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하지만 하라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주로 유정이 촬영을 앞두고 신난다는 이야기나, 윤세헌에 대한 이야기 따위였다.
“아유, 하라 씨. 윤세헌이 자기 기억도 못 할 텐데, 뭐 어때.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유정은 세헌을 회피하고 싶은 하라를 열심히 회유하고 있었다. 함께 잘생긴 얼굴이나 구경하자는 유정의 이야기는 나름 설득적이었다. 10년 전 일이고, 어차피 하라는 평범한 인상이기도 하고…….
‘실제로 세헌 씨는 나 기억 못 했지…….’
그 말을 마석관리과 창고 안에서 엿듣던 하라는 저도 모르게 피식 미소 지었다.
유정이 전전긍긍하는 바깥의 하라를 설득하는 것도 이해는 됐다. 아무튼 남들은 기억도 못 하는데, 본인만 신경 쓰면서 창고에 숨을 건 대체 뭔가? 심지어 ‘과거의 하라’는 그렇게 마석관리과 창고에 숨었다가, 실수로 A급 마석을 깨 버리는 바람에 과태료 800만 원까지 물게 된다.
그 800만 원은 두고두고 하라의 골머리를 썩게 만드는 주범이 되는데, 그 과태료 생각에 권욱이 주는 돈을 받았다가 여러모로 머리가 아파지기도 했다. 물론 대부분은 강하다 때문이지만.
‘그러고 보니 그 과태료 갚았던가…….’
하라는 아득한 기억을 회상해 봤다. 통장에 이것저것 쌓인 걸 보고 신이 나서 그대로 인터넷 뱅킹으로 과태료 이체한 기억이 날 듯도 하고…….
“그냥 지금 들어가자, 응? 그냥 마석관리과 1인인 척 앉아 있으면 모르고 지나갈 거야.”
“네, 뭐…… 그럴게요.”
그러긴 뭘 그래. 저 ‘과거의 하라’는 절대로 그러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강하라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럴게요, 하면서…….
“저 근데 잠깐 창고 좀 들렀다 갈게요. 뭐 좀 체크하려고요.”
……저런 말로 회피하지. 하라는 생각했다. 나 이 대화 알아. 곧 유정은 커피를 사러 가겠다며 나갈 거고…….
“그럴래? 그러면 나 잠깐 커피 사 올 건데 자기 뭐 마실래?”
“아, 전 아침에 커피 마셨어요.”
‘과거의 하라’는 회피하기 위해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그다음엔.
“아차차.”
하라는 움찔하며 창고 구석 쪽으로 몸을 피했다. ‘과거의 하라’는 모퉁이를 돌아서 곧 마석관리과 창고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과거의 하라’가 당황했다.
“뭐야? 누가 문 열어 놨어……. 빠져 가지고.”
빠져 가지고, 운운하는 소리를 들으며 하라는 숨을 죽였다. 그러다가 움찔했다. 자신이 숨은 곳이 A급 마석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과거의 하라’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문을 닫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공익 영상은 방송국에서 찍으면 되지, 대체 여길 왜 오냐고…….”
그 뒤로는 별말이 없었다. 하지만 하라는 ‘과거의 하라’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당연하지만 다 알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들은 ‘윤세헌’이라는 이름. 그리고 하라의 흑역사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유정의 장난스러운 눈빛과 은근한 기대감.
유정은 좋은 사람이긴 하나, 이런 종류의 일에는 별로 눈치가 없었다. 어쩌면 슬쩍 하라 쪽으로 세헌을 유도할지 몰랐다. 그러다 만약 들키면, 하라는 그 창피함을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는 그녀가 윤세헌을 의식하는 것에 관해 자의식 과잉이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하라에게는 고등학생 때, 세헌과 함께 찍힌 뉴스 영상이 흑역사였다.
마석관리과 복무 내내 남들 앞에 나서거나 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하라의 성향도 그 흑역사에서 기인했다. 학교 다니는 내내 ‘우기 오빠 걔’로 불리면 그렇게 된다.
오죽하면 하라는 동창회도 안 갔다. 왜? 동창들 중에는 하라를 ‘강하라’보다 ‘우기 오빠 걔’로 기억하는 애들이 더 많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용케, S급 되고 나서도 세헌 씨가 늦게 알아차렸네…….’
생각해 보니까 좀 놀랍긴 했다. 전국에 S급으로 얼굴이 알려지고 나서, 인터넷 댓글에는 ‘나 강하라 안다.’는 사람들이 범람했으니까. 온갖 커뮤니티에 ‘나 강하라 동창인데.’가 수백 개는 쇄도했다고 하니 오죽했을까. 세헌이 인터넷 댓글을 안 보는 성향인 덕이 컸다.
아무튼, 권욱이 그 쇼핑몰에서 S급 헌터가 되어 귀환한 후, 그리고 하라가 고3이 된 후에도 권욱의 존재는 한동안 하라를 놀리는 수단이 됐다. 동창들은 권욱이 TV에 나오기만 하면 하라에게 ‘야, 권욱이 너 찾더라. 만나고 싶대.’라며 놀려 댔던 것이다.
찾긴 뭘 찾아, 진짜. 하라는 아드득 이를 갈았다. 권욱 때문에 그 이후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한다.
그때였다.
“휴, 젠장.”
‘과거의 하라’가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이쪽으로 이동해 오기 시작했다.
하라는 당황했다. ‘과거의 하라’가 모퉁이를 돌아 안쪽으로 들어오면 분명히 넓지 않은 창고 구조 때문에라도 제 존재는 들키게 된다.
평행 지구설에는 관심도 없던 ‘과거의 하라’가 자신을 마주치면 어떻게 될까? 들키면 안 되는 거 아냐?
그 순간이었다.
[미니 퀘스트: 들키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