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
[시스템이 초기화됩니다.]
[인벤토리가 사라집니다.]
[사용자 권한을 회수합니다.]
시스템이 멈춘 지 열흘 정도가 지난 아침이었다.
회색 창의 시스템은 그 세 가지 메시지를 토하듯 뱉어 낸 후 그대로 사라졌다.
갑자기 멈추더니, 이제는 초기화? 사람들은 당황하며 시스템 창을 계속해 불러냈지만,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뿐인가. 인벤토리에 있던 아이템들이 모조리 주변에 쏟아졌다. 방에서 잠을 자던 어떤 헌터는 던전 부산물에 깔려 죽을 뻔했다나.
스킬도 마찬가지였다.
스킬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다만 시스템으로 편하게 상태를 봐 가며 시전하던 스킬들을, 이제는 머릿속으로 계산해 가며 써야 했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아, 이게 뭐야! 미치겠네!”
아침에 조깅하다 말고 한강 공원에서 인벤토리 내용물이 와르르 쏟아져 그거 다 주워 담느라 고생하신 S급 헌터 권욱의 경우.
다른 헌터 기관들이 그렇듯, 서울지청도 가장 먼저 권욱을 데리고 던전으로 들어갔다. 시스템은 초기화되었지만 던전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사라졌다면 스킬은 장전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장비도 사용이 가능한가? 그런 것 따위를 테스트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전에는 게임처럼, 시스템상에서 스킬을 시전하고 이것저것 재 보는 게 가능했지만 이젠 그럴 수 없었다. 눈앞의 몬스터가 어떤 종류인지, 체력은 얼마나 되는지 같은 걸 살필 시간에…….
“으악! 마력 얼마나 남은 거야!”
그냥 맨몸으로 싸워야 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것이 본래 시스템이 없는 세계의 당연한 법칙이었다. 상대방 체력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다 눈으로 보고 따져 가며 싸우는 일은 게임에서나 가능한 것.
하여 평소보다 훨씬 힘들게, 그리고 자원을 낭비해 가며 B급 던전 하나를 공략하고 나온 권욱의 첫 마디는 ‘저 월급 올려 주세요. 이대로는 일 못 해.’였다.
참고로 시스템이 있는 상태에서 S급인 권욱이 B급 던전을 공략하는 데에는 하루 이틀이면 충분했고, 시스템이 없는 상태에서는 일주일 정도가 걸렸다.
효율이 극도로 나빠졌다는 얘기다.
“뭐, 괜찮아요. 던전은 곧 사라질 거니까.”
헉헉거리며 나온 권욱 앞에서 하라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시스템 초기화가 진짜로 의미하는 바가 뭔지 알고 있는 건, 하라뿐이었다.
하라가 균열의 괴물을 물리친 사이, 시스템 관리자는 잽싸게 시스템을 리셋했다.
시스템이 초기화되며 사용자들의 권한을 전부 회수했다는 말은, 첫 번째 지구의 ‘성좌’들도 이쪽에 관여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들 또한 시스템의 사용자니까.
애당초 던전이 왜 생겨났는지에 관해 생각해 보면 다음 답도 쉽게 도출할 수 있었다.
“그들이 지구를 건너다니며 생긴 통로가 마구잡이로 다른 지구에 생겨난 거니까.”
그들이 다른 지구에 간섭할 수 없다면, 던전의 발생도 자연히 줄어들 것이다. 그러다 결국, 사라지겠지.
실제로 헌터 관련 게시판에는 ‘성좌가 사라졌다.’는 게시물이 이미 몇 개씩 올라오고 있었다. 성좌를 끼고 S급이 되었던 헌터들 또한 마찬가지일 테다.
그 이야기를 듣던 권욱이 신음했다.
“아니, 사라질 거면 나는 지금 무슨 개고생을…….”
“개고생은 아니죠. 현재 남아 있는 던전들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래도 나 혼자 보낼 건 없었잖아!”
“안 들려요.”
하라는 귀를 막으며 약을 올렸다. 권욱이 씩씩대다가 곧 심각한 얼굴을 했다.
“잠깐만, 그럼 우리 곧 쓰레기 되는 거네.”
“쓰레기라뇨. 그리고 ‘우리’로 묶지 말아 주실래요?”
하라가 정색했다. 하지만 이은주 청장도 얼굴이 굳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되면 헌터청이 아예 사라져 버릴 텐데.”
“……좋은 거 아니에요?”
“궁극적으로는 사라지는 게 가장 좋은 일이기는 하지.”
던전 때문에 파괴되는 도시나 기간 시설, 인명 피해 등을 생각하면 던전은 사라지는 게 좋다. 헌터청도 본래는 없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은주 청장은 복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20년씩 헌터청에 매여 있거나 매여 있을 예정이던 사람들 생각은 좀 해야겠어.”
“아…….”
물론 그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튼 공무원이란 늘 모자라서 탈이지, 넘치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때, 가만히 앉아 있던 권욱이 뭔가 떠오른 듯 핫, 하고 일어났다.
“꼬불쳐 둔 내 마석들!”
마석 가격이 떨어질 것은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타이밍이 별로 안 좋았다.
하필 권욱이 벌떡 일어난 것은 이은주 청장 앞이었고, 사람 좋은 인상으로 빵집 아줌마라는 별명을 가진 이 청장은 권욱을 보며 환히 웃었다.
“권욱 씨 재산은 대충 다 압류한 줄 알았는데, 뭐가 또 있나 봐?”
“앗, 그게 아니고요, 청장님.”
“아니긴 뭐가 아냐. 당장 가져와.”
이은주 청장이 웃으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안 그래도 공원에서 인벤토리가 아이템을 뱉어 냈을 때 함께 떨어진 다른 마석들도 한번 거하게 재압류됐다고 들었는데.
권욱이 ‘이이잉.’ 하고 애교를 부렸지만 소용없었다. 하라가 딱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권욱 씨, 그런 건 아이돌 시절에나 했었어야죠……. 그럼 좀 천천히 망했지.”
“약 올리냐?”
아무튼 시대가 급격히 바뀔 것은 충분히 예상되는 바였다. 헌터들이 나타나 갑작스럽게 바뀐 세상은 다시 다른 방식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하라는 생각했다.
“그래도 아마 당분간은 잔존해 있는 던전 때문에 다들 바쁠 거야. 현재 갖고 있는 던전 부산물을 다른 방식으로 쓰는 것도 연구해 봐야 하고.”
“그렇군요…….”
“그런데 이 와중에.”
이은주 청장이 하라를 힐끗 바라보고 타박이 담긴 시선을 던졌다.
“지방 발령을 내 달라고.”
헤헤. 하라가 목뒤를 긁적였다.
*
쏴아아…….
바다 소리가 엄청났다. 검은 바위 위로 파도가 치면, 새카만 갯강구들이 와르르 이리 몰려갔다가 저리로 몰려갔다. 바위틈 사이에 피어나 있는 덩굴들은 본 적도 없는 것들이었다.
구멍이 숭숭 난 돌담장 틈으로 노란 꽃이 피었다가 진 흔적을 가늠해 보며 세헌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하여튼 풍광 하나는 끝내주는 집이었다. 바닷가 바로 앞. 1분만 걸으면 파도가 쳤다. 낡은 집이었지만 조금만 손보면 그럴듯한 곳이 될, 작은 집. 마당은 은근히 넓고 잘 다져져 있었다.
그러니까, 아마 윤세헌이 만약 이곳에 쉬러 왔다면 정말로 달가웠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좌천…….”
세헌은 파도치는 바위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음험하게 웃었다.
윤세헌 인생에 한 번도 있어 본 적 없는 단어.
좌천.
그렇다. 윤세헌은 좌천당했다.
그것도 제주 편집제작국으로.
그 이유는 간단했다. 돌아온 세헌은 미련 없이 시원하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부친의 비리부터 탈탈 털었다. 그뿐인가. 부친 주변인들도 싹 털었다. 이미 물러난 헌터청 본청장은 물론이고, 가지고 있던 온갖 카드는 다 써 버렸다.
그게 어찌나 기가 막힌지 뉴스부장이 ‘야, 윤세헌. 너 시한부냐? 어? 이따위로 오늘만 살래?’라고 꽥꽥 소리를 질렀을 정도였다.
윤순현 의원만 털었다면 괜찮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윤 의원에게 뇌물받은 재계도 털었고, 윤 의원이 만났다는 사람들은 죄다 털었다. 그중에는 공영 방송국에 제법 힘깨나 쓰신다는 어르신들도 몇 계셨다.
그러자 당연하지만 보복성 좌천이 떨어졌다. 그때 좌천 발령받은 후 윤세헌이 보도국에서 했던 소리는, 회사 블라인드에서 두고두고 회자됐다.
“아- 이왕 좌천당할 거 사장까지는 털고 내려갈 걸 그랬습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더불어 보도국장이 윤세헌에게 꽥 소리 지른 건, 그대로 세헌의 별명이 됐다.
미친 새끼. 잘생겼다고 맨날 얼굴마담 소리 듣는 것보다야 미친 새끼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그렇잖아도 9시 뉴스를 하도 자주 빼먹어서, 여러모로 밉보인 마당이었다. 본래 세헌은 징계나 달라, 아니면 파면이나 권고사직으로 해 달라고 우겼다.
자진 퇴사도 아니고 무슨 권고사직이냐고 보도국장이 큰소리를 내자, 세헌은 뻔뻔하게 답했다.
“실업 수당 있어야 여자 친구랑 데이트도 좀 하고 그럴 거 아닙니까.”
실업 수당……. 보도국 전체의 어이가 가출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후배 민영은 ‘윤세헌 입에서 실업 수당이라는 소리와 여자 친구란 소리가 동시에 나오다니,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 거냐.’라고 깔깔 웃었다.
아무튼 회사 간판 앵커가 자진 퇴사하게 둘 수는 없었다. 남들 눈에는 자기 부친까지 고발해 가며 뉴스 빵빵 터트린 1등 앵커가 퇴사하는 상황이다. 외압 소리 안 나오면 다행이게?
그로 인해 결국 세헌은 좌천됐다. 누가 봐도 보복성 발령이지만, 보도국장은 ‘윤세헌 앵커, 요즘 힘들었으니 좀 쉬다 오라고 그랬다.’며 언론 비평 전문지의 인터뷰 요청에 뻔뻔하게도 대답했단다.
뭐, 상관없었다.
“진짜 끝내주게 쉬고 가야겠군요.”
그렇게 말하며 세헌은 뒤돌아 웃었다. 차에서 막 짐을 내리려던 하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쉬러 와서 짐 나르지 말고.”
“하지만 제가 윤세헌 씨보다 힘세…….”
“……다는 말도 하지 말고.”
하라의 손에서 짐을 빼앗아 들며 세헌이 코를 찡그려 보였다. 하라가 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