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소연은 그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있을 틈은 없다.
그녀는 남자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를 손에 듬뿍 묻혔다.
비릿한 피 냄새와 끈적거리고 더운 액체의 감촉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소연은 피를 잔뜩 묻힌 손을 수레의 바닥에 가져다 대었다.
똑-
검은 빛을 내던 그림. 그곳에 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우웅웅-
그리고 빛이 더 강해졌다.
‘검은 빛’이라는 건 상당히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애초에 검은색과 빛이라는 게 그다지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니까.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핏방울을 계속 떨어트렸다.
“저 끝 쪽인 것 같은데?”
그때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소연은 아예 손을 털어 가면서 피를 계속해서 떨어트렸다.
움찔-
그때 그림이 살짝 떨렸다.
원안에 그려진 육망성. 그리고 복잡하게 새겨진 문자들.
그녀가 원과 육망성을 그린 후에 복잡한 주문을 외우자 자동으로 완성된 그 그림을 보며 떨었다.
울컥-
그곳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검은색의 끈적거리는 부정형의 물체.
그것은 꿈틀거리며 마치 벌레처럼 바닥을 기더니 머리로 추정되는 것을 들어 소연의 손을 보았다.
“저, 저기예요!”
그녀는 행여 자신의 손을 뜯어 먹일까 두려워 황급히 창살에 기대진 남자의 시체를 가리켰다.
그것은 잠시 소연의 손과 남자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남자의 시체로 기어갔다.
콰직-
무언가가 물어뜯기는 소리가 들렸다.
소연은 반대쪽 창살에 기대서 몸을 떨었다.
게임 속에서 한번 본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지금 가상현실에서 직접 마주한 느낌은.
‘무서워.’
두려웠다. 몸이 미친 듯이 떨릴 정도로.
단순히 겉모습이 무섭거나 남자의 시체를 거침없이 씹어 삼키는 모습이 보기 흉하다는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원초적인 공포. 그것이 그녀의 전신을 잠식하고 있었다. 낯선 이의 접근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뭐야?”
천이 확 들어 올려졌다.
애꿎게도 낯선 이는 남자의 시체가 있는 쪽이 아니라 그녀가 등을 기대고 있던 쪽으로 접근한 것이다.
시체가 된 남자가 말했던 ‘게런’이 소연의 등을 보았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의 등 너머로 옮겨졌다.
동료였던 남자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있는 괴물에게로.
“이런 씨발!”
남자는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정신없이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옆구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들고서 그 검은색의 괴물에 칼을 박아 넣었다.
꿀렁.
검은색의 물체는 자신의 몸에 박힌 칼을 보더니 소연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 그것도 제물입니다.”
콰직.
그 말이 끝이었다.
호기롭게 칼을 박아 넣었던 남자의 머리통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괴물의 입 속으로.
콰득. 콰직. 콰직.
뼈가 부셔지고 살이 삼켜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잠시 후 남자 둘의 시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 괴물은 입을 열었다.
[[무엇을 바라는가? 제물이 변변치 않아 큰 소원은 힘들겠지만.]]
웅웅거리는 듯 울려오는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 사람의 정신을 황폐화시키고, 공포에 미쳐 버리게 하는 목소리가 소연을 향했다.
다행스럽게도 소연은 그것을 불러낸 자이므로 별다른 영향은 받지 않았다.
공포가 좀 더 깊어지긴 했지만.
“우, 울타리 밖에 있는 자들. 그들 전부가 제물입니다. 그들을 모두 바친 후에 소원을 빌겠습니다.”
괴물은 잠시 그녀를 응시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스륵-
괴물이 고개를 빼자 천이 다시 내려왔다.
어둡게 변한 창살의 내부에서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뭐, 뭐야!”
“괴물! 괴물이다!”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콰직-
그리고 그것을 베어 무는 괴물의 소리도.
“끄아아아아악!”
고통스러워하는 비명 소리. 누군가의 살이 뜯겨 나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
씹어 삼켜지는 소리. 공포에 질린 비명 소리.
소연은 양손으로 귀를 막았지만 그 소리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흑… 흐흑.”
가끔씩은 누군가의 억눌린 듯한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아마도 다른 노예들이지 않을까.
그녀는 이렇게 겁에 질린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건 게임일 뿐이다. 단순한 게임.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겁이 나는 걸까? 왜 사람을 찔렀을 때 그렇게 손이 떨렸던 걸까?
어째서 그 ‘괴물’을 봤을 때 공포심에 미쳐 버릴 것 같았을까.
소연은 그 무엇 하나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았다.
스륵-
“꺄악-!”
한참 후 천이 들어 올려졌을 때 그녀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턱- 하고 창살에 등을 부딪히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뒤로 물러났을지도 모른다.
[[제물은 모두 받았다.]]
밖이 잠잠하다.
분명히 밖에서 무수히 살육을 하고 왔을 텐데도 괴물의 검은색 동체엔 핏방울 하나 없었다.
두려울 정도로 비현실적인 그 괴물을 보며 그녀는 준비된 대사를 읊었다.
만약 미리 준비하고 있는 대사가 없었다면, 그녀는 반사적으로 ‘살려 달라고’ 빌었을지도 모른다.
“수, 순결한 처녀이자 몇십의 인간을 제물로 바, 바친 그대의 숭배자로서 말합니다.”
그녀는 ‘성녀’로 플레이한 적이 있었다.
그런 그녀를 죽였던 것은 바로 악마 숭배자들. 여러 가지 세력이 있는 대륙에서도 강성하기로 이름 높은 세력이었다.
그때 알아낸 주문이 있었다.
바로 마왕 중 한 명을 불러내는 주문이었다.
“사악하디사악하고, 그 성정은 잔혹하며, 그 잔혹함은 이미 이곳 대지에까지 널리 퍼져 있습니다. 저는 순결한 처녀로서 그대의 신실한 종이 되기를 청하옵니다.”
그녀는 넙죽 엎드리고서 발발 떨었다. 말이 이어질수록 앞에선 괴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도 강해졌으므로.
직접 눈을 마주하고선 도저히 마지막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 아스모데우스시여.”
정적이 흘렀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정적이.
[[고개를 들라.]]
그래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을 때 그녀는 안도감과 공포심을 동시에 느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소스라치게 놀랐다.
소와 인간, 양의 머리를 한 악마.
어느새 제 모습을 드러낸 악마가 여섯 쌍의 눈으로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제법 넉넉한 제물을 받은 바. 너, 초라한 숭배자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악마의 손이 천천히 그녀를 향해 뻗어졌다.
그 손은 나무 창살이 아예 없는 것처럼 쑥 통과해 오더니 그녀의 가슴팍에 닿았다.
치이익-
“끄으읍.”
순간 머리가 하얘질 정도의 고통에 그녀는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입을 틀어막아 가며 비명을 참아 냈다.
악마의 앞에서 더 이상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어찌 될지 몰랐으므로.
소연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아아.”
그녀의 입에서 뜨거운 숨이 뿜어져 나왔다.
몸에서 기이할 정도로 강한 열기가 치솟아 올랐다.
소연은 나무 창살을 그대로 부러트리고서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앞에 천으로 덮여진 수레들이 죽 늘어서 있는 게 보였다.
[신화가 쓰여집니다.]
이로서 몇 단계를 건너뛰어 튜토리얼을 끝내 버렸다.
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그녀는 어두운 눈으로 새롭게 떠오른 메시지와 그 수레들을 바라보았다.
‘제물, 제물을 더 찾아야 해.’
소연은 미처 로그아웃을 떠올리지도 못하고 터벅터벅 걸어갔다.
* * *
“케륵아.”
“예?”
“오늘은 맛있는 것 좀 먹을까?”
“좋습니다. 케륵.”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크룩이 너도.”
-저는 통바베큐 먹고 싶습니다.
펜릴이 넙죽 고개를 들며 말했다.
난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움직이지 마라.”
-네…….
펜릴은 다시 몸을 납작 엎드리며 기대기 편한 자세를 했다.
난 푹신한 털의 감촉을 느끼며 크룩이와 케륵이를 봤다.
“저는 저번에 그 서르롱탕인가 그것도 맛있었습니다! 크룩.”
“서르릉탕 맛있지. 케륵. 거기다 술 마시면! 케르륵.”
케륵이와 크룩이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얘기하다가, 내 눈치를 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술을 마시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케륵. 저는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난 픽 웃었다.
대충 고기 좀 굽고, 설렁탕 좀 만들면 되겠네.
“애들 시켜서 요리 재료 좀 모아 오라고 해. 아, 뼈는 미리 끓이고 있어야지. 케륵이 네가 주술 써서 끓여라.”
“알겠습니다! 케르르.”
보통 방법으로 국물을 내려면 너무 오래 걸린다.
그래서 저번에 방법을 찾다가 케륵이가 국물을 우리는 데 유용한 주술을 쓸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케륵이는 크룩이와 함께 신나는 발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야.”
-예?
“너도 너 먹을 거 잡아 와.”
-알겠습니다!
기죽어 있던 펜릴이 내 말에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난 천천히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폈다.
-바로 갑니까?
“그래.”
펜릴도 이내 밖으로 나갔다.
난 창을 꺼내고 벗어 두었던 갑옷까지 모두 착용했다.
신전의 통로를 걸어가 밖으로 나오니 아래쪽의 풍경이 훤히 보였다.
“많아졌네.”
아래에 병사들이 짓던 막사는 모두 튼튼하게 지어져 있었다.
하지만 내 시선은 그곳이 아니라 그 옆쪽을 향해 있었다.
‘마을 다섯 군데였나.’
인간들의 마을은 처음 봤을 때 보다 몇 배나 넓어져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 근처엔 이곳처럼 아예 자리를 잡은 곳보다 마치 유목민처럼 형성돼 있는 마을이 더 많았다.
그래서 아예 그 마을들을 여기다가 옮겨 버렸다.
뭐, 쉽게 옮기기 힘든 곳은 아예 새로 지어 주었고.
“하암.”
하품을 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시간이 꽤 흘렀다.
그동안은 근처에 있는 인간들을 모두 끌어모으는 데에 주력했다.
전력을 차차 늘려갈 예정이고, 인간들도 그 계획 안에 포함되어 있다.
여의주의 파편을 찾아 그곳에 거점을 세우면 필히 인간들과 충돌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왕국들과 제국. 그리고 다른 이 종족들의 왕국들이 있는 대륙.
앞으로 업 퀘스트가 어떤 쪽으로 진행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아마도 신화를 점점 키워 나가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애초에 그걸 위한 퀘스트니까.
왕. 그리고 황제.
처음부터 대족장이 되는 것까지의 과정을 다 합친 것보다 몇 배나 많은 일을 벌여야 왕이 될 수 있다.
게다가 대족장의 업 퀘스트도 모두 끝내야 하고.
그리고 황제는.
‘감도 안 잡히네.’
너무 멀고도 먼 얘기다.
“후우.”
절로 한숨이 나오는 일이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촌장 불러.”
“아, 알겠습니다!”
내가 멈춘 곳은 바로 인간들이 모여 있는 마을의 앞이었다.
그곳에 경비를 서고 있던 남자에게 말을 걸자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어딘가로 뛰어갔다.
이내 처음 봤던 그 촌장이 다시 이쪽으로 뛰어 왔다.
“천천히 걸어.”
“알겠습니다!”
급하게 뛰는 모습이 불안해 보여 한마디 했더니 이제는 굼벵이처럼 느리게 걷는다.
난 다시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그를 기다렸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촌장은 시간이 꽤 지난 지금까지도 날 대하는 것을 불편해했다.
뭐, 다른 인간들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오늘 저녁 축제를 열 거다. 위치는 신전 앞의 공터. 사람을 보낼 테니 모두 준비하고 있다가 나오도록.”
“알겠습니다!”
촌장은 연신 고개를 숙이다가 돌아갔다.
난 다시 우리 부족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축제 준비를 도와주었다.
몇 가지 물품들은 신화 포인트를 이용해 직접 구입했고, 다른 것들은 미리 상인을 통해 부탁해 뒀다.
마침 그 상인도 늦지 않게 도착했다.
“반갑습니다, 대족장님.”
“켈, 오랜만이군.”
켈은 웃는 낯짝으로 인사를 건넸다. 나도 환하게 웃으며 받아주었고.
“물건들은 저곳에 쌓아 두면 된다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설렁탕과 다른 음식들을 좀 해서 축제를 할 생각인데 자네도 참여하겠나?”
“오! 저야 좋습니다. 이거 다음에 올 땐 물건 좀 더 넉넉히 얹어 드려야겠군요!”
“하하. 이미 많이 얹어 주고 있는 것 같네만?”
켈은 쉬르르- 소리를 내며 웃었다.
“손님께선 저의 VIP 고객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아니, 거의 VVIP 고객이신데요.”
난 웃으며 듣다가 그의 말에 섞인 단어에 흠칫 놀랐다.
VVIP. 참 나와 인연이 깊은 단언데.
“고맙군. 이따 보지.”
“알겠습니다.”
난 물품을 내려놓으려 움직이는 켈을 보며 다시 걸었다.
“서루롱탕!”
상인들이 즐거운 목소리로 흥얼거리는 게 들린다.
슬슬 요리를 해 볼까.
그런 생각으로 걷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급하게 뛰어 오는 게 보였다.
바로 정찰 대장이었다.
난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그를 보았다.
“무슨 일이지?”
난 예를 차리려 하는 그를 멈춰 세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는 자신이 맡은 임무와 이전의 상황을 설명하고서 침을 꿀꺽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그때 갑옷을 찬 인간 병사들이 나타나 우리를 공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