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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유료템으로 캐리한다-6화 (6/170)
  • 6화

    “뭐라고?”

    “클로즈 베타, 플레이어, 사람, 우리는 클리어를 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죽어. 맞아, 그렇지?”

    남자의 입가에선 침이 질질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오는 말도 그다지 정상적이진 않았다.

    이상하게 뚝뚝 끊기고 어눌한 말투다.

    콰앙-!

    그런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에 갑작스런 공격에 제때 대응하지 못했다.

    무언가에 얻어맞았다는 것도 몇 미터나 뒤로 날아가 바닥을 구른 후에야 알았다.

    “커억.”

    속에서 끈적끈적한 액체가 울컥 넘쳤다. 핏물 같은 것이 바닥에 주르륵 떨어졌다.

    “사람, 착해, 말 잘 들어.”

    그리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무언가가 내 목을 덥석 잡았다.

    여전히 고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로 그대로 놈에게 질질 끌려갔다.

    “착하지, 이리 온, 하진아, 배고파?”

    귓가에 두서없는 말이 꽂힌다. 방금 전보다 더욱더 이상한 말투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짐작조차도 할 수 없다.

    파악-!

    살짝 정신이 회복되자마자 놈의 허벅지에 팔꿈치를 휘둘렀다.

    꽈득.

    “끄아아아악!”

    하지만 그런 시도는 놈의 가벼운 몸짓에 저지되었다. 무언가 팔을 튕기는 듯하더니 내 팔이 반대 방향으로 꺾였다.

    “끄으으…….”

    미쳐 버릴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몽둥이는 놓치지 않았다. 눈이 점점 붉게 변한다.

    그냥 정신을 놓아야 하나? 이런 상황이면 광전사를 쓰는 게 낫지 않을까?

    망설이는 사이 놈이 우뚝 멈춰 섰다.

    꽈르르릉-!

    산의 정상. 벼락이 무수히 쏟아지고 있다.

    “이 몸 약해, 너 강해, 바꿔야겠어.”

    붉은 시야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놈의 목소리를 들었다.

    놈은 내 목을 천천히 들어 올려 날 보더니 바닥에 내팽개쳤다.

    “기다려, 착하지?”

    그러더니 기괴한 각도로 입을 비틀려 웃고서 뒤로 슬슬 물러난다. 그러고서 품에서 검 하나를 꺼내서 높이 들어 올린다.

    꽈앙-!

    그런 놈의 검으로 곧바로 벼락이 내리꽂혔다.

    비틀- 몸이 흔들리지만 놈은 개의치 않고 검을 들고 있다.

    데미지가 없는 건 아닌 것 같다. 놈의 몸은 한눈에 보일 정도로 바들바들 떨리고 있으니까.

    그래서 더욱 웃음을 띠고 있는 얼굴이 비정상적으로 보였다.

    “한 번 더, 한 번 더!”

    놈이 크게 소리친다.

    꽝-!

    벼락이 놈의 몸에 한 번 더 내리꽂히고, 순간적으로 반투명한 무언가가 남자의 몸 위에 겹쳐 보였다.

    그때에서야 난 깨달았다. 그래, 이건 게임이고, 이렇게 당하면서까지 참을 필요는 없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광전사.’

    스륵-

    팔을 쭉 늘어트리고 간신히 유지하던 이성의 끈을 놓았다.

    자신과 똑같이 통각을 느끼는 플레이어를 죽이는 건 살인과 다를 바 없지 않나, 하는 무의미한 고민을 잊었다.

    왜냐하면 저건 사람이 아니니까. 그저 적일 뿐이니까.

    이게 최선의 공략이다.

    슈우우우-

    몸에서 순식간에 김이 피어오른다.

    “후우.”

    짧게 숨을 내쉬고서 부러진 팔을 물끄러미 보다가 인벤토리에서 붕대와 부목을 꺼내 단단히 고정시켰다.

    “뭐 해? 말 아아아안 들으면, 나쁘, 나쁜 아이.”

    이젠 완전히 남자의 몸 위로 반투명한 형상이 겹쳐 보였다. 그나마 멀쩡한 편이던 발음도 완전히 뭉개진다.

    놈은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걸 보며 놈의 정체를 확신했다. 저런 행동을 보일 놈이 또 있을 리 없으니.

    하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일반적으로 놈이 기생할 때 숙주의 기억을 흡수한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게임의 설정일 뿐이다.

    게임 외적인 부분, 예를 들어 플레이어니 클로즈베타니 하는 단어까지 아는 것은 어떻게 봐도 비정상적인 것 아닌가?

    그런 의문을 이어 가고 있는데 점점 의식이 흐려진다.

    특성이 발동되려 하고 있다.

    좀 더, 좀 더 생각해야 하는데. 그리고 그냥 놈을 죽이면 안… 되는…….

    번뜩-

    시야가 완전히 붉게 변한다.

    “어디 일개 도플갱어 새끼가 사람 흉내를 내?”

    씩 웃었다.

    진한 해방감이 느껴진다.

    스읍, 숨을 들이마시니 진한 뇌기와 풀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답답하고 억죄어 있던 감정이 순식간에 풀려 나간다.

    이 좋은 걸 왜 참고 있었는지.

    부러진 팔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크게 방해될 정돈 아니다. 단단한 몽둥이를 쥐고서 계속 거슬리는 소리를 내고 있는 도플갱어를 봤다.

    “뭐야? 누구?”

    붉게 변한 시야로 회백색의 괴물을 본다.

    본래 덮어쓰고 있던 인간의 형상은 천천히 부스러져 흩어지고 있다.

    처음에 활을 날려 대며 날 견제하던 놈이 갑자기 강해진 이유는 순전히 놈의 정체 때문이다.

    “알아서 뭐하게.”

    천천히 놈에게 다가간다.

    마음 같아선 바로 달려들고 싶지만 여전히 검을 꼿꼿이 들고 서 있는 놈에게 바로 다가가긴 힘들다.

    잘못하다간 바로 벼락을 맞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바닥에 널린 돌멩이를 쥐었다.

    빠악-!

    “아파!”

    여전히 인간 흉내를 내고 있다. 계속해서 돌멩이를 들어서 던졌다.

    처음엔 사람의 말로 계속해서 뭐라 지껄이던 놈은 곧 흉내를 포기했다.

    “크와아아아아-!”

    챙그랑-

    놈이 검을 던진다. 그것을 몽둥이를 휘둘러 간단히 막아 내었다.

    이제는 인간의 형상은 아예 찾아볼 수 없다.

    도플갱어는 숙주의 육체가 완전히 죽기 전까지는 본체를 드러낼 수 없다. 그리고 다른 숙주에 기생할 수도 없다.

    그래서 번개를 맞아 가며 원래 숙주를 죽이고,

    아마도 더 강해 보이는 내 육체로 옮기려고 했던 거겠지.

    “멍청한 새끼.”

    퍼억-!

    빠르게 몸을 날려 놈의 머리를 후려쳤다. 형편없이 놈의 몸이 뒤로 구른다.

    멍청한 도플갱어 새끼. 숙주를 벗어던진 놈의 행동 양식이란 단순하기 그지없다.

    후웅!

    콰직!

    그대로 놈에게 뛰어 올라 몽둥이를 내려찍는다.

    은빛의 액체를 흘려 가며 몸부림을 치는 녀석의 팔과 다리를 짓이긴다.

    응왱웅-

    매끈한 반구형의 중앙이 쭉 갈라지더니 이상한 소리를 낸다.

    퍼엉-!

    순간적으로 몸이 뒤로 확 밀려난다.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피했지만 어깨에 스쳤는지 욱신거린다.

    제기랄. 놈들 중엔 특이한 능력을 가진 개체가 한 놈씩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웅외응-

    도플갱어가 스륵 몸을 일으킨다. 팔과 다리가 처참하게 짓이겨 있지만 놈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날 보며 다시 입을 벌린다.

    펑!

    입에서 무언가가 확 터져 나가며 등을 스쳐갔다. 몸을 팍 숙이며 달렸다.

    쾅-!

    지면에 또 한 번 놈의 이상한 공격이 박혔지만 이미 공중으로 몸을 띄운 상태였기에 피해는 전혀 없었다.

    놈의 회백색의 머리가 바로 발밑에 있다.

    빡!

    한 번 더 몽둥이를 내리찍었다.

    웅- 우우왱-

    일부러 집중적으로 머리를 내리찍었다.

    팡-!

    그 와중에도 놈은 필사적으로 공격을 해 왔다. 공기가 압축되고, 그대로 터지며 분출되는 공격을 피했다.

    나중에 놈의 힘이 슬슬 빠진 것 같을 땐 아예 입을 주먹으로 틀어막고 그대로 목을 가격했다.

    얼마나 그랬을까.

    도플갱어의 전신이 부르르 떨려왔다.

    우응-

    순간적으로 또 공격을 가하는 건가 싶어 경계했지만 그저 신음하는 소리였던 것 같다.

    몽둥이를 높게 들어 올리며 생각했다.

    이제 슬슬 끝을…….

    욱씬-

    시야가 흔들렸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저 적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내 생각이 천천히 흐려지는 게 느껴졌다.

    스킬의 발동 시간이 거의 끝나 가고 있구나.

    신체와 정신의 괴리감이 느껴지며, 차차 시야가 하얗게 변한다.

    “크윽.”

    부러진 팔에서 화륵- 불길이 번지는 것처럼 고통이 치밀어 올랐다. 천천히 광전사 상태가 풀리며 후유증이 밀려온다.

    벌써부터 몸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우왱-

    놈도 내 변화를 알아챈 건지 이상한 소리를 내지만 별 행동이 없다.

    도플갱어의 상태를 보면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는 것에 가까운 것 같지만.

    몽둥이를 인벤토리에 넣으며 칼을 꺼내 들었다.

    아무런 능력이 없는 단도지만 지금 상황에는 몽둥이는 어울리지 않는다.

    푸욱-

    머리에 그대로 단도를 꽂아 넣었다. 도플갱어의 숨통을 끊으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걸 위해서 놈을 죽이지 않고 계속해서 때리기만 한 거다. 힘이 완전히 빠졌을 때, 죽기 직전일 때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부우욱-

    그대로 놈의 머리통을 반으로 쩍 가르자 그 속이 드러났다.

    뇌 같은 건 없다. 겉 피부와 같이 회백색의 속살. 그리고 구슬 하나가 들어 있다.

    바로 숙주와 도플갱어 본인의 기억이 담겨 있는 구슬이다.

    이놈이 죽으면 시체와 같이 그대로 사라지는 물건이다.

    그래서 온전히 얻기 위해선 놈의 숨통이 완전히 끊어지기 전에 꺼내야 한다.

    놈은 머리가 터져나가도 죽지 않으니 산 채로 머리를 가르는 것쯤은 괜찮다.

    푸욱-

    그리고 망설임 없이 놈의 약점이라 불리는 곳을 칼로 찔렀다.

    도플갱어의 핵이라 불리는 곳이다.

    이내 도플갱어의 전신이 아까 전보다 더 격렬하게 떨리더니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도플갱어라.”

    그것을 보며 생각했다. 도플갱어. 흔하지 않은 괴물이다.

    그 서식지는 굉장히 한정적인데…….

    이곳에서 몇 주 동안 헤매며 본 광경을 생각하면 답은 하나다.

    마경.

    초보자들의 지옥. 사람보다 몬스터가 더 많은 곳.

    그야말로 최악의 환경이다. 어쩐지 사람의 흔적이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하아.”

    한숨을 내쉬며 구슬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신세 한탄을 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

    우선 내려가는 게 먼저지.

    콰릉-!

    귓전을 때리는 천둥소리에 몸을 움찔 떨었다.

    바로 근처에 벼락이 떨어졌다.

    몸을 샅샅이 뒤져서 금속이 없나 확인하고서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생각해 보면 이제까지 아무 일도 없던 게 용하다. 아까 전에도 단도를 들고 있었으니. 후유증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천천히 산을 내려갔다. 몇 번이나 진창에 빠지며 발을 헛디뎠지만 쉬지 않고 내려갔다. 그리고 드디어 벼락이 무수히 내려치던 지대를 벗어났다.

    하지만 안심한 것도 잠시,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고블린 수십 마리에 둘러싸였을 때처럼 왠지 등골이 서늘한 느낌이다.

    꽈르르르릉-!

    그와 동시에 시야가 밝게 변했다. 커다란 굉음이 귓속으로 파고든다.

    ‘왜?’

    분명히 정상에서는 벗어났는데?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이어서 강렬한 격통이 전신을 헤집었다.

    시야가 암전됐다.

    * * *

    고블린 부족장 케륵은 산맥을 보고 있었다. 벼락 산에는 끊임없이 벼락이 내리치고 있었다.

    벼락 산에는 사시사철, 날씨와 상관없이 벼락이 내리친다.

    전대 부족장에 말에 의하면 벼락 신께서는 과거 타락한 신도들에게 벌을 내리고서,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경고하는 의미로 저 산에 끊임없이 벼락을 내린다고 했었다.

    “케륵.”

    그는 산을 보며 한 남자를 떠올렸다.

    갑자기 자신의 영역에 나타나 소란을 피우던 사내.

    전대 부족장은 인간들은 굉장히 흉폭하고 잔인한 성정을 지녔으니 조심하라고 했었다.

    예전에는 인간과 같이 어울려 살 때도 있었지만 그들은 탐욕에 휩싸여 고블린들을 ‘몬스터’라고 부르면서 노예로 부리려 했다.

    ‘키룩. 인간들은 전부 위험하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로 도망 왔다.’

    전 부족장의 말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케륵은 며칠 전 고블린 한 마리가 잔인하게 살해당한 것을 보고는 전 부족원에게 그 인간을 죽이라고 지시를 내렸었다.

    하지만 그 인간은 오히려 부족원들을 전부 살해했다.

    특히 크게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했는데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부 회복되어 있는 걸 봤을 땐 모두 대경실색했었다.

    “케르륵.”

    그렇기에 조치를 취했다. 부족을 위해서.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었을까.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왠지 케륵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무엇보다 남자의 몸에서 뻗어 나오던 그 전격……. 그것이 계속해서 생각났다.

    콰과과광-!

    케륵이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커다란 굉음이 일었다. 케륵은 깜짝 놀라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모두들 혼비백산해서 뛰쳐나온 것이 보였다. 지나가는 부족원 하나를 붙잡아 말했다.

    “케륵! 무슨 일이냐!”

    “벼락, 쳤다, 저기! 사람.”

    인간의 말과 달리 고블린의 언어는 조잡하기 그지없다.

    케륵은 답답함을 느끼며 부족원이 가리킨 곳을 향해 갔다.

    “사람!”

    “아니! 사도!”

    “신의 사도!”

    거의 광적으로 부족원들이 소리치고 있다.

    의아함을 느끼며 그 사이로 파고든 케륵은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벼락이라도 내리친 것처럼 바닥이 검은색으로 불타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그 남자다.

    주변이 검은색으로 변한 것과 달리 남자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옷은 다 타 버린 것처럼 까맣게 물들어 재로 변해 있었지만, 상체에는 검은색의 흉갑을 차고 있고, 손에는 검은색의 몽둥이가 들려 있다.

    “벼락 쳤다! 사람, 거기서, 나왔다!”

    케륵은 그나마 유창한 누군가의 말을 듣고 아득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주변에서 소리치는 이들을 보며 그는 결단을 내렸다.

    “신의 기적이다! 사도님을 안으로 옮겨라!”

    그는 우선 명령을 내리고서 그 남자를 물끄러미 봤다. 남자는 마치 편안하게 잠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 * *

    [막대한 벼락의 기운을 흡수합니다.]

    [뇌령이 성장합니다.]

    [뇌령이 성장합니다.]

    [뇌령이 성장합니다.]

    .

    .

    .

    [뇌령의 허용량이 1차 한계에 달했습니다.]

    [뇌령이 2단계로 성장합니다.]

    [VVIP 유료 아이템의 특전 ‘일회성 긴급 구조 아이템’이 사용됩니다.]

    [신체가 완전히 회복됩니다.]

    [안전한 장소로의 이동이 완료되었습니다.]

    [일회성 긴급 구조 아이템이 소멸되었습니다.]

    “크윽.”

    온몸에 저릿한 감각이 느껴진다.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몸을 일으키려 힘을 주었다.

    “지금은 무리하면 안 돼요.”

    그때 누군가가 걱정 어린 목소리와 함께 내 몸을 슥 눌렀다.

    그 손길과 함께 깨달았다. 내 몸에 천 같은 것이 둘러져 있단 것을.

    몸 바로 위로 거칠한 천의 감촉이 생생했다.

    그런데 지금 내게 말을 걸고 있는 건 누구지?

    나는 자꾸 감기는 눈을 억지로 떴다. 희미한 빛이 눈을 파고들었다.

    천천히 시야가 돌아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짙은 갈색의 천장이었다.

    “케륵! 깨어나셨군요!”

    방금 전과 같은 목소리에 그쪽을 돌아보았다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난 다음에야 녀석을 똑바로 바라봤다.

    “고블린 족장?”

    “케륵. 그렇습니다, 사도님.”

    이미 안면이 있는 고블린. 아니, 사실은 고블린 개개인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단지 이 고블린이 인간의 말을 할 수 있기에 저번에 봤던 족장 고블린이라고 짐작할 뿐.

    아직 온전히 상황 파악이 되진 않았지만 슥 주변을 보다가 내 갑옷과 몽둥이가 한쪽에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 것을 보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이 좁고 눅눅한 공간 안에 있는 것은 오롯이 저놈과 나뿐.

    아무렇지 않게 갑옷을 착용하고 몽둥이를 보고서 다시 놈을 보았다.

    “무엇을 보았지?”

    일부러 모호한 말투로 말한다.

    족장은 내가 갑옷을 착용하고 무기를 드는 것을 보면서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난 분명 산의 정상에서 플레이어인 줄 알았던 도플갱어와 싸웠다.

    놈을 처리하고 산을 내려가는 중이었고.

    갑자기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

    ‘벼락을 맞았구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깨어나자마자 봤던 메시지들을 떠올리며 대충 상황을 이해했다.

    도대체 어째서 벼락을 맞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재수 없게 자연재해에 휘말리게 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을 뻔한 상황에서 이곳으로 이동 된 거라는 걸. 하지만 여전히 놈의 공손한 태도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좋게 대화를 끝냈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불필요한 다툼을 피하려던 게 목적이었다. 나에게도, 고블린에게도.

    그런데 이놈은 의식을 잃고 완전히 무력화된 나를 가만히 놔두고 오히려 이렇게 공손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도대체 왜?

    “부족의 중앙에 벼락이 내리꽂혔습니다. 케륵. 그 중앙에는 사도님께서 누워 있으셨구요.”

    다행히 내가 일부러 모호하게 말한 의도가 먹혀들었는지 놈은 별 의심이 없는 말투로 술술 말했다.

    “원래는 부족원들에게 사도님의 정체에 대해 대충 둘러댔었습니다. 하지만 어제를 기점으로 저는 깨달았습니다. 사도님께선 정말로 벼락 신께서 직접 저희 부족에 내리신 분이라는 것을.”

    “왜 그렇게 생각했지?”

    “어젯밤 벼락 신께서 계시를 내렸으니까요. 케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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