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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공무수행에 협조 부탁드립니다-207화 (207/223)

206화

“강하라 씨가 제 목숨 구해 준 것도 그렇고요. 음…….”

세헌은 조금 혼란스러운 듯했다.

자신은 특별한 능력에 대해 어떤 욕망도 없는 사람이지만, 막상 그 능력을 가진 강하라에게 목숨을 빚진 입장이니 말을 고르기가 어려울 법도 했다.

하라는 부드럽게 세헌의 팔을 붙잡았다.

“제가 각성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덕분에 윤세헌 씨 구할 수 있었으니까.”

“…….”

“-로 요약할 수 있겠죠.”

세헌의 눈빛이 다정해졌다.

“그것 보세요.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네? 뭐가요?”

“상황이 복잡한들 늘 너무 쉽게 답을 찾으니까요, 강하라 씨는.”

어떻게든 될 거라는, 희망뿐인 말도 강하라가 있다면 근거 있고 확실한 말이 되는 것이다.

하라가 뺨을 붉혔다. 세헌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 얼굴을 들여다봤다. 김성복도 흐뭇하게 웃었다.

“음, 세상에서 제일 안 될 것 같았는데 이게 되네.”

“그쪽은 흐뭇하게 웃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물론 윤세헌의 다정함은 강하라 한정이었다.

성복 쪽을 향해 험악한 표정을 지은 세헌을 보고 성복이 멋쩍게 코를 훔쳤다.

“그리고 무슨 뜻입니까, 그거.”

“어…….”

“대충 짐작은 했습니다. 그 말도 안 되는 퀘스트.”

하라 또한 세헌의 말에 눈을 희번덕거리며 끼어들었다.

“맞아! 어디서부터 어떻게 된 거예요?! 분명히 제가 큐피트였다고요!”

성복이 눈알을 굴리며 회피했지만 두 사람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도망이라도 쳤다간 지구 끝까지 쫓아올 기세였다. 아니, 지구 끝이 뭔가. 차원을 건너온 이들이다.

“음…… 뭐냐면요, 그게.”

성복은 머리를 긁적였다.

“원래 제가 찾던 게 있었는데, 그건 사실 절대로 만날 수 없는 대척점 같은 거였거든요?”

뭔 소리야. 제대로 알아듣게 말해. 두 사람의 싸늘한 눈빛이 성복을 습격했다.

성복은 어이쿠…… 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

김성복은 어느 날 깨달았다.

자신이 시스템에 갇혔다는 사실을 말이다.

맨 처음에는 분명, 성좌들에게 제 존재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몸을 감췄다. 그가 몸을 감춘 곳은 주로 던전의 균열 사이였다.

시스템은 아주 안락했으므로 그는 거기에 주저앉았다. 그래서 자신이 어느새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도 몰랐다.

“성좌들 때문에 세상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걸 알면서부터는 외부 개입을 최소화시키려고 했거든요.”

하라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기도 했다.

버블슬라임 던전에서 하라는 분명 죽을 뻔했지만, 성좌가 필사적으로 노력한 끝에 그녀는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성좌는 페널티를 받았다. 채팅 금지.

“그거 저도 여러모로 노력한 거예요.”

성복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건 대체 누군데? 난 여의도에서 성좌 노릇 끝내고 이리로 왔는데. 하라는 묻고 싶었지만 일단 기다렸다. 성복이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근데 그게 외려 독이 됐어요.”

정작 그 자신이 차원의 틈을 비집고 나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당연하다. 그가 설계한 시스템은 인과율을 계산해, 흐름에 문제가 생기면 외부 개입을 차단하거나 페널티를 주는 식으로 작동했다.

하지만 성복이야말로 그 인과율에 가장 문제가 되는 존재였다.

균열을 통과해 다시 나가려고 해도, 스스로가 만든 시스템이 그를 가뒀다. 무슨 짓을 해도 나갈 수가 없었다.

수많은 지구를, 그리고 각성한 능력자와 던전을 전부 통제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역작’이라고 칭찬하며 뿌듯해하던 성복은 곧 스스로를 저주하기 시작했다.

“아, 나는 왜 이렇게 천재라서!”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싸쥐는 성복을 보고 하라는 생각했다.

때릴까?

어쨌든 난관에 닥친 성복은 시스템의 허점을 찾는 데에 골몰했다.

“천재라면서요. 허점은 있나 봅니다?”

세헌의 비아냥거림에 성복이 진지하게 답했다.

“저는 천재잖아요. 천재니까 천재가 만든 허점도 찾아낼 수 있겠다 생각한 거죠.”

“……예…….”

고심 끝에 성복이 찾아낸 방법은 인과율을 어그러트리는 것이었다.

시스템은 인과율에 가장 예민했고, 거기 좌우되는 부분이 컸다. 다른 지구와 얽혀 있기에 시간 순서에도 민감했다.

예를 들자면 반드시 순서대로 작동시켜야 하는 기계와 같았다.

과자 공장에서 과자를 찍어 내려면 밀가루 반죽과 설탕, 기름과 부재료를 순서대로 집어넣고 돌려야 한다.

하지만 거기에 갑자기 익히지도 않은 채소 따위를 마구 집어넣고, 순서도 섞어 버리면 어떻게 될까?

기계는 고장 날지도 모른다.

성복은 거기서 힌트를 얻어 시스템의 사용자들, 즉 각성자들 중에서 적합한 인재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반동 기질이 있는 이들을 골라 균열을 휘젓게 하면 시스템의 인과율을 마구 어그러트릴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한 것이다.

그가 맨 처음 고른 이는 라농 우타이타니였다.

“……망했죠.”

“망할 만하네요.”

“……너무하시네…….”

라농 우타이타니는 첫 번째 지구의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응답했다.

하지만 성복은 균열을 비집고 나오는 데에 실패했다. 그 뒤로도 비슷한 실패가 이어졌다.

결국 그는 눈을 돌리고 반대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인과율을 어그러트릴 만한 인간이 아니라, 지독한 인과로 얽힌 인간들을 골라 보면 어떨까.

어느 세계에서든 기어이 만나 얽히고야 마는 인간들.

그 모든 지구가 비슷한 인간관계로 얼기설기 얽혀 있다지만, 어딘가에서는 평생 얼굴도 보지 못한 채 흘러가는 경우도 분명 있다.

하지만 그는 기어이 원하던 이들을 찾아냈다.

“세상에서 제일 안 어울릴 것 같은 사람들인데, 어느 지구에서든 꼬박꼬박 만나더라고요?”

성복은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가리켰다.

“그래서 두 분이 아직 안 만난 지구 중에 골라 봤죠!”

강하라와 윤세헌.

“세상에서 제일 안 어울릴 것 같다고요?”

그렇게 되묻는 세헌의 표정이 미묘했다.

강하라하고, 내가?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세헌은 힐끗 하라를 내려다봤고, 그 순간 조금 울컥했다. 그의 옆에 있는 하라는 ‘그럴싸한데.’ 하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왜 그걸 납득하고 있습니까?”

“예? 아, 보였어요? 아니, 그게…….”

심지어 하라는 세헌의 되물음에 눈을 깜박이며 답까지 했다.

“윤세헌 씨는 그런 생각 안 하셨어요? 저는 했는데…….”

“제가요?”

“아니, 일단 너무 차이도 나고요…….”

그러던 하라는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제가 처음에 잠깐 떠봤을 때, 여자 친구 있다고 거짓말까지 하셨잖아요?”

떠본 거라고, 그게. 일단 강하라의 ‘호, 혹시 저랑 사귀어 주실 수도…….’가 떠본 거라고 하기엔 상당히 무리가 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 세헌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녀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세헌은 필사적으로 변명하려 했으나 하라가 더 빨랐다.

“공무수행이라고 치고 협조한다고만 하셨지, 뭐……. 정말 협조적인 태도시긴 했는데, 뭐랄까. 초반의 세헌 씨는……. 협조만 한다는 태도셨달까…….”

“……제가 협조만 했다기엔 이것저것 여러 가지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정말 감사했죠! 근데 또…….”

요즘 후회남이 유행이라더니. 세헌은 자신의 업보가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그가 맨 처음 하라를 어처구니없는 여자라고 생각하고 철벽 치던 시절의 행동과 말 하나하나를 하라는 정말로 상세하게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세헌도 할 말이 많았다.

“그렇게 따지면 강하라 씨도 저한테 벽 여러 번 세웠는데요.”

“예? 제가요?”

갑작스럽게 성토의 장이 펼쳐졌다.

분명히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다음에는 제가 이것저것 표현했는데, 좋은 분이라는 소리나 하고! 결국 세헌은 제 마음속에 묻어 뒀던 금기까지 끄집어내고야 말았다.

“권욱 씨는 오빠고, 저는 왜 윤 앵커님인지 물어보지도 못하고!”

하라가 눈을 끔벅이다가 ‘허…….’ 하고 실없이 웃음을 터트릴 때에서야 세헌은 깨달았다.

[지정 사용자 ‘윤세헌’의 흑역사가 +1 상승합니다.]

마치 그런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에 뜬 것 같았다. 세헌의 벌게진 얼굴은 이제 새카매졌다.

하지만 하라는 마구 웃더니 그의 속을 더 벅벅 긁어 놨다.

“그, 권욱 씨가 제가 좋아하던 아이돌이었던 건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세헌은 잠시 갈등했다. 이걸 말할까 말까. 어쩐지 말하고 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데. 하지만 그가 계속해서 궁금해하던 부분이기도 했다.

결국 세헌은 주먹을 꾹 쥐고 입을 열었다.

“저는 그게 도무지 모르겠어서 말입니다.”

“예?”

“아이돌을 좋아하는 감정은 이성을 좋아하는 감정과 별개로 분리될 수 있는 겁니까?”

하라는 잠시 입을 뻐끔거리다가, 이윽고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말로만 듣던 남들은 웃기고, 본인은 안 웃긴 재앙이 강하라의 앞에 펼쳐진 것이다.

어떡하죠. 제 남자 친구가 너무 일반인이라 큰일 났어요.

하라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손을 내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떡하지, 너무 귀여워.’

여전히 빨개진 얼굴의 윤세헌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강하라 최애 순위 바뀐 지 좀 됐다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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