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던전 공략이 완료되었습니다.]
[게릴라 게이트가 닫힙니다.]
[남은 시간: 04:59]
아무튼 과거의 하라는 던전 공략에 성공했다.
하라는 뺨을 긁었다. 이제 나도 나가면 되나?
그러다가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마 이대로 덩달아 나까지 던전 밖으로 나가지는 건 아니겠지.
시내 한복판에 열린 던전 특성상, 게이트 밖에는 지금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있을 것이다.
여의도 던전 끝나고 나서 바깥에 누가 있었더라, 셈해 보던 하라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이은주 서울지청장, 그리고 정유진 마포지서장…….
아니, 저기요. 이건 아니지. 그렇게 되면 5분 후에는 자신 또한 사람들 앞에 강제로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기요. 들키지 말라며.”
하지만 시스템 창은 응답이 없었다. 마치 그녀를 놀리듯.
하라가 ‘저기요? 저기요!’ 하고 몇 번이나 목메어 외쳤다. 그동안에도 계속 시간은 흘렀다.
[남은 시간: 02:36]
“김성복 씨! 들키지 말라면서요!”
[남은 시간: 01:30]
“이봐요!”
그 와중에, 남은 5분 동안 던전 안에서 뭐라도 건져가 보겠다며 혹시라도 관변단체가 들어올까 봐 목소리를 죽인 채였다.
하라는 불현듯 서러워졌다. 아니, 이게 사는 건가.
고작 퀘스트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자신의 과거인지라 섣불리 상황을 망칠 수도 없다. 하라도 ‘백 투더 퓨처’ 따위의 수많은 시간 이동 영화를 봤기 때문에 잘 알았다.
[남은 시간: 00:29]
“으아악! 김성복!”
그때였다. 시스템 창이 뿅 하고 떴다.
[‘하늘은 돕는 자를 돕는다’ 선행 퀘스트 완료!]
“29초 남았는데 실화냐!”
[경고: 사용자의 장비가 부서집니다.]
하라는 화들짝 놀라 인벤토리를 뒤져 봤다. 갑자기 무슨 장비가 부서진다는 거야?
하지만 부서지는 장비라고는 없었다.
그리고 하라는 곧, 그게 일종의 복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저 경고가 수십 개가 뜨는 것도 무시하고 복희가 만든 빛의 검을 부수었던 강하라에 대한 자그마한 복수 말이다.
그리고 놀리듯 시스템 창이 떴다.
[인과율 계산 중…….]
“아니, 30초도 안 남았는데 무슨 인과율 계산이에욧!”
그 말에 응답하듯 시스템 창이 깜박였다.
[남은 시간: 00:29]
하라가 ‘어?’ 하고 당황했다. 시간이 안 흐른다고?
하지만 찬찬히 생각해 보면 과거로도 보낼 수 있는데, 시간을 멈추는 것 정도야 어려울 것 없어 보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정말 시스템 창은 하라에게 작정하고 복수한 것이다.
하라는 울컥했다.
“이게 구해 달라는 사람의 태도입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시스템 창은 뻔뻔하게 또다시 퀘스트 창을 띄웠다.
[‘하늘은 돕는 자를 돕는다’ 본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또다시 시스템 창 로그의 ‘선행 퀘스트’ 부분이 깜박였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다급함에 이를 놓친 모양이었다.
이놈의 사기꾼 시스템! 꼭 짱이 돼야지. 짱이 돼서 맨날 싸움만 하고 시스템 다 패 버릴 거야.
하라는 눈물 흘리며 속으로 맹세했다.
[선행 퀘스트 결괏값은 지정 사용자의 인과율 간섭 계산을 위해 필수로 선행되어야 합니다. 결괏값은 본 퀘스트에 반영됩니다.]
“예? 그럼 제가 실패했으면요?”
시스템이 잠시 침묵하다가 메시지 하나를 뱉어 냈다.
[:P]
“…….”
이젠 짜증 낼 기운도 없었다. 하라는 손을 내저었다.
“됐고, 본 퀘스트 주세요. 이랬는데 또 두 번째 본 퀘스트가 어쩌고 하면 진짜 다 패 버린다…….”
[인과율 계산 중…….]
머리가 아팠지만 뭐 그렇다니 어쩌겠나. 하라는 한숨을 쉬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튼 솔직히 중간부터는 좀 재미있기도 했던 게 사실이니까.
그리고 윤세헌 씨도 봤잖아. 그게 비록 자신이 금방 돌아가겠다고 말한 세헌은 아니었지만, 약간의 위안은 됐다. 사실 과거의 강하라 옆에 얌전히 눕혀 놓으려고 잠깐 안아 들었을 때, 은근히 풍기는 향수 냄새도 맡았다.
‘개이득!’
그리고 무엇보다 꾸역꾸역 어떻게든 남들 구하려고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보니 조금 뿌듯하기도 했다.
많이 컸네, 강하라. 매번 엉망진창 우당탕탕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자신감이 붙었다. 하라는 시스템 창을 향해 으름장을 놨다.
“아, 빨리 내놔요. 나 돌아가야 된단 말이에요.”
[인과율 계산 중…….]
그렇게 시스템 창이 한참이나 돌아가더니, 띵 소리를 냈다. 그리고 본 퀘스트 메시지 창이 떴다. 앞서 뜬 것과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지정 사용자 ‘강하라’는 주어지는 퀘스트 던전 안에서 누군가를 구해야 합니다.]
[단, 구해야 할 대상의 위치, 인적 정보 등은 알 수 없습니다.]
[지정 사용자 ‘강하라’는 퀘스트 던전 내에서는 퀘스트 정보를 상대에게 발설할 수 없습니다.]
“안 해요, 안 해.”
다만 앞에서 보지 못한 메시지도 하나 있었다.
[경고: 해당 퀘스트는 지정 사용자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해당 퀘스트 실패 시 페널티: 등급 하락]
등급 하락? 하라의 입이 약간 벌어졌다.
하지만 하라는 곧 코웃음쳤다. 이런 식으로 겁주면 내가 무서워할 줄 알고!
“알았어요, 알았어. 빨리 열어요.”
[남은 시간: 00:28]
그 말에 응답하듯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하라의 눈앞에 새빨간 균열이 벌어졌다.
즈즈즈즈…….
딱 하라 한 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을 법한 깊은 균열. 그 균열은 마치 불이 붙은 듯, 뜨겁고 깊었다.
하라는 심호흡했다. 지옥용의 속박에 따라오는 화염 저항이 없었다면 아마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가자.”
잠깐. 근데 그러면 큐피트 노릇 누가 해?
*
남산은 한가로웠다.
산 언저리에 최근 새로 지어진 호텔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 케이블카를 타러 온 사람들…….
초여름 날씨였지만 바람이 산들산들 불었다. 십여 년 전까지는 공간이 찢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 때문에 외출을 삼가는 분위기였지만, 요즘은 그렇지도 않았다. 헌터인지 뭔지 하는 사람들이 연이어 나타났고, 공간이 찢어지는 일도 최근에는 빠르게 수습된 덕이었다.
드드드드…….
“아이고, 아침부터 왜 이렇게 시끄럽대.”
남산 언저리의 한 호화 주택 정원.
아침부터 잔디밭의 잡초를 뽑고 있던 김 씨가 투덜거렸다. 그가 일하는 집은 이 근방에서도 내로라하는 유력가의 집안이었는데, 사모님이 소음에 예민한 사람이라 김 씨로서는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옆집 사는 어린애까지 놀러 와 있었다. 이 동네가 워낙 부유층들이 많은 만큼 그 집 또한 그럴싸한 집안이었기에, 그 애가 한 번씩 울 때마다 김 씨도 괜히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나마 성격 좋은 이 집 아들이 어린애와 잘 놀아 주어 다행이었다.
“김 집사님.”
역시나. 거실에서 이마를 짚고 있던 사모님이 김 씨를 불렀다. 정원에서 뽑아낸 잡초를 그대로 손에 쥔 채 김 씨는 달려갔다.
“예예, 사모님.”
“이게 아침부터 무슨 소리예요?”
“저도 잘 모릅니다만……. 근처 호텔 때문에 그런가 봅니다. 새로 개장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별관을 또 짓는다고…….”
“맙소사. 집 앞에 호텔 생길 때부터 예상은 했는데…….”
사모는 이마를 짚었다. 왕년에 유명한 여배우였다는 사모의 고운 피부에 주름이 갔다.
“정말 죄송하지만 김 집사님, 가서 언제 공사 끝나는지 물어봐 주실 수 있을까요?”
“예? 예.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집이 비는데 괜찮을까요?”
김 씨가 기웃거렸다. 집안일을 보는 송 씨가 시장엘 가, 집에는 사모와 애들 둘뿐이었다.
사모는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송 여사님 금방 오실 테니까. 그리고 날이 더운데 뭐라도 사 드시고 천천히 오세요.”
“아이고, 뭐 이런 걸 다…….”
사모가 김 씨의 손에 봉투를 쥐여 주었다. 말이 ‘뭐라도 사 먹어라.’지, 꽤 큰 금액이었다.
얼마 전 김 씨가 아들 대학 등록금이 걱정이라고 흘리듯 한 말을 기억한 모양이었다. 김 씨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아이고, 이런 걸 바라고 제가 그때 그렇게 말한 게 아닌데……. 사장님 아시면 큰일 나요.”
“저 아무것도 드린 거 없어요. 그냥 뭐 사 드시라고요.”
“아이구, 참…….”
김 씨는 결국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나 집을 나왔다. 발걸음은 뛸 듯이 가벼웠다.
공부를 잘하는 아들이 대학에 가고 싶다는데, 차마 등록금 줄 돈이 없다는 소리를 할 수 없어 입을 닫았던 것이 고작 일주일 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일이 해결될 줄이야.
‘얼른 은행부터 가야겠다.’
소음은 아마 핑계였을 것이다. 같은 사용인인 송 여사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얼른 찔러 넣어 준 것이다. 겸사겸사 은행도 다녀오라고 한낮에 저를 내보내 준 게 분명했다.
아무튼 그 난폭한 사장님의 안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곱고 배려심 많은 사모님이었다.
김 씨는 날듯이 길을 달려 내려갔다. 저 밑에 있는 은행까지 가려면 한참을 뛰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그날이 제가 사모님을 보는 마지막 날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