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무너져 내린 절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충격의 여파에 휩쓸린 이들마저 고통을 뒤로하고 그저 멍하니 그곳을 보았다.
거대한 덩치의 이무기가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붕괴였다.
“족장님…….”
누군가 마치 울먹이듯 애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 족장님을 구해야.”
어떤 이는 앞에 상대하던 적마저 잊고 돌무더기 쪽으로 가려 했다.
푸욱!
물론 적들은 그들을 보내지 않았다.
제 주인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 등을 돌린 이들을 공격했다.
“크라아아아아!”
그렇기에 벼락 부족의 병사들은 그 애통함을, 분노를 눈앞의 적에게로 다시 돌렸다.
그 어느 때보다 더 거칠게 날뛰기 시작했다.
케륵은 절벽 위에 서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대족장이 죽었다.
그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정신 차려!”
그때 누군가가 케륵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멍하니 고개를 들어보니 그의 앞에 분노한 표정의 크룩이 보였다.
“크르룩! 대족장님은! 이렇게 죽을 분이 아니다! 아래로 내려가서 도와드려야 돼!”
크룩은 잔뜩 흥분한 외조로 그리 외쳤다. 케륵은 떨리는 눈빛으로 그에게 말했다.
“어떻게?”
“뭐라고?”
“케르륵. 뭘 어떻게 하자고 하는 거지?”
저 돌무더기를 치우자고? 지금 바로? 케륵이 생각하기에 그건 무리였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선 병력을 지휘해서 전투를 끝내는 거야. 케르를. 아래로 내려가자.”
“크루룩! 그럼 저 돌무더기를 그대로 두자는 거냐?”
오크는 말을 한마디, 한마디 씹어 뱉듯이 그렇게 쏘아붙였다.
케륵은 그것을 보며 생각했다.
언제부터 크룩은 대족장을 이리 크게 생각했던 걸까?
그리고.
‘나는 언제부터 그랬던 걸까.’
벼락 부족이 고블린들만의 부족이었을 때.
자신이 아직 족장의 부하로 있었던 시절. 전 족장이 죽었을 땐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었다.
그저 죽었구나. 하는 정도.
반면에 지금 느끼는 이 허무함은? 절망감은? 도대체 무엇일까.
케륵은 알 수 없었다.
쿠궁-!
둘의 대화가 더욱 거칠어지려 할 때 갑자기 굉음이 울려왔다.
케륵과 크룩은 말다툼을 하던 걸 잊고서 바로 고개를 돌렸다.
쿠구궁-!
무너져 내린 바위더미가 들썩이고 있다.
그 둘의 머릿속에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감이 그들의 마음속에 자라났다.
쿵! 쿵!
점점 진동은 거세지고, 쌓여 있는 바위들이 옆으로 떨어져 내린다.
무언가가 그 안에서 튀어나오려 하고 있다.
쿠화아아악-!
그리고 곧 커다란 바위들이 사방으로 흩날리며 안에서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슈르르으-
긴 혀를 날름거리며 몸 곳곳이 찢기고 파인 이무기.
이제는 흰색이라고 볼 수도 없을 정도로 더러워진 그 몸체로 잔해를 뚫고 나타났다.
볼품없는 모습이었으나. 그는 살아 있었다.
-제 주제를 모르는 필멸자들아.
모두들 다시 한 번 놀라 이무기를 올려다봤고, 그의 입에 무언가가 물려 있는 걸 발견했다.
긴 창을 쥐고 있는 인영을.
-이것이 알량한 재주만 믿고 날뛴 자의 최후다.
꿀꺽-
이무기의 입이 쩍 벌어졌다가 그대로 입가에 물고 있던 것을 삼켜 버렸다.
그것의 정체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 상황을 보고 있던 크룩의 눈동자가 붉게 변했다.
치이이익-
그의 몸에서 옅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직접 자신에게 광폭화를 건 오크가 절벽을 향해 뛰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나는 재주가 없을 터인 오크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꾸웅!
마지막 발자국이 절벽의 모서리에 닿는 순간 거대한 울림이 퍼졌다.
크룩의 몸이 하늘로 떠올랐다.
그는 등에 매고 있던 도끼 두 자루를 뽑아 들었다.
증오스러운 적에게로 날아들면서.
“벼락 신이시여!”
쿠궁-!
“제게 힘을 주소서!”
그의 온몸에서 찬란한 빛이 퍼져 나왔다.
“크라아아아아악-!”
그저 작은 오크의 외침이, 나중엔 사방천지를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커졌다.
그의 팔과 다리는 아름드리나무만큼 거대해졌고, 그의 몸통은 작은 언덕만큼이나 커졌다.
슈르르으으-!
이무기의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상처 입은 흰 뱀은 급히 기운을 끌어올렸다.
-이 미친 돼지 새끼가!
광폭화와 거대화 권능을 쓴 분노한 오크가 이무기에게로 떨어져 내렸다.
이무기의 힘에 땅이 치솟아 오크의 앞을 가로막았고.
쿠웅-!
크룩은 거침없이 도끼를 휘둘러 흙기둥에 도끼를 박아 넣었다가 그 반동으로 다시 이무기에게 몸을 날렸다.
이무기는 샤악 거리는 소리를 내며 입을 쩍 벌렸다.
크룩의 거대한 도끼가 이무기에게 짓쳐 들었다.
이무기는 자신의 몸 일부를 경화시켜 도끼를 막아서며 동시에 오크의 목덜미를 노렸다.
꽈앙-!
하지만 크룩의 공격이 이무기의 몸에 박히자마자 흰 뱀은 뒤로 튕겨나갔다.
이무기가 오크의 공격에 깃든 막대한 힘을 무시한 까닭이었다.
쿠웅-! 쿵!
크룩은 지체하지 않고 뱀에게로 달려들었다.
정신을 차리기 전에 놈의 대가리를 쪼개어 놓을 요량으로.
하지만 이무기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푸욱-!
부지불식간에 뱀이 기대어 있던 절벽에서 뾰족한 송곳이 튀어 나왔다.
단단한 바위로 만들어진 송곳에 오크의 쇄골 어림이 꿰뚫렸다.
콰직!
크룩은 반대 손에 들린 도끼로 돌송곳을 부수어 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뱀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이번엔 그의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콰드득-!
오크의 발을 타고 오르는 대지의 족쇄. 이미 대족장을 상대로 썼었던 힘이다.
“크아아아아아아-!”
크룩은 힘을 주어 금세 그것에서 빠져 나왔지만 이미 뱀의 아가리가 그의 목덜미에 가까워져 있었다.
-끄아아아아악-!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로 이무기의 것이었다.
거대한 도마뱀이 이무기의 몸통을 꽉 깨물고 주둥이를 거칠게 흔들고 있었다.
“케르르르-! 이놈을 붙잡아!”
도마뱀의 몸통 위. 케륵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크룩은 자신을 묶었던 족쇄에서 벗어나자마자 이무기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바로 이무기의 대가리 바로 밑을 손으로 꽉 누르고, 나머지 한 손으로도 몸을 바닥에 짓눌러 꽉 고정시켰다.
콰드드득!
이무기는 자신을 억죄는 단단한 손아귀에 위기를 느끼고 자신의 몸통 대부분을 경화시켰다.
경화를 시전하는 건 생각보다 막대한 힘이 든다.
이무기로서도 전신을 경화시키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어서 부분적으로만 사용하고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다.
“케르르르르르-”.
그리고 놈이 경화를 사용하리란 건 케륵과 크룩도 이미 예측하고 있던 바였다.
그렇지 않았으면 애초에 놈을 붙잡기보다 처음부터 반으로 쪼개 놨었을 테니.
콰지지지지지직-!
뒤로 물러난 도마뱀의 입에 강대한 기운이 모여 들었다.
크룩에게까지 피해가 가지 않으려면 최대한 압축해야 한다.
케륵은 땀을 뻘뻘 흘리며 주술을 이어갔다.
크룩은 그 와중에도 놈이 경화를 풀고 공격해 오지 않도록 계속해서 무릎으로 이무기의 몸을 내려찍었다.
콰르르르르르릉-!
그리고 곧 케륵의 주술이 완성되었을 때.
세상이 한 번, 하얗게 번쩍였다.
“끄으으으.”
크룩은 침을 흘리며 몸을 벌벌 떨었다.
그는 이무기의 몸통과 머리 일부분이 날아간 걸 확인하며 뒤로 주저앉았다.
쿠웅-.
케륵이 소환한 도마뱀이 다시 뼈 무더기로 돌아갔다가, 아예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더 이상 도마뱀을 소환할 수는 없으리라.
그리고 크룩의 몸도 점차 줄어들었다.
“끄륵. 끄르르르.”
오크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어깻죽지를 바라보았다.
오른쪽 팔이 송두리째 날아가 있었다.
케륵은 빠르게 뛰어와 포션을 그의 어깨에 들이부었다.
치이이익-!
“크아아아악-!”
크룩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통에 케륵은 겨우 포션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그의 상처 부위에 떨어트릴 수 있었다.
“후우.”
이무기가 죽었다.
비록 크룩의 팔 한쪽을 내주었지만, 결국 이겨 낸 것이다.
케륵과 크룩은 그렇기에 눈물을 흘렸다.
적은 죽어도 대족장이 죽었다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뼈아픈 승리였다.
고작 자그마한 승리의 조각을 거머쥔 패배나 마찬가지였다.
끄아아아악-!
그때 후방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케륵과 크룩은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무기가 불러왔던 병사들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사, 살려 줘!”
누군가 외친다.
그것은……. 이지를 잃은 병사들의 외침이었다.
팔이 잘려 나가고, 목이 찔리는 와중에도 아무런 말도 안 하고 묵묵히 싸우던 병사의 외침.
그리고 순식간에 놈들의 몸이 바짝 말라 간다.
“케르를?”
그들을 상대하던 병사들이 당황하여 그것을 지켜보았다.
어찌할 줄 모르고 그들을 향해 창을, 검을 내질렀지만 그들의 상태는 변함이 없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미라처럼 바싹 말라 버렸고, 이내 흰색의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리고 그 가루들이 크룩과 케륵이 있는 쪽으로 날아갔다.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새하얀 가루들은 무리를 이뤄 이동했고.
슈우우우욱-
곧 이무기의 주둥이를 향해 모여들었다.
가루들에 밀려 이무기의 주둥이가 쩍 벌어진다.
그리고 곧 그것들은 구의 형태를 이뤄 단단히 응집했다.
우웅-!
모두 그 순간 느꼈다.
슈르르르-
아직 끝이 난 게 아님을.
이무기의 몸이 빛나며 휑하니 뚫려 있던 그의 몸통이 다시 채워지기 시작했다.
케륵도, 크룩도. 어찌 막을 겨를도 없이 그걸 지켜봐야 했다.
이무기의 몸이 하얗게 빛난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유유히 허공에 뜬 이무기는 지상의 것들을 오연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한때 지룡(地龍)이라 불렸던 이무기를 아는가?
그의 목소리가 모두의 머릿속에 전달됐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느꼈다. 저 괴물의 존재감이 터무니없이 커진 것을.
뱀의 주둥이에 물린 구슬이 찬란히 빛난다.
-용이되, 이젠 용이 아니게 된 분노를 너희들은 아는가?
드드드드드-
또다시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절벽 위에 서 있던 이들도, 절벽 아래에 있는 이들도 모두 그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시선에 닿는 모든 땅이 불길하게 떨린다.
-하찮은 필멸자들에 의해 또 깊은 잠에 빠져야 하는 내 분노를 아는가?
무덤덤하게 말하던 그의 말에 분노가 담기기 시작했다.
대지가 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서 있는 땅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다들 급하게 나무라도 붙잡았지만, 이번엔 그 나무마저 기울어 땅에 쓰러진다.
나무가 뿌리내린 땅 자체가 붕괴되기 시작했으므로.
-나와 함께 이곳에 잠들 수 있는 영광을 주도록 하지.
대지는 계속해서 무너져 내렸고, 그 위에 제대로 서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용의 분노는 모두를 생매장시킨 후에야 잠잠해질 터였다.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죽는다.
그런 생각이 모두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땅이 잠잠해졌다. 모두들 어리둥절해 하늘을 올려다봤다.
-크윽!
용이 신음을 흘리고 있다. 그는 무언가 불편한지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크아아아아악!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는 몰라도, 놈은 아예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몸부림쳤다.
게다가 어찌나 몸이 떨리는지 땅이 아니라 그의 몸에 지진이 난 것 같았다.
비명 소리가 너무 커 모두의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리고 곧 하늘에 떠 있는 용의 몸 한 부분이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콰아아아아악-!
그리고 다음 순간, 그곳에서 벼락이 튀어나왔다.
찬란한 황금빛이 용이 뿜어내는 흰색의 빛을 밀어냈다.
“안 어울리게 무슨 용 흉내야?”
구원자이자 벼락 신의 징벌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