠릿빠릿하게 움직인다.
사흘 동안의 특별 훈련의 효과가 아주 좋다.
이렌과 소년도 각자 벽에 기대앉아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고, 나도 한쪽 벽에 기대앉았다.
‘상태창.’
[상태 창]
이름: 이호진
레벨: 31
직업: 대부족 ‘벼락’의 대족장 / 벼락 신의 계승자
세력: 대부족 ‘벼락’
특성: 뢰신(雷身)
스킬: 기본 창술(Lv.9), 둔기술(Lv.1) 전격 방출(Lv.8), 전투 보조, 탐색, 지도 작성.
고유 스킬: 뇌령(Lv.3), 뇌룡 질주(Lv.3), 쇼크웨이브(Lv.2), 신기 뇌룡(雷龍), 지룡의 용안(龍眼)
신화: 벼락 신의 계승자(유일)
[신화]
현재 등급: 대족장
벼락 신의 계승자(유일)
-그의 창에는 벼락 신의 힘이 깃들어 있다 전해진다.
그의 분노 앞에서 멀쩡할 수 있는 이는 없고, 그의 뜻은 곧 신의 뜻이다.
모든 벼락 신의 신도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마주치는 이에게 위압감을 준다.
마경 외곽 지역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도시 ‘폴그룬’ 일대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동급 이하의 상대에게 공포와 경외심을 느끼게 합니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대적할 때 어드밴티지를 획득합니다.
벼락의 힘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신화 포인트: 710,000/2,590,000
현재 레벨은 31. 이 던전에서 두 번이나 레벨 업을 했다.
본래의 레벨 업 속도를 생각하면 사흘 동안 2렙이나 올린 건 아주 빠른 속도다.
마물이라는 게 그리 흔하지도 않거니와, 내가 몬스터를 잡는답시고 이종족을 공격할 수도 없으니까.
결국, 어떠한 업적을 성취하거나 전쟁을 해야 한다는 건데.
지금 상황에선 그게 무리니 이런 던전들이 지금 레벨 업을 하기엔 최적의 장소다.
특히 이 던전의 특징은 ‘막대한 물량’이다.
아마도 이 근처에선 이 던전보다 레벨 업에 특화된 던전은 없을 거다.
“밥 다 됐습니다!”
한참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바하토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나에게 와서 큰 그릇을 건넸다. 그 안에는 뽀얀 설렁탕이 들어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소년과 이렌도 내 곁에 와서 그릇을 받아 들었다.
우리는 빙 둘러앉아서 식사를 시작했다.
이런 던전 안에서 트롤과 흑마법사, 소년과 함께 설렁탕을 먹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공간 압축 가방이 있어 식재료를 부족하지 않게 챙길 수 있었기에 가능한 호사였다.
하얀색의 뜨끈한 국물이 피곤한 몸을 쭉 풀어 준다.
“후아.”
소년을 만난 첫날 저녁도 설렁탕을 먹었었다. 그래서 그런지 소년은 국물을 후후 불어 가며 잘도 먹었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살짝 복잡해졌다.
나는 던전. 광렙. 몬스터. 이런 단어들로 이곳을 규정하고 있다.
게임에서 먼저 접했던 장소였고, 내 주목적도 레벨 업이었으니까.
이곳에 온 이유엔 이 불합리한 장소를 해방한다는 거창한 이유 같은 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곳엔 소년을 포함해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소년에겐 석인들을 마치 적 같은 뉘앙스로 설명하긴 했지만, 그들도 엄연히 피해자다.
왕국에서 한 줌도 안 되는 권력자들의 탐욕에 희생당한 백성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몸이 돌이 되었고, 권력자들의 명령에 따라 돌이 되지 않은 인간들을 죽였다.
물론 그들 중에는 악한 이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사람을 사냥한 사람도 있었을 거다. 그러나 그런 것이 권력자들의 악행을 희석해 주진 않는다.
결국, 이 모든 일은 영생을 꿈꿨던 미친 권력자들이 벌인 일이었으니까.
특히 모든 것을 주도했던 왕.
그를 죽여야 이 부조리한 공간을 없앨 수 있다.
“너. 아직 이름은 기억 안 나냐?”
“후룹. 네? 네!”
막 국물을 들이켜고 있던 소년은 깜짝 놀라 대답했다.
아직 그를 너, 야, 소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이름을 기억 못 하고 있기 때문이다.
“흠.”
하지만 난 그가 자신에 대해 아는 것보다 그를 더 잘 안다.
그의 본래 지위. 출생 신분. 처음 만났던 방에 있던 이유. 등등.
“계속 야, 라고 하는 것도 불편한데 이름 하나 정하자.”
“이름이요?”
소년은 갑작스러운 제안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내자식이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척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론 꺼내지 않았다.
“응. 뭐 별명으로 생각해도 되고. 진짜 이름 생각나기 전까지만 부르게.”
소년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냥 야, 라고 불리는 것보단 낫겠죠.”
“석삼이 어때.”
“예? 서크삼?”
“음. 그건 안 되겠다.”
장난식으로 말한 거긴 하지만 소년의 발음을 보고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난 조용히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저는… 가 아닙니다. 원하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저 한 명의 인간일 뿐입니다. 저는!’
스크립트로 본 문장일 뿐이었지만 지금은 어쩐지 목소리로 기억이 난다.
난 턱을 괴며 말했다.
“마틴 어떠냐.”
“에이. 너무 평범한 거 아닙니까?”
바하토프가 눈치 없이 끼어들긴 했지만 한번 노려보자 조용히 고개를 수그렸다.
“괜찮은데요? 발음하기도 편하고. 왠지 친숙하기도 하고.”
소년은 별 불만 없다는 듯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녀석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래. 마틴. 이제 밥 먹었으니까 치우고 나가자.”
“네.”
우리는 먹은 것들을 치우고서 몸을 풀었다.
짐을 다 챙긴 후 마틴이 벽에 다시 손을 올렸고.
드드드-
곧 벽이 천천히 움직이며 우리는 다시 어둠에 휩싸였다.
* * *
우리는 통로를 걷고 있었다. 한참을 걷는데도 석인 병사들은 마주치지 않았다.
일부러 마틴에게 병사들이 없는 길로 안내해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간혹 다가오는 병사들이 있긴 했지만 모두 소년의 인장을 이용해서 싸우지 않고 이동했다.
아직 던전의 초입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구간을 벗어나면 일행 모두 인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병사들과 싸우지 않고 넘어갈 방법은 없다.
“저기가 통로의 끝이에요.”
소년이 앞을 가리켰다. 그의 말마따나 조금 더 걷자 환한 빛이 비치는 게 보였다.
우리는 말없이 쭉 걸어갔고, 곧 통로를 빠져나와 바깥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지하를 벗어난 건 아니었다. 우리가 도착한 건 거대한 공동.
환한 빛이 비치는 이유는 공동의 천장에 구 형태의 빛이 둥둥 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태양처럼 공동 전체를 비추고 있었다.
몇 단계로 나누어진 던전의 일 단계가 끝나 가고, 이 단계로 넘어가기 전의 분기점이다.
일 단계는 벌써 나를 빼고 둘이서도 사냥이 가능한 정도의 난이도여서 효율이 떨어진다.
슬슬 다음 단계로 가야지.
“가자.”
잠시 공동 내부를 둘러보던 우리는 다시 앞으로 걸어나기 시작했다.
저 앞에 높게 솟은 성벽을 향해서.
그야말로 이질적인 모습이다. 지하에 있는 거대한 공동. 그 공동에 세워진 거대한 성벽.
회색빛의 칙칙한 성벽과 그 위에 서 있는 석인 병사들. 게다가 도시의 성문 앞에는 석인들이 쭉 줄을 서 있다.
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검문을 받는 것이다.
너무나 평범한 도시의 광경이었고.
그랬기에 더욱 이질적이었다. 그들의 몸에는 회색 외의 색을 찾기 힘들었으므로.
옷과 머리칼, 심지어 신발마저 회색빛인 인간들.
이곳은 잊힌 왕국의 제1도시.
바하렌.
우리가 도시에 가까워져 가자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 사이에서 소요가 일어나는 게 보였다.
그 직후 도시 앞에 줄을 서 있던 석인들도 뒤돌아보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더니 모두 성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너희들은 누구냐!”
가까워지자 석인 병사가 소리치는 게 들렸다.
이전까지 정해진 대사들을 내뱉던 병사들과 달리 제법 그럴듯해 보이는 표정과 말투였다.
마틴이 병사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걸 보고서 이번엔 내가 앞으로 나섰다.
저들은 일 단계의 병사들과 생긴 건 비슷해도 지능이 더 높다. 마틴의 인장을 보여 줘도 그냥 안 넘어갈 확률이 높다.
아무리 명령에 의한 것이었더라도 인간들을 사냥한 전력이 있는 놈들이니까.
“나는.”
그래서 난 후드를 벗었고.
“너희들의.”
파직-!
던전에 진입한 후 한 번도 쓰지 않던 기운을 강하게 발출했다.
몸에서부터 푸른색의 전류가 찬란하게 솟아오른다. 아주 거칠고 강렬한 기세로.
“도시를 무너트리러 왔다.”
그들에게 윽박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