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며칠 동안은 도시에서 머물며 계속해서 얘기를 나누었다.
변경백의 경우는 함부로 손댈 만한 전력이 아니다. 그 때문에 내가 마음 편히 돌아다니기 위해서라도 확실하게 해 둘 필요가 있었다.
꽤 긴 기간을 두고 수행될 계획이기에 어느 정도 틀이 잡힌 후로는 성에 연락을 넣어 사람을 불렀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성에서 사람 한 명과 고블린 둘이 왔다.
나는 트렌까지 불러 총 네 명을 앞에 두었다.
현재는 제크가 운영하는 은밀한 장소를 빌린 상태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앞으로는 트렌과 함께 직접 계획을 진행하도록.”
“예.”
성에서 온 이는 최근 인간 사제 중 두각을 드러내던 프란츠였다.
케륵이 직접 추천한 사람인데, 머리 회전이 빠르고 교에 대한 충성심도 강한 남자였다.
게다가 그가 부인과 자녀들이 있다는 것도 플러스 요인이었다.
잔인한 얘기지만, 가족이 성내에 거주하고 있는 이상 함부로 허튼 마음을 품지 못할 테니까.
[이름: 프란츠]
[나이: 28]
[종족: 인간]
[신앙도: 83%]
[위치: 도시 벨루곤]
[벼락 신앙에 귀의한 이래 꾸준히 신앙심을 길러 가고 있는 인물입니다.]
게다가 케륵에게 들은 정보를 깔끔하게 상태 창으로 확인할 수도 있으니.
신앙도 83%면 꽤 믿어 볼 만한 수치다.
나머지 고블린 둘은 케륵이 직접 키우던 사제들이라서 딱히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조용히 앉아 있는 트렌을 보았다.
“트렌.”
“예.”
“이렌이 아니라 너를 이 일에 투입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트렌은 내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잘 모른다 답하였다.
“모를 수밖에 없지. 말을 하지 않았으니.”
그 태도가 나는 더 기꺼웠다.
함부로 상급자의 뜻을 재단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모른다고 대답하기 전에 고민하는 태도를 보였다.
마지막으로 모르는 건 그냥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기까지 하니.
딱 이 정도의 태도가 좋다.
“너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 앞으로도 너를 중히 쓸 생각이니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 더욱 다양한 경험을 쌓길 원한다.”
“알겠습니다.”
트렌은 바로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내가 다시 돌아올 땐 큰일을 시작할 테니 실력을 갈고닦는 것도 게을리하지 말도록.”
“명심하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곧 누군가가 저 앞에서 걸어왔다.
페일이었다.
“얘기는 끝나셨습니까?”
“그래. 안에 모두 모아 놓았으니 디테일한 건 저들과 얘기를 나누도록.”
“예.”
페일은 살풋 웃어 보이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 내가 나온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페일을 지나쳐서 쭉 밖으로 걸어 나갔고, 문밖을 나서자 이렌과 바하토프가 보였다.
“가자.”
“예.”
그들은 별다른 질문 없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제 이 도시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비록 미봉책이라 하나 변경백을 견제할 수단을 마련해 뒀으니 도시에 계속 머무를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내 힘을 더 기르기 위해선 멀리 떠나야 한다.
‘이곳은 어디까지나 변방이니까.’
지금까지의 내 주 활동지가 마경과 왕국의 변방에 국한되어 있었던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전작의 ‘정보’를 활용하려면 이곳에 머무르고 있어선 안 된다.
제크와 페일과의 대화를 통해 다른 유저들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었다.
다른 플레이어들도 분명 나처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최대한 활용하려 할 거다.
시간이 꽤 지났으니 웬만한 플레이어들은 다 알 만한 아이템이나 엔피씨, 퀘스트들은 이미 선점 당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나는 나만이 아는 정보를 쫓아 움직여야 한다.
“신분증을 보여 주시오.”
어느새 우리는 북쪽 문에 도착했다. 경비병들이 나서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렌.”
“예.”
내 뒤를 따라 걷던 이렌이 나서서 패 두 개를 꺼내 보였다. 철패와 동패였다.
바하토프는 자신의 로브 소맷자락에 적혀 있는 문양을 보여 주었다.
“흠. 조심히 가시오.”
경비병은 그것들을 모두 확인한 후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신분 패가 있으니 편하다. 들어올 때는 뇌물을 먹여 가면서 들어왔었는데.
“저, 우,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문을 지나서 한창 걷고 있는데 바하토프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이렌도 따로 질문은 없었지만, 귀를 쫑긋 세우는 게 보였다.
“우리는 잊힌 왕의 무덤으로 간다.”
“왕의 무덤 말입니까……?”
“그래. 걸어서 삼 일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지.”
바하토프는 여전히 의문이 해소되지 않은 눈치였지만 내가 입을 다물자 더 질문해 오진 않았다.
왕의 무덤.
그곳은 이 왕국 내에 있으면서도 비교적 쓸 만한 ‘던전’이었다.
하지만 왕국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많이 알려지지 않은 편이었는데, 아무래도 많은 플레이어의 활동 반경이 대부분 제국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나 혼자만 알고 있는 곳은 아니지만, 실제 게임을 플레이했을 때처럼 대량의 플레이어들이 있는 게 아니므로 아직 클리어되지 않았을 거라 기대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정확히 몇 명일까.’
이건 제크나 페일과 대화해도 딱히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들도 그저 주변에 이런 메일을 받은 사람이 있다더라. 정도로만 알고 있었으니까.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으리라는 건 확실했다.
아무리 내 위치가 변방이라 해도 지금까지 만난 유저들의 수가 극히 적기도 했고.
그렇다고 대륙 전체 규모를 생각하면 아예 절대적인 수가 적지는 않을 것 같은데.
우선 내 추정으로는 최소한 천 명 이상.
최대는… 만 명?
잘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다른 플레이어들을 더 많이 만나 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누군가를 본다는 게 꺼려지기도 한다.
이곳은 실제 피와 목숨이 오가는 곳이다.
지금까지 만난 유저들은 상대할 때 두려움이나 공포를 느낄 이유가 없었다.
내가 더 강했으니까.
하지만 언제까지고 강자의 처지에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한다.
이 대륙에는 위험만큼 아주 많은 기회가 숨어 있으니까.
“후우.”
한숨을 내쉬니 바하토프와 이렌이 쳐다보았으나 난 그저 묵묵히 앞만 보았다.
우선은 왕의 무덤을 어떻게 클리어할지를 생각하는데 주력하자.
* * *
“도착했다. 오늘은 늦었으니 이곳에서 야영하고 내일 진입하도록 하지.”
“아, 이곳이…….”
바하토프는 약간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다.
나도 처음 이곳을 왔을 땐 비슷한 표정이었기에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조금 있다 자세히 설명해 줄게.”
안 그래도 이렌은 이미 야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실제로 딱히 준비랄 것도 없지만.
도시를 떠나면서 포인트 상점에서 구매해 둔 물건이 있기 때문이다.
“가동.”
이렌이 작은 구슬 하나를 쥐고서 읊조린다. 그러자 구슬에 푸른빛이 어른거리더니 순식간에 팽창했다.
‘판타지판 원터치 텐트 같은 느낌이네.’
지금은 익숙해지긴 했지만 처음 봤을 땐 꽤 신기했다.
그저 그래픽으로 표현되던 게임 화면과 달리 이곳에선 직접 두 눈으로 벌어지는 일을 볼 수 있으니까.
구슬은 이렌의 기운에 반응해 순식간에 커다래지고, 이내 일정한 형태를 갖추어 나간다.
마치 작은 집 같은 형태다.
약간 눈에 띄는 형태이긴 하지만, 인지 방해 결계가 적용되어 있어 야습은 걱정 안 해도 된다.
이미 이곳으로 오는 사흘 내내 사용해 봤기에 능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 짐을 내려놓고 간단하게 음식을 차렸다.
잊힌 왕의 무덤에 관해 얘기하기 시작한 건 식사까지 어느 정도 마친 후였다.
“잊힌 왕의 무덤은 일종의 던전이다.”
“던전 말씀입니까?”
“던전이 무엇입니까?”
먼저 대답한 건 바하토프, 그다음 질문은 이렌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경 내에서만 생활한 이렌에겐 생소한 개념이겠지.
“네가 설명해라.”
“아, 알겠습니다.”
애초에 던전이라는 개념은 마법사들이 정립한 것이다.
무엇보다 직접 설명하기 귀찮다.
“우선 던전이라는 건 본래는 단순히 지하 감옥을 뜻하는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마탑을 중심으로 조금씩 다른 뜻으로 불리다가 근래엔 보통 사람들에게도 그런 뜻으로 통하더군요.”
이렌은 진지한 표정으로 바하토프의 말을 경청했다.
나는 이미 알고 있는 거라서 아직 남아 있는 밀 빵과 수프를 먹는 데 주력했다.
“마탑에 많은 수의 마법사가 속해 있긴 하지만, 과거에도 그렇고 최근에도 아무런 소속이 없는 마법사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보통 동굴이나 지하 혹은 건물에 자신만의 실험실을 차리는 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실험실 내에 있는 자재들이 대부분 아주 고가라는 겁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계속 들어보십쇼. 비싼 물건이 있으면 당연히 도둑놈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겠습니까? 보통은 마법사의 실험실이라고 하면 꺼림칙하겠지만, 도둑놈들은 그런 거 신경 안 쓰거든요. 그래서 그런 도둑놈을 막기 위해 던전에 방비를 하고, 마법을 설치하고,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아주 흉악한 환경을 갖추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마법사들 사이에선 자조적으로 자신의 실험실을 ‘던전’이라고 부르는 게 잦아졌고, 종래엔 당연한 것처럼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좀 길게 주절거리긴 했지만 아주 정확한 설명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내가 설명할 시점이 왔기에 입에 남아 있던 빵을 꿀꺽 삼키고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런 개념이 계속 확대되다 보니 이제는 다른 것에도 던전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됐지.”
나는 손을 하나씩 펴며 말했다.
“입구가 숨겨져 있을 것, 내부에 해당 시설을 보호하는 가디언 혹은 몬스터가 있을 것, 함정과 같은 침입자를 저지하는 것이 설치돼 있을 것.”
뭐, 길게 풀어 설명하긴 했지만 결국 그냥 게임사에서 정해 놓은 세계관이다.
“그럼 왕의 무덤이란 곳에도 그런 게 있는 겁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지금까지의 긴 설명은 모두 잊힌 왕의 무덤이란 던전에 대해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왕의 무덤은 입구가 숨겨져 있다. 그리고 지키는 가디언이 있고, 함정과 미로가 설치되어 있다.”
그야말로 플레이어로서는 욕이 나오는 난이도였다.
집 옆에 나 있는 창을 열어서 바로 옆에 있는 왕의 무덤을 가리켰다.
“우리는 먼저 입구를 찾고, 안에 들어가서 던전을 클리어할 거야.”
겉보기로는 그저 부서진 돌기둥, 나무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 같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가 겉모습이 볼품없어 플레이어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곳.
그리고 그 난이도 때문에 늦게까지 클리어되지 않은 곳.
가장 짜증 나는 건 바로 미로다.
규모도 어마어마한 데다가 내부의 길들이 모두 미로식으로 나 있어서 까딱하면 아사할 위험까지 있다.
그런데 굳이 여기를 찾아온 이유. 난 그것을 입 밖에 꺼냈다.
“그 끝에 있는 건 바로 끝도 없이 쌓여 있는 왕의 재화다.”
그 말에 바하토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하지만 사실 내 본 목적은 따로 있다.
이 던전에 숨겨진 비밀. 그것을 해결하면 꽤 큰 힘을 얻을 수 있다.
게다가 왕의 무덤은 거대한 규모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수의 가디언이 지키고 있다.
또한 이 던전의 숨겨진 비밀.
그렇다는 말은 곧.
‘광렙’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