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크룩은 코를 씰룩였다.
성벽에선 케륵이 소환해 낸 괴수가 막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우레와 같은 굉음이 일고.
곧이어 트렌이 기사의 목을 잘랐다.
그는 생각했다.
‘지금인가?’
평소 그의 성정이었다면 이미 전방에서 날뛰고 있었을 거다.
다만 이번엔 대족장의 명이 있었기에 참고 있던 것이다.
전장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져 있었다.
‘지금이 맞는 것 같아.’
대족장이 말했던 계획.
전장이 혼란스러워지고.
모두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해 있을 때.
“크루룩.”
크룩은 도끼를 바닥에 내려놨다.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앞으로 달리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길을 뚫어라.’
케륵이 소환해 낸 괴수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애초에 덩치가 크고 무겁기만 할 뿐 강한 괴수가 아니었으니까.
케륵의 역할은 ‘시선을 끄는 것’이다. 길을 뚫는 것은 바로 크룩의 몫이었다.
“크라아아아아아아아!”
크룩의 고함이 터져나가고, 순식간에 그의 몸이 커지기 시작했다.
꽈앙!
그는 아군을 밟지 않도록 높이 몸을 띄워 한달음에 성벽에 도착했다.
차캉- 츠르륵.
건틀렛이 그의 팔을 감싼다.
후우우우웅!
푸른빛이 터져 나오고.
전격이 튀어 오른다.
크룩은 주먹을 꽉 쥐고서 자신의 앞에 세워진 거대한 벽을 봤다.
‘이 벽을 부수고 싶다.’
생각했다.
생각한 것은 곧 그의 힘이 되었다.
꽈르르르릉-
그의 역할은 공성추.
아군의 길을 연다.
“크라아아아아악!”
함성과 함께 주먹이 성벽을 향해 쏘아졌고.
콰르르르르르르!
성벽이 말 그대로 ‘깨져’ 나갔다.
“크룩.”
크룩은 콧김을 뿜어내며 자신이 한 것을 보았다.
아직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는 성벽을 발로 차고, 주먹으로 내려치고, 온몸으로 부딪쳤다.
곧 해자는 성벽에서 나온 파편에 막혀 버렸다.
“신을 위하여!”
“케르르르르르를!”
“크라라라아아아!”
뒤를 이어 군대가 성내를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 * *
삐이이이-
에드몽은 귓가에서 울리는 이명에 뒤늦게 정신 차렸다.
“아…….”
그가 눈을 뜬 건 웬 넓은 공터였다. 자세히 보니 성 내에 있던 시설 중 하나였다.
오크의 주먹.
거대한 오크가 성벽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 충격으로 성벽은 무너져 내렸다.
‘이럴, 이럴 때가 아니다.’
에드몽은 자신의 근처에 떨어져 있는 검을 집어 들었다.
아직도 성벽에 오크가 서 있다.
놈을 처리하지 않으면 성벽이 아예 무너져 내릴 거다.
이미 몬스터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지만 에드몽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성벽으로 달려가려 했다.
“어이.”
누군가가 가로막지 않았다면.
“어딜 가려고?”
“너는.”
사납게 전격이 튀어 오르는 창을 든 사내.
바로 저 몬스터들을 이끌고 요새를 공격해 온 남자였다.
“솔직히 죽을 줄 알았는데.”
눈이 빨갛게 변한 사내는 어쩐지 그 전보다 더욱 사나워 보였다.
“살아 있는 걸 보니 아주 좋네.”
그 사내. 호진은 씩 웃어 보였다.
“내가 직접 안 죽이면 아무래도 포인트가 적게 들어오거든.”
그는 오랜만에 ‘광전사’ 특성이 제대로 발동된 상태였다.
에드몽이 잠깐 기절해 있는 동안 목을 보전하고 있는 것도 그 덕분이었다.
평소라면 ‘부족’을 생각해 빨리 전투를 끝냈겠지만.
지금의 호진은 자신을 생각해 판단을 내렸다.
제대로 된 상대를 죽여야 포인트를 많이 벌 수 있다. 그건 변명에 불과했다.
처음 만난 인간 강자를 쉽게 죽이긴 싫다는 것.
“덤벼.”
그게 가장 큰 이유였다.
파앙-!
호진의 몸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에드몽은 가까스로 검을 들어 그것을 막아 냈다.
카앙-!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치는 소리.
호진은 그 충격을 이용하여 창을 뒤로 뺐다가 다시 다른 각도로 찔러갔다.
“괴물… 새끼!”
에드몽은 아예 옆으로 몸을 굴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서 검에 기운을 불어넣고서 낮게 휘둘렀다,
까앙!
콰드드드득-!
호진은 몸을 띄워 공격을 피하더니 창을 아래로 내려찍어 버렸다.
빛의 검이 땅을 말 그대로 갈아 버리며 파고들었고, 호진은 이어서 스킬을 썼다.
<뇌룡 질주>
쾅!
에드몽은 순간 호진의 움직임을 놓쳤다.
호진이 뇌룡 질주를 사용해 그의 옆을 파고들었다.
까가각!
그가 공격을 막은 건 순전히 그의 능력 덕분이었다.
검을 덮고 있는 빛의 검이 워낙 큰 탓에 넓은 면적을 방어해 준 것이다.
“생각보다 약한데.”
깡! 까앙! 캉! 캉!
호진은 한 호흡에 몇 차례나 창을 찔렀다.
에드몽은 식은땀을 흘리며 연신 공격을 막아 냈다.
깡!
대검과 창이 맞부딪친다.
후욱- 호진은 창을 그대로 돌려 에드몽의 옆구리를 찍었다.
“끄윽.”
호진은 아예 치명타를 넣을 요량으로 다시 한 번 스킬을 써 그의 뒤를 잡았다.
“흐아아아압!”
그때 에드몽의 몸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호진도 뒤로 몸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에드몽의 몸 주위로 하얀색의 얇은 막 같은 게 생겨났다.
“그래도 숨겨진 수는 있었나 보지?”
호진이 비아냥대듯 말했으나 에드몽은 그저 굳은 표정으로 호진에게 검을 겨눴다.
“이젠 쉽지 않을 것이다.”
후웅!
이번엔 에드몽이 호진을 향해 돌진했다.
꾸웅!
세로로 내려찍는 거대한 빛의 검.
호진은 오른쪽으로 피하고서 다시 공격을 하려 했다.
후우우웅!
하지만 검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호진에게 따라붙었다.
호진도 표정을 굳히고선 아예 스킬을 써서 피할 수밖에 없었다.
콰앙!
캉!
검과 창이 맞부딪치고.
호진도 본능적으로 느꼈다. 놈의 몸놀림이 그 전과 달라진 것을.
‘버프기 같은 건가?’
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전까진 알게 모르게 무기를 부딪칠 때마다 놈의 몸이 무거워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처음보다 더욱 몸놀림이 빨랐다.
‘상태이상 회복 효과까지 붙어 있을 수도.’
광전사 특성은 사람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다.
특히 그의 경우는 ‘전투 보조’가 극성으로 발휘되는 상태.
몇 년을 전장에서 구른 에드몽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실력이었다.
애초에 에드몽도 검술을 체계적으로 배운 자는 아니었으니까.
<쇼크웨이브>
호진은 기습적으로 땅을 내리쳤다.
콰즈즈즈즈즉!
방사형으로 퍼져 나간 전격이 에드몽의 몸을 타고 올랐다.
호진은 그의 몸놀림이 살짝 둔해진 걸 확인했다.
‘아예 전격 공격이 안 들어가는 건 아니야.’
짧은 계산을 마치고서 호진은 다시 그에게 달려들었다.
캉!
검과 창은 상대의 몸을 베지 못하고 연신 자신들끼리 맞부딪쳤다.
유효타를 내지 못한 상태로 서로 지지부진한 싸움이 이어졌다.
균형이 깨진 건 에드몽의 검이 호진의 가슴팍을 찌른 순간이었다.
에드몽은 자신의 검이 저 얄팍한 흉갑을 꿰뚫을 것이라 확신했다.
까앙!
하지만 검은 갑옷에 가로막혔다.
“끄아아아악!”
도리어 큰 부상을 입은 건 에드몽이었다.
호진은 자신의 가슴팍을 아예 내어 주며 그의 왼쪽 어깨를 창으로 꿰뚫어 버린 것이다.
콰지지지직-!
이어서 창끝에 어린 기운이 에드몽의 몸을 파고들려 했다.
화악!
하지만 에드몽의 몸을 감싸고 있던 빛의 막이 어깨에 몰려들더니 호진의 전격을 흩어 버렸다.
콰가각!
에드몽의 검이 갑옷을 타고 위로 베어 오는 탓에 호진은 몸을 뒤로 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둘의 균형은 이미 깨어졌다.
퍼억!
창대가 에드몽의 정강이를 찍었다.
부상 탓인지 에드몽의 몸놀림이 전과 같지 않았다.
퍽! 퍼억!
이어서 호진이 기습적으로 내지른 발차기가 다시 한 번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에드몽의 몸이 균형을 잃었다.
호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오른 손등을 찍어 버렸다.
캉-
에드몽의 검이 떨어지며 청명한 소리를 내었다.
호진은 그대로 그의 가슴팍을 걷어차 넘어트렸다.
꾸욱-
“가만히 있어.”
호진은 에드몽의 가슴을 밟았다.
창극을 그의 목에 겨누고서 입을 열었다.
“목이 꿰뚫리기 싫으면.”
“죽여라.”
에드몽은 생각했다.
이미 성벽은 뚫렸다.
적의 수는 어림잡아도 최소 사백에서 오백.
요새라고는 하나 그렇게 많은 병력이 주둔하고 있진 않다.
에드몽, 그의 작위가 겨우 남작이었으니까.
그가 최전방 요새를 맡고 있지만 제대로 된 병력은 후방에 변경백이 맡고 있는 성에 있다.
이곳에 있는 건 자신이 직접 기른 사병들뿐.
‘애초에 이럴 운명이었을지도.’
에드몽, 그의 신분은 본래 그리 높지 않았다.
백작 가문의 서자.
전쟁에서 세운 공이 아니었으면 남작위도, 자신의 영지를 얻을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두 번의 승급도 전쟁에서 수많은 실전을 거치며 성취했던 것이니.
뭐, 공을 세우고 나서도 이런 볼품없는 영지를 하사받긴 헀지만.
‘몬스터들이라.’
그의 예상 밖이긴 했지만 아마 비슷한 전력의 적군이 쳐들어왔어도 같은 꼴을 당했을 것 같다.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는 시간을 끄는 용도의 버림 패가 아니었을까.
앞으로는 마경.
옆에는 호시탐탐 침략해 오려는 왕국.
별다른 방비도 없이 최전방의 외딴 곳에 놓여 있는 요새.
“넌 이름이 뭐지?”
“내가 왜 그것을 말해야 하지?”
꽈악-
에드몽의 가슴을 밟고 있는 발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는 숨이 덜컥 막혔지만 지지 않고 호진을 노려보았다.
‘연락을 해야 한다.’
근처에는 변경백이 영지가 있다.
그의 병력, 그의 힘이라면 충분히 이 괴물들을 막을 수 있을 터.
그들에게 정보를 알려야 했다.
왕국을 위해서.
수도에 있을… 자신의 딸을 위해서.
“괴, 괴물 새끼들도… 명예를 아는 건가?”
숨이 막혀 오는 와중에도 그는 일부러 도발적인 언사를 뱉었다.
그러면서 슬쩍 손을 옆구리로 가져갔다.
손끝이 작은 수정구에 닿으려는 순간.
콰직!
“끄으읍!”
호진의 다른 발이 그의 손을 내리찍었다.
그의 손가락이 기괴한 각도로 비틀렸다.
“이름을 말해. 허튼짓하지 말고.”
호진은 그의 손을 질근질근 밟으며 다시 물었다.
이름을 아는 것은 중요했다.
그의 머릿속엔 전작의 중요 인물들과, 비중이 떨어지더라도 맡은 역할이 있던 이들에 대한 정보가 있으니까.
앞으로 사로잡을 인간들에게 물어봐도 상관은 없지만.
‘마음에 안 들어.’
여전히 눈앞의 남자가 도발적인 눈을 하고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호진의 눈은 여전히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때.
“잠깐만요!”
어떤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드몽과 호진의 시선이 동시에 옆을 향했다.
“나, 남작님을 사, 살려 주세요!”
호진은 묘한 표정으로 여자를 보았다가 에드몽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에드몽의 눈이 묘하게 풀려 있는 걸 확인했다.
“그, 그녀는 건드리지 말게!”
갑자기 에드몽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항복! 항복하겠네! 병사들을 모두 물릴 테니 그녀는 살려 주게나!”
에드몽이 말을 이어갈수록 호진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자, 자네도 병사들의 피해가 적으면 좋지 않은가? 내가 명령, 명령만 내리면!”
이어서 옆에 서 있는 여성도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호진에게 말했다.
“저는, 저는 괜찮으니 남작님의 목숨을 살려 주세요!”
여자의 말이 끝났을 때 호진은 결정을 내렸다.
푸욱!
작은 손짓에 창이 떨어져 내렸다.
호진의 창이 에드몽의 목을 꿰뚫었다.
“크, 커억!”
에드몽의 손이 애처롭게 여자를 향해 뻗어졌다.
호진은 한 번 더 창을 내려찍어 그의 숨통을 완전히 끊고서 여자를 향해 창을 겨누었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
“너 플레이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