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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유료템으로 캐리한다-68화 (68/170)

68화

페일과 제크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하지만 페일은 금세 본래의 표정을 찾으며 입을 열었다.

“변경백이라.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요.”

“신경전은 끝난 거 아니었어? 괜히 빙빙 돌리지 말고 제대로 말해.”

페일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애초에 쉬운 일이었으면 후원을 해 준단 말도 안 했어.”

책상 위에 있는 돈주머니를 툭 쳤다. 촤륵- 하는 소리와 함께 금화 몇 개가 밖으로 밀려 나왔다.

“이 돈이 그리 우스워 보이나? 솔직히 말해서 내 힘으로도 벨루곤 정도는 집어삼킬 수 있어.”

나름 큰 도시라지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다른 것이지.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

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페일을 빤히 바라보았다.

“우리가 직접 이 도시에 영향력을 늘리는 것보단 이미 도시에 자리를 잡은 네 조직을 후원하는 게 의심을 살 확률도 적고, 시간도 줄일 수 있겠지.”

“그렇겠지요.”

“즉, 나는 돈으로 시간을 사려는 거다. 그럴 힘이 없는 게 아니라.”

페일은 내 말을 듣고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고개를 숙였다.

곧, 그가 다시 나를 보았을 땐 그의 눈빛은 살짝 변해 있었다.

“계획은 있는 겁니까?”

“계획이라. 뭐, 나도 바로 변경백을 칠 생각은 없어. 우선은 벨루곤을 집어삼키고 주변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그리고 벨루곤의 주인이 너네라는 걸 똑똑히 각인시키는 것이 우선이지.”

“예.”

“그리고… 그 영향력을 바탕으로 변경백에게로 흐르는 정보를 교란하고, 최대한 귀찮게 하는 게 일차적인 목표지.”

“귀찮게 말입니까?”

페일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래. 다른 일에 잘 신경 쓰지 못하도록. 최대한 성가시게.”

“…알겠습니다.”

난 턱을 긁었다.

“그래서 할 건가?”

페일은 내 말에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저희는 기껏해야 이 도시에서 세 번째 정도밖에 안 됩니다. 굳이 저희를 찾은 이유가 뭡니까?”

“세 번째라. 사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지.”

플레이어에게 남들과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다.

“우리는 플레이어야. 너였어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잖아?”

이 세계의 사람들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그저 플레이어의 ‘성장 가능성’이 너무 독보적일 뿐이다.

아직도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게 더 많지만, 적어도 기본적인 시스템이 비슷하게 굴러간다는 건 알고 있다.

플레이어는 빠르게 성장한다.

그 성장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 세계의 보통 사람과 비할 바는 아니다.

이곳에도 강한 인물들은 많다. 꽤 상당한 실력을 갖춘 나를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죽일 놈들이 무수하게 쌓여 있다.

인간이 아니라 기타 이종족, 마물 등으로 확대하면 그 수는 더 많아진다.

말하자면 난 이제 겨우 시작점일 뿐이고. 본래 기반을 잡고 있던 이들의 세력과 힘은 압도적이라는 거다.

‘하지만 그게 다야.’

플레이어는 레벨 업을 하고, 신화를 쌓아 가며 세력을 구축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승패가 결정된 땅따먹기나 다름없다는 거다.

물론 지금의 상황을 게임과 완전히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플레이어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고, 이것은 게임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겪고 있는 ‘현실’이니까.

“내가 돕지 않았어도 일 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도시를 먹었겠지. 안 그래?”

하여튼 중요한 건 내가 지금 누구에게 투자해야 하는지는 명확하다는 거다.

‘제법 몸을 쓸 줄 아는 놈 한 명과 머리를 굴리는 놈 한 명.’

나쁘지 않은 조합이다.

“저희가 꽤 잘나긴 했죠.”

페일은 내 말에 천진한 웃음으로 답했다. 그러고 보면 저 어린 외양도 하나의 무기였겠지.

지금까지 살아남은 플레이어인 이상 적어도 웬만한 성인 장정 이상으로는 싸울 줄 알 텐데.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나는 품에서 종이 두 장을 꺼냈다. 페일뿐만 아니라 제크에게도 종이를 건넸다.

우리는 계약서를 서로 검토하며 길게 대화했다.

우선 첫 번째 목표는 벨루곤을 확보하는 것.

서로 간에 손해를 입히거나 배신을 하는 것은 철저하게 방지할 수 있게 조항을 적어 두었다.

협력은 단순히 신뢰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벨루곤을 점령하고 영향력을 확대하고 나면 최종적으로는 변경백을 친다.

‘몇 달은 걸리겠지.’

마하룬 요새를 단숨에 점령한 것과는 다르다.

에드몽도 두 번의 승급을 거친 놈으로 그리 약한 놈은 아니었지만, 변경백은 그보다 적어도 두 단계 위의 무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점의 중요도도 훨씬 높으니 아마 마법사와 무인의 수가 꽤 많을 거다.

‘그나마 에드몽과 변경백이 그리 친근한 사이는 아니라는 게 다행이군.’

머릿속으로 에드몽과 변경백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요새를 점령하고 나서 자세히 알게 된 사실들이다.

에드몽은 귀족 가문의 서자였다. 반면에 변경백은 유서 깊은 가문의 적자.

‘변경백은 에드몽을 철저히 무시했었어.’

변경백의 입장에선 고작 서자 주제에 전공을 세워서 영지를 얻은 에드몽이 고깝게 보였나 보다.

그야말로 철저히 귀족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나로선 고마운 일이었다.

그것 때문에 변경백은 본래 에드몽 혹은 그의 대리인에게 정기적으로 대면 보고를 받을 의무가 있음에도 그것을 수행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한 달에 한 번씩 마법구를 통해서 원격 보고를 받는 게 끝.

심지어 그것마저도 에드몽이 아니라 요새의 마법사를 통해서였다.

따라서 요새를 완전히 점령한 후에도 마법사는 죽이지 않고 살려 두었다.

그렇게 우리는 시간을 벌었고, 어느 정도 이상 힘을 갖추면 바로 변경백을 칠 예정이었다.

‘이놈들을 잘 이용하면 시간을 버는 게 더 쉽겠지.’

난 계약서에 막 서명을 하려는 페일을 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좋아. 그러면 계약도 끝났으니 다른 이야기를 좀 해 볼까?”

페일과 제크가 서명을 하고 나도 그 밑에 서명을 끝낸 후 둘에게 말했다.

“어떤 얘기 말입니까?”

나에게 묻는 페일을 보며 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어떻게 이 게임에 접속하게 됐는지. 그리고 이곳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지.”

나는 가장 궁금했던 것에 관해 얘기를 꺼냈다.

기실 저번에 그 여자를 만났을 때도 자세히 묻고 싶었던 것들이다.

하지만 그 여자는 우선 위험해 보이기도 했거니와, 악마와 계약을 했기에 자세히 물어보지 않았다.

혹여라도 악마의 관심을 끄는 것은 사양이었으니까.

그때 생각한 대로 적당한 힘을 갖추기 전까지는 아예 접촉하지 않을 거다.

“좋아. 그건 우리도 원하던 주제야.”

내 말에 먼저 대답한 건 제크였다.

“그냥 빙빙 돌려 안 말하고 깔끔하게 말하지. 딱히 숨길 것도 아니잖아?”

제크는 손을 포개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본래 아마 복서였어.”

“복서?”

“그래. 내 입으로 얘기하긴 그렇지만 제법 쓸 만한 실력이었지. 하지만 한 경기에서 크게 다친 후 그만뒀지.”

난 계속 얘기를 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에 시작했던 게 가상현실 게임이야. 랭커로 제법 이름도 날리고, 광고수익으로 돈 걱정을 안 할 만큼은 벌었지.”

막힘없이 말하던 제크는 다음 대목에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지저분한 일에 휘말렸지. 어떤 놈이랑 시비가 붙어서 캐삭빵을 뜨게 됐고, 이겼었는데 그놈이 나를 핵유저라고 지목했거든.”

“핵? 가상현실 게임에도 그런 게 있나?”

“게임 한 번도 안 해 봤어? 핵이 없는 게임은 없어. 다만 가상현실 게임의 경우는 일인당 한 아이디밖에 못 만들고, 핵 유저로 걸리면 아예 영구정지를 당하니 잘 안 쓰는 거뿐이지.”

“그렇군.”

“그래. 하여튼 그놈이 나한테 억하심정이라도 품었는지 꽤 지저분하게 여론전을 했어. 조작된 증거까지 들고 와서 말이야. 그 일로 나는 스폰서가 전부 끊겼지. 그래서 돈이 궁한 처지였는데… 어느 날 메일이 왔어.”

제크의 입에서 메일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나도 귀를 쫑긋 기울였다.

“한 게임을 테스트해 주면 꽤 큰돈을 준다더군. 게임 사이트도 버젓이 있고, 선금도 넣어 준다기에 수락했지. 적어도 카드빚은 갚아야 했으니까.”

“그렇게 이 게임에 들어온 거군?”

“그래. 빌어먹을 로그아웃이 안 되는 건 나중에야 알았지.”

제크 다음으로는 내 얘기를 했다. 물론 전작을 플레이해 봤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굳이 모든 패를 보일 필요는 없으니까.

내 이야기가 끝난 후엔 페일의 차례였다.

“저는 비제이였어요. 월드 크래프트를 주로 했었죠.”

“월드 크래프트면 그건가? 경영 겸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네. 저 같은 경우는 플랫폼 쪽지로 연락이 왔었어요. 테스트를 플레이해 보고 마음에 들면 본 서비스에 들어갈 때 방송을 해 줬으면 한다고. 저는 워낙 마이너 장르 비제이여서 돈을 준다는데 당연히 수락했죠.”

월드 크래프트라.

과거 PC게임 시절 유명하던 배틀 크래프트와 월드 시티를 만들던 두 게임의 개발진이 합작하여 개발한 가상현실 게임이다.

추억 때문에 한번 해 보려다가 워낙 복잡하고 방대한 시스템에 질려서 손도 못 대 본 게임이다.

월드 크래프트 고수는 모두 다 아이큐가 백오십 이상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왔었으니.

제크는 무력을 담당하고, 페일은 머리를 담당한다.

둘의 이야기를 들으면 아직 기껏해야 이런 도시의 작은 조직이나 하고 있는 게 이해가 안 될 정도다.

저 둘의 이력에 비교해서 나는 초라하기 그지없었으니.

과연 다른 유저들은 어떨까.

그 이후로도 우리는 다양한 얘기를 나누었다.

특히 나중에는 벨루곤의 유명한 독주를 나누어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현실에 관한 이야기,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상대인 걸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왠지 대화가 끝나갈 즈음엔 마음속의 응어리가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특히 대화의 마지막 즈음에 제크가 한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말이야. 오히려 이런 관계가 더 편한 것 같아. 물론 현실이었다면 꽤 불안했겠지. 우리가 그렇게 친근한 사이는 아니잖아?”

“그렇지.”

“바로 그렇다고 하긴. 나쁜 자식. 하여튼 여기선 그게 아니란 말이야. 같잖게 친하다거나, 우정이라거나 이런 감정에 호소할 게 아니라 그냥 딱 계약서 한 장 쓰면 되는 거잖아.”

“우리처럼?”

“그래. 배신하면 바로 계약서 효력 발휘돼서 뒈지는데 누가 배신을 하겠어? 차라리 처음부터 손 안 잡고 그냥 뒤통수 치고 말지.”

그 말에 나는 그냥 웃으며 잔을 부딪쳤었다.

“앞으로 잘해 보자고!”

제크의 마지막 건배를 끝으로 난 여관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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