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윤세헌 코앞에서 하기엔, 강하라는 아직 하수였다.
그러니까, 그를 귀엽게 여기는 것과 별개로 윤세헌 얼굴에다가 대고 ‘님, 지금 되게 귀여우세요.’라고 말하기엔 강하라가 좀 덜 뻔뻔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둘의 사이가 벌어지지 않은 건, 전적으로 윤세헌의 태세 변화가 빨랐기 때문이다.
“……뭐, 됐습니다. 억울한 건 억울한 거고, 지금 강하라 씨 남자 친구는 저니까.”
“…….”
뭔데요. 그렇게 말하는 거 반칙 아닌가요. 심지어 그렇게 말하면서 손 고쳐 잡는 건 두 배로 반칙 아닌가요? 네?
“아이구, 두 분 사이 좋으시네요. 그럼 저는 이만…….”
“어딜 갑니까.”
물론 하라의 손만 고쳐 잡은 건 아니었다. 세헌은 그사이 슬그머니 사라지려던 성복의 뒷덜미를 반대쪽 손으로 붙들고 눈을 부라렸다.
성복이 깨갱, 했다.
“이건 해결하고 가야 할 것 아닙니까.”
“아이, 사랑으로 해결된 거 아닌가요? 러브 앤 피…… 죄송합니다.”
장난하냐는 눈빛의 두 사람이 성복을 매섭게 노려봤다. 특히 하라는 험악한 얼굴이 되어 인벤토리를 열려다가 아차, 했다. 아직도 시스템 창이 비활성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희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말 좀 해 주세요.”
“……솔직히 말씀드려도 돼요?”
성복이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입을 뗐다.
“저도 잘 몰라요.”
“저기요!”
하지만 사실이었다. 성복은 우물쭈물하며 털어놨다.
“그게, 제가 탈출하는 게 우선이라 막판에는 인과율 꼬아 놓는 데만 집중하는 바람에요.”
하라가 지구를 건너다니며 꼬아 놓은 인과율 덕에 성복이 탈출했다는 것은 정말로 기쁜 일이나, 문제는 꼬인 과거사와 차원이었다.
성복은 쭈뼛거리다가, 변명하듯 말했다.
“사실 중간에 강하라 씨를 한 번 꼬셔서 제가 있는 쪽으로 데리고 오려고 했거든요…….”
성복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처음에 그는 적당히 시스템을 조작해 이벤트 퀘스트를 주는 식으로 하라를 한 번 꾀어내려고 했다. 큐피트는 좋은 핑곗거리였고, 하라를 퀘스트로 소환하는 것 정도는 그리 큰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때까지만.
“대장간 퀘스트!”
하라가 듣자마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성복이 손가락을 퉁겼다.
“그거 사실 저예요.”
“……근데 저 그 이벤트권…….”
“맞아요. 저 주셨더라고요…….”
성복은 흐린 눈으로 당시를 회상했다.
시스템으로 급조한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 퀘스트에 소환된 건, 다름 아닌 복희였다.
처음에는 낭패였다 싶었지만, 거기 와서도 그 말도 안 되는 이벤트 퀘스트를 성실하고도 열심히 하고 있는 복희를 보며 성복은 생각했다.
‘저거 나네…….’
쉼 없이 요술봉을 스무 개 넘게 만들고 있는 복희를 보며 나중에는 저도 모르게 응원까지 했다나.
자신이 시스템 관리자가 아니었다면 복희의 성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는 성복을 보며, 하라는 문득 래영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김성복한테만 상냥한 이 세계관 대체 뭔데…….”
그게요, 시스템 관리자가 김성복이라 그랬답니다…….
하라는 그와 함께 ‘인류의 구원자 김 성 복!’ 하고 빙글빙글 도는 요술봉도 떠올렸다. 지금은 인벤토리에 들어가 꺼낼 수도 없는 그 요술봉……. 그러니까 아주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니긴 한데.
그러다가 하라는 흠칫하고 세헌을 붙들었다.
“헉, 세헌 씨. 어떻게 하죠?”
“네? 왜 그러십니까.”
“율리 개인봉…….”
그만 깜박 잊어버린 게 있었다. 영은에게 들려 준 율리의 응원봉 말이다.
“거기에 스트레인지 걸즈라고 쓰여 있는데! 큰일 났다!”
“그건…… 정말 큰일이긴 하네요.”
세헌이 이마를 찌푸렸다.
반면 성복은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과거 다 바꿔 놓고 그런 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구영은 씨도 구했는데 아이돌 응원봉은 그냥 공주 요술봉이겠거니 하겠죠. 그러니 일단 이거 받으세요.”
“예? 뭔데요?”
성복이 내민 건 기다란 기둥 같은 물건이었다.
하라는 엉겁결에 성복이 건넨 그 물건을 받아 보고는 눈을 깜박였다. 이거, 어째 내 검 같은데…….
“그거 열세 번째 검이에요.”
“예?”
“사실 어둠에 묻혀서 나오지 말아야 할 물건…… 은 거짓말이고요.”
복희는 제작 스킬을 얻은 이후로 주로 검을 만드는 데에 매진했다. 하라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끝내 복희가 하라에게 SS급 검을 만들어 주기는 했지만, 문제는 하라가 그걸 김성복 만나겠다고 부숴 먹었다는 것이다.
성복은 좌절했다.
“그거 제가 만든 거 아니긴 한데 그렇다고 SS급 검을 그렇게 뽀개는 사람이 어딨어요…….”
“죄송…… 아니, 근데 성복 씨가 만든 거 아니면 제가 사과 안 해도 되지 않아요? 그리고 아무튼 만나긴 만났으니까…….”
그렇게 답하며 하라는 그 검을 뜯어봤다. 복희가 열두 개의 검 이후 숨겨진 하나의 검 어쩌고, 하던 걸 하라도 기억하고 있었다.
“근데 첫 번째 검 다음에 나온 거면 그냥 두 번째 검 아닙니까?”
세헌이 고개를 갸웃하며 옆에서 들여다보자 성복이 ‘어둠에 숨겨졌던 비밀의 존재가 만들었으니 열세 번째라고 쳐주시겠어요?’ 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비활성화되어 있던 시스템 창이 열렸다.
[인과를 가르는 빛의 검 SSS (제작자: ???)]
지정 사용자(강하라) 귀속 아이템
SSS? 하라의 눈알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이게 무슨…….”
“일단 받으시고요.”
SSS급 아이템을 주면서 일단 받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라는 저도 모르게 검을 부둥켜안았다.
성복은 뭐가 그렇게 급한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일단 강하라 씨한테 보상으로 드린 차원 이동권은 수량이 정말 그거 한 장뿐이에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보시면 될 거예요.”
“……음…….”
세헌이 주머니에 집어넣어 뒀던 차원 이동권을 꺼내 눈살 찌푸리며 들여다봤다. 이 허접한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이거지.
“다른 걸 더 만들어 낼 순 없어요?”
“못 만들어요!”
성복은 얄밉게까지 느껴지는 웃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시스템을 관리하고 있던 데서 제가 탈출해 버렸으니 이제는 저도 손쓸 수가 없어요. 제 손을 떠났거든요.”
“아…….”
“애당초 저걸 누구 한 명이 컨트롤한다는 게 어불성설이라고 윤세헌 씨도 말씀하셨잖아요.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아니, 맞는 말이긴 한데 저렇게 말하니까 되게 얄밉네?
그렇게 하라가 생각할 때였다.
갑작스럽게 세헌이 하라의 손을 유독 세게 잡아 왔다. ‘아야-’ 하라가 저도 모르게 신음할 정도로 드센 악력이었다.
“세헌 씨, 왜…….”
“저게 뭡니까.”
하라는 눈을 깜박이며 세헌을 바라봤다. 세헌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고, 하라는 그게 성복이 말한 ‘저걸’, 즉 시스템 창 쪽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을 때는…….
“저, 저게 뭐야.”
하라도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허공에는, 아까부터 계속 커지고 있던 시스템 창이 하늘을 가득 덮으며 떠 있었다. 수천억- 아니, 천문학적인 숫자로 가득 찬 시스템 창.
뒤이어 성복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냐하면 저렇게 되니까!”
다음 순간이었다. 그 숫자들이 갑자기 한순간 멈추고, 깜박이기 시작하더니 하나의 창을 띄웠다.
[시스템 오류]
그뿐인가. [시스템 오류]라는 창이 허공에 수십 개, 수백 개가 뜨기 시작했다.
다다다닥……. 눈 깜짝할 사이에 늘어나는 회색 창은 공포에 가까웠다. 게다가 수백 개로 늘어난 시점에서, 그 모든 창은 새빨갛게 깜박이기까지 했다.
하라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는 사실을.
[균열의 괴물(SSS)이 눈을 뜹니다.]
[새로운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와 함께 허공에 균열이 천천히 열렸다. 하늘 전체를 가르는 균열이었다.
“저기요, 김성복 씨!”
‘저거 뭐예요, 어떻게 해 봐요!’ 그렇게 말하려고 뒤를 돌아본 직후, 하라는 부리나케 도망치는 김성복을 발견했다. 정확히는 허공으로 사라지려는 김성복이다.
하라는 급히 날아 성복의 뒷덜미를 잡았다.
“어디 가!”
“죄송해요! 저 저거에 잡히면 또 몇천 년씩 갇힐 거예요!”
이거 수습하기 전엔 도망 못 간다고 말하려던 하라가 멈칫했다. 몇천 년…….
성복은 팔자로 눈썹을 누그러트리며 싹싹 빌었다.
“시스템에 자가 회복 기능 넣어 뒀더니 그게 저런 식으로 저 잡으러 다닌단 말이에요.”
“그래도 같이 도와줘야죠! 저걸 지금 저 혼자 뭐 어떻게 하라고요?”
“강하라 씨도 한몫했어요!”
“제가 뭘요!”
“페널티!”
성복이 큰소리로 외친 단어에 하라가 멈칫했다.
불사조의 부활 스킬. 거기에는 분명히 페널티가 있다고 명시돼 있었다.
“지금 차원도 꼬이고, 지구도 다 꼬인 와중에 강하라 씨가 과거까지 바꿔 놔서 저렇게 된 거라고요.”
“…….”
“곧 퀘스트 뜰 거예요. 페널티 귀속 퀘스트요.”
그 말대로였다. 하라의 앞에 시스템 창이 떴다. 여전히 비활성화된 창이었다.
[페널티 퀘스트: 균열의 괴물(SSS) 공략]
[해당 퀘스트는 귀속 퀘스트입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N]
[단, 거부 시 자동으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수락 시 시스템 창 활성화 가능]
기가 막혔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었다.
하라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허공의 거대한 균열에서, 천천히 회색의 뭔가가 내려오고 있었다.
식은땀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