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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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이 조심스럽게 하라에게 물었다.
“정말 괜찮아요? 안 무거우세요?”
“아이, 그럼요! 괜찮아요! 저만 믿으세요!”
하라는 환히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영은은 아무래도 미안해 죽겠는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영은은 지금, 하라의 품 안에 공주님처럼 안겨 있었으니까!
심지어 영은은 키도 제법 컸다. 팔다리가 길고 늘씬한 그녀는, 하라가 안자 다리가 한참이나 밑에서 대롱거렸다.
하라는 으쌰, 하고 그런 영은을 고쳐 안으며 생각했다.
‘윤세헌 씨 키 크고 팔다리 긴 건, 어머니 닮으셨나 보다.’
하라는 세헌의 아버지도 본 적이 있었다. 키가 크고 어딘가 듬직하기는 하지만, 좋게 말해 윤 의원은 산적처럼 생겼다.
물론 남의 아버지를 그렇게 말하는 데에 약간의 죄책감이 들긴 하나, 아무튼 세헌처럼 샤프한 맛은 아무래도 없었던 것이다.
가느다랗고 선이 고운 영은을 내려다보며 하라는 자신만 믿으라는 듯 눈에 힘을 주고 기운차게 말했다.
“이래 봬도 80kg 넘는 남자분도 운반한 적 있답니다!”
“아……. 대단하셔라.”
영은의 눈이 동그래졌다.
“재난…… 요원분들은 원래 그렇게 다 힘이 센가요?”
“다는 아니지만 제가 특별히 그렇다고 할까요!”
재난청 공무원들이 다 S급은 아닐 테니까. 하라는 헤헤 웃었다.
그 말간 얼굴에 영은도 조금 안심되는지 하라의 목을 고쳐 안았다.
뽈뽈뽈뽈.
어두운 던전 안에서 영은을 안고 마구잡이로 날다간 자칫해 그녀가 다칠까 싶어서, 하라는 조금 빠르게 걷는 속도로 날았다. 다행히도 영은은 금세 현 상황에 적응해, 하라가 번거로울 일은 없었다.
다만 조그마한 몬스터들이 가끔 주제도 모르고 덤비는 경우가 있어, 몇 번 영은을 내려놔야 했다. 그 과정에서 겨우겨우 버티던 하라의 빛의 검이 팍삭, 하고 깨졌다.
“어머, 저 때문에 깨졌나 봐요…….”
“아, 아니에요! 원래 깨져 있었어요!”
“그래도…….”
“소모품입니다! 버리면 돼요!”
S급 빛의 검을 만든 누구누구가 들었다면 기함할 말이었다. 언감생심. 소모품이라니.
하지만 영은은 그 말을 듣고 안심한 눈치였다.
하라는 고민하다가 인벤토리에서 좋은 물건을 발견했다. 율리 콘서트에서 썼던 야광봉이었다. 이거라면 헌터 전용 아이템이 아니니 영은도 들고 있을 수 있었다.
영은은 이내 야광봉을 받아 들고 신기해했다.
“어머, 귀여워라. 요술봉 같네요, 꼭. 장난감이에요? 요원님도 딸 있어요?”
“앗…….”
그게 그렇게 되나. 하라는 어색하게 웃었다. 좋아하는 아이돌 야광봉이라고 설명할 만한 시대도 아니고.
“어, 동생…… 거예요.”
“어머, 늦둥이 동생 있나 보다. 그쵸.”
영은은 어둠 속에서 헤매다가 겨우 하라를 만나 그런지,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 훨씬 괜찮아 보였다. 아마 회복 포션의 효과도 있긴 할 것이다. 기력을 조금은 보충했을 테니까.
“나이 먹어서 남한테 이렇게 안겨 본 거 처음인데.”
“엄청 어려 보이시는데요?”
“제가 지금 서른일곱인데요.”
영은이 수줍게 웃으며 덧붙였다.
“아줌마죠.”
“무슨, 아줌마라뇨! 저도 서른인데!”
하라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가 아차, 예전에는 좀 일찍 결혼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영은은 정말로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곱고 어려 보였다. 지금 당장 나가서 연예계에 다시 복귀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왜 그런데 집에만 계셨을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문득 하라는 조금 짜증이 났다.
윤 의원님, 싸움 잘하시나…….
아무튼 중요한 건 지금 여기를 나가는 것이다.
“그럼 제가 언니네요. 하하, 안겨 있으면서 언니라고 말하니까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
“뭐가 민망하세요, 언니! 그죠!”
그렇게 말하며 하라는 팔을 휙 휘둘렀다. 영은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뭐예요?”
“네? 전 뭐 아무것도 못 봤는데요?”
하라가 뽈뽈 날아가는 통에 영은은 제대로 주변을 살펴보긴 힘들었다. 그래서 자신이 지나온 뒤에, 사람 머리통만 한 설치류 몬스터가 하라의 주먹 한 방에 죽은 것은 몰랐다.
던전 브레이크 다음이라 엄청난 몬스터는 없었다. 다만 자잘하게 하라를 귀찮게 하는 것들이 많았기에, 하라는 제법 바쁘게 손을 놀려야 했다.
대부분은 하라가 마력을 집중해 밟거나 누르기만 해도 죽었으나, 화염계 몬스터는 좀 까다롭긴 해서 하라는 두어 번 더 영은을 내려놔야 했다.
그래도 금세 처리할 수 있는 것은 마찬가지인지라, 영은이 점점 하라를 믿음직하게 여기는 게 눈에 보였다.
“요원님 같은 초능력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에요.”
“아하하, 안 만나 보시는 게 제일 좋죠!”
“우리 남편이 그렇게 바쁘게 돌아다닌 보람이 있긴 하네요…….”
그 말에 하라는 멈칫했다. 언젠가 세헌의 차에 타고 있다가, 본의 아니게 그의 옆에서 들었던 것들이 기억나서였다.
한때는 자신의 아내였던 여인에 관해 함부로 지껄이는 말.
‘…….’
하라의 안색이 저도 모르게 뜨거워졌다. 당사자를 눈앞에 두고 그 말들을 떠올리자니 낯이 뜨겁고 화가 나려고 해서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하라는 입을 닫았다. 그건 아주 먼 훗날의 이야기이니까.
본래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다. 세월이 지나며 감정들이 퇴색되는 건 당연할진대, 먼 미래의 윤 의원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과거의 윤 의원도 같다고 할 수는 없다. 애당초 남의 집 가정사에 하라가 감히 뭐라고 말을 보탤 수는…….
…….
‘그래도 돌아가면 윤 의원님 싸움 잘하는지 좀 알아봐야겠다…….’
어쩐지 중년 남자에 대한 살의가 갈수록 올라왔다.
아무튼 그건 나중에, 일이 잘 풀린다면 돌아가서 해결할 일이고. 일단 영은에게는 환히 웃었다.
“나가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되겠어요, 그쵸.”
“그렇겠죠? 일단 저희 아이들부터 찾고요.”
아이들! 어린 윤세헌 씨! 율리!
거기까지 생각하자 하라의 입매가 살짝 꿈틀했다. 어린 윤세헌 씨가 얼마나 귀여울까 싶어서였다.
물론 귀여움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하라가 아는 윤세헌을 생각하고 있으면 어리다고 해서 ‘그’ 윤세헌이 귀여울까 싶기도 했지만…….
그러다 하라는 아차 했다.
‘잠깐. 어린 세헌 씨한테는 내 얼굴…… 보여 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이 던전이 어린 세헌에게 상당한 트라우마로 각인된 건 분명했다. 실제로 20여 년이 지난 후까지도 세헌은 불을 무서워했으니까. 그러면, 그 던전 안에서 만난 사람을 기억할 수도 있을 텐데…….
그때였다.
탁탁탁…….
하라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짧고 둔탁한, 그러나 빠른 발소리가 들려서였다. 동굴을 울리는 발소리.
영은이 화들짝 놀라 하라의 목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는 게 느껴졌다.
“또 괴물일까요?”
“아직 몰라요. 하지만 괜찮아요.”
하라는 영은을 가볍게 내려놓고 그 앞을 막아섰다. 어둠 속에서 이렇게 빠른 속력으로 이동하는 몬스터라면 제법 등급이 높을 게 뻔했다.
하지만 그래 봐야 이곳은 D등급 던전이었고, 하라는 S급이었다. 진심으로 맞서면 하라에게는 한주먹감일 것이다.
“제가 지켜 드릴게요. 뭐가 나오든 제가 더 셀걸요.”
“무리하지 마세요! 저도 도울 수 있다면 도울게요!”
“아녜요, 나오지 마세요.”
하라는 허공에 인벤토리 창을 키워 두고 앞쪽을 노려봤다.
희미하게 비치는 동굴. 발걸음은 잠시 멈칫하는 것 같다가 느려졌다. 상대도 이쪽의 인기척을 느낀 듯했다.
하라는 조심스럽게 인벤토리 안에서 뭘 꺼내야 할지 가늠했다. 아까 전 만났던 불의 개는 등급은 낮았지만 조금 상대하기 번거로웠는데…….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돌기둥 뒤쪽으로 먼저 드러난 건 사람의 다리였다.
뭐지? 생존잔가?
“사라…….”
‘사람이세요?’ 하고 물어보려던 것도 잊고, 하라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가, 하라가 방금 전까지 생각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헛것을 보나. 하라는 눈을 깜박였다.
저편에서 나타난 이 역시, 희미한 빛에 인상을 쓰다가 그녀를 보고는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하라는 잠시 생각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역시 이 상황을 설명할 만한 건…….
도플갱어?
D급 던전에 도플갱어가 나온다는 보고가 있었나?
“아니지! 게다가 도플갱어는 지금 존재하는 사람을 따라 하는 거잖아!”
저도 모르게 하라가 큰 소리를 내자, 그쪽의 눈동자 또한 놀란 듯 커졌다가 뭔가를 분간하려는 듯 가늘어졌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본 하라는, 이게 정말로, 도플갱어 따위가 만들어 낸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귀여움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그…….
그…….
“……윤,”
윤세헌 씨, 하고 말하려다가 하라는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뒤의 영은 때문이었다.
상대방은 그런 하라를 물끄러미 보더니 하, 하고 실소했다.
“강하라 씨.”
왜지.
눈이 뜨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