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 공무수행에 협조 부탁드립니다-186화 (186/223)

184화

*

게이트라는 것이 생긴 후부터 라농 우타이타니의 이름은 급속도로 유명해졌다. 한국에서의 네임 밸류로 따지자면 대충 넬슨 만델라나 J.F 케네디쯤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케네디는 몰라도 라농은 아는 사람들이 숱했다.

그리고 그런 라농 우타이타니가 지금 윤세헌의 앞에 있었다. 누운 채로.

<미스 우타이타니.>

세헌은 침을 삼켰다.

눈앞의 요원들은 약에 취해 있는 라농을 가볍게 흔들었다. 하지만 침대 위의 라농은 움직이지 않았다.

<전에 미스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라농의 마음대로입니다.>

옆에 서 있던 GUILD 요원 하나가 가볍게 답했다.

세헌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설명이 이어졌다.

<라농 우타이타니는 여자입니다만, 던전 너머의 세계에 다녀온 후에는 자신을 칭하는 말이 수시로 바뀌었습니다. 맨 처음에는 해리성 정체 장애를 의심했지만…….>

아무래도 라농이 던전 너머의 세계에서, 또 다른 자신과 조우하며 혼란이 온 듯하다고 요원은 답했다.

세헌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다른 지구의 나는 여자일 수도 있단 뜻입니까?>

<그건 라농만 알겠죠. 아무도 거길 가 본 적이 없으니.>

요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세헌은 한숨을 쉬었다. 옆에 있던 권욱이 흐음, 하며 세헌을 힐끗 쳐다봤다.

그 의미심장한 눈초리에 세헌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요.”

“아뇨. 윤세헌 씨가 여자라면 재밌었겠다…… 같은 생각을…… 말하지 말 걸 그랬죠?”

“……전 재미없군요.”

라농이 움찔거리며 깨어나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으음…….>

그런 라농을 보며, 근처에 있던 비바가 설명했다.

<1년의 대부분을 약물에 취해 잠으로 보내. 깨우는 데 꽤 시간이 걸릴 거야.>

<알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희한하군.>

<뭐가 말입니까.>

비바는 어깨를 으쓱했다.

<보통 이런 경우엔 ‘빨리 깨우지 못해!’ 하며 화를 내거나, 직접 깨우던데 말이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웃음이 나왔다. 비바는 이런 상황을 생각보다 꽤 많이 겪어 본 듯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지금 세헌이 와 있는 곳은 미국의 헌터 수용 전용 기밀 시설이었다. 이런 곳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들은 대개 높은 신분이거나, 아니면 거기에 준하는 힘을 가진 헌터든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대체로 시간이 없겠지.

물론 세헌도 시간이 많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서둘러서 일을 망치기보다는 최대한 신중하고 싶었다.

*

“야, 윤세헌, 이 미친놈아! 신중하게 굴어! 너 이거 뭐야?”

어제 세헌이 제출한 휴직계를 던지며 화를 내던 뉴스부장의 말이었다. 그랬다. 휴가를 내기에는 부족해 보여 세헌은 휴직계를 냈다.

“작년부터 계속 뉴스 빼먹는 거 봐줬더니, 무슨 휴직을 해? 너 여자한테 미쳐서 커리어 말아먹으려고 작정했어?”

“네.”

세헌의 말에 뉴스부장이 움찔하더니 주변을 둘러봤다. 아침 뉴스를 진행하고 막 들어오던 보도국 사람들의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하지만 세헌은 회의실로 들어가거나, 조용히 말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저 미쳤고요, 커리어 말아먹을 생각은 없지만 지금 해결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네 여자친구, 헌터 아냐? 바쁜 건 알겠는데, 네가 휴직까지 하고 따라가야 될 이유가 뭐냐?”

바깥에는, 아직도 강하라가 언노운 게이트를 수습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사실 그건 그저 17지구의 강하라, 그러니까 실패한 강하라일 뿐인데.

세헌은 눈을 내리깔았다.

“저밖에 따라갈 사람이 없어서요.”

“뭐? 걔 팀은 어디다 놔두고?”

“……설명드리기 어렵습니다.”

허 참. 뉴스부장이 기가 막히다는 듯 손부채질을 했다.

웃기는 일이다. 일반인인 자신이 강하라를 어떻게 구하나.

휴직계를 내면서도 이게 맞는 건가. 자신은 그냥 가만히 있고 이은주 청장이나 권욱에게 부탁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주제넘게 덤볐다가 목숨이라도 잃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딱히 뉴스부장에게 한 말이 거짓말도 아니었다. 차원 너머에 있다는 강하라. 그 부모가 따라가 데려오겠나, 아니면 그 동생이 따라가 데려오겠나.

권욱? 아무리 S급 헌터라고 할지라도 그 깐죽거리는 종자에게 강하라의 일을 맡길 수는 없었다.

결국 휴직계는 수리됐다. 뉴스부장은 혀를 찼다.

“난 모르겠다. 윤세헌. 너 믿는 거 많은 거 알고, 집안 괜찮은 것도 아는데. 지금 아주 실수하는 거다.”

“죄송합니다.”

보도국 내에서 뉴스부장이 알음알음 외줄 타기를 하며, 제 후임으로 세헌을 생각했다는 거 안다. 그리고 세헌에게 믿는 게 많았다는 사실도.

세헌은 저도 모르게 비죽비죽 웃고야 말았다. 어이가 없어서다.

“당신 말마따나 공무수행이라고 치고, 협조하겠습니다.”

“……세상에. 선생님, 감사합니다.”

강하라와 계약 연애를 시작할 때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민간인의 공무 협조치고는 너무 대단한 스케일 아닌가? 차원을 건너가다니. 심지어 헌터도 아닌 자신이.

안개 속에서 더듬더듬 길을 짚어 가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야만 했다.

17지구의 하라와 대화를 나눈 후 한바탕 울고 난 비바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정확히 반나절 만에, 라농 우타이타니와의 30분짜리 미팅이 성사됐다.

비바는 신신당부했다.

<들어가서 일 치면 내 목도 날아가는 거야. 나 올 한 해 공짜로 일해 주기로 하고 이거 성사시킨 거니까, 알아서 잘해.>

비바쯤 되는 헌터의 1년 치 급여…… 아마 주 예산쯤은 될 것이다. 몇백억은 넘겠지.

세헌은 깊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미국에는 래영이 동행했다. 비행기를 타기에도 아까운 시간이니 당연했다.

그리고 17지구의 하라도 함께였다. 이쪽은 비바의 부탁이었다.

래영은 ‘아무튼 다들 내가 택배인 줄 알아…….’ 하고 구시렁거렸지만, 말과는 달리 순순히 세헌과 하라를 데려다주었다. 물론 권욱을 데려다줄 때는 무지하게 투덜거렸지만.

이후에는 꽤 순조로웠다.

순간 이동 스킬로 국가 간 이동을 하는 헌터들이 의무적으로 이용해야 하는 센터에 내려선 후, 입국 절차를 거쳤다. 그리고 곧장 비바가 보낸 전용 차량을 통해 기밀 시설로 왔다.

비바는 처음에는 절대 안 된다더니, 한번 해 주기로 결정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자신이 책임지는 스타일인 듯했다. 시설까지 같이 온 걸 보면 말이다. 비바도 엄청나게 바쁠 터인데.

하지만 거기 관해 비바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1년간 무료로 일해 주기로 했잖아. 당분간 죽어라고 게으름 피울 예정이라고.>

물론 그게 진짜는 아닐 것이다. 자신이 보다 세심하게 신경 써 주기 위해서겠지.

<으아아악!>

그때였다. 약물에서 깨어나던 라농이 마구 몸부림쳤다. 요원들이 그녀를 붙들었고, 세헌은 반사적으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보다 빠르게 17지구의 하라가 세헌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이를 보며 권욱이 휘파람을 불었다.

세헌은 새삼스럽게 그녀를 힐끗 바라봤다. 자신이 아는 강하라와는 완전히 다른, 냉랭한 눈은 지금도 라농 쪽을 긴장하며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에는 혼란도 아주 조금 섞여 있었다.

“……그 세계에서의 라농은 어땠습니까.”

세헌의 물음에 하라가 그를 올려다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죽었어.”

“…….”

“던전 브레이크에 휘말려서.”

“…….”

마치 세헌이 궁금한 게 뭔지 안다는 말투였다.

라농이 아니라, 사실 그 세계에서의 윤세헌은 어땠느냐고. 거기에서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느냐고. 그렇게 물어보고 싶은 세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냉랭하게 잘라 버리는 말투였다.

그 순간이었다.

<깨어났습니다.>

요원 하나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몸부림치며 괴로워하고 있던 라농이 겨우 진정한 모양이었다.

세헌은 조심스럽게 침대 쪽으로 다가섰다.

라농은 흰머리가 반쯤 빠져 있었고, 비쩍 말라 있었다. 근육이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듯, 뼈가 앙상했다. 본래 나이는 쉰쯤 되었겠지만, 마치 여든 살 노인처럼 늙고 병든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무슨 힘이 있는지, 요원들에게 붙들려 씨근거리고 있었다.

<미스 우타이타니. ……미스터 우타이타니?>

요원 하나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노인은 눈을 희번덕거리더니 킬킬 웃었다.

<라농이라고 불러.>

<……라농.>

그제야 세헌이 입을 떼자 노인은 세헌을 보고 히죽 웃었다.

<뭐야, 이건 또. 미남계야?>

<…….>

<제법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만, 그래도 나는 여기를 떠나고야 말 거야.>

<…….>

<그래도 자네 이름은 알려 주면 좋겠군. 천국에서 찾아보고 싶으니 말이야.>

“라농 우타이타니가 인정한 세계적 미남…….”

권욱이 놀리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삐약.”

권욱의 품에서 내내 자고 있던 삐약이가 때마침 깨어나 맞받아치는 것처럼 대답했다.

래영이 입술을 말아 물었고, 동시에 옆에 서 있던 강하라의 볼도 움찔거렸다. 웃는 건지 아닌지 불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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