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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유료템으로 캐리한다-25화 (25/170)
  • 25화

    난 그대로 떠나려다가 잠시 생각을 바꿔 짐승의 시체 앞에 주저앉았다.

    주우욱-

    가죽의 목덜미를 갈랐다.

    그러자 그곳에서 피가 주륵 흘렀다. 난 그것에 입을 대 꿀꺽꿀꺽 삼켰다.

    기생충이나 바이러스 같은 게 걱정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디에 물이 있는지도 몰랐고, 피를 섭취하면 수분뿐만 아니라 영양분도 얻을 수 있다.

    굶어 죽거나 물을 못 먹어서 죽는 것보단 차라리 병 걸려 죽는 게 낫지.

    “흐읍.”

    굉장히 비리고 불쾌한 맛이 입안을 감돌았다.

    소매에 슥- 피를 닫고서 다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햇빛이 강렬하게 비쳤다. 나무의 모양이나 기후를 봐서 완전히 다른 곳은 아닌 것 같은데.

    정확히 어딘지는 도저히 감이 안 잡혔다.

    “가 보자.”

    우선 걷기 시작했다. 최대한 숲과 산을 정처 없이 떠돈 기억을 되살려 가며.

    물이나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찾으면 좋겠지만.

    우선 새로운 동굴이나 쉴 곳이라도 찾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정처 없이 걸었다.

    “이런 씨발!”

    하지만 난 어느 순간 폭발해서 지팡이로 삼던 창대를 내팽개쳤다.

    신경이 잔뜩 날카로워진 게 나 스스로도 느껴졌다.

    거의 반나절을 걷는 동안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물이나 열매는커녕 쉴 만한 곳까지……. 그 어느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았던 몸도 순식간에 메말라 갔다.

    설마 이대로 여기서 죽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부스스스-

    그때 풀숲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나무와 풀숲 사이에 쪼그려 앉았다.

    하지만 그 소리는 계속해서 가까워졌다.

    그리고 무언가 형체 같은 게 슬쩍 보였다. 창대를 꽉 쥐고서 호흡을 진정시켰다.

    짐승을 상대할 때처럼 최대한 숨을 억누르고.

    무엇이 다가오는지를 가만히 살폈다.

    “찾았다!”

    그런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고블린의 언어였다.

    “여기 계셔! 이리 와!”

    기쁜 듯이, 환호와 같은 목소리로 누군가를 더 부른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설마? 나를 찾으러 온 건가? 우리 부족에서? 아니면?

    난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슬쩍 눈을 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봤다.

    역광이라 정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짤막한 키에 명확하게 고블린의 특징이 두드러지는 윤곽이 보였다.

    호의적인 음성. 그것에 일말의 기대감이 차올랐다.

    곧 풀숲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그 수가 늘어났다.

    우리 부족의 고블린. 혹은 처음 일어났을 때 마주쳤던 그 고블린들이겠지.

    잠시 망설여졌지만 난 곧 결정을 내렸다.

    “후우.”

    숨을 한번 내쉬고서 난 당당한 걸음걸이로 숨어 있던 풀숲을 빠져나왔다.

    어차피 상대의 수는 많아 보인다.

    이제 와서 몸을 빼기도 힘들 테니 차라리 당당해지기라도 하리라. 그리고 난 곧 그들을 볼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괴상한 가면을 쓴 고블린들을.

    “우리는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키르륵. 신의 사도시여.”

    “…너흰 누구지?”

    우선 우리 부족의 아이들은 아니다.

    그렇다면 저들이 나에게 호의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신의 사도라고 부르는 이유는?

    “저희는 벼락 신의 아이들입니다.”

    가면 사이로 놈의 눈이 빛났다.

    “얼마 전 정찰대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벼락의 힘을 다루시는 분을 봤다고. 저희와 가시죠.”

    꿀꺽.

    난 침을 삼키며 그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세히 설명해 봐라.”

    “저희도 벼락 신님의 신도입니다. 얼마 전 당신이 이곳에 올 것이라는 신탁이 내려온 후 내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녀석의 말에 난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말 하나하나가 쉬이 믿기지가 않았다.

    “내가 여기에 올 것을 알고 있었다고?”

    “키륵. 그렇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알려 주지 않으셔서 찾는데 헤맸지만요. 이곳. 성산 전체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성산. 그 말에 팔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이곳에서 들었던 ‘성산’은 한 곳밖에 없었다.

    내가 벼락을 맞았던 그곳.

    “우선 가시지요. 그분께서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난 그의 말에 조용히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곧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가지.”

    함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선은 따라가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내 몸이 잘게 떨리는 것을 못 봤을 리가 없을 터.

    만약 적이었다면 이미 날 죽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난 그들을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그들은 앞장서서 걷기 시작한 이후로는 나에게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걷기만 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웬 동굴 같은 게 보였다.

    그 안으로 들어가 걷는데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점점 숨이 차오를 즈음, 저 앞에서부터 빛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다시 한 번 환영합니다.”

    환한 빛이 비치는 곳으로 빠져나가며 고블린이 말했다.

    “벼락 신의 도시에 오신 것을.”

    그렇구나.

    단순한 동굴이 아니라 통로다. 이곳에 오기 위한.

    “이게…….”

    난 할 말을 잃고 주변을 보았다. 난 표정 관리가 힘들 정도로 놀랐다.

    엄청난 규모의 도시가 보였다.

    곳곳에 늘어져 있는 벽돌집들. 그 사이사이를 가로지르는 잘 정돈된 도로.

    그리고 중앙에 솟아 있는 높다란 탑까지.

    마치 갑자기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곳은 이 도시가 자리를 잡은 터가 인공적으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는 거다.

    도시 전체를 둘러싼 높다란 절벽은 분명히 인공적으로 손을 댄 흔적이 남아 있다.

    ‘단순한 분지가 아니라, 내부를 깎아서 안에 이런 도시를 세운 건가?’

    놀라움은 둘째치고 그게 가능한 일이긴 한 건가?

    이런 곳은… 이런 모습은, 설사 인간의 도시라도 쉬이 보기 힘든 것이다.

    “그분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키륵.”

    난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연신 주변을 둘러보며 그를 따라 걸어갔다.

    그에게 안내받아 도착한 곳은 대저택이었다.

    그는 그곳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서 곧 자리를 피했다.

    “어서 오게.”

    곧 문이 열리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안내한 이들과 똑같이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난 그의 외형만으로도 깜짝 놀라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도 모르게 높임말이 나왔다. 그 정도로 그에겐 경시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 맞은편의 의자를 가리켰다.

    “우선 앉지. 할 얘기가 많아 보이는데.”

    “…알겠습니다.

    난 그의 말에 따라 우선 의자에 앉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놀려 무언가를 하더니 곧 내 앞에 작은 주전자 같은 걸 들고 왔다.

    “한번 들어 보게. 얼마 전에 왕국에서 좋은 차가 왔거든.”

    연한 녹색 빛의 차가 쪼르륵 내 앞의 잔에 담긴다.

    그곳에서 올라오는 향긋한 향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잔을 만지작거렸다.

    “당신은 누굽니까?”

    그는 찬찬히 자신의 잔에도 차를 따르고 나서야 나를 봤다.

    “질문이 잘못됐군.”

    다향을 음미하듯 천천히 찻잔을 입가에 가져갔다가 뗀 그는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나?”

    “잘 모르겠습니다.”

    왠지 계속해서 대화의 언저리만 맴도는 느낌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 끌려다니기만 하는 느낌. 그리 좋지는 않다.

    “이곳은 신의 영향력이 가장 막강한 장소. 성산에 위치한 우리 종교만의 도시라네.”

    “이해가… 안 되는군요.”

    쉽사리 받아들이긴 힘든 개념이었다.

    ‘벼락 신’이라는 신앙이 체계적으로 확립된 개념이었던 건가?

    “그러면 저희 벼락 부족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이곳이 ‘도시’라면 우리 부족에 대해서 모를 리 없을 거다.

    “부족이라.”

    그는 살짝 웃어 보였다.

    비웃는 미소가 아니었다.

    어쩐지 처연한. 서글퍼 보이기까지 하는 웃음이었다.

    “그렇게까지 영락할 줄은 몰랐는데. 그렇다면 자네는 족장인 건가?”

    “…그렇습니다.”

    “따라 나와 보게.”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벌떡 일어났다.

    본래 내 성격이었으면 한참 전에 불만을 터트렸을 터인데.

    어쩐지 거부하지 못하고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는 문을 열고서 밖으로 나가 천천히 길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나도 그를 따라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들.’

    아까 전엔 도시의 웅장함에 압도되어 보이지 않았던 게 보였다.

    웃는 낯으로 뛰어다니는 고블린 아이들.

    그들은 모두 천진난만한 웃음을 입가에 걸고서 저들끼리 장난치며 놀고 있었다.

    “악!”

    그때 내 앞으로 뛰어 가던 한 아이가 넘어졌다.

    난 무심코 손을 내밀어 아이를 일으켜 주었다.

    “감사합니다!”

    아이는 날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선 다시 자기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 모습을 보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저런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지?’

    우리 부족이 최근 들어 많이 성장했다지만 그래 봤자 아직 과도기에 불과하다.

    아이들은 웃는 얼굴로 뛰어다니기보단 일을 배운다. 그리고 어른들을 따라 사냥을 한다.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아이들이라 해도 걱정 없이 놀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여기가 비정상적인 거겠지.’

    현대인의 감각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도 놀라운 일이다.

    다른 이들이 이곳을 본다면 나보다 더 놀라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저 아이들이 특별한 건 아닐까? 높은 지위를 가진 자의 자식이라던가.

    도시라고 했으니 그 정도로 계급이 세분화되어 있을 확률도 있으니.

    “저 아이들은 그저 평범한 아이들이네.”

    “예?”

    “이곳에서 아이들은 그저 웃고 뛰어놀지. 그들이 배우는 건 오직 하나. 벼락 신의 가르침뿐이네.”

    내 속내를 꿰뚫어 본 것처럼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물론 이 시대에도 흔한 일은 아니었네. 이때는 가장 우리가 번성할 때였으니. 힘들 때도 많았었지.”

    난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의 말에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때요?”

    “눈치가 아예 없진 않군.”

    뒤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그는 그저 또 빙그레 웃어 보이고선 앞서서 걸었다.

    “아까부터 왜 말을 끝까지 안 해 주시는 겁니까!”

    난 이번에야말로 짜증 내듯이 말했다.

    아까 전부터 무언가 보여 줄 듯 말 듯 하는 태도에 답답함이 커졌기 때문이다.

    “저곳에 올라가면 모든 걸 알려 주겠네.”

    그가 말을 하며 가리킨 곳은 바로 도시의 중앙에 높이 솟은 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키르륵.”

    무언가 더 따지려고 했지만 탑 앞에 경비를 서고 있던 고블린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통에 타이밍을 놓쳤다.

    나에게도 예를 취하기에 어색하게 나도 인사를 받아 주었다.

    “올라가지.”

    탑의 내부로 들어갔다. 그런데 내부엔 계단이 따로 없었다.

    파직-

    그때 그의 손에 전격이 튀었다.

    분명히 나와 같은 힘이다. 깜짝 놀라 입을 열기도 전에 놀라운 일이 연이어 벌어졌다.

    지이이잉-

    그의 손이 벽에 닿자 기운이 벽을 타고 흐르더니 바닥을 파랗게 물들였다.

    후웅-!

    그러더니 바닥이 움직였다. 위를 향해서.

    ‘엘리베이터?’

    더 이상 놀랄 힘도 없었다. 바닥이 빠르게 올라가더니 우리는 어느새 탑의 꼭대기에 올라 있었다.

    쿵-

    바닥이 꼭대기에 닿자 작은 진동이 울리며 정지했다.

    사내는 뒤돌아 나를 보더니 손을 찬찬히 들어 올렸다.

    “질문의 모든 답을 보여 주겠네.”

    “윽.”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그때 나는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이 도시에 도착한 순간 몸이 전혀 아프지 않다는 것을.

    두통을 느끼고 나서야 그것을 알아챘다.

    “아?”

    그리고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번화한 도시의 광경은 더 이상 없었다.

    오롯이 보이는 것이라곤 무너지고 파괴된 폐허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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