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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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의 구성은 다소 바뀌었다. 하라는 조심스럽게 영은을 설득했다.
“이쪽에 계신 분은 전투 요원은 아니세요. 그래서 제가 전투를 맡고, 이분께서 구영은 선생님을 업고 가셔야 할 것 같은데…….”
영은은 자신이 걸을 수 있다고 나섰으나, 세헌이나 하라가 보기엔 아니었다. 걷는 것보다는 차라리 체력을 비축하는 게 나아 보였다.
다리야 회복 포션으로 어떻게든 걸을 수 있는 상태로 만들었다지만, 오랜 시간 어둠 속을 헤매서 탈진에 가까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결국 세헌이 영은을 둘러업게 됐다.
“감사합니다. 저, 그, 성함이…….”
세헌은 잠시 침묵했다가, 영은에게 답했다.
“……비밀입니다.”
“어…….”
“앗, 저희 그게, 기밀 기관이잖아요. 그래서 그래요.”
하라가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두 사람이 앞서 상의한 결과였다. 참고로 그 상의라는 건 대체로 이런 식의 속삭임으로 진행됐다.
‘저 그런데 구영은 씨를 어디까지 바래다주죠?’
‘무슨 소립니까?’
‘저 어린 윤세헌 씨를 만나면 안 돼요. 세헌 씨는 과거에 절 만난 기억이 없잖아요.’
세헌은 머리를 한 번 짚었다.
‘어린 저와 율리 이야기하는 거면, 저는 이미 걔네들 만났습니다.’
하라가 펄쩍 뛰었다.
‘생각해 보니까 그렇네요?! 선생님, 어떻게 그렇게 선생님답지 않은 일을!’
‘그거 욕입니까?’
‘……욕은 아닐걸요?’
아무튼 영양가는 없는 대화였다.
이미 두 사람이 과거로 와 버린 이상, 그리고 세헌이 어린 소년, 소녀를 만난 이상 과거는 변할 수밖에 없다.
결국 하라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영은을 업은 세헌에게 엄지를 치켜올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머님 한번 구해 봐요.
그런 눈빛의 하라를 보고 세헌은 입술을 깨물었다. 웃음이 나서다. 물론 마냥 웃기만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으르르르…….”
오래도 헤맨 만큼, 돌아가는 길은 지난했다. 그래도 빛이 있어 괜찮았지만, 중간중간 나타나는 몬스터들이 퍽 귀찮았다.
그뿐인가.
“엄마야, 저거 화염 도마뱀인데!”
하라가 펄쩍 뛰며 손을 휘둘렀다. 하라의 손에 들린 B급 무기 하나가 파사삭 부서지며 동시에 화염 도마뱀에게로 빛을 쏘았다.
화염 도마뱀은 순식간에 절명했다.
[흥분한 화염 도마뱀(B)을 처치했습니다.]
“여기 D등급 던전인데 B급 몬스터가 왜 튀어나와!”
그렇게 절규하는 하라와 세헌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퀘스트의 등급이 상향 조정됩니다.]
[던전 브레이크로 인해 몬스터들의 상태 이상 확률이 높아집니다.]
[해당 조치는 인과율의 밸런스 조정을 위한 필수적인 사항으로, 사용자의 너른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미친 시스템아!”
너른 양해 좋아하시네! 욕이 저절로 나왔다.
하지만 이미 일이 벌어진 이상 던전 공략을 하기는 해야 한다. 던전 브레이크로 인한 몬스터 등급 상향은 가끔 있긴 한 일이니, 아주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도 하라가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으, 무기만 있었어도!”
하라가 안타까운 소리를 냈다.
하라의 약점은 상상력이 부족해 스킬을 쓸 때, 손에 무기가 쥐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무기를 휘두르는 것에 한정해 생각하다 보니 응용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아이템을 획득했습니다: 화염 도마뱀의 꼬리(B)]
[화염 도마뱀의 꼬리 B]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인다. 단단한 껍질은 날카로워 뭐라도 자를 수 있을 것처럼 생겼다.
몬스터들의 등급이 올라간 만큼, 아이템 습득률도 다소 높아졌다는 것이다.
하라는 손안에서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화염 도마뱀의 꼬리를 들고 반쯤 울며 칼처럼 휘둘렀다.
“징그러워!”
손안에서 움직이는 꼬리가 징그러운지, 흩어지는 바퀴벌레들이 징그러운지 굳이 구분해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렇다 해도,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아까보다 확연히 잦아진 몬스터 출현 빈도 탓이다.
당연하게도 영은은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걱정되지만, 자신이 요원들에게 방해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요원님. 저 때문에 한 분만 계속…….”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지만 여자분 혼자 싸우시는데……. 제가 방해되는 건 아닐까요?”
영은의 말에 세헌이 딱 잘라 답했다.
“저희는 던전에 고립된 분들을 구출하기 위해 들어온 것입니다. 구영은 씨 같은 분을 내팽개치고 싸우러 들어온 게 아니라, 구영은 씨가 저희의 던전 진입 목적이란 이야기입니다.”
“…….”
“그러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네…….”
세헌의 단호한 말에 영은이 작게 대답했다.
“근데요.”
“말씀하십시오.”
“제가 제 이름을 말씀드렸던가요……?”
세헌이 움찔했다. 세헌의 목을 끌어안은 채 등에 매달려 있던 영은이 고개를 갸웃하는 게 전부 느껴졌다.
세헌은 한참 후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탤런트셨잖습니까.”
“어머나, 저 아세요?”
“모를 수가…….”
모를 수가, 없죠. 그렇게 말하려다가 세헌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영은이 활동을 한 것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고등학생 때 데뷔해 청춘스타로 등극하기까지, 연기 생활을 한 건 약 3년여에 불과했다.
그러다 일찍 결혼했고, 세헌을 낳은 후에는 완전히 잊혀졌다. 영은이 그 이후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계기는, 던전에서 죽었기 때문이었다.
“……없죠.”
“어떻게요? 요즘은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저한테는 유명한 분입니다.”
핑계를 대려면 한없이 많았다. 아버지가 좋아했습니다, 친구가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말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세헌은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영화로 데뷔하셨고, 방송사 개국 기념 드라마에도 나오셨죠. 다 봤습니다.”
윤 의원은 세헌이 영은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고 이후, 한참 입원했다 퇴원한 끝에 집으로 돌아간 세헌이 마주한 건, 영은의 흔적이 사라진 집 안이었다.
함묵증을 앓는 동안 어머니에 대한 것을 되도록이면 접하지 않는 게 좋다던 의사들의 조언이 그 시작이었겠지만, 윤 의원은 그 흔적을 돌려놓기는커녕 완전히 없애 버렸다.
하여 세헌은 오히려 악착같이 찾아봤었다. 물론 그것도 한때였으나, 지금 이 순간 세헌은 잠시나마 영은의 필모그래피를 다 찾아봤던 것이 참 다행이다 싶어졌다.
덕분에 영은이 쑥스러운 듯 뒤에서 몸을 배배 꼬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 나이가…….”
“서른다섯입니다.”
“……저희 동년배네요? 어머, 창피해라.”
영은이 수줍게 웃었다.
“맞아요. 저 학교 다닐 때 제 얼굴 들어간 책받침 들고 온 친구들이 있었어요. 비슷한 세대인가 보다, 저희. 어떡하나. 이런 데서 마주쳐서……. 저 아기 낳고 가뜩이나 얼굴 상했는데…….”
그러더니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덧붙였다.
“어머, 아기 때문에 상했다는 뜻은 아니고요.”
“예.”
세헌은 짧게 답했다. 어쩐지 길게 대답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영은은 작게 미소 지었다.
“감사해요.”
“……네.”
“저 알아봐 주셔서 감사하다는 건 아니구요, 구하러 와 주셔서요.”
“…….”
“제가 나가서 꼭 사례할게요. 저희 애 아빠도 나랏일 하는데, 이렇게 도움받을 줄은 몰랐어요. 정말 정말 감사해요.”
목 안쪽 어딘가에서 울분이 치받쳐 올랐다. 잊고 있었던, 어쩌면 세월이 흐르며 퇴색된 분노와 슬픔이 다시 차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스무 살 이후에 집을 나오면서 꼭, 제 슬픔을 갚아 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그 울분을 영은 앞에서 드러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예. 저도 감사합니다.”
“어머나, 요원님께서 제게 감사하실 게…….”
그때였다.
“앗! 피하세요!”
하라의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렸다.
세헌은 움찔하며 앞을 봤다. 저 앞에서 하라와 대치하던 몬스터가 쏴 낸 커다란 불의 깃털이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깃털은 언뜻 봐도 수십 개나 됐다. 아무리 불을 뚫고 왔다 해도, 반사적으로 그 불꽃들을 보자 몸이 굳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윤 선생님!”
하라의 외침에 정신 차린 세헌은 황급히 몸을 돌리려다 움찔했다. 영은이 제 등에 업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몸을 돌리는 순간 희생하는 건 영은이 될 것이다.
퍽, 하고 날카로운 통증이 어깨에 박혔다. 뜨거웠다. 세헌은 신음했다.
“큭.”
상처가 타는 소리를 내며 지져졌다. 세헌은 조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출혈 부위가 바로 지져지니까 괜찮지 않나?
정신 나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