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이 주가 지났다.
소풍 가자고 얘기를 꺼냈었지만 이런저런 일이 바빠 이제야 가게 됐다.
“뇌조야. 아직도 삐졌어?”
-나 안 삐졌는데?
뇌조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고개를 획 돌리고 있었다.
“미안해. 요즘 바빠서 그랬어.”
-나도 이해해. 필요할 때만 부를 수도 있지. 워낙 바쁘잖아.
가시 돋친 말투.
마치 예전에 만났던 전 여자 친구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밖에 놀러 나왔잖아. 아빠랑 같이 놀자. 응?”
-그래.
쓴웃음을 짓고서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이렌과 뇌조, 케륵이 그리고 펜릴과 함께였다.
케륵이와 크룩이 둘 중 한 명은 성을 지켜야 했기에 둘이 가위바위보를 시켰다.
결국 이긴 케륵이가 함께 온 것이다.
“케룰. 케루루루. 케를!”
케륵이도 기분이 좋은지 고블린들이 부르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펜릴. 얼마나 남았어?”
-거의 다 왔습니다. 저 앞이에요.
펜릴이 가리킨 곳은 앞에 있는 높은 언덕이었다.
부지런히 언덕을 올랐고 우리는 곧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와!
키루루루-
뇌조는 삐져 있던 것도 잊고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하늘을 날았다.
나도 펜릴의 등에서 내리며 감탄했다.
“이쁘네.”
“그렇네요.”
이렌도 신나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가 온 언덕은 꽃이 만발해 있었다.
얼마 전 펜릴이 바깥을 돌아다니다 발견한 곳이었다.
꽃 말고도 언덕 주변에 펼쳐진 경치가 썩 괜찮았다.
“케르륵. 케륵.”
여전히 케륵은 노랫가락을 흥얼거리고 있다.
그는 꽃보다 다른 것에 더 신 나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펜릴의 등에 매달아 놨던 보자기를 풀기 시작한 거다.
그의 덩치보다 몇 배나 커다란 크기였기에 나와 이렌도 붙어서 도와줬다.
“설렁탕! 불고기! 맛탕!”
케륵은 신나게 음식의 이름을 외쳤다.
그를 오랫동안 관찰한 결과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음식이었다.
그렇다고 식욕이 큰 건 아니고, 오히려 미식가에 가까웠다.
특히 내가 한 요리를 아주 좋아했다.
그걸 알기에 오늘은 특별히 실력 발휘를 해서 요리들을 잔뜩 챙겨 왔다.
“펜릴 너도 가져온 거 먹어.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펜릴도 챙겨온 고깃덩어리를 내려서 먹기 시작했다.
“좋아. 그럼 우리도 먹어 볼까.”
음식을 쫙 펼쳐 놓고, 인간 마을에서 챙겨온 과실주도 잔에 따랐다.
“뇌조야. 너도 이거 먹어.”
-응?
난 손바닥을 펼쳐 허공에 뇌전을 뭉쳤다.
정령인 뇌조는 따로 음식을 먹진 않았지만, 나의 순수한 뇌전의 기운을 아주 좋아했다.
-아빠 최고!
뇌조은 바로 내 어깨에 찰싹 달라붙어서 부리로 뇌전 구슬을 콕콕 찍어 먹었다.
이렌과 케륵, 그리고 나도 술과 음식을 본격적으로 즐기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취한 건 케륵이였다.
그는 금세 얼굴이 발갛게 변해서 계속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와 이렌은 비교적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녀가 말을 걸었다.
“대족장님.”
“응?”
“대족장님은 언제 자식을 가질 예정이십니까?”
“뭐?”
“자식 말입니다. 인간으로 치면 이미 혼인을 하고 자식을 몇은 놨을 나이 아니십니까?”
갑작스러운 이렌의 질문에 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떠듬거렸다.
그때 케륵이 끼어들었다.
“이렌. 케르르. 케르륵! 케를 케를!”
고블린어로 침을 튀겨 가며 얘기했다.
이렌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난 고블린어 몰라. 인간 말로 해.”
“아! 그렇구만. 케르를.”
난 이미 알아듣고서 케륵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그럴 틈도 없이 케륵이 다시 말했다.
“대족장님은 무려 신의 대리자이시지! 그만큼 눈도 엄청 높을 거라고! 너는 너무 못생겼어!”
“뭐? 내가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고백 받았었다고!”
…그래도 둘이 말다툼을 하기 시작하며 나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둘은 고블린과 트롤의 미인상에 대해 열렬히 떠들고 있었다.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뇌기를 운용하여 하늘 높이 떠오르자 탁 트인 전경이 드러났다.
이내 뇌조도 나를 따라 날아올라, 우리 둘은 허공에 둥실 떠올라 있었다.
“뇌조야. 너는 가 보고 싶은 곳 있어?”
-응?
뇌조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바다 가 보고 싶어.
“바다?”
-응! 예전에 들어본 적 있어. 엄청 물이 많은 곳이 있다고. 저어기 끝까지 물이 펼쳐져 있대.
“그래?”
-응. 아빠도 바다 본 적 없어?
난 뇌조의 말에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직접 바다에 간 적은 많지 않다.
마지막으로 갔던 게 중학생 때였었나?
“글쎄. 그래도 이곳의 바다는 나도 가 보고 싶네.”
-그치? 엄청 예쁠 것 같아!
“나중에 아빠가 데려가 줄게.”
-진짜?
“응. 약속.”
웃으며 뇌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뇌조는 기분이 좋은 듯 맑은 소리를 내며 하늘을 날아다녔다.
평화로운 날이다.
케륵과 이렌은 여전히 침을 튀겨 가며 논쟁을 하고 있고, 펜릴은 열심히 고기를 뜯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이대로 있고 싶다.
모두와 함께.
그런 것도 좋지 않을까.
이들과 함께 부족을 키워 나가며 좀 더 좋은 도시, 좋은 환경을 만들며 천천히 세력을 키워 나가면.
그렇게만 해도 되지 않을까.
“후우.”
하지만 난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모두를 두고 혼자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잠시 약해졌나 보다.
떠나는 건 예정대로 진행해야 한다.
단장이 돌아온 직후.
성을 떠날 생각이다.
난 다시 고개를 들어 평화로운 광경을 눈에 담았다.
후회가 남지 않도록.
곧 나는 땅으로 다시 내려갔다.
“자, 자. 그만 싸우고 우리 다 같이 한잔하자!”
“케르륵. 알겠습니다.”
“네.”
이렌도 어느새 술을 좀 마셨는지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럼 다 같이 벼락 신을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잔이 허공에서 부딪히며 탁한 액체가 하늘로 튀어 오른다.
해가 질 무렵 우리는 성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단장이 돌아왔다.
* * *
“이 주밖에 안 됐는데 많이 바뀌었군요.”
“이제 시작이지 않습니까. 앞으로도 더 바뀌어야지요.”
단장은 웃으며 인사를 그렇다 답했다.
“탈로스 님은 어디 계십니까?”
“저 뒤쪽에 있습니다. 같이 가시죠.”
단장의 손에는 동그란 모양의 물건이 들려 있었다.
아마 저게 그가 말했던 아티팩트 이리라.
우리는 같이 성벽을 따라 걸었다. 탈로스가 만든 대저택의 뒤편에는 또 하나의 커다란 건물이 있었다.
그 안에서는 날카로운 소음이 나고 있었다.
캉! 캉! 캉!
안으로 발을 들이며 소리 높혀 그를 불렀다.
“탈로스!”
하지만 대답은 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더 안쪽으로 걸어갔다. 금세 후끈후끈한 열기가 올라왔다.
무언가를 두드리는 듯한 소음도 점점 아프게 고막을 때렸다.
“탈로스! 나 왔네!”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소음이 뚝 끊긴 것이다.
곧 쿵, 쿵. 땅을 울리는 소리가 나더니 탈로스가 불쑥 나타났다.
“오! 왔나!”
“그래, 단장님이 저번에 말했던 물건을 가져왔어. 밖에서 얘기 좀 하지.”
탈로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단장은 바로 물건을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목에 가져다 대시면 알아서 착용될 겁니다.”
탈로스는 그것을 집더니 바로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곧 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빛이 가셨을 때 그것은 목걸이의 형태로 그의 목에 걸려 있었다.
“마를 억누르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래 동부 전선에서 마인들을 상대할 때 쓰던 물건입니다.”
“그걸 나에게 그냥 줘도 되나?”
“예. 어차피 마물에게 큰 타격을 입히진 못합니다. 탈로스 님에게 더 필요한 물건이겠지요.”
탈로스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단장과 둘이 할 얘기가 있다고 하고서 탈로스를 돌려보냈다.
우리는 얘기를 나누기 위해 신전으로 들어왔다.
비어 있는 회의실에 들어가 마주 앉은 후 내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이제 어디로 가실 겁니까?”
“글쎄요. 아마도 동부 전선으로 갈 것 같군요.”
“멜리움 왕국에서 철수하시는 겁니까?”
“예. 왕국에는 이미 활동하던 사제단이 둘이나 있으니까요. 저희는 멜리움 왕국 남부의 마물들을 처리하러 잠시 파견 왔었던 것뿐입니다.”
어쩐지 그래서 어렵지 않게 동부 전선에서 신물을 빼 올 수 있던 거군.
“그렇군요. 어쩐지 이 주나 걸리신다고 하셔서 의아했었는데. 그곳에서 볼일을 보고 오셨었나 보군요.”
이 대륙에는 ‘포탈’이라는 편리한 물건이 있다.
실제로 동부 전선에 가는 데는 이틀 정도면 충분했으리라. 벨루곤에 포탈이 있으니까.
“예. 전선이 그리 좋지 않은 상황이라 잠시 손을 보태고 왔습니다.”
난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그의 눈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행운을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원형의 펜던트를 손에 꼭 쥐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바로 출발하실 예정입니까?”
“예. 마음 같아서는 며칠 쉬다 가고 싶지만 그리 여유가 없군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가시는 길에 여비로 쓰시지요.”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네 건냈다.
단장은 이번엔 별다른 거절 없이 바로 받아 들었다.
탈로스의 곁에 있는 사제들은 일주일 정도 더 탈로스의 상세를 확인한 후 돌아간다고 했다.
단장은 사제들과 인사를 나눈 후에 떠났다.
이후 나는 신전으로 돌아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케륵과 크룩을 만났다.
도시의 관리 및 정비는 케륵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크룩에게는 훈련을 더 강화시켜 진행해 두라고 했다. 앞으로는 전쟁이 끝없이 이어질 테니.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지시를 내려 두었다.
능력을 각성하는 이가 있으면 바로 사제로 임명하라고 했고, 인간들도 대우에 있어 차별이 없게 했다.
마지막으로 신화 포인트를 탈탈 털어 각 영역에 식량을 분배했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났다.
“대족장님, 병사들이라도 좀 데려가는 게 어떻습니까? 케르륵.”
케륵은 문 앞에서 나를 걱정스러운 듯 보았다.
난 픽 웃으며 녀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할 사람을 걱정해라. 멀쩡히 돌아올 테니 도시나 잘 관리하고 있어.”
“케르를. 알겠습니다.”
녀석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주저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섰다.
케륵은 고개를 돌려 이번엔 내 양옆에 서 있는 이들을 쏘아 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족장님의 안위를 우선시해라. 잘 보조하도록.”
어깨에 창을 둘러맨 이렌이 먼저 대답했다.
“알았다.”
그리고 옆에 있는 트렌도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번 여정의 일행은 이렌과 트렌 그리고 나. 단 셋뿐이다.
애초에 이렌과 트렌은 맡겨 둘 일이 있어서 데려가는 것뿐이고, 호위는 따로 없다.
호위가 필요했으면 무리를 해서라도 케륵이나 크룩이를 데려갔겠지.
“그럼 이만 가 볼게.”
“예. 케륵.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배웅해 주는 건 케륵뿐.
본래는 아예 배웅을 받지 않는다 했지만 케륵이 우기고 우겨 가며 따라온 거다.
케륵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고, 우리는 열린 문 사이로 걸어 나갔다.
성문과 천천히 멀어져 가는데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고개를 돌리니 성벽 밖에 서 있던 펜릴이 고개를 숙였다.
그 옆에는 탈로스도 서 있었다.
손을 흔들어 그들에게 인사하고서 다시 걸었다.
범죄도시 벨루곤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