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어쩌다가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인지.
며칠 전 메일함에 낯선 이름으로 메일이 와 있었다. 보통의 메일이라면 무시했었겠지만.
[안녕하세요. 카이저 님. 오랜만에 인사드립…….]
메일의 제목에 적혀 있는 낯부끄러운 닉네임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게 클릭하게 된 메일.
[기사나 상인, 영주, 그리고 왕이나 황제까지. 당신에게는 무한한 기회가 있습니다. 어떠한 한계도, 제약도 없는 세계에서 당신의 꿈을 펼쳐 보세요.]
메일의 첫 문장은 게임의 소개 문구였는데, 내겐 굉장히 익숙한 것이었다.
예전에 내가 폐인 소리를 들을 정도로 깊게 빠져 있었던 게임의 문구였다.
방대하면서도 디테일한 세계관, 획기적인 시스템.
몬스터, 이종족, 인간 등 다양한 종족으로 캐릭터를 생성할 수 있고, 직업도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었던 게임.
‘더 리얼.’
그 게임에서 내가 쓰던 닉네임이 바로 ‘카이저’다.
던전을 실패한 적도, 적에게 패배한 적도 없는 완전무결의 ‘황제’.
‘씨발… 황제는 무슨 황제.’
나이를 먹고 보게 되니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유치하게 느껴졌다. 중2병을 겪을 나이도 아니었을 텐데.
여하튼, 난 그 당시 대부분 시간을 게임에 쏟았었고, 그 결과 모아 뒀던 돈까지 거의 탕진할 뻔했었다.
핵과금러이자 랭커.
그게 그때의 나였다.
도중에 서비스가 종료되지 않았다면 여전히 게임 폐인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안녕하세요, 더 카이저, 이호진 님.
‘더 리얼’의 GM입니다.
‘더 리얼’이 오는 7월 20일부터 비공개 클로즈베타 서비스를 시행합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오직 단 한 명만 획득할 수 있었던 VVIP 등급의 유저이자 랭커이셨던 이호진 님께서 꼭 플레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운영진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 클로즈베타 플레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VVIP 유료 아이템 팩을 동봉해 드리오니 즐거운 플레이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기에 난 메일을 본 후 고민에 빠졌었다.
애착이 깊었던 게임인 만큼 혹여나 차기작이 형편없으면 크게 실망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버의 오픈 날까지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결국 게임을 다운받았다.
‘어차피 정식 오픈도 아닌 클로즈 베타 서비스인데, 뭐.’
게다가 VVIP 유료 아이템까지 보내 준 성의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내심 지금 안 해 보면 계속 신경 쓰일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렇게 난 다운로드를 끝낸 후 캡슐 안에서 게임을 작동시켰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렘을 가득 안고서.
그래. 거기까진 아주 좋았다.
딱 거기까지는.
부스스-
앞머리를 스치는 바람에 회상을 멈추며 앞을 봤다.
풀의 향기와 바람의 상쾌함. 현재 가상현실 기기가 3세대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다.
어찌나 공기가 맑고 생생한지 코가 뻥 뚫리는 느낌이다.
아무리 게임을 잘 만들었다고 해도 기계의 성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선에서지, 그 이상을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다.
난 다시 한 번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콘솔 창을 열어서 버튼을 눌렀다.
[게임을 클리어할 때까지 로그아웃은 불가능합니다.]
게임에 접속한 지 대략 일주일.
아직도 로그아웃이 안 된다.
* * *
캡슐이 닫히며 눈앞에 화면이 떴다.
“설정은 거의 그대로네.”
다운로드 바와 함께 게임의 설정에 대한 내용이 영상으로 재생된다. 아무 생각 없이 그걸 보며 다운이 완료되길 기다렸다.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오!”
이제 시작인가?
[설치가 시작됩니다.]
아… 설치도 해야 하지.
메시지를 옆으로 밀어 놓고서 영상도 꺼 버렸다. 그러고서 메일의 내용에 대해 떠올렸다.
VVIP 유료 아이템 팩.
메일에는 정식 발매 때 판매 예정인 유료 패키지 두 가지를 합친 아이템과 한 가지 특별한 것을 포함한 팩을 클로즈베타 기간 동안 제공한다고 적혀 있었다.
스타터 팩, 성장 팩, 그리고 추가로 VVIP 고객 특전.
스타터 팩은 처음 시작할 때 필요한 것들 위주로 구성된 아이템이다. 그리고 성장 팩은 성장함에 따라서 차례대로 아이템이 지급되는 거고.
마지막으로 VVIP 고객 특전은 나를 위한 전용 특성과 아이템이라고 했다.
‘내가 그만큼 돈을 많이 썼었나.’
어쩐지 민망해질 정도의 혜택이었다.
과금 순위 1위에 랭킹 1위였으니 게임사도 기억하고 있던 건가.
‘애초에 인기가 없어서 그런 거지만.’
정말 유명한 게임이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 그런 게임은 몇억, 아니 몇십억을 쏟아붓는 사람들도 많았으니까.
반면에 이 게임은 인기가 없었다.
가상현실 기기의 상용화 및 보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때 발매된 PC 게임이라서 거의 묻혀 버린 거다.
특히 초창기에는 시장을 선점하려는 듯 유수의 게임 기업들이 대작들을 발매했었으니.
그런 시기에 나온 이 게임은 인기가 없었던 만큼 핵과금 유저도 적었고, 내가 당당히 과금 순위 1위에 오를 수 있었다.
뭐, 그래도 돈을 쓴 것에 후회는 없다.
어차피 그 당시엔 가상현실 기기를 사는 것도 꽤 비싼 가격이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게임이 재밌었으니까.’
[설치가 완료되었습니다.]
“오!”
때마침 떠오른 메시지에 반색하며 바로 게임 시작 버튼을 눌렀다.
한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가 다시 환해졌다.
사방이 하얗다.
가만히 기다리니 이내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캐릭터를 생성하시겠습니까?]
“예.”
[이름을 정해 주세요]
난 잠시 고민했다. 물론 예전의 닉네임인 ‘카이저’를 쓸 생각은 없었다. 너무 유치하니까.
“이호진.”
[‘이호진’으로 이름을 설정하겠습니까?]
“예.”
결국, 내 선택은 그냥 본명이었다. 길게 생각하기도 귀찮았고,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게 더 오글거릴 것 같았다.
이내 다시 메시지가 나타났다.
[캐릭터를 생성하는 데에는 무작위 생성과 직접 생성이 있습니…….]
“무작위 생성.”
길게 설명이 이어질 것 같아서 바로 끊었다.
어차피 클로즈베타인데 안전 빵을 택할 필요는 없으니까.
잠깐의 침묵 이후 다시 메시지가 떴다.
[VVIP 유료아이템 패키지가 적용됩니다.]
[‘신화’를 쌓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을 선정합니다.]
로딩 창과 함께 허공에 설명이 떠올랐다. ‘신화 시스템’. 바로 이 게임의 핵심 시스템 중 하나다.
만렙을 찍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신화’다.
처음에 생성된 캐릭터는 자신이 하는 행동에 따라서 소문을 쌓아 간다.
작은 선행들이나 행동들이 멀리 퍼져 나가고, 그것은 곧 명성이 된다.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신화가 된다.
나중에는 NPC들 사이에서도 마치 영웅담처럼 소문이 돌기도 하고, 신화로 말미암아 새로운 능력을 얻을 수도 있다.
즉, 레벨보다 더 중요하다.
[지역이 선정되었습니다.]
[이동을 시작합니다.]
곧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걸 알리는 메시지가 떴다.
다음 순간 아무것도 없던 발밑으로 커다란 대륙이 생겨났다. 한눈에 다 안 들어올 정도로 드넓은 대륙이.
화악-!
밝은 빛과 함께 몸이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원래 이렇게 접속되던가?’
그 생각과 동시에 기묘한 감각이 내 몸을 감쌌다.
* * *
밝다. 그냥 미친 듯이 밝다.
몸이 계속해서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꽉 감은 눈 사이로 빛이 천천히 가실 때쯤 어딘가에 도착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윽.”
불쾌한 현기증에 비틀거리다가 손을 짚었다.
잠시 그 상태로 어지럼증을 가라앉힌 후에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휘이잉-
바람이 귓가를 스치며 지나간다.
울창하게 솟은 나무들. 거친 감촉의 흙바닥. 간간이 들리는 새나 곤충의 소리까지.
“이게…….”
발로 바닥을 비벼 보니 흙이 산산이 흩어지는 느낌이 느껴진다.
몇 분 전까지 캡슐 안에 있었던 내가 지금은 대자연의 한복판에 서 있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맑고 청명한 하늘이 나무 사이로 보인다.
난 힘없이 나무 등치에 기댔다.
다양한 가상현실 게임을 해 봤지만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멍하니 앞을 보았다. 몇 분간을 그러고 있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인벤토리’를 확인해 주세요.]
“인벤토리.”
바로 메시지의 말을 따랐다. 그러자 반투명한 창이 펼쳐졌다.
[VVIP 고객 특전 팩]
[스타터 팩]
[성장 팩]
인벤토리에는 단출하게 세 가지 아이템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 세 개는 모두 묶음 아이템이었고, 난 스타터 팩부터 눌러 보았다.
투웅-
손으로 아이콘을 클릭하자 눈앞으로 가방이 떨어졌다. 그 안을 확인해 보니 미리 확인했었던 구성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침낭이나 식수, 식량 같은 아이템. 그 외에 치료약 등등.
이 게임은 스타팅 지점이 도시인 경우가 아주 적으니 꽤 쓸모 있는 것들이다.
마침 나도 숲의 한복판에서 시작했고.
계속 살펴보니 그중에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게 있었다.
바로 상급 무기 팩과 방어구 팩이다.
상급 이상의 장비들이 랜덤으로 나오는 유료 템들.
난 곧바로 두 개 다 개봉했다.
화아아악-!
밝은 빛과 함께 허공에 희미한 형체가 아른거렸다.
곧 내 앞으로 떨어지는 두 아이템이 떨어졌다.
“에이…….”
잔뜩 기대를 품으며 확인해 봤지만 곧 실망감이 들었다. 둘 다 흔한 상급 아이템들이었다.
내 팔뚝보다 조금 긴 검과 빛바랜 은색의 흉갑.
게다가 특별한 스킬이나 특성 같은 건 붙어 있지 않았다. 그저 방어력과 공격력이 준수할 뿐.
“진짜 내 돈 주고 샀으면 욕했을 것 같은데.”
쩝. 아쉬운 소리를 하면서 다른 아이템을 차례차례 풀었다. VVIP 고객 특전과 성장 팩.
곧 밝은 빛이 한 번 더 뿜어져 나왔고, 난 내용물을 확인하려 했다.
스스슥-
하지만 난 근처에서 들리는 기척에 멈칫했다.
난 곧바로 검과 방어구를 착용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VVIP 고객 특전이 적용됩니다.]
[새로운 특성과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눈앞으로 휙 메시지가 지나갔지만 내 정신은 완전히 다른 쪽에 가 있었다.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
스스스스스-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다시 뚜렷하게 들린다.
과거 폐인처럼 게임을 즐겼던 내 머릿속엔 그 당시의 기억이 생생히 남아 있다.
보통 지금 같은 흐름이라면.
[첫 번째 임무]
[미지와의 조우]
당연히 튜토리얼 전투겠지.
그 생각을 하자마자 메시지가 떴다.
본래 이 게임은 캐릭터마다 스토리가 바뀌는 편이다. 하지만 튜토리얼 때의 임무는 다르다. 같은 임무가 몇 번이나 나올 때도 있다.
세 번째였나?
맨 처음 이 임무를 접했던 게.
한번 생각이 물꼬를 트자 임무의 내용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미지와의 조우 임무는 간단히 말해서 몬스터나 짐승의 습격을 받는 상황을 말한다.
PC 게임으로 할 때는 단순히 조작법과 전투 시스템을 익히기 위한 임무였지만…….
스슥-
이번에는 소리뿐만 아니라 풀숲에 초록빛의 무언가가 스치는 게 보였다. 풀과 같은 색이어서 유심히 보지 않았으면 놓칠 뻔했다.
난 마지막으로 움직임이 멈춘 풀숲을 노려보면서 검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곧 다가올 전투에 긴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찜찜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현실적일 수 있나?’
가상현실 게임을 이것저것 즐겨 봤지만, 이 정도로까지 사실적인 느낌을 주는 게임은 없었다.
그런 생각이 한창 머리를 어지럽히던 중.
파악-!
“캬아아악!”
무언가가 풀숲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난 자연스레 생각을 멈추고서 그쪽을 보았다.
순식간에 그것이 가까워졌다.
반사적으로 옆으로 구르며 그것을 보니 곧 그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날카로운 손톱과 초록색의 동체. 그리고 일그러진 얼굴까지.
‘고블린!’
인간 이하의 근력과 그리 뛰어나지 않은 지능.
“크르르으으으.”
무리를 이루어 습격할 때 빼고는 어디까지나 초보 몹 취급을 받는 녀석이다.
그러니 튜토리얼. 즉, 첫 번째 임무의 상대로 나온 거겠지만…….
“캬아아아아악!”
쉬이이익-!
빠른 몸놀림으로 달려드는 녀석을 상대하는 나로선 피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녀석은 침을 뚝뚝 흘리면서 빨갛게 변한 눈으로 날 노려봤다.
두 번이나 녀석의 공격을 피하고 난 다음에야 검을 앞으로 치켜세우고서 고블린을 마주했다.
시퍼런 날붙이 때문인지 이번에는 고블린도 나를 쉽사리 공격하지 못했다.
주춤-
고블린을 보며 슬쩍 움직였다.
턱-!
“윽.”
하지만 미처 옆에 있던 돌부리를 확인하지 못했고, 순간적으로 균형이 무너졌다.
내 몸이 기우는 틈을 타서 고블린이 달려들었다.
파악-!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고블린.
난 균형을 회복하려 애쓰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놈은 미꾸라지처럼 피하며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끄으읍.”
팔뚝에 강한 통증이 올라온다.
그리고 동시에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고블린을 경계하면서 슬쩍 팔뚝을 봤다. 주륵- 상처에서 핏물이 흘러나온다. 가볍지 않은 부상이다.
깊게 파인 왼쪽 팔뚝. 그리고 내가 느꼈던 위화감.
‘왜 아픈 거지?’
가상현실 게임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가상현실일 뿐이다.
이렇게 생생한 통각을 느끼게 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보통은 머리가 깨지고, 팔이 잘려도 게임 내에선 아릿한 통증만 느껴질 뿐.
반면에 지금은 ‘고작’ 팔뚝이 베인 것뿐인데 미치도록 아프다.
“키이이.”
고블린은 나를 보며 비웃음 같은 울음소리를 낸다.
나는 이를 악물며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고블린은 사냥감이 약한 모습을 보이면 더 흥분하는 몬스터니까.
‘사냥감이라.’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고작해야 고블린이다. 오크도, 트롤도 아니고 고블린. 그런데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뭐지?
나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고블린은 이내 나에게 확 달려들었다.
“케에엑!”
고작 고블린한테 죽는 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고블린의 손톱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위기 상황, 특성이 자동 발동됩니다.]
그때였다. 갑자기 메시지가 떠오른 것은. 또한 거의 동시에 전신에 강렬한 짜릿함이 올라왔다.
심장이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고블린이 나를 보고 흠칫 놀라는 게 보인다.
세포 하나하나가 감전된 것 같다. 살갗 위로 푸른색의 전격이 튀어 올랐다.
[VVIP등급 유저 ‘이호진’ 전용 특성, ‘뢰신(雷身)’이 적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