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이쪽 근방인 것 같습니다.”
“그래?”
난 지도와 앞의 산을 번갈아 보았다.
“예, 바람의 말에 의하면 가운데가 움푹 파인 지형이라더군요. 그 내부는 이상하게 보이지 않다는 것 같지만.”
난 펜릴의 위에 올라탄 상태로 옆의 바닥에 서 있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바람의 정령을 다루는 트롤.
내가 이번 탐색에 데려온 건 케륵과 크룩이 아닌 그녀였다.
“흐음.”
지도에 표시된 ‘성산’ 그중에서도 나는 내가 들어갔던 동굴을 찾고 있다.
본래는 케륵이나 크룩 둘 중 하나를 데리고 오려 했지만.
‘바람의 정령.’
고민을 하던 중 문득 트롤 정령사인 이렌이 생각났다.
바람의 정령은 게임에서도 탐색에 많이 쓰였다.
정령사 자체가 희귀해 실제로 본 적은 거의 없지만.
들은 바로는 마법사보다 효율이 훨씬 좋다고 했다. 범위도 넓은 데다가 힘도 별로 안 드니.
“그럼 이곳 근처로 동굴이 있나 한번 물어보게.”
“알겠습니다.”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손짓을 하자 그녀 앞에 바람이 모여들었는데 그녀는 그곳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휘이이-
이내 초록빛의 바람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선물이라.’
나는 탐험대나 그녀의 정령의 소식을 기다리며 다시 펜릴의 등에 드러누웠다.
‘뭘까.’
현재 마경 외곽 일대는 통합이 진행 중이다.
안쪽으로는 마경의 심부와 맞닿아 있고 바깥으로는 그 뱀이 있는 지역 직전까지 점령한 상태.
심부로 향하든 마경의 바깥으로 진출하든 결정을 해야 한다.
그리고 결정을 내리려면 우선 뱀을 잡아야 하고.
‘골치 아프네.’
고민해야 될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케륵과 크룩이랑도 회의를 할 거긴 하지만.
‘우선 전력부터 강화해야겠지.’
가장 선결해야 할 과제에 집중하기로 했다.
처음 뱀에 대해 그저 ‘크다’는 생각밖에 없었지만 이렌에게 들은 정보에 의하면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 뱀은 단순히 덩치만 큰 게 아니었다.
간단한 주술을 부릴 줄 알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힘까지 쓴다고 했다.
심지어 지금 싸우면 우리 부족이라도 무조건 피해가 클 것이라고 했었으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 크룩! 저희가 여지껏 잡은 괴수가 몇인데!’
물론 그 말을 듣자마자 크룩은 분노했었지만 말이다.
‘저희 부족도 일반적인 괴수는 몇 번이나 상대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뱀은 차원이 다릅니다.’
이렌도 맞받아쳤었고.
여튼 그녀에게 그런 말을 들은 이상 결코 다른 괴수들과 동일 선상에 두고 생각할 순 없었다.
심지어 펜릴도 그 뱀은 꽤 강하다고 했으니.
‘선물이라는 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군.’
일부러 찾아오라고 전언까지 할 정도였으니 보통의 물건은 아니지 않을까.
“찾았습니다!”
그때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몸을 벌떡 일으키니 저 멀리서 고블린이 뛰어오고 있었다.
“우선 숨은 고르고 말하게.”
숨을 크게 헐떡이는 고블린을 보며 난 우선 그를 진정시켰다.
그는 천천히 숨을 고르더니 곧 말을 이었다.
“족장님이 말하신 것과 같은 흡사한 동굴을 발견했습니다. 몇몇 정찰대원은 쭉 안으로 향했고, 저는 보고를 위해 따로 왔습니다.”
“훌륭하구나. 한번 가 보지.”
난 그의 말에 바로 웃음을 지으며 펜릴을 발로 찼다.
“가자.”
-…네.
“목소리가 작다?”
-시정하겠습니다!
펜릴은 여전히 반성 모드다. 어딜 감히 기절해 있다고 욕을 해?
생각난 김에 한 대 더 쥐어박을까 하다가 그냥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동!”
“예!”
이렌과 그녀를 감시하고 있던 오크들도 짐을 챙겨 걷기 시작했다.
“아니야. 너도 잘했어.”
그 와중에 이렌은 어느새 돌아온 바람의 정령을 달래고 있다.
피식 웃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도 지나간 적이 있는 것 같네.’
점점 목적지와 가까워져서 그런지 풍경이 익숙해 보였다.
‘느낌은 많이 다르지만.’
능력도, 힘도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헤맸던 곳이라 그런 걸까.
펜릴의 등 위에 올라타 부족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움직이고 있으니 전혀 다른 장소처럼 보였다.
‘힘이라.’
주먹을 꽉 쥐니 새파란 전격이 튀어 오른다.
고작 며칠 전 기운이 고갈되어 고생했었는데.
지금은 아예 없었던 일만 같다.
“흐음.”
왠지 감상적이게 되는 기분을 떨쳐내고서 앞을 보았다.
얼마간 이동하다 보니 저 앞에 고블린 한 마리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여깁니다!”
그는 우리가 지나치기라도 할까 봐 펄쩍 펄쩍 뛰어가며 손을 흔들었다.
가까이 다가간 나는 고블린의 옆에 동굴의 입구를 볼 수 있었다.
“맞는 것… 같군.”
제대로 찾은 것 같다. 기억 속과 완전히 똑같은 모습이다.
“읏차.”
난 펜릴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너희 둘. 그리고 이렌. 그리고 너.”
난 오크 둘과 이렌, 그리고 고블린 정찰대원 한 명을 가리켰다.
“이렇게만 안으로 들어간다. 나머지 인원은 펜릴과 함께 바깥에서 대기하도록. 오래 걸릴 수도 있으니 짐도 내려놓고 있고.”
“알겠습니다! 크루룩.”
-예!
나머지 오크 들이 짐을 내려놓고 자리를 잡는 걸 확인하고 나서 발을 떼었다.
“그럼 가지.”
“예!”
우리는 동굴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이렌은 정령을 이용해 먼저 내부를 정찰하도록.”
“알겠습니다.”
미리 정찰대원들이 앞서갔겠지만 일부러 이렌에게 명령을 내렸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리고 겸사겸사 이렌의 능력을 관찰할 수도 있고.
다행히 동굴 안을 걷는 동안엔 별일이 없었다.
“가장 안쪽까지 들어갔었는데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네요. 알 수 없는 기운이 감싸여 있어서요.”
“그렇군.”
알 수 없는 기운이라. 그렇다면 고블린들은 어디 있는 걸까.
우선 직접 봐야 뭐라도 알 수 있을 것 같기에 최대한 부지런히 걸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도 끝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저 앞에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다.
나는 약간 긴장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스윽-
“아…….”
이렌이 말한 알 수 없는 기운이란 게 무엇인지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발걸음을 밖으로 내딛는 순간 전신을 훑는 감각이 느껴졌다.
기운이 살짝 들떴다가 가라앉았다.
‘무슨 원리지?’
이곳도 본래 벼락 신의 영역. ‘벼락’이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결계인가?
짧은 고민이 끝난 후 곧 앞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대로네.’
이미 한참 전에 멸망한 듯한 폐허. 그때 본 그대로였다.
‘뭘 기대했던 걸까.’
왠지 모를 허무함을 느끼며 발을 뗐다.
아니, 떼려고 했다.
“조, 족장님!”
“응?”
뒤를 돌아보니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렌과 오크들이 보였다.
“왜 그래?”
“저 안 지나가져요!”
“뭐? 너네들도 그래?”
“크루룩, 저희는 아닙니다.”
그녀 옆에 있는 오크 중 한 명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내가 다시 이렌을 쳐다보니 그녀는 허공에 손을 짚었다.
“웬 벽 같은 게…….”
난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이 스윽 딸려 왔다.
그녀는 예상하지 못한 듯 앞으로 휘청거렸다.
“괜찮나?”
“예, 죄송합니다.”
“아니야.”
나와 부족원들은 출입에 제한이 없는 걸로 보였다.
그런 걸 보면 결계가 있는 게 확실한 것 같다.
하긴 이런 지형인데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장치 하나 없는 게 더 이상하지.
그게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건 좀 신기하지만.
“우선 안으로 가 보지.”
“예!”
난 천천히 걸어가며 탐색 스킬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앞서 지나간 정찰대원들의 발자국이 드러났다.
‘안쪽으로 걸어갔구나.’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흔적을 따라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계속 따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난 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족장님!”
주변을 탐색하며 나아가고 있던 고블린 중 하나가 나를 보고 예를 취했다.
난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아 주고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무언가 발견한 게 있나?”
“우선 최대한 주변을 탐색하면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족장님이 말하셨던 탑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
난 그들의 말을 들으며 내가 지나쳤던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탑이… 없구나.’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
도시의 중앙에 있던 탑이 없다.
“우리는 이쪽 방향으로 우선 쭉 가 보지. 너희들은 우선 따로 움직이며 혹시 특이 사항이 없나 확인하고.”
“알겠습니다!”
어차피 모든 인원이 한꺼번에 움직일 필요는 없었기에 따로 나뉘어 움직였다.
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탑의 위치를 더듬으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난 곧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탑의 흔적을.
처음엔 바로 알아보기 힘들었다. 주변에 워낙 부서져 내린 건물이 많았기에.
하지만 전체적인 모습을 유추해 보니 이 정도 높이였을 건물은 하나밖에 없었다.
‘공성 무기 같은 거에 얻어맞은 건가?’
아니면 거대한 괴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부서져 있다.
아마 탑이 여러 개 있었다면 뭐가 뭔지 아예 구분하지 못했을 거다.
난 잔해를 밟고서 올라갔다.
“족장님!”
쿠웅-
갑자기 땅이 울린다.
“무언가가 느껴집니다!”
후우우우웅-
이렌의 주변으로 바람이 거칠게 몰아친다.
“물러나세요!”
후욱!
초록빛의 바람이 나를 뒤로 떠밀었다.
막아설 수도 있었지만 난 일부러 그 힘에 몸을 맡겼다.
그녀가 아무 이유 없이 그러는 건 아닌 것 같고.
딱히 해를 입히려는 기색도 없었기에.
쿠웅!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울리는 땅.
나는 그제야 느꼈다.
우웅웅웅-
탑의 잔해 밑에서 터져 나오는 기운을.
콰아앙-!
무언가가 잔해를 뚫고 치솟았다.
난 기운을 끌어올리며 오크들과 이렌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조심해!”
그리고 그대로 그들을 붙잡고 저 멀리 던져 버렸다.
“크루라아아악!”
다행히 이렌은 내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바람을 이용해 그들의 몸을 감쌌다.
난 그들이 안전하게 떨어지는 걸 보며 바로 옆으로 몸을 날렸다.
꽈아앙-!
아슬아슬하게 내 옆을 커다란 주먹이 스쳐 지나간다.
“큭!”
돌의 파편이 몸 곳곳을 스치고 지나갔다.
난 고개를 들어 놈을 노려보았다.
“골렘!”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인조 생명체를.
‘왜?’
가장 먼저 든 의문은 그것이다.
하필 왜 이곳에 골렘이 있는 걸까?
꽝-!
다시 한 번 주먹이 내리꽂힌다. 난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콰지지직-!
그리고 그대로 기운을 끌어올려 놈에게 내리쳤다.
파직-!
벼락을 얻어맞은 골렘의 어깨 부위에 새까만 그을음이 생겼다.
우웅-.
하지만 녀석은 잠깐 비틀거릴 뿐 곧 다시 나를 공격해 왔다.
‘벼락이 잘 안 먹혀.’
놈의 몸체를 이루고 있는 거친 바윗덩이들을 보며 느꼈던 불안감.
‘돌에 벼락이 잘 통할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얻었다.
콰앙!
“와 씨발!”
안 통하네. 이게 안 되네!
파직!
파지직!
연달아 쏘아 낸 벼락이 놈의 몸을 뒤로 밀어낸다.
하지만 문제는 놈은 별 데미지가 없다는 듯 다시 나에게 달려든다는 거였다.
‘원래 속성 같은 게 있긴 하지.’
지금까지는 크게 느낄 일이 없었던 정보다.
어디까지나 살아 있는 생물체들을 대상으로 힘을 써 왔었으니까.
‘핵을 공격해야 하는데.’
녀석은 아예 바윗덩이로 이루어진 몸이다.
가죽이 두꺼운 놈들이더라도 상처를 내거나 약점을 노리고 벼락을 쏘아 내면 됐는데, 이놈은 그것도 안 통한다.
“제기랄.”
물리력이 부족하다. 제대로 공격을 가하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놈의 공격이 너무 위협적이니 그것도 힘들다.
까앙-!
인벤토리에서 꺼내 든 몽둥이를 들고 놈을 내리쳤다.
그러나 이번에도 놈의 움직임을 잠시 저지하는 데에 그쳤다.
“바람이여!”
그때 이렌의 목소리가 들렸다.
후우우우웅-
빠르게 내 곁을 스쳐 가는 바람. 그것은 순식간에 골렘의 몸을 에워쌌다.
“가슴의 정중앙이에요!”
“뭐라고?”
“정중앙! 그곳에 핵이 있어요!”
난 멈칫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시간이 얼마 없어요!”
하지만 그녀에게 뭐라 물을 틈도 없이 다시 골렘을 봐야 했다.
끼기기긱-
골렘의 관절 부위에 초록빛의 기운들이 넘실거리고 있다.
아마도 정령의 힘으로 움직임을 억제하고 있는 듯했다.
난 곧바로 기운을 끌어모았다. 최대한으로 힘을 끌어모아 방망이에 집중시켰다.
본래 방망이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푸른 전격이 날카롭게 빗어졌다.
“어, 얼마 못 버틸 것 같아요!”
이렌의 다급한 목소리.
난 다급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기운을 운용하는 것에 집중했다.
전신에 흩어진 기운을 발과 팔로 모은다.
앞으로 쓸 스킬의 위력을 더욱 증폭시키기 위해.
파아앗-!
골렘의 몸을 억죄고 있던 초록빛의 기운이 흩어진다.
그리고 놈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뇌룡 질주!”
때마침 나도 준비를 끝냈다.
한 줄기 벼락이 되어 놈의 가슴팍에 끌어모은 기운을 꽂아 넣었다.
꽈아아아앙-!
거친 폭음과 순간적으로 근방이 새하얗게 물든다.
바닥에 착지해 숨을 몰아쉬며 난 허공을 노려보았다.
시야를 가린 먼지바람이 걷히길 기다리면서.
‘됐나……?’
파직-!
그때 전방에서 푸른 전격이 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