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플레이어가 무엇이죠?”
여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호진은 퉤 침을 뱉었다.
“꼴사납게 연기하지 말고.”
그는 에드몽의 시체와 여자를 번갈아 보며 고민했다.
‘시체도 들고, 여자도 데려가기엔 손이 모자란데.’
그의 고민은 짧았다.
때마침 부족의 병사들이 호진이 있는 곳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가장 선봉에는 트렌이 서 있었다.
“수고했다. 잠시 이 여자를 붙잡고 있어라.”
“알겠습니다!”
트렌은 바로 움직여 여자를 단단히 붙들었다.
호진은 여자를 쳐다보고서 다시 트렌에게 말했다.
“잠시 기다려라.”
그는 그대로 에드몽의 시체를 쥐고서 높이 몸을 띄웠다.
순식간에 성의 전경이 훤히 보였다.
부족원들이 성내로 진입해와 인간 병사들과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호진은 숨을 크게 들이 마쉬고서 크게 소리쳤다.
“너희들의 주인은 죽었다!”
벼락같은 음성에 모두의 시선이 호진에게로 쏠렸다.
그의 손에 들린 에드몽의 시체를 본 인간 병사들이 크게 동요하는 게 보였다.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 주마! 만약 저항한다면 모두 살해할 것이다!”
그 말이 결정타였다.
인간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한 듯 모두 무기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호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땅에 착지한 후 에드몽의 시체를 내려놓았다.
“넌 나랑 얘기 좀 하지?”
트렌에게 붙들려 있는 여자는 연기를 그만둔 듯 입술을 깨물며 호진을 노려보았다.
“크라아아아아!”
“케르르르르!”
벼락 부족원들은 성 곳곳에서 무기를 높이 치켜든 채 환호성을 질렀다.
인간들은 그들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마하룬 요새가 함락되었다.
* * *
“후우.”
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광전사’ 특성을 쓴 탓에 온몸이 욱신거렸다.
그래도 크게 무리는 하지 않았으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다.
‘용안 개방.’
난 속으로 중얼거리고서 눈을 떴다.
“무슨 악마와 계약했지?”
여자는 여전히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다.
눈을 낮게 내리깔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절로 연민이 생겨날 것 같지만.
“넌 지금 네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지?”
몸 주위로 뭉글거리며 피어오르는 검은색의 기운.
마치 부정형의 검은 액체가 꿀럭거리며 흐르고 있는 것 같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이 든다.
“무슨 악마와 계약했지?”
“저는…….”
“아까 그 귀족 상태를 보니 매혹과 관련 있는 것 같던데?”
여자가 입술을 잘근 씹는다.
매혹과 관련 있는 악마를 생각하니 몇 명이 떠오른다.
그중에서도 ‘계약자’를 마주하는 것만으로 저런 불길함을 느끼게 할 악마라면.
“꽤나 대단한 놈이랑 계약했군.”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하긴 했지만 차마 ‘그’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진 못했다.
악마의 진명에는 힘이 깃들어 있다.
그의 관심을 끌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제기랄.’
여자를 함부로 못 대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절 죽이지 못하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보내 주세요.”
“악마와 계약한 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나?”
“적어도 당신보다는 잘 알고 있죠.”
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그녀에게 바짝 다가갔다.
“이건 빌어먹을 게임이 아니야. 설마 아직도 모르는 건가?”
“우린 플레이어예요. 게임을 클리어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녀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요새를 통째로 집어삼킬 수 있었는데.”
반말로 변한 말투와 함께 그녀의 기세도 일변했다.
“좀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긴 했지만 쓸 만한 남자였지.”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판 모양새군.”
여자의 눈엔 광기 같은 게 어려 있었다.
이 여자가 정말 나와 같은 플레이어가 맞단 말인가?
“당신도 꽤 쓸 만해 보이는데.”
여자가 갑자기 요사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손을 뻗었다.
파지지직-
난 전격을 두른 손으로 여자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을 타고 나에게 접근하던 위험한 기운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쓸데없는 수작질 부리지 마. 머리통을 쪼개 놓기 전에.”
아마도 그녀가 가진 ‘매혹’ 능력일 것이다.
에드몽 남작이라고 했었나. 그 귀족의 이름은 전쟁이 끝난 후에야 알 수 있었다.
남작이 마지막에 멍청한 말을 지껄였던 것도 이미 저 여자에게 넘어갔기 때문일 거다.
“악마의 저주를 감당할 수 있겠어?”
내 위협적인 말투에도 여자는 빙글거리며 웃었다.
악마의 저주.
악마와 계약한 자는 몸도, 영혼도 그 악마의 것이 된다.
대가로 받는 것은 강력한 힘과 특별한 능력. 그리고.
“아주 든든하겠군. 대단하신 분의 가호를 받고 있어서.”
“그럼. 대악마의 진명을 알고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으니까.”
악마의 가호. 계약자를 해한 사람에게 치명적인 저주를 내리는 힘이다.
내가 만약 그녀에게 큰 상처를 입힌다면 순식간에 나에게 저주가 내려질 것이다.
이 여자를 해할 수도 없고. 데리고 있다면 틈날 때마다 우리 부족원에게 수작을 부리려 할 것이다.
나야 괜찮지만 케륵이나 크룩, 기타 부족원들은 저항하기 힘들겠지.
난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서명해라. 그러면 놓아주지.”
여자가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종이를 집어 들었다.
여자는 그것을 다 읽고서는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악마의 가호는 해한 정도에 따라 저주의 강도가 달라지지.”
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팔과 다리에 족쇄를 채워서 사막 같은 데다가 버려두면 네가 살 확률은 얼마나 될까?”
웃었다.
그녀가 미친년 행세를 하고 있으니.
나도 비슷하게 보이기 위해서.
“한 오십 명을 모아서 칼로 한 번씩 찌르라고 시키면 저주는 얼마나 약해질까? 가호가 무적인 것 같아?”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 진심을 파헤치려는 듯 내 눈을 똑바로 보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서명해.”
여자는 이를 뿌득 갈더니 곧 펜을 들어 사인을 했다.
진소연.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곧 종이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곧 가루가 되어 서로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됐군. 이제 꺼져. 아니, 내가 직접 배웅해 주지.”
난 창을 집어 들고서 그녀를 잡아 일으켰다.
밖으로 나가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난 슬쩍 시선이 돌아가는 그녀의 등을 창으로 툭 쳤다.
“허튼 생각 하지 말고 앞만 보고 걸어.”
내가 내밀었던 계약서.
꽤 큰 포인트를 내고서 구입한 아이템이다.
이름은 ‘영혼의 서약’
만약 계약을 어길 시 그대로 목숨을 앗아간다.
그 경우 내가 직접 죽인 걸로 판정되지 않기 때문에 저주도 받지 않는다.
계약 조건은 세 가지.
‘이호진과 그의 세력에게 직, 간접적인 피해를 입히지 않을 것.’
‘이호진이 ‘왕’ 등급을 달성하면 그를 찾아올 것.’
‘현재 가진 모든 포인트를 내게 넘길 것.’
내가 왕 등급을 달성할 때쯤엔.
악마의 저주쯤은 파훼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우리는 성문에 다다랐다.
“거지 같은 새끼. 간다.”
여자가 바로 가려는 모양새이기에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포인트 주고 가.”
“하.”
그녀는 한숨을 내쉬더니 내 손등에 자신의 손등을 가져다 대었다.
화악-
[신화 포인트가 250,000 증가했습니다]
“됐냐?”
“그래. 가라.”
그녀는 바닥에 퉤 침을 뱉더니 성문을 지나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좀 얼어지자 갑자기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뭐라 입을 달싹거렸다.
‘개새끼’
욕이군.
“저건 무슨 뜻입니까?”
옆에서 성문을 지키고 있던 오크 병사가 내게 물었다.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행동을 물어보는 듯했다.
난 혀를 차며 그냥 아무 말이나 둘러댔다.
“만나서 반가웠다는 뜻이다.”
실제로는 만나서 거지 같았고, 다신 보지 말자는 뜻이겠지만.
나도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한 플레이어가 저런 유형의 사람이라는 것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악마 진영 플레이어는 절대 가까이할 수 없다.
모든 유저들은 각자의 ‘신화’를 키워 나가는 게 목표다.
상생할 수 있다면 상생하는 게 맞지만, 그녀를 가까이 둔다면 분명 신화가 어그러지거나 그녀의 신화에 잡아먹힐 게 분명했다.
“아, 그렇군요! 크루룩.”
오크는 내말에 눈을 빛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난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수고하라고 해 주었다.
“조심히 가십쇼! 족장님!”
오크도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러더니 별안간 오른손을 들어 보이더니 짤막한 가운데 손가락을 쭉 들어 보였다.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이 새끼가…….”
후우. 갑자기 뻗친 화를 참아 내며 어리둥절해하는 오크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주 인사성이 밝은 아이구나. 다음에 또 보자.”
그렇게 말하고 지나가니 등 뒤에서 오크가 쩌렁쩌렁하게 인사를 올린다. 가운데 손가락을 힘껏 치켜 올리면서.
…급격히 피로감이 몰려왔다.
* * *
광전사가 풀린 순간부터 당장이라도 쓰러져 자고 싶었다.
저 여자만 아니었다면 이미 뻗어 있었을지도.
난 요새의 중앙에 있는 높은 건물로 걸어갔다.
케륵과 크룩은 날 기다리고 있었는지 건물 앞에 서 있었다.
“현재 상황은 어떻지?”
난 건물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케륵과 크룩은 자연스레 나를 따라오며 대답했다.
“사망자 37명, 부상자 93명입니다. 크룩.”
“부상자들이 있는 곳부터 가지.”
난 우선적으로 부상자들을 모아 놓은 방으로 향했다.
그들에게 각각 포션 한 병씩을 사용하라 명하고서 우선 포인트를 소모해 치유의 축복을 내렸다.
“쉴 방이 있나?”
“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케륵.”
케륵이 앞장서서 걸어갔고, 침대가 딸려 있는 제법 넓은 방에 도착했다.
난 바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부족에 있는 코룸에게 연락을 넣어라.”
코룸은 현재 마경 내의 부족을 관리하고 있는 1등급 사제다.
“일주일 내로 훈련 상태가 좋은 부족원 사백을 보내도록.”
우선 요새를 점령했지만 그 이후가 문제이다.
인간 마을 쪽에 설치해 둔 신전도 관리해야 했고, 여의주 파편이 있는 곳에 거점을 세울 준비도 해야 했다.
성내에 있던 인간 포로들에게 물어본 결과 이 근처엔 딱히 큰 위험이 없는 걸 파악했다.
한 가지 걸리는 건 바로 변경백.
‘그자는 제법 위험하겠지.’
본 부족에서 보낼 사백의 병력을 바로 전투에 투입할 생각은 없다.
경계와 관리에 우선적으로 투입하고서 차차 훈련을 통해 본대에 투입할 것이다.
“오백에서 빈자리는 그들 중 뛰어난 이들로 채울 것이다. 나머지 인원들은 크룩이 직접 맡아 철저하게 훈련시키도록.”
“알겠습니다! 크룩.”
“예! 케르륵.”
고개를 끄덕이고서 지도를 꺼내 들었다.
마하룬 요새를 중심으로 아군을 뜻하는 초록색 점과 중립의 노란색 점들이 무수히 찍혀 있다.
인간들도 차차 흡수하고, 훈련시켜 병사로 삼을 예정이다.
난 점들을 한번 훑고서 마지막으로 한 지점을 보았다.
푸른빛의 점이 찍혀 있는 곳.
바로 퀘스트의 목적지였다.
이 요새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다.
아마도 펜릴을 타고 이동하면 반나절 만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펜릴은 어딨지?”
“그, 그게.”
크룩이 내 물음에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케륵이 나서서 물음에 답을 했다.
“발리스타의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었습니다. 지금은 이 건물의 뒤편에서 요양 중입니다.”
난 케륵의 말에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맨날 잘 싸우던 놈이 갑자기 웬 화살에 맞았대?
우선 펫 치료제가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난 고개를 끄덕거리고서 지도를 다시 보았다.
“부족원들이 인간들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해. 그들도 곧 벼락 신의 품에 귀의할 자들이니.”
“알겠습니다. 케륵.”
“그리고 앞으로 이곳에서도 매일 아침 해가 떴을 때, 점심을 먹을 때, 그리고 해가 질 때 기도를 한다. 인간들도 포함해서.”
“예! 크룩.”
기도는 중요하다.
벼락 신에 대한 숭배 행위는 곧 나에 대한 신앙으로 이어지니까.
그 모든 행위들이 내 신화 포인트로 이어질 것이다.
난 신화 창을 열어서 신화 포인트 부분만 확인했다.
-현재 신화 포인트: 510,000/1,190,000
포인트가 부쩍 증가해 있었다.
이번 요새를 점령한 게 꽤 포인트가 컸나 보다.
여자에게 받은 이십오만 포인트는 포인트의 총량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저 현재 소유한 포인트를 증가시켜 줄 뿐.
서로 거래를 해 가며 포인트를 뻥튀기하려는 것을 막기 위한 시스템이다.
난 포인트 창을 닫고서 그들에게 말했다.
“조만간 펜릴과 어디 좀 다녀올 거야.”
우선 어떻게 생긴 곳인지 확인이라도 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