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방패 조! 앞으로!”
“크르룩!”
자신의 몸보다 큰 방패를 들고 앞으로 이동. 그리고 땅에 박아 고정시킨다.
“2열에서 3열까지는 창 들고 대기!”
2열에서 3열은 방패 조 사이사이에 배치되어 그 틈을 노린다.
그 뒤로는 비교적 작고 무게가 가벼운 방패를 한쪽 손목에 차고 도끼나 방망이 검 등을 들고 있다.
덩치가 작은 고블린들은 중간중간 배치된다.
그 외에도 여러 명령을 내려 진형을 완전히 갖추었다.
하지만 초조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이곳은 우리가 생각한 전장이 아니었다.
놈들은 우리보다 수가 많다. 그래서 게릴라 형식이나 대군의 운용이 어려운 지형에서 맞서려 했었다.
하지만 이곳은 탁 트인 지형.
적은 많은 병력의 이점을 살려 능선을 따라 병력을 쭉 산개해 놓았다.
게다가 적에겐 기병 같은 병종도 있으니.
‘특히 저 멧돼지는 말보다 더 상대하기 까다로워.’
저 병종을 상대하기 위해 방패 조까지 편성해 두었는데, 이곳은 너무 넓어 사방을 모두 방패 조로 막을 수가 없다.
“크와!”
적의 선봉이 갈라지고 한 놈이 걸어 나왔다.
한 손에 창을 들고 있는데 그 기세가 꽤나 흉흉했다.
“건방진 난쟁이와 돼지 새끼들아!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쳐들어오느냐!”
놈은 도발적인 어조로 소리쳤다. 케륵과 크룩은 다른 종족의 언어를 알아들었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앞에 나서서 말하려다가 크룩이 자신이 말하겠다고 했다.
난 고개를 끄덕여 허락해 주었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 여기가 네놈 영역이라도 되느냐!”
“이곳은 우리에게 공물을 바치던 부족이다! 겁도 없이 숲을 들쑤시고 다니던 놈들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그것이 네놈들이었구나!”
“X 같은 소리! 겁먹어서 집에 처박혀 있던 놈들이 말이 많구나!”
“고놈 주둥이만 살았구나!”
“난 주둥이라도 살았지 네놈 족장은 주둥이도 죽었는지 무거운 엉덩이로 부족원들이나 깔아뭉개고서 뒤에 처박혀 있지 않냐!”
크룩과 말로 아웅다웅하던 상대가 순식간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족장을 모욕하는 말에 화가 난 모습이다.
“건방진 새끼들!”
놈은 몸을 획 돌려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바람 부족. 그리고 트롤.
그들은 월등한 신체 능력을 지녔다. 게다가 그 이지 또한 뛰어난 편.
놈들은 마경에서도 나름 문명이라 할 만한 부족을 이루고 있었다.
다행인 점은 놈들은 번식력이 굉장히 낮았다.
만약 그들이 오크나 고블린처럼 번식을 쉽게 했다면 이미 이 일대는 놈들의 손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렇게 맞붙게 되긴 했지만.
“크아아아아아아-!”
“적들에게 죽음을-!”
가장 앞에서 달려오는 건 멧돼지 몬스터를 타고 있는 놈들.
수십이나 되는 놈들이 몽둥이를 들고서 달려든다.
‘이대론 안 돼.’
본래라면 방패 조만으로 막을 생각이었지만, 직접 보니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보니까 더 확 와닿는다.
왜 저놈들이 게임 상에서 악명이 그리 드높은지.
“케륵, 크룩! 지휘를 맡긴다!”
내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
우선 뛰쳐나가기 전 제1열에 있는 방패 조의 뒤로 이동해 축성 스킬을 시전 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방패임에도 전격이 튀기 시작했다.
그다음에 앞으로 뛰어 올랐다.
꾸워어어어어-!
바로 아래로 보이는 선봉조.
콰지지지직-!
그들에게 벼락을 내리꽂는다.
“크아아악!”
몽둥이에서 시작된 전격은 땅을 그대로 뒤집어 놓으며 선봉의 균형을 흩트렸다.
돌진해 오며 생긴 힘이 상당수 흩어진다.
“아아악!”
이어서 고블린들이 화살과 독침 등을 날려 댄다.
“끄…… 끄윽!”
거죽이 얇은 곳에 맞은 몇몇 적들은 순식간에 중독돼 멧돼지 위에서 떨어졌다.
콰앙앙-!
기운을 최대로 끌어 올리며 몽둥이를 휘두른다.
콰직!
휘두른 몽둥이에 걸린 머리통들이 터져 나간다.
멧돼지? 기병? 그런 어쭙잖은 돌격력으로 얻은 힘은 우습다.
난 어디로 튀어 나갈지 모르는 번개 위에 올라타 있으니까.
최대한 날뛰며 선두 조의 기세를 꺾는다.
퍼엉!
아예 적을 분쇄할 기세로 몰아세운다.
쿠웅-!
“크라아아아!”
“버텨! 버텨야 돼!”
하지만 나 혼자서 모든 적을 막을 수는 없었다.
우리에게 너무 불리한 전장이다.
내가 미처 상대하지 못한 적들은 그대로 방패 조와 충돌했다.
그들을 돕기 위해 몸을 돌려 다시 한 번 땅에 몽둥이를 내리쳤다.
쾅-!
전격이 놈들의 뒤를 덮친다. 방패를 뚫으려 애쓰던 놈들 일부가 쓰러진다.
끄워어어어어-!
전장의 상황이 좀 나아지나 싶었지만 곧이어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끔찍할 정도로 커다란 고함 소리.
꾸웅-!
무식할 정도로 커다란 몽둥이가 내 옆을 스쳤다.
첫 공격이 지지부진하자 거인들을 출격시킨 것이다.
빠악!
바로 높이 뛰어 올라 가장 앞서 있는 놈의 턱주가리를 후려쳤다.
눈에 보일 정도로 푸른 전격이 놈의 머리통을 휩쓸었다.
꽈앙-!
거대한 몸체가 뒤로 쓰러지며 적들을 깔아뭉갰다.
‘어?’
이어서 다른 거인을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웬 나무에 쳐 박혀 있었다.
후욱-
뒤늦게 통증이 올라왔다.
“큽.”
울컥 올라오는 걸 뱉어 보니 짙은 적색의 핏물이었다.
내장이 상한 게 틀림없다.
바로 포션을 하나 꺼내 들이켜고서 다시 몸을 날렸다.
속에서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철 기둥? 말뚝? 뭐였지?’
뒤늦게 방금 전의 상황이 떠올랐다.
다음 거인을 노리려 몸을 날리던 순간 갑자기 날아온 철 기둥 같은 게 가슴팍을 때렸다.
그 충격으로 내 몸은 형편없이 처박힌 거고.
다시 몸을 날려 전장으로 와 보니 벌써 거인은 본진과 부딪히고 있었다.
한 놈은 본진의 우익을 헤집고 있었고, 몇몇 오크들이 필사적으로 달라붙어 저지하는 상황.
나머지 한 마리는.
“크라라아아아악!”
크룩이 달라붙어 있었다.
주술을 필사적으로 운용하고 있는지 몸이 과대하게 커져 있다.
하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무리하고 있는 것 같다.
몸의 혈관이란 혈관이 다 터질 것처럼 올라와 있으니.
꽈아앙-!
그와 동시에 적진을 유리하는 철 기둥.
바로 나를 공격했던 것이었다.
시력을 강화해 그쪽을 보니 보통의 트롤보다 더 커다란 몸집인 놈이 웬 발리스타 같은 걸 조작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니 순간적으로 망설여졌다.
거인을 먼저 처리할지, 저 화살부터 처리할지.
“나를! 무시하지! 마라!”
쿠웅!
하지만 내 고민은 빠르게 끝났다.
크룩의 몸이 급격하게 커지고 있었다.
땅을 뒤흔드는 진동은 거인의 것이 아니라 그의 것.
그는 덩치를 불려 나가더니, 순식간에 거인보다도 더 거대해졌다.
텁-!
크룩은 한 손으로, 당황하는 거인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그리고 거인의 발뒤꿈치를 걸어서 손을 쭉 내밀며 균형을 무너트렸다.
“크라아아!”
한 손에는 목, 한 손에는 고간을 붙잡더니 번쩍 들어 올려서 적의 본진으로 그대로 던져 버린다.
그 위치엔 공교롭게도 발리스타 같은 것도 있었던지라 내 고민 두 가지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드디어 각성했구나.’
일찍이 사제로서 각성을 마친 케륵과 달리 이제 막 각성을 한 크룩.
그 위력 자체는 케륵만큼이나 든든했다.
쿠웅! 쿵!
“덤벼라!”
크룩은 부족원들이 다치지 않게 조심하며 우익을 흔들던 거인을 상대하러 이동했다.
덕분에 나는 마음 놓고 적의 전열을 헤집고 다닐 수 있었다.
“케르르르르르!”
다행히 호재가 이어져서 터졌다.
방패 조가 제 역할을 끝낸 것이다.
방패 조의 바로 뒤에서부터 괴음이 들려왔다.
방패조가 빠르게 무기를 빼어 들며 뒤로 빠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눈이 붉게 변한 고블린과 오크들이 튀어 왔다.
콰앙-!
트롤이 휘두른 무기와 오크가 휘두른 무기가 부딪혔다.
놀랍게도 그 결과는 호각이었다.
트롤이 오히려 당황해하며 무기를 뒤로 뺀다.
난 바로 스킬을 발동시켜 놈들에게 한 번 더 축성을 내렸다.
“크르라아아아!”
안 그래도 빨갛게 변한 눈 때문에 미친놈들처럼 보이는 부족원들의 전신에 파란 전격까지 감돌았다.
놈들은 강화된 힘으로 트롤들을 밀어붙였다.
퍼억-!
나도 쉼 없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광전사들이 제법 활약하고 있지만 안심하고 있을 순 없다.
왜냐하면 저 상태의 지속 시간은 길어야 10분 정도이니까.
약을 배합해 강제로 잠재력을 폭발시키는 방법인데, 부작용이 심하다.
그렇기 때문에 연속으로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다.
쉬시식-!
광전사들이 정면에서 막고, 화살과 마취 침이 뒤에서 계속해서 날아든다.
전장 곳곳에선 광기에 찬 외침과 비명이 들린다.
난 그저 그 가운데에서 몽둥이를 휘두르고, 또 휘두를 뿐이었다.
적의 수는 너무 많아 한시도 쉬고 있을 틈이 없다.
‘광전사가 건재할 때 최대한 적의 수를 줄여야 해.’
그런 생각을 하며 그저 머리통을 깨부순다.
‘하지만.’
한 줄기 불안함은 감출 수 없었다.
‘왜 적의 주술사가 가만히 있는 거지?’
가장 위협적인 적이 조용했기 때문에.
“키를르아아아아아-!”
한참을 트롤을 죽이며 전선을 밀어붙이고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난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적 주술사의 외침이라는 것을.
모든 트롤들의 몸에 주황색의 빛이 퍼져 나갔다.
다시 한 번 광전사들이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트롤들은 언제 밀렸냐는 듯 여유로운 태도로 광전사들을 상대했다.
퍼엉-!
어느 순간 오크 한 마리가 북이 터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뒤로 날아갔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오크들의 눈빛이 점점 정상으로 돌아오는 게 보였다.
“씨바알-!”
기운을 거의 남용하듯이 사용했다.
‘광전사들이 뒤로 빠지는 시간을 벌어야 해.’
휘두르고 또 휘두른다.
광전사들이 충분히 몸을 뺄 수 있도록.
안타깝게도 광전사 중 많은 수가 목숨을 잃었다.
본래 계획과 달리 트롤들이 빠르게 기세를 회복했기에 일어난 참사였다.
뿌득-
저 약을 복용하는 것은 특별히 단련된 이들만이 가능했기에 더욱 뼈아픈 손실이었다.
“벼- 라- 악!”
답답한 마음에 기운을 빠르게 앞으로 쏘아 내었다.
한 줄기 벼락이 내 앞을 쭉 관통했지만 그것만으론 전장의 판도를 바꾸긴 힘들었다.
‘이렇게, 이렇게 어이없이.’
이를 악물었다.
새삼스럽게 떠오른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며.
전장은 결코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난 고민했다. 케륵에게 연락을 할지 말지.
더 기다리기엔 전장의 상황이 너무 안 좋다. 주술사의 능력이 예상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잠깐 동안 고민하다가 우선 조금만 더 버텨 보자는 생각에 몽둥이를 다시 꽉 잡았다.
그리고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데 어떤 신호가 왔다.
난 급히 손을 놀려 품에서 부르르 진동하는 물건을 꺼내 들었다.
파란색으로 빛나고 있는 구슬을.
-족장님! 그들이 도착했습니다!
목소리가 들렸다.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 따로 빠져나갔던 케륵의 목소리가.
“빨리 와!”
난 기쁨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후우우웅-!
내 대답을 들었는지 곧 응답이 들려왔다.
목소리가 아니라 다른 형태로. 적진의 옆 산등성이에서 무언가가 희끗하게 비치는 것 같더니.
“케르르르르륵!”
케륵이 튀어나왔다.
어떤 거대한 괴수의 몸 위에 타고서.
아우우우우우우-!
전장의 흐름이 다시 바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