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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공무수행에 협조 부탁드립니다-191화 (191/223)

189화

그때만 해도 휴대 전화 같은 건 꿈도 못 꾸던 세상이었다.

공기가 찢어지고, 균열이 일어나며 그곳에서 괴물들이 쏟아져 나온다 해도 가족에게 전화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게이트가 열리면 주변의 전산이 마비됐고, 전화선 케이블이 다 뜯어져 전화도 불통이 됐다.

애당초 마석으로 게이트가 열리는 걸 방지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려지지 않은 때였다.

그러니, 호텔 공사장 근처에서 땅이 쑥 꺼지며 시작된 균열은, 그저 공사 중 지반 침하로만 보였다.

“어이! 그거 뭐야!”

“모르겠습니다. 이 밑에 공동이라도 있나 본데요?”

“아이 씨……. 이거 오늘 공치게 생겼네.”

공사 중인 인부들조차 까맣게 몰랐다. 공사장 바닥에 생긴 게 침몰형 게이트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 침몰형 게이트가 땅 밑으로 뻗고 뻗어서…….

근방의 주택까지 침범했을 줄은.

*

집 안은 엉망이었다. 여자, 영은은 넓은 집 안을 보고 쓰게 웃었다.

집을 관리하는 송 여사가 오면 기함을 할 것이다.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 하나가 고작 한 시간 동안 만들어 낸 결과치고는, 드넓은 거실은 참담한 풍경을 보이고 있었다.

이리저리 가위질한 색종이, 풀이 덕지덕지 묻은 비싼 카펫. 그리고 계단 위에 널브러진 인형이며 장난감 따위…….

쿵쿵쿵쿵.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에서 마구 뛰어 내려오는 소리가 났다.

“아줌마! 아줌마!”

동시에 그녀를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 한창 계단을 오르내리는 법을 익힌 여자아이, 율리였다.

영은은 반사적으로 거실을 가로질러 계단 아래쪽으로 다가갔다.

“율리야, 다쳐!”

뒤에서 고함에 가까운 큰 소리가 들렸다.

영은은 저도 모르게 그 소리를 듣고 웃었다. 이제 열다섯이 된 제 아들이 집 안에서 저렇게 큰 소리를 내는 건 율리가 왔을 때뿐이었다.

어릴 때부터 투정 한번 부리는 법 없이 말 잘 듣던 제 아들인 만큼, 이런 소동은 영은에게 낯설면서도 반가운 일이었다.

손에 뭔가를 꼭 쥔 율리는 너무나 익숙하게 영은에게 몸을 던졌다. 어이쿠, 소리가 다 나왔다.

“아줌마! 이거 윤니 주세요!”

“안 돼, 율리야!”

쿵쿵쿵쿵. 다급했던지, 늘 집 안에서 조용조용 다니던 아들이 나무 계단을 돌아서 빠르게 내려오다가 율리를 받아 안은 영은과 눈이 마주치고 흠칫했다.

열다섯, 이제 소년티가 완연한 남자아이. 영은의 아들인 세헌이었다.

영은이 웃었다.

“뭐길래 그래?”

“아니, 그게…….”

율리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이거!”

아. 뭔가 했더니 영은이 결혼할 때 들고 온 포세린 인형이었다.

작은 밀짚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든, 양치기 소녀. 드레스에는 꽃이 장식되어 있고 그 옆에는 양이 한 마리 앉아 있었다.

혼수품으로 흔히들 구입하는 장식품이었는데, 영은은 이런 게 있는지도 잊고 있었다.

“이걸 어디서 찾았대.”

“아, 안방에서요…….”

아들이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안방에 율리를 들여보낸 것이, 영은을 난처하게 할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영은의 남편인 순현은 안방에 남이 들어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아들조차도.

당연했다. 안방에는 온갖 물건이 다 있었기 때문이다. 구의원인지 시의원인지, 영은이 보기에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남편은 그에 관한 서류를 아주 목숨처럼 끼고 살았다.

아니면 그 서류 틈 사이, 혹은 서류들이 실려 있는 박스 안에 낀 지폐 더미 때문일 테다.

하지만 이 어린애에게는 그런 서류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물건이었다. 반면 안방 선반 위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는 포세린 인형은 세상에 다시없을 보물처럼 보였겠지.

영은은 미소 지었다.

“세헌아, 괜찮…….”

그때였다.

뻑.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 자리에 있던 세 사람 모두 고개를 들었다.

“무슨 소리지?”

“모르겠어요.”

“뭐 터지는 소리 같지 않았니, 세헌아?”

영은은 품 안에 안은 율리를 추스르며 계단 위에 서 있는 아들에게 물었다.

천장을 보던 세헌이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는데…… 지붕에 뭐 떨어졌나 봐요.”

“근처 공사장에서 뭐가 날아왔나…….”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 혹은 건물을 철거하는 소리는 몰라도, 건물이 터지는 소리를 들어 본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나.

하여 세헌도 영은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포세린 인형을 꼭 움켜쥔 율리조차도 몰랐다.

그들이 그대로 침몰하는 게이트와 함께,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릴 줄은.

*

사방이 어두웠다. 하라는 마른세수를 했다.

“저기요. 제가 잘못했어요.”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속삭인 말이었다. 그럼에도 시스템은 응답이 없었다.

“제발 여기서 꺼내 주세요.”

목소리를 조금 키웠지만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잘못했다고요.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지만.”

하라는 또다시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채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그리고 소리 질렀다.

“그러니까 좀 꺼내 주세요! 예?!”

그러나 시스템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응답하지 않았다. 대신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사사사삭…….

하라는 히익, 하고 숨을 들이켜며 입을 막았다. 뭔가 기어가는 소리였다. 심지어 하나가 아니었다.

하라는 흑흑 울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시스템 창을 켰다. 거기에는 자신이 지금 빠진 던전에 대한 정보가 기재돼 있었다.

[던전]

등급: D (상태 이상: 던전 브레이크)

제한 인원: 없음

환경 분류: 지하, 동굴, 흙

몬스터 출현 유형: 곤충, 포유류, 절지동물, 화염형…….

퀘스트: 노말(0) 히든(1) 사이드(0)

[퀘스트 정보를 보시겠습니까? Y/N]

그랬다. 그렇게 열린 균열 속은,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던전이었다. 사방이 캄캄한.

마치 율리 콘서트 때 열렸던 그 지하 던전과 비슷했다.

다만 좀 다른 게 있었다.

사사사…….

“히익.”

그 소리에 하라는 몸을 움츠렸다. 그러고는 주변을 빠르게 둘러봤다.

하지만 칠흑같이 깜깜해 아무것도 안 보였다. 시스템 창 외에는.

그럼에도 불을 밝힐 생각은 안 들었다. 빛의 검이 부서져서는 아니다. 하라의 인벤토리에는 아직 경광봉 몇 개가 남아 있기도 했고, 아무튼 다른 장비도 있었다.

문제는.

몬스터 출현 유형: 곤충, 포유류…….

시스템 창의 ‘곤충’이 눈에 유독 잘 들어왔다. 하라는 울고 싶어졌다.

처음에 던전에 떨어졌을 때에는 그냥 좀 덥고, 갑갑하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곧이어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촛불 스킬을 썼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가 봤던 광경이 다시 뇌리에 스쳤다.

그러니까,

불을 밝히자마자 황급히 어두운 곳을 찾아 몰려가는…….

바…….

“으아아아…….”

그다음 말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하라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 이후로 냉큼 비행 스킬을 써서 지금 하라는 공중에 앉아 있었고, 덕분에 실시간으로 소중한 마력이 펑펑 새 나가고 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바닥에 서 있느니 차라리 마력 소진으로 생을 마감하는 게 나을 것이다.

‘잠깐. 마력 소진되면 그…… 바…… 사이에서 생을 마감하나?’

그건 싫어!

“엄마! 나 꺼내 줘!”

하라는 저도 모르게 절규했다. 당연하지만 안쪽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아니, 이 바…… 천지에서 대체 뭘 구하라는 거예요? 일단 나부터 구해 달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데!

그렇지만 상황은 하라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부우우……. 시야 한쪽에서 뭔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다시 꺼졌다.

하라는 저도 모르게 그쪽을 바라봤다. 어두운 던전의 통로 사이로 뭔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빛을 동반한.

혹시 사람인가?

던전의 상태 이상은 이미 인지한 뒤였다. 던전 브레이크. 하라가 있는 곳은, 이미 터져서 세상에 괴물들이 뛰쳐나가 버린 상황의 던전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하라가 이렇게 한가하게 바…… 곤충들을 피해 공중에 쪼그려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몬스터들은 이미 반 이상 이 던전을 빠져나갔을 테니 말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놈도 있긴 했다.

화르르르…….

화염형 몬스터였다.

[즐거운 불뱀 (D)]

HP: 342/342

상태 이상: 흥분(던전 브레이크)

스킬: 불태우기(D), 깨물기(C), 몰아넣기(D)

불로 이루어진 뱀.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는다.

활활 불타고 있는 뱀이 저편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상태창을 보니 한두 마리도 아니었다. 여섯 마리쯤 되려나.

하라는 으, 하는 표정이 됐다. 고작 D급 몬스터에게 겁을 먹어서가 아니다.

사사사삭…….

그 뱀이 저편에서 마구 움직이는 바람에, 그쪽에 있던 바…… 가 이쪽으로 마구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희미한 불빛에 그놈의 바…… 가 움직이는 모습이 하라에게는 너무나 잘 보였다.

안 되겠다. 일단 저놈부터 죽여야겠어.

그런데 뭘로 죽이지. 물을 붓나? 하라가 그렇게 생각하며 움직이려 할 때였다.

“사, 살려 주세요…….”

하라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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