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전력으로 기운을 운용하는 데다가 뇌룡 질주까지 쓰니 요새에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요새에 오기까지 여러 마을을 지나왔다.
아마 전쟁이 나서 적군이 쳐들어오면 저 요새 안으로 피신하는 거겠지.
반면에 내가 이미 흡수한 여러 마을들은 그럴 틈도 없을 것이다.
그러기엔 너무 거리가 머니까.
‘해저가 파져 있네.’
꽤 깊어 보였다. 성벽 위로는 경비병으로 보이는 이들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닐 것이다.
‘용안 개방.’
시야가 바뀌었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푸른 막 같은 게 생겨났다.
아니,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라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거겠지.
이제야 보이는 거고.
‘결계인가.’
전방 요새에 마법적 방어 요소가 없는 게 더 이상하긴 하지.
난 어떻게 눈에 안 띄고 들어갈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가 우선 요새로부터 거리를 멀리 벌렸다.
그런 후 몸을 굉장히 높게 띄웠다.
‘뇌조야.’
-응!
다시 땅으로 하강하려던 몸이 멈췄다.
오래 유지하고 있긴 힘들지만 십 분 정도는 괜찮다.
난 그 상태로 요새의 내부 구조를 살폈다.
‘성벽이 두 개군. 저 경로로 병력이 이동하겠어.’
구조를 어느 정도 파악한 후에는 요새를 감싸고 있는 결계로 시선을 돌렸다.
‘결계의 강도는 꽤 단단하군. 어설프게 두드려선 안 되겠어.’
최대한 많은 정보를 머릿속에 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심상치 않은 것이 눈에 띄었다.
검은색의 기운.
칠흑같이 어두운 기운이 성의 발코니 한 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누군지 살피고자 좀 더 가까이 다가갔지만, 결계가 위로도 높게 쳐져 있는 탓에 더 이상 다가가기 힘들었다.
사람의 형태라는 것만 겨우 알정도.
난 쯧 혀를 차고서 다시 바닥에 착지했다.
‘악마 본인은 아니다.’
악마라고 하기엔 기운이 옅었다. 아마도 숭배자… 아니면 계약자.
어찌 됐든 까다로운 상대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플레이어는 아니겠지.’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플레이어라고 하면 기껏해야 숭배자일 것이다.
악마와 계약하는 건 굉장히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다른 것보다 악마를 소환하는 방법을 아는 것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전작에서도 악마와 계약까지 한 건 극히 일부.
그들도 계약 방법은 극비로 감추고 있었다.
그야 자신들의 전력을 드러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지만.
‘어찌 됐든 까다로운 상대야.’
대강 상대의 전력을 미리 파악하고자 하는 의도이긴 했지만 기분이 더러워졌다.
계약자는 힘도 까다롭지만 다른 이유에서 더 상대하기가 힘들다.
난 다시 부족을 향해 달려갔다.
곧 부족에 다시 도착해 다른 이들이 축제를 즐기는 걸 보고서 신전 안으로 들어왔다.
내 방의 침대에 걸터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지룡(地龍)의 여의주 파편.
그것은 요새 너머에 있다. 그리고 보통 이런 요새에 위치한 지휘관은 강할 확률이 높다.
이 게임에 소드마스터니 익스퍼트니 하는 설정은 없다.
하지만 그들은 ‘승급’을 한다.
몬스터가 진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쌓은 업에 따라서 점점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국경과 마경을 맞대고 있는 요새의 지휘관이 단순히 계급만 높은 귀족일 리는 없을 터.
어쩌면 승급을 두 번 이상 한 인간일지도 모른다.
이곳의 표현에 따르면 이성(二成) 기사. 두 번 승급을 했다는 뜻이다.
우리 케륵이와 크룩이는 일성이고.
‘그리고 마법사도 있겠지.’
요새에 처져 있던 결계.
아티펙트를 이용해서 만든 거긴 하겠지만 그것을 유지, 보수하기 위해서는 마법사가 필요하다.
아예 관리가 필요 없는 결계 아티펙트의 경우는 그 가치가 상상을 초월하니까.
성도나 공, 후작급의 귀족의 성이 아니면 웬만해선 보기 힘들다.
높게 잡으면 이성 기사 한 명과 일성에서 무성 사이의 기사 서너 명, 그리고 마법사 한 명.
우리 쪽은 겨우 일성 두 명이긴 하지만 승급이나 진화에 따라 강함이 결정되는 건 아니다.
기본적인 피지컬이라는 게 있으니까. 특히 우리 쪽은 포인트를 지속적으로 사용해 가며 축복을 받고 있으니까.
본래 인간 병사 하나가 고블린 셋 정도는 상대할 수 있지만, 우리 부족의 고블린들은 혼자서 병사 하나를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복잡하구만.”
나는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곧 눈을 감고 잠에 들었다.
다음 날부터는 모든 간부들을 소집하고서 회의를 시작했다.
어떻게 요새를 상대할지를.
그리고 어느 날.
한 인간 마을의 구성원들이 모조리 살해당한 채 발견되었다.
* * *
인간 마을.
그 마을에 도착했을 땐 온 사방이 까맣게 불타 있었다.
생자의 숨결은 터럭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고한 이들이었지.’
철컥. 철컥. 철컥.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모두의 발소리.
군대가 나아가고 있다.
다시 한 번 그날을 떠올렸다.
그 마을에서의 참상을.
새까만 잿더미 사이로 시체가 있었다. 아이와 어른 할 것 없이 한 군데에 겹쳐져 있던 시체들.
산 채로 화형을 당한 것처럼 그들의 시체엔 고통에 몸부림친 흔적이 똑똑히 남아 있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이들이었다.
그날 오랜만에, 너무 오랜만에 눈물을 흘렸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그리고 오늘 우리는 요새를 향해서 진군하기 시작했다.
복수를 하기 위해서 군대를 진군시킨 것은 아니다. 다만 분노가 아예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수백의 군대가 평야를 걷는다.
발리스타 열 대와 캐터필터 열 대.
그리고 그것을 운반하고 조작할 예정인 병사 이십. 힘이 특별히 강한 오크 넷이 포함되어 있다.
늑대를 탄 울프 라이더 삼십.
오크와 고블린이 반절씩 섞여 있다.
주로 고블린으로 이루어져 있는, 활과 도끼로 무장한 궁병 오십.
트렌이 본인의 재량 하에 움직일 수 있는 트롤 이십과 오크, 고블린 혼합 병사가 오십이다.
트렌의 부대는 이번에 가장 앞에서 침투할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울프라이더 바로 뒤편에 배치되어 있다.
이번엔 조약하게나마 군대의 편제를 만들었다.
십부장. 백부장. 천인장.
십부장은 제4등급 사제. 그들이 열 명의 병사를 맡는다.
백부장은 제3등급 사제들. 그들이 열 개의 조를 맡는다.
현재 3등급 사제의 수는 다섯이다.
우선 트렌이 3등급 사제다. 그리고 궁병 조에 한 명, 울프 라이더 조에 한 명, 마지막으로 이백삼십의 병사를 둘로 나눠 배치했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앞을 보았다.
저 멀리 요새가 보인다.
현재 요새에 가까운 마을들은 모두 비어 있다.
이미 성 안으로 대피를 마친 듯 보였다.
나도 민간인을 전투에 끌어들이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충분한 시간을 두었다.
어차피 기습을 가하기엔 지형이 좋지 않았다. 아주 넓은 개활지가 펼쳐져 있었으니.
“대족장님, 저 앞에 있습니다.”
펜릴의 등 위에 같이 타 있는 병사 한 명이 말했다.
고블린 중 가장 시력이 좋은 자를 같이 태웠다.
본래 정찰대 임무를 수행하는 이였다. 그가 가리킨 곳을 향해 시선을 옮기자 무언가가 보였다.
뿌득-
이가 갈렸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행동한 것의 결과물이 앞에 놓여 있었다.
오크와 고블린 병사 열 명의 시체.
어느 날이었다.
마지막 마을과 접촉하러 갔던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던 기사와 병사들에게 기습을 받은 것은.
그들은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우리 병사 열 명을 끌고 갔다.
그 결과가 앞에 있었다.
몸에 무수한 고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채 꼬챙이에 몸을 관통당해 있는 시체들.
저들뿐만이 아니다. 저 요새의 병사들은 그 마을을 괴물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아예 말소해 버렸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죽였다.
단지 우리와 접촉했다는 이유만으로.
케륵과 크룩의 낯빛도 분노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군대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멈춰야 한다.
나는 누군가의 말에 진군을 멈추라 지시했다.
-난 그럼 이만 들어가지.
그룬은 오는 내내 작전에 대해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지금은 적군의 사거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릴 만한 지점을 말해 준 것이다.
“그래.”
난 투구의 면갑을 들어 올렸다.
답답하게 막혀 있던 시야가 탁 트이고 요새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성곽을 따라 병사들이 서 있는 게 보인다.
용안을 발동시키자 시야가 더욱 멀리까지 뻗어 나갔다.
난 본능적으로 성곽에 선 이들 중 가장 강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이를 보았다.
탁-
펜릴의 등에서 뛰어내려 땅을 밟았다.
콰지직-
동시에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 과정이 손발을 움직이듯 매우 자연스러웠다.
‘뇌조.’
꽈르르르르릉!
키루루-
몸을 하늘 높이 띄우면서 뇌조를 불렀다.
뇌조는 내 몸을 감싸며 나를 하늘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온몸에서 전격을 줄기줄기 내뿜으며 난 ‘그 남자’와 같은 높이에서 그를 보았다.
“네가 이곳의 주인인가.”
작게 뇌까리듯 말했으나 내 목소리는 저 멀리까지 대기를 진동시키며 퍼져 나갔다.
“나는 왕국의 검. 단지 이곳을 지키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귀를 울리는 목소리.
답은 역시 그 남자에게서 돌아왔다. 남자가 뽑아 든 검에서 눈부신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폼을 잡는 능력 하나는 일품이군. 겁을 집어먹고 집에서 발발 떨고 있던 개새끼 주제에.”
남자는 내 도발적인 언사에도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그의 주위에 서 있는 이들이 얼굴 가득 분노를 담아서 무어라 소리칠 뿐이었다.
하지만 내 귀에까지 닿는 목소리는 없었다.
“인간이 아니라 괴물을 상대하는데 방법을 가릴 필요가 있는가?”
“이 황야에 와서 보았다. 굶고 보호 받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을. 그들은 모두 우리의 보호 아래 매끼 풍족한 음식을 먹으며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들은 자네 왕국의 백성이 아닌 건가? 만약 우리가 아니라 적이 쳐들어왔다면 그들은 반항조차 못한 채 그대로 쓸려 나갔을 터. 게다가 그대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인간들을 죽이기도 했지.”
마음 같아선 그저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 싶었지만.
나는 미리 준비한 대사를 읊었다.
저들을 넘어, 성 안에 숨어 있는 저 안의 인간들에게까지 들리도록.
“식량으로 쓰려고 기르는 것인가?”
대답은 예상외의 곳에서 들려왔다.
몸에 잿빛의 천을 두른 자.
남자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강한 기운을 가진 사내였다.
마법사인가.
“자신 왕국의 백성들을 죽이고 불태운 이들의 태도치고는 상당히 당당하군. 마지막으로 권유하지. 성문을 열고 벼락 신의 뜻을 받아들여라.”
“괴물들에게 뒤를 대 준 놈들을 가만히 놔둘 필요가 있나? 오늘은 너희 괴물들의 차례다.”
난 더 이상 대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저들은 아무런 죄책감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분노에 새하얗게 질린 손으로 창을 꽉 쥐었다.
목이 꿰뚫린 채로 불타 버린 인간의 시체를 떠올렸다.
모조리 불타 버린 그 마을을 떠올렸다.
꽈르르르릉-
두 번째 전격이 피어오른다.
순식간에 창은 하나의 벼락이 되었다.
“신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천치들아.”
키릭-
몸 속 깊숙한 곳에서 뇌령이 빠르게 돌기 시작한다.
더욱 강한 기운.
강한 전격을 뿜어내며 기운의 흐름을 가속시켰다.
“이것은 신의 말씀이다.”
준비한 대사를 마치며 스킬을 발동시켰다.
[신기]
요새를 둘러싸고 있는 결계를 뚫어야 병사들이 접근할 수 있다.
단순한 물리력이나 보통의 기술로는 뚫기 힘든 게 결계다.
그리고 난 그것을 일격에 뚫을 힘을 가지고 있다.
적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해.
아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압도적인 힘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
황금빛의 용. 그 형상이 희미하게 창 위로 떠오른다.
[뇌룡]
꽈르르르르르르릉-!
용이 앞으로 뻗어져 나간다.
콰가가가각!
용의 주둥이가 결계와 닿으며 불쾌한 소음을 만들어 내었다.
기운을 시작부터 전부 소진할 수는 없으니 상당히 약해진 위력이었다.
만약 전력으로 했으면 부딪히자마자 결계를 깨 버렸겠지.
마법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결계는 연신 푸른빛을 내뿜었지만 난 걱정하지 않았다.
위력은 충분하다.
콰차앙!
푸른 조각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뇌룡은 결계를 깬 후 약간 희미해지긴 했으나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콰아아아아앙-!
그때 그 남자가 빛줄기를 뿜어내는 검을 크게 휘둘렀다.
뇌룡과 남자의 빛줄기가 맞닿았다.
꽈르르릉!
스킬이 파훼되며 그 잔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모두들 부리나케 피했지만 전격은 그들을 순식간에 감전시켰다.
하지만 감정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격화되었다.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 준다는 하찮은 이유 때문에 그런 학살을 저질렀다면.
나도 보여 주리라.
본보기가 무엇인지.
“전 병력.”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가 기운을 타고 퍼져 나간다.
까득- 소리를 내고서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돌격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