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지금 저보고 죽으라는 겁니까.”
한참 동안 권욱을 바라보다가 세헌이 뱉은 말이었다.
권욱은 황당해졌다.
“아니, 지금 사람을 뭘로 보고. 제가 쓰레기예요? 갑자기 와서 죽으라고 하게?”
“그간의 권욱 씨 행보를 한번 돌아보시죠.”
“……물론 제가 좀 쓰레기 같긴 했는데 그래도 갑자기 죽으라는 소리를 할 만큼 쓰레기는…….”
“상암동.”
“잘못했습니다.”
권욱은 ‘아!’ 하고 소리 지르고는 머리를 책상에 콩 박았다. 그 모습을 보던 세헌은 어이가 없어 코웃음 쳤다.
“죽은 사람을 저승으로 가서 데려오라는 말이 아니라면- 그게 뭡니까, 대체.”
“안 죽었으면요?”
권욱이 냉큼 대답하자마자 세헌의 턱 근방에 힘줄이 돋았다. 이를 악문 것이다.
빠드득, 하고 묵직한 소리가 나자 권욱은 조금 놀랐다. 예리하던 눈매는 이제 널 죽이겠다는 살기 어린 눈초리로 바뀌어 있었다.
“권욱 씨. 지금 사람 가지고 장난치는 거면 가만 안 두겠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반대로 생각하면 장난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고백이기도 했다.
희망 고문. 그 단어를 머릿속에서 억지로 지워 내며 권욱은 어깨를 으쓱했다.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어설픈 걸로 구라 치는 것도 아니에요. 물론 윤세헌 씨를 갖고 노는 것도 아니고.”
“그럼 뭡니까.”
“아……. 이럴 땐 역시 헌터끼리 얘기하는 게 좋은데. 특히 강하라 씨는 제 스테이터스 창 다 읽을 수 있어서 편했단 말이죠.”
잡소리 하지 말고 본론만 말해. 세헌의 매서운 눈빛을 읽고 권욱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 소원 빌었어요. 강하라 찾게 해 달라고.”
“…….”
권욱은 삐약이를 끌어안은 채 성좌 ‘지니’에게 소원을 빌었다.
야, 나와봐. 강하라 좀 찾아와. 저기 있는 17지구의 강하라 말고, 내가 아는 찐따 강하라.
“그리고 거절당했죠.”
“결론이 뭡니까.”
“제가 뭐라고 거절당했게요?”
[성좌의 한계를 넘는 소원(차원 이동)은 불가합니다.]
시스템 메시지를 끄적인 권욱은 볼펜을 집어 던지고 메모를 세헌의 앞에 내보였다.
윤세헌의 눈이 커졌다.
*
비바 포츠는 계속 당황하고 있었다.
<라농 우타이타니를 만나게 해 달라니, 그건 안 된다고 했잖아.>
오랜만에 한국에서 걸려 온 전화는, 윤세헌의 것이었다.
이은주 청장의 인가를 받고 연결된 전화에서 윤세헌은 비바에게 ‘라농 우타이타니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요청했다. 비바는 정중하게 거절했으나, 세헌은 뜻밖에도 끈질기게 매달렸다.
<저희는 아주 약간의 힌트라도 필요합니다.>
<약간의 힌트?>
윤세헌은 가볍게 심호흡한 후 입을 열었다.
<차원을 건너는 일에 관한 힌트 말입니다.>
<……차원을 건넌다고?>
<예.>
허허.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할 타입으로는 안 보였는데……. 비바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추스르며 물었다.
<차원 건너서 뭐 하게?>
남자는 잠시 침묵하다가 답했다.
<찾아야 할 게 있습니다.>
<뭔데?>
<……강하라 씨입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비바는 기가 막혔다. 얼마 전에 봤던 강하라를 찾는데 차원 이동이 왜 필요해?
그에 세헌은 침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강하라의 사망 소식을 말이다.
S급 헌터가 갑작스럽게 죽었다는 이야기에 비바는 놀랐지만 곧 납득했다. 본래 던전에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아무리 강한 헌터라 할지라도 어이없이 개죽음당하는 일이 워낙 흔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방금 전에는 강하라를 찾는다며? 뭐, 시체라도 사라졌어?>
그 물음에 윤세헌이라는 남자는 더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전했다. 강하라가 아무래도 차원 이동을 한 것 같다는 말이었다.
그제야 비바는 저 요청의 전말을 납득했다.
죽은 줄 알았던 강하라가, 다른 차원으로 갔다 이거지.
<내가 남편이냐고 물었을 때는 아니라고 하더니?>
<……그게 지금 상관있습니까?>
윤세헌의 귀 끝이 미미하게 붉어졌다. 저 건너편에서 영상으로 보고 있는 비바는 모르겠지만, 옆에서 팔짱 끼고 있던 권욱은 그 꼬라지를 생생하게 다 봤다.
권욱은 생각했다. 나 오늘부터 빨간색 좋아하는 거 취소.
물론 화면 너머의 비바도, 윤세헌의 귀 끝까지는 몰라도 그의 기색은 대강 눈치챈 바다. 비바는 호쾌하게 웃었다.
<좋네, 좋을 때야.>
<……이건 서울지청에서 미국 측에 공식적으로 요청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따로 부탁드리는 겁니다. 공식 요청은 너무 오래 걸리니까요.>
만약 권욱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서울지청은 강하라의 수색을 위해 미국 측에 협조 요청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말장난일 뿐이었다.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17지구의 강하라 때문에라도 그녀는 살아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고, 게다가 GUILD는 사조직이기 때문에 서울지청의 협조 요청에 꼭 응해 줘야 할 의무도 없다.
심지어 오로지 추측에만 의지해 공문을 보내기엔, 대한민국 공직 사회는 너무나 경직되어 있었다.
그러니 세헌에게는, 오로지 이 길밖에 없었다.
차원 이동의 실마리를 잡을 방법 말이다.
세헌은 헌터가 아니니 던전의 하늘을 날 수도, 바닥이 없다는 던전의 바다에 무작정 몸을 던질 수도 없었다. 결국 던전 너머의 세계를 보고 왔다는 라농 우타이타니에게 물어서라도 그녀를 찾아야 했다.
‘제발 긍정적으로 받아 주어야 할 텐데.’
비바는 한숨을 쉬며 웃었다.
<나도 그럴 때가 있었지. 정말 좋은 시절이었어.>
하지만 그 웃음이 긍정의 신호는 아니었다. 비바는 이내 얼굴을 들며 세헌에게 딱 잘라 말했다.
<그렇지만 안 돼. 이건 내 권한이 아니야.>
<…….>
<차라리 그쪽이 정식으로 CIA에 요청하는 게 빠를걸.>
그때였다.
<안녕, 비비안.>
덜컹, 소리가 났다. 세헌은 저도 모르게 뒤돌았다. 세헌이 영상 통화 중인 회의실의 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문가에 기대어 있는 것은, 17지구의 하라였다. 여전히 무표정하고, 세헌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
영상 너머의 비바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너…….>
아까 전까지만 해도 세헌과 통화하며 느긋한 자세로 앉아 있던 그녀는 잠깐 일어났다가, 다시 영상 앞으로 최대한 가까이 몸을 들이민 채였다. 방금과는 사뭇 다른 자세였으며, 꽤 다급해 보이기도 했다.
권욱은 그 변화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비바는 단 한 번도 이쪽과 영상 통화하면서 여유를 잃은 적이 없었으니까.
심각한 대화 내내 얼빠진 농담을 섞어서 말하는 모습을 보고 과연 월드 클래스라고 감탄했는데,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너 그때 그 자식 맞지!>
<네 좋은 시절은 아직 기니에 남아 있어.>
<네가 준 베르가못 열매 뭐야, 그거!>
<네 고향에 레몬 나무도 두 그루 심었지. 네가 원했던 대로. 그게 내 앞에 있는 너는 아니지만.>
권욱이 가만히 둘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이거 그건가? 집단적 독백?”
하지만 세헌은 심각했다. 17지구의 하라가 이미 몇 개의 차원을 건너왔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는 다른 지구의 비바가 원했던 것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지금 이곳의 비바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
그러나 세헌의 걱정과는 상관없이 하라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는데…….>
<무슨 말!>
<안심해. 귀네스는 내가 죽였어.>
그렇게 말하며 17지구의 하라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 자리에 있던 권욱과 윤세헌은 눈을 부릅떴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던 그녀가 그렇게 표정을 바꾸는 광경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귀네스는 아마도 사람 이름일 텐데, 누굴 죽였다는 말을 하며 저렇게 웃는 모습이 괜찮은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비바에게는 어떤 신호가 되었다는 건 분명했다.
비바는 ‘허, 허…….’ 하고 잠시 자신이 들은 말을 곱씹어 보더니,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조금씩 그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비바가 울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귀네스, 레몬 나무. 그게 무슨 뜻인지는 권욱도, 윤세헌도 몰랐다. 그러나 비바에게는 아주 중요한 말이었으리라.
그리고 강하라는 눈물을 흘리는 비바에게는 더 이상 관심 없다는 듯, 권욱을 바라봤다.
“사람 잘못 찾았어.”
권욱이 눈썹을 꿈틀하며 되물었다.
“……무슨 뜻이야?”
“내가 몇 개씩이나 되는 차원을 건너왔다는 이야기를 다 들어 놓고서, 왜 비바에게 묻느냐는 뜻이야.”
그렇게 말하던 하라는 힐끗 세헌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궜다.
“……아니, 아니야. 알겠어.”
17지구의 강하라는 여태까지 윤세헌에게 단 한 번도 말을 건 적이 없다. 이는 윤세헌이라는 사람이 없는 듯 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건 아마도 그녀가 아는 또 다른 세헌이 그리워져서이리라.
그리고 세헌 역시 같으리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세헌은 조금 달랐다.
“아뇨, 내가 당신에게 묻지 않은 이유는 좀 다릅니다.”
남자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당신은 당신 입으로 몇 개의 차원을 건넜다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당신의 지구에 돌아가지 못했잖습니까.”
반면 라농은 한번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즉, 실패한 사람에게는 별로 묻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비록 그게 ‘강하라’와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라의 속눈썹이 떨렸다. 권욱은 속으로 욕했다.
정 없는 새끼. 나 살려 준 게 강하라라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