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진소연.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한 유명 게임에서 랭커로서 나름 이름을 날리던 그녀는 어느 날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진소연 님.
‘더 리얼’의 GM입니다.
과거 온라인 게임으로 서비스했었던 ‘리얼’의 가상현실 버전이 ‘더 리얼’이라는 이름으로 개발 중에 있습니다.
현재 개발이 마무리 단계에 있어 오는 7월 20일부터 비공개 클로즈베타 서비스를 실시합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과거 ‘리얼’의 랭커이셨던 진소연 님이 꼭 플레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클로즈베타 플레이 시 소정의 보상을 지급할 예정입니다.
관심이 있으시다면 010-XXXX-XXXX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클로즈베타 테스터 제안을 받은 건 처음이 아니었다.
그녀는 나름 유명한 랭커였으니까. 보통은 시간 관계상 무시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리얼’이라는 이름에 그녀는 쉬이 넘어가지 못했다.
과거 그녀가 유명해지기 전, 학생 때부터 즐겨 하던 게임의 이름이었으니까.
고등학생일 때는 공부 때문에 가상현실 기기는 꿈도 못 꿨었다.
어쩔 수 없이 온라인 게임을 해야 했고, 그렇게 접했던 게 바로 리얼.
가상현실 게임의 범람 속에서 온라인 게임은 소수의 캐쥬얼 게임을 제외하곤 모두 망해 버린 시기였다.
그나마 리얼이 유일하게 MMORPG 장르 중 꾸준히 서비스를 하고 있던 게임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성인이 되면서 ‘리얼’이라는 게임도 서비스가 종료됐다.
그렇게 그녀도 자연스레 그 당시 가장 유명한 가상현실 게임으로 넘어갔다.
그때부터 천천히 게이머로서의 빛을 보기 시작했고, 지금에 와선 자연스레 전업 게이머로서 자리 잡게 됐다.
“그래도 게임성은 꽤 좋았었지.”
이미 기억의 저편에 묻혀 있던 게임이었으나 이름을 보자 새록새록 추억이 떠올랐다.
난이도가 굉장히 높고 하드코어하지만 게임성은 확실한 게임이었다.
단순히 레벨만 높다고 강한 게 아니라 신화를 키워 능력을 얻거나 자체적으로 세력을 일굴 수도 있다.
그녀가 가장 높은 랭킹에 올랐던 건 바로 ‘성녀’로 플레이했었을 때다.
운 좋게 가장 세력이 큰 종교의 중심지에 캐릭이 생성됐었고, 승승장구하면서 랭킹 한 자릿수까지 올랐었다.
그 당시 악마 숭배자에게 결국 패하긴 했었지만.
그녀는 과거 추억들을 떠올리다가 잠시 후 조용히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띠리링-
-안녕하세요.
진소연의 수화기 너머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사실적이네.”
그것이 그녀의 첫 소감이었다.
소연은 불쾌한 현기증에 인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조금 진정이 되었을 때쯤 그녀는 고개를 슬쩍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덜컹-
갑작스러운 진동에 그녀의 엉덩이에 얼얼한 충격이 느껴졌다.
웬 나무로 된 창살 같은 것이 둘러져 있는 수레였다. 그 위엔 천 같은 게 덮여 있는지 바깥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슬쩍 그 천에 손을 뻗어 들어 올려 보려 했다.
쾅!
그때 갑자기 나무 창살을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깜짝 놀라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어서 어떤 남자가 천을 들어 올리고서 쑥 고개를 내밀더니 그녀를 향해 말했다.
“가만히 있어. 상황 파악 안 돼?”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 그녀는 거친 말투에 순간 겁을 집어먹었지만 용기를 내어 물었다.
“지, 지금이 무슨 상황인데요?”
꽝-!
다시 한 번 몽둥이가 창살을 내리쳤다. 이러다 부서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강하게.
“이게 정신이 나갔나. 넌 곧 노예로 팔려 나갈 거라고. 쯧.”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천을 내리고서 사라졌다.
소연은 넋이 나가서 멍하니 창살을 바라보았다.
‘노예상.’
그녀는 이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들어본 적 있다. 노예상에 잡힌 상태로 시작하는 튜토리얼 시나리오다.
최악의 시나리오 중 하나라고 욕을 처먹던 시나리오.
소연은 시선을 내려 자신의 몸을 살펴봤다.
다행히 옷은 초보자들에게 지급되는 보통의 옷이었다.
고증을 살린다고 누더기 같은 것을 걸쳐 놨다면 욕을 한 바가지를 퍼부었을 텐데.
흠이 있다면 바로 그녀의 발에 쇠사슬이 이어진 족쇄가 착용되어 있다는 것.
그녀는 그나마 손은 자유로워서 다행이라는 생각했다.
‘그나저나 엄청 현실적인데.’
소연은 손으로 바닥을 쓸어 보며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그녀는 현재 한참 인기몰이 중인 가상현실 게임의 랭커다.
그 게임도 굉장히 사실적인 감각으로 유명해지긴 했지만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나뭇결이랑 거칠거칠한 감각까지 그대로 살아 있어.’
게다가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맑은 공기 사이사이로 꼬릿한 냄새가 맡아졌다.
아직 게임이 어떻게 전개되는지까진 확인하지 못했지만 우선 이것만으로도 플러스 요소였다.
‘노예상 시나리오만 아니었으면 아주 기분이 좋았을 텐데.’
추억의 게임이 아주 좋은 모습으로 돌아온 건 반길 만한 일이었다.
후속작이 처참하게 망한 사례는 수두룩하니까.
아직 섣불리 판단할 상태는 아니긴 하지만 가상현실 게임에서 ‘현실감’이라는 건 아주 중요한 요소다.
반면에 그것과 별개로 지금 그녀 자신의 상황은 아주 좋지 않았다.
‘난이도로 치면 거의 열 손가락 안에 꼽을 텐데.’
전작 ‘리얼’에서 시나리오는 아주 무수하게 많았다.
가상현실만 아니었을 뿐 게임을 구성하는 데에는 인공지능 시스템이 아주 깊게 개입되어 있었으니까.
거의 몇백, 몇천 개는 되는 유저마다 모두 다른 튜토리얼 시나리오.
하지만 그래도 몇 가지 공통된 시나리오가 있긴 했는데.
그중에서 노예상 시나리오는 자주 언급되곤 했던 시나리오다.
‘내가 노예상 시나리오에 떨어진다면?’
이대로 노예로 팔려 버리면 나가리인데.
무조건 노예로 팔리기 전에 빠져나가야 한다. 만약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노예 계급부터 게임을 플레이해야 한다.
‘그러면 죽어도 상위권에 들 수는 없어.’
그녀는 연락했던 직원에게 들었던 ‘상위권 보너스’를 떠올렸다.
무조건 빠져나가야 한다.
랭커였던 그녀도 깜짝 놀랄 정도로 컸던 선금. 보너스까지 합치면 몇 달은 편히 쉬어도 될 금액이다.
아니면 본래 하던 게임에 현질을 해서 아예 최상위권으로 치고 나갈 수도 있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빠져나가기로 가닥을 잡긴 했지만 답이 바로 턱 하니 나오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쉬운 일이었으면 노예상 시나리오가 빈번히 최악의 시나리오로 꼽히진 않았을 테니.
“후우.”
그녀는 우선 길게 숨을 내뱉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소연은 게임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아까 전 남자의 윽박지름에 알게 모르게 겁을 먹은 상태였다.
곧 냉정함을 회복한 후 그녀는 뒤늦게 시야의 우측 하단에 무언가가 깜빡거리는 걸 발견했다.
[‘인벤토리’를 확인해 주세요.]
[첫 번째 임무]
[노예상의 납치]
[어려운 튜토리얼 난이도에 대한 보상으로 아이템이 지급됩니다.]
“아.”
게임 메시지.
언제 떴었던 모양인데 미처 확인하지 못했었나 보다.
그녀는 슬쩍 창살을 바라본 후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인벤토리.”
곧 그녀의 앞으로 반투명한 창이 펼쳐졌다.
[날카로운 단검]
[빵 × 5]
[식수 × 5]
생각보다 더 단출한 목록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인벤토리에서 슬쩍 단검을 꺼내 보고 난 후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단검.
다른 게임에서라면 초보자용 무기로나 지급될 아이템이다.
하지만 그녀가 아는 전작 그대로라면 이 단검은 결코 허접한 무기 같은 게 아니었다.
‘단검 정도면 급소를 노릴 수도 있어.’
이 게임은 단순히 데미지가 누적된다고 몬스터가 죽지 않는다.
급소를 제대로 노리면 아예 즉사하는 경우도 있고, 아무리 강한 공격이라도 튼튼한 곳에 박히면 제대로 피해를 주지 못한다.
‘지랄 맞은 전투 시스템이긴 했지.’
소연은 나름 하드 게이머로서 리얼에 더욱 빠져들게 된 요소이긴 했지만 반대로 터무니없이 높은 난이도에 학을 떼며 접은 유저들도 많았다.
튜토리얼 몬스터로 나온 늑대를 제대로 잡지 못해 죽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니.
‘문제는 적이 한둘이 아닐 거라는 건데.’
그녀는 눈을 낮게 내리깔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분명히 자신이 생각한 시나리오가 있었다.
결코 처음 게임을 시작한 유저라면 모를 지식을 총동원해서 짰던 시나리오가.
그 당시엔 그저 잠시의 여흥에 불과한 시뮬레이션에 불과했지만.
‘있다.’
지금에 와선 그녀에게 큰 호재가 되었다.
소연은 다시 단검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스윽- 슥.
그녀는 바닥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과거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을 떠올리기 위해.
한참 후. 그녀는 고개를 쳐들며 웃음 지었다.
“됐어.”
저도 모르게 환희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그녀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었어야 할 바닥에는 검은 빛을 내는 그림이 한 가지 떠올라 있었다.
* * *
어둠 속을 내달리던 무리들은 해가 뜰 기미가 보이기 전 미리 숲을 찾아내었다.
낮에는 쉬고, 밤에는 움직이기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미리 쉴 준비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 사내는 한 손에 거친 빵이 담긴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제기랄. 노예 끼니까지 일일이 신경 써야 하다니.”
그는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지금까지는 노예들에게 며칠에만 한 번씩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식량을 던져 줬었다.
하지만 이제 곧 상인을 만날 예정이기에 한참 ‘관리’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꼬박꼬박 끼니를 챙겨 주고 있는 것이다.
더 비싼 값을 받기 위해선 상품의 상태가 좋아 보여야 하니까.
사내는 한참 동안 일일이 천을 들어 올리며 빵을 던져 주었다.
게걸스럽게 빵을 먹어치우는 노예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며 간간히 수레를 걷어찼다.
“이 새끼야! 목 막혀 뒈지니까 천천히 먹어! 때려죽이기 전에!”
혹시라도 어이없는 이유로 상품이 손상되면 자신이 죽기 직전까지 맞을 수도 있다.
그는 쯧 혀를 차며 드디어 마지막 수레 앞에 섰다.
“미친년…….”
그는 수레 안에 있을 여자를 생각하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처음 잡았을 때부터 정상이 아니었다.
완전히 백치가 된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여자.
때려도 별 반응이 없고, 아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여자였다.
혹여 다른 노예에게 해코지라도 당할까 싶어 따로 가둬 둔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여자가 갑자기 오늘은 멀쩡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 온 것이다.
너무나 생생하게 빛나는 그 눈빛이. 어쩐지 더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쯧.”
그는 다시 한 번 혀를 차며 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천을 들어 올리자마자 그녀의 모습에 흠칫 놀랐다.
“너… 뭐, 뭐야?”
그녀의 상의가 거칠게 찢어져 있었다.
그녀는 물기가 어린 눈으로 그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어, 어떤 남자가 갑자기…….”
그러더니 완전히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게 아닌가. 그는 저도 모르게 창살 앞으로 다가갔다.
“뭐? 어떤 새끼야? 폴? 게럴?”
어떤 새끼가 감히 겁도 없이 상품을 건드렸단 말인가.
그것도 이 여자는 머리가 이상해보여서 그렇지, 미색은 꽤나 훌륭한 편이어서 급이 높은 상품이었다.
아마 귀족에게 팔릴지도 모르는 여자였는데.
“오, 옷을 칼로 찢으려고 해서 여기 상처가…….”
그녀는 자신의 가슴팍을 앞으로 내밀며 창살로 다가왔다.
남자는 그녀의 말에 더욱 흥분해서 바짝 고개를 내밀었다.
거칠게 찢어진 옷 사이로 하얀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그는 남자로서 자연스레 눈이 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속으로 이건 단지 흠이 나지 않나 확인하는 것일 뿐이라고 애써 합리화했다.
“흐윽.”
갑자기 여자의 팔이 뻗어 나와 그의 목을 감쌌다.
평상시라면 바로 떼어 낸 후에 몽둥이를 휘둘렀을 테지만 남다른 감촉에 남자는 바로 반응을 하지 못했다.
“커흑.”
그리고 그것이 그가 당한 이유였다.
소름 끼치는 감촉이 그의 목을 파고들었다.
비명이라도 질러 상황을 알리려 했지만 그의 입에 무언가가 콱 박혀 들었다.
바로 그녀가 찢어서 따로 들고 있던 천 쪼가리였다.
그녀는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플레이어.
기본적인 근력 수치는 남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남자는 잠시 버둥거렸지만 여자는 남자의 목을 잡은 채로 놓아주지 않았다.
“후우.”
그녀는 한 번 더 단검을 휘젓고 난 후에야 남자의 몸이 축 늘어짐을 느꼈다.
입을 막긴 했지만 주변에서 소리를 못 들었을 리가 없을 터.
빨리 움직여야 한다.
‘뭐, 뭐지.’
하지만 그녀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 느껴진 감각.
칼이 살을 헤집고, 한 생명이 꺼져 가는 모습이 그녀의 뇌리에 강렬하게 박혀 들었다.
남자가 팔을 휘두르다가 긁은 자신의 팔뚝에선 피가 맺혀 있었다.
아주 작은 상처다.
다른 게임에서라면 아예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작은 상처.
하지만 지금 그 상처에서는 화끈거리는 고통이 올라왔다.
보통의 통각 설정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파.’
가상현실 게임에선 팔이 잘려도 단지 따끔거릴 뿐이다.
그런데 단지 손톱에 긁혔을 뿐인데 이런 고통이라니?
저벅. 저벅.
“저기서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그래? 내가 보고 올게.”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