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 공무수행에 협조 부탁드립니다-197화 (197/223)

196화

앗, 이게 아닌가. 하라는 뒤늦게 당황했다.

서울지방자연재난대응정책청 직속. 그러니까, S급이 되고 나서부터 습관처럼 외운 말이긴 했다.

S급으로 공식 팀이 짜인 후에는 더 이상 마포지서 소속이 아닌데도 자꾸만 마석관리과 소속으로 자신을 소개하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건 아니지!

‘멍청이!’

하라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재난청이 지금의 명칭이 된 건 비교적 최근이다. 대부분의 기관이 그렇듯 처음에는 소속도 불명확했고, 부서나 이름도 여러 번 바뀌었다. 재난청이 ‘청’으로 승격된 것도 채 15년이 되지 않았을 정도다.

‘지금은 그 이름 아닐 텐데!’

윤세헌이 이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녀를 보자마자 확신으로 바뀌었다.

구영은.

윤세헌의 이름 세 글자를 포털사이트에 검색만 해도 프로필에 함께 뜬다. 모친 구영은.

그렇게 링크된 사진들 속에서 그녀를 하라도 당연하지만 몇 번은 봤다. 사진 속의 그녀는 젊고 아름다웠지만, 화질이 낮아 불명확한 부분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하라 앞의 그녀는 피폐하고 창백하게 질렸을지언정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좋았어.’

하라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어머니가 던전 속에서 돌아가신 게, 세헌에게는 큰 트라우마로 남았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하라는 자신이 꼭 그녀를 구하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하하, 기관에서 온 것 맞아요. 그런데 저희 기관이 지금 이름을 바꾸려고 고심 중이거든요……. 저도 모르게 아직은 대외비인 이름을 말해 버렸네요.”

“아…….”

눈이 동그래진 영은이 하라를 멀거니 올려다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튼…… 구하러 오신 건 맞죠?”

“네! 그럼요!”

“다행이다…….”

영은이 힘없이 웃었다.

하라는 으쌰, 하고 주저앉은 영은의 팔 아래로 제 팔을 끼워 넣어 영은을 부축했다. 영은이 비척비척 일어났다. 그동안 어찌나 힘겨웠는지 바싹 마른 팔이 그대로 느껴졌다.

“여기 떨어진 지 얼마나 되셨어요?”

“바깥에서 오신 거 아니세요? 저야말로 그거 물어보려고 했는데…….”

“아, 가끔 바깥이랑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던전도 있거든요!”

식은땀이 났다. 다행히도 던전에 관해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던 시절이라, 영은은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잘 모르겠어요. 시계는 저희 애가 가지고 있는데, 아마 저희 아이를 만나면 알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러다가 영은의 얼굴이 갑작스레 확 어두워졌다.

“어둠 때문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어요. 어떡하죠? 너무 오래 지났으면…….”

“괜찮아요, 선생님. 아직 탈진하시지도 않았고 탈수가…… 아이쿠, 내 정신 봐. 이것 좀 드세요.”

하라는 말하다 말고 잽싸게 인벤토리에서 회복 포션을 마저 꺼내 내밀었다. 영은은 물인 줄 알고 그것을 마셨다가, 맛을 보고 묘한 얼굴이 됐다.

그거 맛이 좀 없긴 하죠…….

“그런데 그럼 자제분에게 가는 길도 잘 모르시겠네요……?”

“아, 그건…… 뒤에.”

영은이 분연한 얼굴로 뒤쪽을 가리켰다.

“혹시 몰라서, 오는 길에 계속 오른쪽 벽을 긁으면서 왔어요.”

그제야 하라는 영은의 발밑에 떨어진 돌을 볼 수 있었다. 거친 돌은 조금 닳아 있었고, 곧 벽면에서도 돌에 긁힌 흔적이 보였다. 영은은 그 돌을 쥐고 벽을 계속 긁으며 왔던 것이다.

“그런데 횃불도 꺼지고 안 보여서 애들한테 돌아갈 수가 없는 거예요…….”

“세상에, 너무 고생하셨어요.”

“밝은 게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어요.”

회복 포션의 효과가 슬슬 적용되는지 영은은 아까보다 생기가 돌았다.

“혹시 오시면서 애들…… 은 못 보셨죠? 하나는 중학생 남자애고, 하나는 요만한 여자앤데…….”

요만한 여자애?

아.

맞다, 율리도 같이 빠졌지!

하라의 눈이 커졌다.

자그마한 율리! 앙증맞을 다섯 살의 율리를 생각하자 가슴이 확, 찌릿해졌다.

“아.”

그리고 그 직후, 하라는 저도 모르게 입을 약간 벌렸다.

“미쳤나 봐…….”

최애를 까먹다니. 이럴 수가. 내 어린 최애가 이 안에 있는데……!

하라는 최애 아이돌인 율리를 두고 윤세헌의 생각만 했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워졌다. 뭐지? 이게 탈덕인가?

물론 그럴 리 없었다. 율리를 향한 하라의 마음은 아직도 여전했으니까.

다만…….

‘……우선순위가 바뀌었나 봐…….’

하라로서는 놀랄 만한 일이었다. 큐피트가 보면 벌떡 일어날 일. 강하라의 최애 순위가 바뀐 것이다!

물론 하라는 곧 진정했다. 생각해 보니 그 큐피트, 나였지. 그리고 자연스럽게도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근데 내가 이리로 왔는데 큐피트 노릇은 누가 해?’

한 번 가졌던 의문이 재차 살아났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만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도 영은이 하라의 부축을 받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미쳤나 봐.’ 따위의 소리를 하고 침묵하는 바람에 영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라는 애써 아하하, 하고 웃었다.

“아, 잠깐 다른 게 생각나서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영은의 눈빛을 하라는 이미 봐 버렸다. ‘기관에서 나왔다는데 영 못 미덥네…….’라는 기색이 너무나 노골적이었다.

죄송…… 죄송합니다……. 그쪽 아드님이 제 최애라서 그래요……. 라고 말할 수도 없고.

“아이들은 제가 보지 못했어요. 같이 찾아볼까요?”

“네, 그래요. 근데 제 꼴이 이래서…….”

회복 포션 덕에 일어날 수는 있었지만, 영은의 걸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하라는 그 모습을 보고 씩 웃었다. 물론 영은이 다친 게 좋아서는 아니다.

이럴 때를 위해 단련한 게 있지!

*

“세헌 군의 어머니를 찾아보고 오겠습니다.”

한편 세헌은 결연한 얼굴로 소년에게 말했다. 소년은 당황해 세헌을 붙들었다.

“네? 안 돼요, 아저씨, 가지 마세…….”

소년은 간신히 이 동굴에서 만난 어른에게 의지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하지만 곧 어머니에 대한 걱정이 떠올랐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했다.

세헌은 그런 소년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 소년이 어떤 심경일지 세헌도 알 수 있었다.

동굴 안에서 고립되어, 제발 율리가 아닌 누구라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그였다. 나중에는 율리가 우는 소리마저 환청으로 들렸다.

혼자 던전에 고립되어 있는데, 너무 죽을 것 같아 율리의 환상을 자신이 만들어 낸 건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했으니.

하지만 세헌에겐 그보다 더 절실한 게 있었다. 그는 제 어머니를, 홀로 죽게 두고 싶지 않았다.

나이를 먹고, 자신이 던전 안에서 겪었던 일을 돌이킬 때마다 생각했다. 자신도 그렇게 무서웠는데 제 어머니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영은은 불과 세헌과 몇 살 차이 나지도 않았다. 스물두 살에 결혼해 아이를 가졌으니까.

세헌 자신도 던전 안에 떨어지면 이렇게 막막한데, 영은은 더했을 것이다.

“미안해요. 하지만 어머니를 빨리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세헌 군의 어머니는 지금 혼자 헤매고 있을 거잖아요, 그렇죠?”

그 말에 약간 벌어졌던 소년의 입이 다물렸다. 이내 그의 눈 안에 슬픔과 동시에 용기가 차올랐다.

홀로 어둠 속에서 공포 따위와 싸우고 있을 제 어머니를 향한 슬픔, 그리고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다시 어둠 속에 고립돼도 상관없다는 용기였다.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세헌은 미소 지었다.

“장하다.”

물론 세헌도 소년을 어둠 속에 홀로 둘 생각은 없었다. 그가 불 다음으로 싫어하는 건 새카만 어둠이었으니까.

그는 삐약이를 안아 소년 옆에 두었다.

“너는 여기 있어.”

“괘액!”

삐약이가 거세게 세헌의 말을 거부했다.

[지정 사용자 ‘강하라’의 명령이 아니면 수행하지 않습니다.]

[삐약이가 지정 사용자 ‘강하라’를 원합니다.]

“인마, 나도 그 지정 사용자를 강력히 원하긴 마찬가지다…….”

시스템 창을 보며 세헌이 허탈하게 읊조렸다.

그때였다.

드드드드…….

“으앙!”

벽면이 작게 흔들렸다. 균열 때문에 던전 어딘가가 무너지는 소리인 듯했다.

자던 율리가 갑작스레 깨어나 울며 본능적으로 엄마를 찾았다. 하지만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곧 깨달은 율리는 더 크게 울며 소년의 다리에 매달렸다. 아까 세헌의 품에서 자긴 했지만, 역시 익숙한 것은 소년인 듯했다.

지진은 곧 끝났지만, 율리의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괜찮아, 율리야. 끝났어. 다 끝났어.”

“엄마아아아!”

소년이 율리의 등을 두들겼지만 소용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세헌은 삐약이에게 필사적으로 부탁했다.

“나는 일반인이지만 너는 S급이잖아. 너 아니면 아무도 이 애들을 못 지켜. 그리고…… 알지?”

이 애가 죽으면 네 아빠도 없다!

세헌의 강력한 눈빛에 삐약이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삐약이는 잠시 부리를 닫고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러더니 곧 세헌의 제안을 수락했다.

[삐약이의 설득에 성공했습니다!]

[행운+1]

행운이 있어? 세헌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나 그가 시스템 창을 확인할 새도 없이 다음 메시지가 떴다.

[단, 삐약이는 사용자와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 능력치가 저하됩니다.]

일종의 페널티였다.

세헌은 마른세수를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삐약이를 데려가 버리면 애들 둘이서 어떻게 몬스터들에게 대처한단 말인가.

그는 인벤토리 안 키트에서 랜턴을 꺼내 들며 준비를 마쳤다.

“아저씨, 무사히 돌아오세요…….”

소년이 불안한 말투로 조그맣게 말했다. 세헌은 소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그래요. 꼭 어머니와 돌아올게요.”

그리고 그렇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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