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주술사라. 흥미가 돋았다.
“어째서 주술사가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던 거지?”
“그게… 그자는 자신이 이곳의 트롤들과 같은 부족이 아니라더군요. 억지로 납치되어 일을 하던 것뿐이랍니다. 케륵.”
“흐음.”
있을 법한 일이었다.
주술사는 그만큼 고급 인력이니까.
“직접 만나 보고 싶군. 지금 데려올 수 있나?”
“알겠습니다.”
케륵이 명령하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블린이 어딘가로 달려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커다란 덩치의 트롤이 나타났다.
캬르르르-
마치 맹수의 울음과 같은 울음소리. 그다음 거친 목소리가 이어졌다.
“바람 부족의 대족장님께 예를 표합니다.”
그자는 포승줄에 묶인 채로 내게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다.
“좀 더 가까이 오라.”
“예.”
트롤은 고블린의 인도를 따라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난 트롤을 찬찬히 살펴봤다.
‘여자 트롤이군.’
고블린이나 오크는 남자와 여자 개체의 차이를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반면에 트롤은 키가 굉장히 크고, 골격도 살짝 달랐지만 전체적으로 모습이 인간과 비슷한 편이었다.
날카롭게 솟은 귀와 톱니처럼 나 있는 이 때문에 완전히 닮지는 않았지만.
“원래 바람 부족원이 아니었다고?”
“그렇습니다. 저는 명예로운 풀잎 부족의 일원입니다. 비록 강제로 잡혀 이곳으로 끌려왔지만 결코 바람 부족의 야만적인 행위에 동참한 적은 없습니다.”
마치 서양인과 같이 상체와 골반이 발달한 몸이다.
굉장히 발달한 몸은 잘 짜여진 조각과도 닮아 보였다.
‘유달리 특이한 편이군.’
일반적인 트롤들이 인간들과 비슷했다면, 이자는 인간과 아주 닮아 있었다.
보통 트롤들은 어금니가 상당히 발달해 입 밖으로 크게 돌출되어 있다.
게다가 얼굴형이나 전체적인 모습이 인간과는 유리되는 특징들이 있다.
반면에 그녀는 이목구비도 인간과 상당히 흡사했다.
푸른빛이 도는 피부색과 톱니같이 날카로운 이만 빼면 인간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게임을 플레이하면서도 이런 외형의 트롤을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딱-
톱니 같은 이가 맞물리는 소리를 들으며 상념에서 깼다.
난 그녀를 보며 물었다.
“이곳에서 주술사 역할을 한 이유가 뭐지?”
“저는 주술사 같은 게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저를 주술사라 추대하며 부려먹은 것뿐. 저는 위대하신 어머니 자연의 딸. 그저 그분의 힘을 빌릴 방법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건 무슨 힘이지?”
그녀는 나에게 직접 보여 주어도 되냐고 물었다.
난 해를 끼치지만 않으면 상관없다고 말하며 허락해 주었다.
다만 허튼짓을 하면 바로 목을 날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럼…….”
그녀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채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청량한 공기가 어딘가에서 불어오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주로 사용하는 기운과도 케륵이 주술을 쓸 때와도 다른 힘이었다.
그 바람은 그녀의 앞으로 뭉치더니 곧 어떤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
난 그걸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정령?”
소용돌이치듯 빙글빙글 도는 초록색의 기운이 그녀의 앞에 있었다.
“저희는 그저 바람이라 부릅니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하지만 종종 다른 부족 사람들이 정령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긴 했습니다.”
정령은 자유롭게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때마다 청량한 공기가 훅 끼쳐 왔다.
게임의 그래픽으로 봤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자연의 일부를 뚝 떼어다가 빚어 놓은 느낌.
정령의 존재에 한 번 놀라고, 트롤이 정령을 다룬다는 것에 한 번 더 놀랐다.
“그대의 부족은 전부 정령을 다룰 수 있는 건가?”
“아닙니다. 어머니와 좀 더 가까운 이들만이 힘을 빌릴 수 있습니다.”
“부족원이 총 몇이지?”
연신 담담하게 대답을 하고 있던 그녀는 내 마지막 질문에 어두운 낯빛을 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제는 저 하나뿐입니다.”
그저 포로일 뿐인 그녀의 말이었지만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 말을 고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그녀도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는지 조금 늦게 입을 열었다.
“본래 저희 부족의 수는 많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듣지 못했지만 한 번 멸족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서 소수만이 남았다 했습니다. 그래서 타 부족과의 접촉을 거의 하지 않고서 숲의 깊은 곳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케륵과 크룩 또한 그녀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는 몇 번 입을 떠듬거리다가 캬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목을 가다듬고서 이어 말했다.
“커다란 뱀. 하얀색의 커다란 뱀이 얼마 전 부족을 습격했습니다. 전력을 기울여 그놈을 숲의 바깥쪽으로 쫓아내는 데엔 성공했지만… 그때 저희 부족도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하얀 뱀이라. 바로 떠오르는 게 있었지만 난 우선 그녀의 말을 계속 들었다.
“안 그래도 번식을 하기 힘든 저희 종족의 특성상 다른 수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저희도 동족을 찾아 헤맸었습니다. 그러다 바람 부족과 조우하게 됐고, 놈들은 정령을 다루는 저를 제외한 다른 부족원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녀의 말은 마지막에 가선 거의 씹어 내뱉는 듯했다.
그녀의 바람 부족에 대한 증오심이 강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난 ‘하얀색의 커다란 뱀’이라는 표현에 쉽게 그것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설마 내가 아는 그놈을 말하는 걸까?
“힘들었겠군.”
“아닙니다. 지금은 모든 뜻을 이루었으니까요.”
캬르르-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이 미소 지었다.
“제 뜻대로 놈들은 불나방처럼 당신들에게 달려들어 결국 전부 죽지 않았습니까. 족장의 옆에 붙어 신뢰를 얻은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기쁘다는 듯이 입가를 쫙 벌려 웃었다.
입 안의 톱니 같은 이가 더욱 돋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족장을 부추겼노라 말했다.
노예들을 전투에 동원하면 뒤를 칠 염려가 있다 말하며 데려가지 말라했고.
부족 안에 숨어 적들을 기다리는 것은 겁쟁이나 하는 짓이라고 말해 족장을 부추겼다고 했다.
“족장은 왜 너의 말을 들은 거지?”
“제가 워낙 미인이니까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렇군.”
“예. 그러니 저를 부족원으로 받아 주십시오.”
이건 또 뭔 맥락 없는 흐름이지.
정령을 다루는 것을 보고 이미 탐나는 인재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녀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당당한 태도였다.
“어차피 돌아갈 곳은 없습니다. 다른 트롤들과 같이 있고 싶은 마음도 없고요. 제 힘이라면 족장님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녀의 진지한 표정에 고민이 들었다.
하지만 당장 결정할 문제는 아니기에 우선 그녀를 돌려보냈다.
“이상한 트롤입니다. 케륵.”
“저런 트롤은 처음 봅니다. 크룩.”
케륵과 크룩도 그녀가 떠나자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 혼자 그렇게 느낀 건 아닌가 보다.
“그녀가 말한 하얀 뱀이 아마 그걸 말하는 거겠지?”
“그런 것 같습니다. 케륵. 족장님께 들은 것 말고는 그런 소문을 접한 적도, 따로 본 적도 없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크룩.”
저번에 복귀했을 때 이들과도 흰 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었다.
앞으로 상대할 적이니 그들도 알고 있어야 할 정보였다.
어찌 됐든 그녀는 그 뱀을 상대해 쫓아내는 것까지 성공한 경력이 있다고 얘기했다.
그렇다면 그 뱀을 사냥할 계획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혹시 그녀의 말에 거짓은 없는지, 위해가 될 것은 없는지 확인한 후 부족원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에게 무슨 지위를 주어야 할지도 고민이고.
정령사라는 엄청나게 희귀한 능력을 가진 이를 방치해 둘 수는 없는 일이니.
“우선 오늘은 이만 쉬도록 하지. 자네 둘도 축제를 즐겨야 하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케륵.”
“감사합니다. 크룩.”
케륵은 비교적 담담한 표정으로, 크룩은 아주 희희낙락하며 물러났다.
나도 펜릴의 몸을 베고서 쉬다가 밖의 흥이 점점 오를 때쯤 밖으로 나갔다.
“족장님-!”
“와아아아아아-!”
이건 무슨 족장이라기보단 아이돌이라도 된 느낌이다. 아니면 사이비 교주나.
환호하는 부족원들에게 일일이 다가가 한 번씩 잔을 나눴다.
내가 돌아온 것을 기념해 연 축제라 그런지 다들 평소보다 더 들떠 보였다.
내가 그만큼 물자를 넉넉하게 풀기도 했고.
반면에 한쪽엔 트롤들이 나무 우리에 갇혀 있었다. 본래 트롤들이 노예들을 가둬 두는 곳이었다.
그들에게도 오늘만은 음식을 넉넉히 주었기에 기뻐하며 특식을 즐기고 있었다.
혹시 사고라도 칠까 봐 술은 안 줬지만.
난 그들을 보며 지나쳐 작은 우리 같은 곳으로 다가갔다.
바로 아까 전의 트롤 여자가 갇혀 있는 곳이다.
“그대는 이름이 뭐지?”
“세라크 이렌 하즈셀라.”
그녀는 그 작은 몸을 쭈그려 앉아 있었다.
“이렌이라고 불러주세요.”
난 그녀에게 술잔 하나를 건네었다.
“이렌. 부족원이 되고 싶은 이유는 뭐지?”
이렌은 내 말에 눈을 빛내며 말했다.
“복수는 끝났고, 어차피 갈 곳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제 힘이 귀하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 족장님이 중히 쓰실 거란 생각도 있습니다.”
그녀는 맑은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여전히 이질적인 이목구비와 톱니 같은 이빨은 적응되지 않았지만.
왠지 그녀의 솔직한 말만큼이나 더욱 신뢰가 갔다.
난 술잔을 들어 보이며 그것을 마셨다.
독한 탓에 몇 모금 마시고 내렸지만 그녀는 그것을 모조리 마시고서 잔을 탁 내렸다.
“그리고 전 부족 내에서 제일가는 미인이었습니다.”
“…그게 지금 일이랑 무슨 상관이지?”
“원래 강자는 미녀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전 강하기도 하고요.”
그녀의 넘치는 자신감에 난 몇 번 입을 떠듬거리다가 그냥 술잔을 다시 채워 주고서 자리를 떴다.
부족 곳곳엔 불이 타오르고 부족원들은 흥청망청 저들끼리의 축제를 즐기고 있다.
“이제 인간들이랑 있으면 더 어색할 것 같네.”
피식 웃으면서 신전 앞에 걸터앉아 웃고 떠드는 이들을 구경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케륵이었다.
저번에 된통 숙취를 겪고 나선 역시 술은 좋지 않다고 다시는 입에 안 댄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마셔! 오늘은 먹고 죽는 거야! 케르르륵!”
저거 완전 만취한 것 같은데.
평소에 차분하고 이지적인 모습과 굉장히 대비되는 모습이다.
“네 통!”
“크르라아아아!”
그 와중에 크룩은 혼자서 술을 네 통이나 비우고 있다.
따로 저들에게 오늘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즐기는 것에만 신경 쓰라고 했던 것 때문인가.
‘오늘 눈치 보면서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면 둘 다 술통에 가둬 놀 거야.’
둘을 내보내기 전 말했던 거다.
반쯤 농담으로 한 말인데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슬쩍 웃음이 나왔다.
펜릴도 둘에게 지지 않으려는 듯 큼지막한 고기 덩이와 양동이에 술을 잔뜩 받아 두고서 핥아 먹고 있다.
그런데 놈의 눈 한쪽에는 큼지막하게 멍이 들어 있다.
‘생각보다 오래가네.’
약하게 조절해서 때린 것 같은데 생각보다 멍이 크게 졌다.
왠지 더 처량해 보이는 걸.
‘아냐, 맞아도 싸지.’
난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곧 놈이 했던 욕설을 떠올리며 고개를 휘젓고 제단을 걸어 올라갔다.
“보기 좋구만.”
가장 높은 곳이라 그런지 부족이 한눈에 보였다.
난 그들이 노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축제가 끝나고 그들이 다시 하나둘씩 일어나 흩어질 때까지 그들을 지켜보다가 신전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 와중에 케륵과 크룩은 서로 지지 않으려는 듯 열심히 토하고 있었다.
* * *
[영역의 통합이 완료되었습니다.]
[영역의 규모가 대폭 커졌습니다.]
[부족으로 향하는 길이 생겼습니다.]
어느 날 종이에 계획을 적고 있는데 갑자기 메시지가 떠올랐다.
부족으로 돌아온 후 내린 명령.
각 부족을 잇는 길을 만들라고 했었지.
드디어 그 작업이 끝났나 보다.
난 지도를 펼쳐 들고서 맵 곳곳을 확인했다.
새롭게 난 길들이 지도에 업데이트돼 있다.
난 그중 어느 한 지점을 보며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슬슬 선물을 찾으러 가 볼까.”
너무 오래 방치해 두는 것도 선물을 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
게다가 그는 ‘보상’에 대해 언급했었다.
‘그러고 보면 VVIP 팩에 등급이 올라갈 때마다 보상이 있었지.’
세 가지로 나뉜 VVIP 유료 팩 중에 성장 팩.
난 부족을 대부족으로 성장시켰고, 나도 대족장 등급으로 승급했다.
그러니 마땅히 보상이 주어져야 했을 텐데 아무런 일도 없었다.
‘어떤 보상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난 다시 지도로 시선을 돌려 큼지막하게 ‘성산’이라 적힌 지역을 보았다.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곧 그게 뭔지 알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