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이게 무슨…….”
할 말을 잃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웃으면서 뛰어놀던 아이들도, 부지런히 자신의 일을 하던 고블린들도.
그 누구 하나 보이지 않는다.
“어떤 것 같나?”
“이게 뭡니까?”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그야말로 무언가에 현혹당한 기분이었다.
“이곳이 파괴된 지 벌써 몇백 년은 됐네.”
내가 느끼는 허망함과 별개로 남자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생명력이 넘치고 번화했던 도시가 멸망한 이후 종교도 빠르게 쇠락했지. 현재는 그저 몇몇 부족을 통해 전승으로 내려올 뿐이라네.”
“그렇다면 제가 본 건…….”
“과거의 흔적이지. 이게 지금의 모습이고.”
“그게 단지 환상 같은 것이라고요?”
아직도 아이를 일으켜 세워 주었을 때의 감촉이 생생하다.
따뜻하고 자그마했던 손.
날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던 모습과 명랑한 웃음소리들.
그 모든 게 신기루에 불과하다고?
딱-
“이런 것 말인가?”
남자가 손가락을 탁 튕겼다.
그러자 물감이 번지듯 앞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케륵?”
그곳에서 누군가가 튀어 나왔다. 난 그를 보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족장님? 케륵. 이, 이곳은 어디입니까? 그리고 이분은?”
바로 케륵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그의 몸에 손을 대었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선명했다.
“괜찮으십니까?”
“나, 나는 괜찮…….”
그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내가 대답을 하던 순간.
“케륵?”
사르르-
그의 몸이 찬찬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재가 흩날리는 것처럼.
“케르르. 기분이 이상합니…….”
“아!”
툭.
그에게 뻗었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아직 남은 감각이 선명한데도 손에는 희뿌연 재만이 남아 있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자네 말대로 환상 같은 거네.”
뿌득-
환상일 것이다. 환상일 뿐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하면서도 뼈에 사무치는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더욱 화가 나는 건 남자의 텅 빈 눈이었다.
지금의 상황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그저 투명한 눈동자로 나를 보고 있는 남자.
파지직-
하지만 야속하게도 내 몸은 여전히 엉망진창이다.
잠깐 들끓었던 기운은 맥없이 흐르고 멀쩡하게 느껴졌던 몸도 다시 열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뜨겁다.
“무리한 기운의 운용으로 몸 상태가 말이 아니군. 완전히 기운이 돌아오기 전까지 회복은 무리겠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난 그를 노려보며 답했다.
마치 선문답을 하듯 빙빙 돌려 가며 이야기를 하고, 결코 유쾌하지 않은 것을 보여 주며, 이제는 어설픈 의사 행세까지 하고 싶은 건가?
“화가 나나 보군. 무력한 자신의 상황에 답답하기도 하겠지. 우습구나.”
그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이러면 되겠나?”
콰르릉-!
갑자기 귓가에 천둥소리가 들렸다.
한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파지직-
그리고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전신에서 전격이 튀어 오르며 몸을 감싸고.
꽈악-
꽉 쥔 손엔 힘이 가득했다.
“분노. 나쁜 감정은 아니야. 신의 얼굴은 다양하니 그중엔 분노도 있기 마련이지. 그리고.”
그는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상실감. 자신과 종족도 다르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텐데 큰 상실감을 느끼더군. 모름지기 남을 이끌 위치라면 자신의 사람들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지.”
“당신은 누구입니까?”
“자네를 지켜본 지 오래됐네. 시스템이라고 하던가? 신기한 힘이야. 아무런 인연도 없는 이에게 내 힘이 이어진 것을 보고 큰 흥미를 느꼈었지. 심지어 내 아이들조차 느끼지 못했었는데 말이야.”
“당신은…….”
후웅-
그의 몸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빛에서 나는 기시감을 느꼈다.
벼락을 맞았을 대 느꼈던 그 기묘한 기운. 그것이 지금 눈앞의 사내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한때 번성했던 이 도시는 멸망했네. 침략자들은 강했고, 이곳의 지형 탓에 생존자 또한 극히 적었다네.”
“그 침략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마경이 어떤 곳인지.”
질문에 다시 질문으로 돌아온 대답.
하지만 이번엔 답답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바로 생각나는 장소가 있었으니까.
마경의 심부.
본래의 벼락 부족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그곳이 있다.
진정한 마경의 모습이.
그렇다면 이곳은.
“자네 부족과 그리 멀지 않지.”
“그럼…….”
“그만. 이제 시간이 별로 안 남았군.”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한 걸음 더 내게 다가왔다.
그러고서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잡았다.
“자네는 이곳을 나가고 싶겠지. 그 목적을 위해서라도 자넨 힘을 더 키워야 하네. 지금의 상황에선 어림도 없지.”
“뭐, 뭔가 알고 있는 겁니까?”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내의 정체에 대해선 대충 짐작을 하고 있었다.
예전 전작에서 운영자들이 맡아서 플레이를 하던 캐릭터와 다른 느낌이긴 했지만.
풍기는 분위기 자체는 비슷했으니까.
‘벼락 신!’
게다가 내 기운의 근원이나 마찬가지인 그의 힘을 못 알아볼 리도 없고.
“게임. 시스템. 대충 알고는 있지. 자네의 성장에도 꽤 많은 영향을 준 것도 알고.”
“그렇다면.”
“나의 권능은 이미 자네의 것. 내가 함부로 거둘 수도 없고, 거둘 생각도 없네. 하지만 그 ‘시스템’이라는 것은 너무 믿지 말게나.”
남자의 말에 슬쩍 허공을 보았다.
[시스템 업그레이드……. 86%]
내내 한쪽에 떠 있는 메시지.
지금 시스템이 먹통인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제 갈 시간이군.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지.”
“저는 아직 물어볼 게……!”
“이곳은 현실이네. 뻔한 사실을 외면하지 말게.”
쿵!
번쩍이는 전격이 몸을 꿰뚫는다.
제단에서 겪었던 것과 같은 느낌이 전신을 휩쓴다.
몸이 붕 뜨고 정신은 아득해진다.
필사적으로 눈을 뜨며 남자를 보았다.
내내 아무런 감정도 없던 그의 눈빛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안타까움. 분노. 그리고 한 줄기의… 희망.
그것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시야가 어둡게 변했다.
[아. 그리고 이 장소에 한 가지 선물을 남겨 두었네. 그걸 찾으면 본래 받아야 했던 보상 또한 같이 얻을 수 있을 거네.]
그의 목소리를 듣고서 난 정신을 잃었다.
* * *
-주인님!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파고든다.
-주인님! 정신 차리세요! 으음. 완전 의식이 없는 것 같은데.
-어떡하지.
익숙한 목소리다.
바로 눈을 뜨려 했지만 눈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그러면…….
하지만 차근차근 의식을 집중하니 몸에 천천히 힘이 돌아왔다.
그렇게 눈을 뜨려던 순간이었다.
-이 XXX! XX XXX! XX!
갑자기 통렬한 욕설이 날아왔다.
순간적으로 뜨려던 눈을 멈추고서 가만히 있어 봤다.
-이 악덕 XX! 맨날 부려먹기만 하고! 기회만 되면 내가 XXX해서 XXX! XX!
음. 그랬었구나.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구나.
이번 기회에 아주 잘 알았다.
“으음.”
시간차를 두고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눈을 뜨고 나니 바로 앞에 펜릴의 커다란 얼굴이 보였다.
-주, 주인님. 일어나셨습니까?
“어, 펜릴이구나. 어쩐 일이야?”
난 입꼬리를 죽 당겨 웃어 보이며 녀석을 쳐다봤다.
-하, 하하.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여기 물 좀 드십쇼.
펜릴은 앞발로 살살 물 잔을 내게 밀어 주었다.
난 상체를 일으켜 물을 마시고 나서 녀석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지?”
-아… 그게. 어제 갑자기 이 건물에 벼락이 내리쳤습니다. 그리고 이 방에 주인님이 나타났고요.
“그리고?”
-어… 케륵과 크룩이랑 교대로 주인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마 둘 다 부족 일을 보고 있을 겁니다.
펜릴은 눈을 또르륵 굴리며 내 눈치를 봤다.
내가 자기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헷갈리는 거겠지.
“그래? 고생했어.”
그래서 난 일부러 그의 몸을 툭툭 치며 웃었다.
녀석은 내 반응에 못 들은 거라 생각했는지 표정이 좀 풀어졌다.
-헤헤. 감사합니다. 밖에 나가 보실 겁니까?
“그러지. 애들이 걱정하고 있겠어.
난 아예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니 방 한편에 내 흉갑을 비롯한 아이템들이 놓여 있었다.
천천히 갑옷을 모두 착용하고서 허리춤에 무기도 찼다.
그리고 문을 나가기 전 여전히 나를 보고 있는 펜릴에게 말했다.
“욕은 잘 들었다. 덕분에 정신이 확 들었어.”
그 말을 하고 바로 밖으로 나왔다.
-주, 주인님! 주인니이이임!
머리를 파고드는 처절한 외침은 무시하고서 쭉 밖으로 걸어 나갔다.
부족은 한눈에 보기에도 평화로워 보였다.
내가 갑작스럽게 사라졌는데도 케륵과 크룩이 잘 관리를 하고 있었나 보다.
역시 그 둘은 든든하기 그지없다.
“대족장님!”
천천히 부족을 거닐고 가끔씩 부족원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는데 누군가 날 크게 불렀다.
고개를 돌리니 케륵이 나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케, 케륵. 일어나셨습니까?”
그는 거친 숨길을 토해 내며 나를 봤다.
“응. 잘 지내고 있었어?”
“최선을 다해서 부족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몸을 꼿꼿이 피며 말했다.
난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와 그를 보다가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혹시 내가 없어졌을 때… 날 본 적 없어?”
“케륵? 그게 무슨 말입니까?”
녀석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난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답했다.
잠깐 멈춰 섰던 걸음을 이어 가며 케륵과 얘기를 나눴다.
“내가 일주일이나 없어졌었다고?”
“그렇습니다. 케륵. 어제가 딱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내가 느낀 시간의 흐름과는 상당히 달랐다.
산속을 헤맸던 것까지 포함해서 고작 3일도 안 걸렸던 것 같은데.
시간의 흐름이 달랐던 건가?
아니면 이동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많이 흘렀었나?
어느 쪽이든 ‘신’의 힘으로 이루어진 일이니 지금 내 수준에선 짐작도 하기 힘든 것이었다.
당장 답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 의문은 뒤로 넘기고서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물었다.
“족장님이 사라지신 것은 저희 둘 만 알고 있었습니다. 케륵.”
케륵이 천천히 일주일간의 일을 말했다.
처음 내가 사라졌을 때 그 자리에 내가 걸치고 있던 갑옷과 연락 수정 등이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떻게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선 부족원들에겐 내가 신의 부름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다.
함부로 부족원들을 움직일 순 없어서 소수의 정찰조만을 움직여 조사하고 있었고.
그러다가 어제 갑자기 내가 돌아온 것이다.
“수고했다.”
“아닙니다. 케륵. 그저 시키신 대로 했을 뿐입니다.”
케륵은 겸손하게 말했지만 부족의 모습은 심히 만족스러웠다.
내가 사라지기 전 이들과 했던 회의들.
그때 나왔던 계획들이 있었는데 케륵과 크룩은 이미 그것들의 터를 잡아 두고 있던 것이다.
천을 짜는 공방, 대장간, 창고 등등.
내가 갑자기 사라져서 당황스러웠을 텐데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일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세히 살펴봐야 하겠지만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훌륭하다. 정말 잘해 주었어.”
“감사합니다! 케륵.”
“분리해 둔 부족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
“그곳도 원활히 운영되고 있습니다. 노예였던 동지들이 처음에는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사냥과 훈련, 기도를 통해서 순식간에 적응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둘 사이에 남은 부족들이 있는지 파악하며 차근차근 정리하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규모가 있던 몇몇 부족은 통합을 완료했지만 미처 못 보고 지나친 작은 부족이 있을 수 있었다.
꽤 급하게 진군을 했었으니까.
“그 부분은 좀 더 자세한 계획을 짜 봐야겠군. 그건 그렇고 트롤들은 어떻게 되었나?”
난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물었다.
“족장님이 명하신 대로 우선 따로 격리해 두었습니다. 전사들을 시켜 교대로 감시하고 있는데 아직 별다른 반발은 없습니다. 케륵.”
“그렇군.”
반발이 없을 만하다.
긍지 높은 트롤의 전사들은 우리 병력에 의해 다 죽었으니.
남은 건 전부 목숨을 구걸했던 이들뿐이다.
“다만, 한 명만이 요청에 의해 따로 격리되어 있습니다.”
“한 명? 그게 누구지?”
“케륵, 트롤 부족의 주술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