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단장에게 보여 줬던 주머니에는 탈로스의 피부 조각이 들어 있었다.
단장도 그것을 보고는 바로 내 말을 믿은 것이고.
하지만 애초에 그건 탈로스에게서 직접 얻었던 게 아니다.
며칠 전 정찰 임무를 마치고 온 정찰대원이 어느 숲에서 땅에 떨어져 있던 탈로스의 피부 조각을 주워 온 것이다.
청동 거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놈답게 피부의 ‘조각’ 역시 꽤 크기가 컸다.
내가 주머니에 넣어 놨던 건 아주 일부였고.
‘어떡하지.’
과연 이 정도 단서로 만족할까?
사기 쳤다고 때리려 드는 거 아냐?
그런데 갑자기 근처에서 타격음이 들렸다.
뻐억!
“야! 야! 넌 때리면 안 되지!”
“크, 크룩. 이, 이놈이 도망가려 하길래… 죄송합니다.”
슬쩍 눈치를 보다가 도망치려는 남자를 크룩이 주먹으로 때려눕힌 것이다.
“끄, 끄으으.”
크룩의 주먹에 맞은 남자는 전격에 감전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그림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도 고함이 터져 나왔다.
“차, 차라리 죽여라, 이 악마들아!”
뻑! 뻐억! 퍽!
공포에 질린 그림자들의 고함과 사제들의 고결한 정화 의식의 소리가 섞이며 한층 기괴한 분위기를 만든다.
호기심에 나왔던 인간들도 지금은 질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림자에 쓰인 이들의 가족은 미리 못 보게 조치해 두어서 다행이다.
아마 봤다면 큰 충격을 받았을 거다.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곧 단장님께서 은혜의 손길로 보듬어 주실 겁니다.”
“이건 미친 짓이야! 난 여기서 나가겠어!”
“하하. 안 됩니다.”
빠악!
또 도망가려는 그림자를 사제들이 단봉으로 내리친다.
웃으면서 패니까 더 무서운데.
심지어 남자를 밟고 있는 단장과 부단장의 얼굴에도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다.
얼굴만 봐서는 아주 온화함의 표본이다.
심지어 저렇게 격렬하게 밟으면서 주변에 피 한 방울 안 튄다는 게 더 무섭다.
저들은 잊힌 신의 사제들이라는 이름보다 유저들이 지은 별명으로 더 유명했다.
일명 물리 치료 사제.
평소에는 구제 활동과 병자의 치료 활동을 겸하기도 하지만.
만약 마물의 단서를 찾거나, 범죄자를 마주했을 땐 180도 바뀐다.
그들은 폭력을 사용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사람들은 본래 모두 선한 영혼을 지니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이가 악행을 저질렀다면 그것은 영혼이 마에 물들었다는 뜻.’
그리고 그 마(魔)를 정화하는 방법은 마물을 대할 때와 똑같다.
물리 치료.
즉, 때려서 정화한다.
나는 처참하게 얻어맞고 있는 그림자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마음이 홀가분하면서 안타깝다.
“형제님.”
그때 사제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예.”
사제는 슬쩍 그림자들이 모인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마 치유 활동은 반나절 안에 끝날 겁니다.”
그리고 다시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다음엔 바로 형제님이 말씀하신 마물을 찾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반나절이요.”
반나절이라.
“쉬지도 않고 오셨는데 좀 휴식을 취하시고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희들은 괜찮습니다. 마물을 정화하는 것이 저희의 임무인데요.”
난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제가 삼 일째 전혀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밤보다는 낮에 이동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사제는 내 말에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 번 다시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그는 사제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더니 곧 다시 돌아와 알겠다고 답했다.
출발하는 건 다음 날 정오로 정해졌다.
사제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후 난 품에서 구슬을 꺼내 들었다.
‘들리나?’
-예! 들립니다!
기운을 불어 넣고서 속으로 말하니 곧 대답이 들려왔다.
현재 탈로스의 흔적을 추적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정찰 대원이었다.
‘진행 상황은 어떤가.’
-현재 흔적을 따라 이동하고 있습니다. 아직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 좀 더 수고하게.’
연결을 끊고서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다.
정화 의식은 사제의 말대로 반나절 동안 이어졌다.
단장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상태로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정화 작업은 완벽하게 끝났습니다. 저들도 한 삼 일 정도 요양을 하면 정신을 차릴 겁니다.”
나도 이미 그림자가 모두 소멸된 것을 알고 있었다.
[업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마지막 그림자가 소멸될 때 메시지가 떠올랐었기 때문이다.
“예. 그러면 아까 얘기했던 대로 내일 출발하기 전까지 좀 쉬시고 계시죠.”
“알겠습니다.”
그림자에 당했던 이들을 신전 내의 회복실에 옮겨 놓으며, 사제들에게도 방을 안내해 줬다.
아직 빈방이 많았기 때문에 일 인당 방 하나씩을 내줄 수 있었다.
사제들에게 신전 내의 휴게 시설을 안내해 주고 난 후 나도 방으로 들어왔다.
“아, 죽겠다.”
침대에 털썩 눕자 피로가 몰려왔다.
“삼 일이나 못 잤네.”
신체가 건강해진 만큼 피로도 덜 느끼는 몸이 됐지만, 쉬지 않고 뛰어다닌 통에 오랜만에 극심한 피로가 느껴졌다.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일어났을 때는 새로운 소식이 있기를 바라면서.
* * *
“이 늑대들은 굉장히 순하군요.”
단장이 자신이 탄 늑대를 쓰다듬으며 내게 말했다.
“모두 이 친구의 부하들입니다. 충성스럽고, 전투에도 큰 도움이 되지요.”
“그렇군요.”
난 펜릴의 등 위에 크룩이와 올라타 있었다.
사제들에겐 늑대를 빌려주었다. 걸어서 이동하면 속도도 속도거니와 체력 소모도 크니까.
“어제 목욕탕도 잘 썼습니다. 수도에서 한번 써 본 적 있긴 한데 이곳에도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피로가 쫙 가시는 느낌이더군요.”
“하하. 그렇죠. 저도 이번 일이 끝나면 탕에 몸 좀 담가야겠습니다.”
우리는 담소를 나누며 계속해서 이동했다.
지금 가는 곳은 바로 탈로스의 흔적을 발견했던 숲이다.
오전에 정찰 대원이 구슬을 통해 연락을 해 온 것이다.
탈로스의 흔적을 쫓다가 거인의 거주지를 발견했다고 한다.
듣기로는 숲 깊숙한 곳에 엄청 큰 나무집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대족장의 업 (3) - 청동거인 탈로스]
[마에 물들어 타락한 거인족 탈로스. 그를 퇴치하십시오.]
새로운 업 퀘스트였다.
난 고개를 돌려 전방을 바라보았다.
확실한 단서를 찾아서 다행이었다.
탈로스는 게임에서도 유명한 보스 몹이었다.
피부는 마치 청동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단단하여 창칼이 잘 들지 않는다.
덩치는 평소에도 크룩이 거대화를 썼을 때만큼이나 크고, 그 완력이 대단하다.
그리스 신화의 똑같은 이름을 가진 거인과 비슷한 설정이었다.
아쉬운 건 신화와 달리 눈에 띄는 약점이 없다는 것.
그때는 한 유저가 오백의 병사를 희생시켜 겨우 잡았었다고 알려졌다.
그리고 탈로스의 가죽으로 갑옷을 만들었더니 전설 등급 아이템이 나왔다고 하던가.
‘이들과 함께하는 건 오히려 이득이다.’
슬쩍 늑대를 타고 있는 사제들을 보았다.
그들도 탈로스에 대해 대략적인 정보는 알고 있는 걸로 보이던데 그다지 긴장한 기색은 없었다.
업 퀘스트에 뜬 만큼 탈로스는 무조건 잡아야 한다.
아마 우리 병력만을 이용해 전투를 치렀다면 아무런 희생 없이 탈로스를 잡긴 힘들었을 거다.
반면에 이 사제들은 대 마물전의 스페셜리스트들.
고작 열 명인데도 불구하고 천군만마를 얻은 것만큼이나 든든하다.
“대족장님. 크룩.”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크룩이 말을 걸어왔다.
슬쩍 돌아보니 크룩이 굳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
크룩은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크루룩. 저도 그 목욕탕이란 거 써도 됩니까?”
“어? 당연히 되지. 아직 이용 안 해 봤어?”
“예. 딱히 쓸 틈이 없어서.”
푸흐흐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크룩의 뜬금없는 말 덕분에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곧 도착하겠군.”
한 가지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탈로스가 어떤 조건에 의해 이지를 약간이나마 되찾았다는 것.
그 조건이란 무엇일까.
업 퀘스트로 엮인 만큼 어쩐지 나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 * *
“대족장님! 제3정찰대장 코룰 인사 올립니다!”
고블린 한 명이 내게 납작 엎드렸다.
난 손을 휘저어 그를 일으키고서 바로 물었다.
“수고했다. 커다란 집이 있었다고?”
“예. 여기서 20분 정도만 걸어가면 됩니다. 엄청나게 큰 나무집이었습니다.”
펜릴의 등에서 내려서 단장을 보았다.
“이곳부터는 다들 내려서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알겠습니다. 이 친구들은 그냥 이곳에 두면 되나요?”
난 대답 대신 펜릴을 바라보았다.
펜릴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늑대들을 자신 뒤로 정렬시켰다.
“이 친구가 통솔할 겁니다.”
“정말 똑똑하군요.”
단장은 약간 감탄한 듯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이동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정찰대장 코룰이 가장 앞장서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계속 걷다 보니 저 앞의 언덕에 고블린들이 납작 엎드려 있는 게 보였다.
고블린 정찰대원들은 날 보고서 소리 없이 예를 표했다.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고서 그 언덕으로 다가갔다.
‘엄청 크군.’
-그렇습니다.
펜릴은 몸을 숨긴 채로 내 옆에 서 있었다.
모두들 눈앞에 세워져 있는 집을 보고 약간 놀란 듯했다.
크룩이보다 더 클 수도 있겠는걸.
잠시 고민을 하다가 펜릴에게 집을 둘러보고 오라고 시켰다.
-아무도 없습니다.
펜릴은 다시 돌아와 그렇게 말했고, 난 단장에게 집이 비어 있다고 말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우선 기다려 볼 생각입니다.”
단장은 흘깃 집을 보았다.
“탈로스의 흔적이 이곳으로 이어져 있다고 하니 그놈의 집일 확률이 높을 테지요.”
그러고서 만약 탈로스의 집이 아니더라도 그 주인이 누군지 확인해 볼 생각이라고 했다.
모두 곳곳에 자리를 잡고서 앉았다.
난 새삼스러운 눈으로 사제들을 보았다.
단장은 인간.
부단장은 트롤과 용종.
그리고 평단원들도 인간과 다른 종족들이 섞여 있다.
종족 차이로 서로 어색해하는 모습도 없다.
그 모습은 우리가 나아갈 목표이기도 했다.
만약 저들이 사제가 아니라 기사단이거나 했으면 무조건 포섭했을 텐데.
우리 부족은 벼락 신을 중심으로 뭉쳤기 때문에 종교적 색체가 강했다.
‘뭐, 그래도 친하게 진해서 좋을 건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저들을 더 머무르게 할 만한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늑대 한 마리가 코를 킁킁거리더니 낮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크릉!
‘무슨 일이야?’
-알아보겠습니다.
울음소리를 냈던 늑대가 번쩍 고개를 들더니 무언가 대화를 하는 듯 입을 달싹거렸다.
곧 펜릴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저 집에서 나는 것과 비슷한 냄새가 가까워지고 있답니다.
‘비슷한 냄새?’
집주인이 온다는 건가?
바로 단장을 향해 갔다.
“형제님도 느끼셨습니까?”
하지만 먼저 입을 연 건 단장이었다.
그는 아까 전 늑대가 가리켰던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놈이 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