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아이고, 청장님! 중신은요! 그게 아니라…….”
하라가 손짓, 발짓 다 하며 그 남자가 자신을 구하려다가 던전에 같이 휘말린 이야기를 설명하자, 이은주 청장이 흥미를 보였다.
그때였다. 휴대 전화가 삐로록, 울렸다. 전화기 화면을 보니 ‘짜증나는인간’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하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청장님. 제가 지금 권욱 전화를 받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글쎄, 난 모르지.”
둘이 사이가 안 좋은 걸 알고 있는 이 청장이 피식 웃었다.
“아유, 청장님! 저 제주나 강원으로 발령 좀 내주세요. 예? 권욱 너무 싫어요!”
“그럼 그쪽은 고맙지. 근데 내가 강하라 씨 중신 서려면 제주는 좀 힘들 텐데?”
결국 ‘아이고, 중신 아니라니까요!’ 하고 징징대며 한편으론 전화를 받으니 상대가 대뜸 성질을 냈다.
- 야, 강하라 노냐?
“아, 왜 또 시빈데요.”
- 너 요새 무슨 남자 찾는다고 논다며? 장난치냐? 누군 죽도록 일하는데…….
“상암동 털고 나온 게 일주일 전이거든?”
전화로 티격태격하고 있으니, 이은주 청장이 재킷을 들고 일어섰다. 다시 국회에 돌아가야 한단다.
입 모양만으로 ‘청장님, 죄송해요. 살펴 가세요.’ 하고 있으니, 이 청장이 알 만하다는 듯 손을 살래살래 저었다.
“집에 청장님 와 계시는데 지금 님 때문에 배웅도 못 하고 있거든요? 할 말 더 없으면 끊지?”
- 바쁜 청장님은 왜 방해하냐? 노는 주제에. 너 남자에 미쳐서, 어? 아주, 심지어 뭐? 인터넷에서 본 남자라며?
“아, 꺼져, 꺼져! 인터넷에서 봤든가, 던전에서 봤든가 뭔 상관인데요!”
- 상관이 있지! 네가 놀면 내가 일해야 되거든, 어?!
강하라가 쓸데없이 온갖 인맥 다 동원하는 바람에 권욱에게까지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권욱은 저 혼자 일하느라 아주 삭신이 쑤신다느니, 네가 서울지청 채널에 하도 안 나와서 제 얼굴이 아주 닳겠다느니 하는 소리를 한참이나 늘어놨다.
어이가 없는 소리였다.
하라는 기가 막혀서 그 모든 말에 다 말대꾸하며 티격태격하느라, 어느새 이은주 청장이 말했던 남자의 신상은 까맣게 잊어 버렸…….
*
퍽.
[시나리오를 멈춥니다.]
“싫어요!!!!! 이게 뭐야!”
즐겁게 턱 밑에 꽃받침을 하고, 시스템이 띄워 주는 영상을 감상하던 하라가 큰 소리를 냈다.
[해당 시나리오를 멈추시겠습니까? Y/N]
“정지! 완전 정지!!!”
하라는 미친 듯이 시스템의 정지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시스템은 끄덕하지 않고 다른 메시지를 내보냈다.
[해당 결괏값은 사용자 ‘강하라’가 과거에 개입한 상황에서 가장 가능성 높은 미래를 추출한 것입니다.]
[해당 결괏값 시나리오를 보상으로 받으시겠습니까? Y/N]
“싫어요, 안 받을래요.”
하라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흰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그녀에게 시나리오와 결괏값을 설득하는 시스템 창만 두어 개 떠 있을 뿐이었다.
이 아공간에 갇힌 건, 균열의 괴물을 처치한 직후였다.
막 균열의 괴물을 쓰러트렸을 때.
[시스템의 인과율이 제어 범위를 벗어났습니다.]
[시스템 관리자에 의해 초기화 중…….]
[초기화 과정에서 중대한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사용자에 의한 오류 복구 중…….]
그 시스템 메시지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균열의 괴물이 쓰러지자 대혼란이 온 시스템을 관리자가 초기화하고 있다는 건, 아마도 성복이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이리라. 아무튼 성복 또한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던 것이다.
하라에게 약간의 힌트를 줄 정도로는.
[!경고!]
[시스템 초기화 중에는 차원 시스템이 섞일 수 있습니다. ‘차원 이동권’의 사용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경고!]
[시스템 초기화 중에는…….]
하라는 넋을 놓고 잠시 그 메시지를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스킬이 생각났다. ‘합체’를 사용하기 직전, 그 근방에 있던 잡스러운 스킬이다.
[‘간파(C)’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그녀가 윤세헌에게 돌아가려면 지금에야말로 이 스킬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찜(F)’을 사용합니다.]
[!경고!]
[시스템 초기화 중입니다. 정말로 ‘찜(F)’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완전 사용할 건데요!’
그리고, 스킬을 사용한 직후 하라는 웬 아공간에 안착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스킬에 실패한 줄 알고 얼마나 좌절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시스템은, 그녀에게 아직 보상 지급이 남았다며 하라를 잠깐 불러세운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그다음 본 것이, 하라가 방금 전까지 보고 있던 미래 시나리오였다.
하라가 앞서 과거의 세헌과 영은을 구해 주는 바람에 새로운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시스템은 그 결괏값을, 하라에게 보상으로 지급해 줄 수 있다고 제의했다. 이왕 초기화하는 김에, 하라가 있던 지구의 과거까지 바꾸는 것이었다.
그 시나리오는 정말로 완벽했다. 고등학교 3학년 내내 ‘우기 오빠 걔’라고 불렸던 흑역사도, 9급 공무원 시절의 ‘걍 찐’ 하라도 없었다.
그뿐인가. 하라는 18세에 S급 헌터로 각성해 승승장구했다. 10년 넘게 헌터로 활동하면서…….
“그 와중에 윤세헌 씨를 또 만났네…….”
하라는 허탈하게 웃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흑역사의 현장에, 기자 입봉은커녕 쇼핑몰 서점에서 책이나 구입해서 나오던 윤세헌이 있었던 것이다.
‘학생.’ 하면서 자신을 구해 주려다 던전에 휘말리는 윤세헌을 보고 하라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뭐 하는 사람이래, 대체…….”
던전에 한 번 휘말려 끔찍한 일을 겪었음에도, 도망 안 치고 오히려 그 안으로 뛰어들려는 여자애를 말리는 오지랖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러면서도 약간의 안심은 됐다.
본래 윤세헌은 던전에서의 트라우마를 이기지 못하고 함묵증을 앓는 한편, 어머니의 죽음을 이용하는 부친에 대한 복수심에 앵커가 됐었다.
하지만 새로운 과거의 세헌은 던전으로 뛰어드는 하라를 구하려 했다. 그것만 봐도 세헌이 더 이상의 트라우마를 겪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해당 시나리오에서의 지정 사용자 ‘윤세헌’의 행복도는 96%입니다.]
때마침 하라를 약 올리듯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하라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시스템 메시지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었다.
“행복도 96%…….”
세헌의 말마따나 그가 기자도 되고, 앵커도 했던 건 그의 인생이 불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아니, 정확히는 해외 VJ가 찍은 영상 속의 세헌은 정말 표정이 좋아 보였다. 어머니도 살아 계신 데다가, 자유롭게 사는 듯했다.
“그럼 원래의 세헌 씨는 얼마나 행복한데요?”
[시스템 초기화 중…….]
그러나 하라의 질문에 시스템은 초기화 중이라는 메시지만 반복했다. 어이가 없었다. 기존의 행복도를 알려 줘야 비교하고 결과를 도출할 거 아니야?
“이게 무슨 일이냐…….”
강하라는 흑역사 없는 S급 헌터, 윤세헌은 자유롭고 행복한 독서가.
딱 한 가지만 빼면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윤세헌이 강하라 애인이 아니라는 거.
“……어딜 가든 기어이 만난다고 했으니까 역시 윤세헌 씨의 행복을 우선해야 하나. 으음.”
하라가 고개를 기울이며 갈등할 때였다.
“그거 선택할 겁니까? 난 별로 같은데.”
“……?”
익숙한 목소리. 그리고 갑작스럽게 확 메슥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시야가 블랙아웃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
하라는 눈을 떴다. 그리고 저도 모르는 사이, 자신이 어딘가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즉시 벌떡 일어났다.
그 직후.
텁.
“굿모닝.”
확 일어난 그녀의 이마와 제 이마가 부딪힐까 봐, 하라의 이마를 잽싸게 붙든 채 부드럽게 웃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윤세헌이었다.
“이게 뭐야? 꿈이에요?”
하라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주변을 바라봤다.
익숙한 곳이었다. 작은 침대, 그리고 지나치게 깔끔해서 사람이 사는 것 같지도 않은 방. 하지만 하라가 한동안 묵었던 그곳.
세헌의 집, 게스트 룸이었다.
세헌이 피식 웃었다.
“꿈 아닙니다.”
“뭔데요, 그럼?”
“처음엔 저도 제 집 침대에서 그쪽이 자고 있는 걸 보고 꿈인 줄 알았죠.”
그는 짧고도 진중하게, 사흘 밤을 샌 여파로 죽은 듯 자고 일어났는데 게스트 룸에서 웬 인기척이 나서 들어와 봤더니 강하라가 누워서 잠꼬대를 하고 있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하라의 눈이 커졌다. 아공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꿈이었나.
“게스트 룸에 누굴 초대한 적도 없어서 도둑인 줄 알았건만, 거기에 자고 있는 게 사람 맘대로 보내 버리고 열흘 넘게 속 태운 여자 친구라니.”
하여 그는 문가에서 팔짱을 끼고, 하라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그쪽이 엉뚱한 잠꼬대를 하지만 않았어도 그대로 며칠은 두고 보았을 겁니다.”
“엉뚱한 잠꼬대요?”
하라는 어안이 벙벙해했다. 세헌은 어깨를 으쓱하며 짧게 읊었다.
“그럼 원래의 세헌 씨는 얼마나 행복한데요?”
“……헐.”
“어딜 가든 기어이 만난다고 했으니까 역시 윤세헌 씨의 행복을 우선해야 하나, 같은 말?”
그의 어투는 분명하게 비아냥대고 있었다. 하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게졌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려는 하라를 세헌은 가만두지 않았다. 두 손을 뻗어 하라의 뺨을 누르듯 붙잡은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눈을 부라린 채, 말을 이었다.
“참고로 저는 벌써 선택했습니다.”
“뭐, 뭐 하셨는데요…….”
기가 죽은 하라의 질문에 세헌은 코웃음 쳤다.
“맞혀 보세요.”
“……제가 지금 윤세헌 씨 게스트 룸에 있는 게 맞죠?”
“예. 참고로 삐약이가 부순 건 다 보수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하라는 기함했다.
“아니, 그 시나리오를 버리셨다고요?!”
“안 됩니까?”
“생각을 해 보세요! ‘윤세헌 인생 행복해지기+강하라 흑역사 청산’ VS ‘강하라 흑역사 유지+윤세헌 인생 안 행복’이면!!!”
“저도 봤습니다, 그 시나리오. 행복은 충분히 누렸습니다.”
“하지만!”
하라는 뭔가 더 말하려다가, 말문이 막혔다. 그에 세헌은 피식 웃었다.
“압니다. 강하라 씨가 그쪽 행복보다 제 행복을 더 우선시한 거.”
“…….”
“저도 솔직히 갈등 안 했다면 거짓말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