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네 번째로 윤 의원이 전화를 걸었을 때, 하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받으셔야 하는 거 아닐까요…….”
“오늘 치 못난 꼴은 끝났습니다.”
세헌은 농담처럼 답했고, 하라는 애매하게 웃었다.
“하지만 저도 못난 꼴 많이 보였는데요…….”
“세상엔 굳이 보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많죠.”
말투는 가벼웠지만 세헌의 태도는 완강했다. 하라는 더 이상 말을 얹지 않았지만, 윤 의원이 문제였다.
일곱 번째 전화가 왔을 때, 세헌은 결국 한숨을 쉬고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합니다. 잠깐 차 좀 세우고 전화 받겠습니다.”
마치 전화를 받는 것보다, 차를 잠깐 세우느라 하라의 귀가가 지체되는 게 훨씬 미안한 일이라는 태도였다.
하라는 고개를 끄덕였고, 세헌은 졸음운전 쉼터에 차를 세웠다. 그때까지도 윤 의원은 집요하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안전벨트를 푼 세헌이 전화를 받으며 차에서 내렸다. 문이 닫혔다.
별로 듣고 싶지는 않았지만, S급 특유의 기감 때문일까. 하라의 귀에 세헌이 말하는 소리, 그리고 윤 의원이 전화기 건너편에서 뭐라고 하는지까지 다 들렸다.
아니, 시력은 똑같은데 청력은 왜 이렇게 좋아지냐고. 하라는 마른세수를 하다가 차에서 내렸다. 세헌은 이미 저편, 졸음운전 쉼터의 끝까지 걸어가고 있었다.
하라는 반대편으로 걸어 쉼터 경계의 가드레일에 기대섰다. 새벽임에도 세종 근방이라 그런가, 차들이 꽤 지나다녔다. 쌩쌩, 차가 스쳐 갈 때마다 세헌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지워졌다.
- 아비다. 전화를 왜 이렇게 안 받아?
“이유를 모르는 것도 아니시잖아요. 남들 다 자는 새벽에 이게 무슨 짓입니까?”
- 언제까지 안 받나 하고 전화해 봤다! 아비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전화 예절도 없는 분한테 말버릇 지적을 받다니, 개가 웃겠네요.”
- 뭐야?
싸늘한 말투.
하라는 흐린 눈으로 밤하늘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최근의 윤세헌이 제게 상냥해서 까먹고 있었지만…… 윤세헌은 원래 저렇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 희한한 거 준비하고 있다며. 뭐 하는 짓이냐?
“……뉴스부장은 아니겠고. 보도국장입니까.”
- 출처를 알아서 뭐 하게? 어딜 아비 뒤통수를 치려고 들어서는…….
“늘 그러려고 했던 거 모르시지도 않으면서 왜 모르는 척하십니까.”
뒤통수. 보도국장. 심상찮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간간이 세헌이 화를 참느라 심호흡하는 것도 보였다.
- 늘 그러긴? 여태까지 가만히 있다가?
윤 의원이 성을 냈다.
- 그 계집애 일 때문에 그러는 거냐?
하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 이야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말조심하세요.”
- 내가 아비 똥통에 빠트리려는 자식 새끼한테 말조심도 해야 하냐? 그 계집애 때문에 그러는 거 맞지? 너 이 새끼, 진짜 정신 안 차려?
몇 번씩이나 국회 의원을 했던 양반치고 입이 대단히 험했다.
- 이상한 거 집안에 들여놓을 생각 하지도 말라고 내가 했어, 안 했어? 내 말을 아주…….
세헌은 후, 하고 길게 숨을 들이켜더니 그의 말을 잘랐다.
“내 집에 뭐가 들어오든 당신 집안 될 일 없으니까 말조심해.”
- 뭐? 당신? 너 이 새끼…….
“그리고 뇌물 좀 작작 처드세요. 눈 뜨고 있으면 다 보이도록 굴면서 뒤통수는. 없어서 못 먹는 시절도 아닌데 추접스럽게 뭐 하는 짓입니까? 100년을 살 거야, 200년을 살 거야.”
- 이 자식, 말하는 본새가…….
두 사람 사이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친 말이 오갔다.
왜, 왜 그러는 걸까. 귀를 막고 아아아아아, 하고 소리 내던 하라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마음이 아팠다. 제 부모가 제게 험하게 굴 때보다 더.
멀리서 전화받던 세헌은 하라 쪽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하라에게 다 들린다는 걸 진작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녀가 필사적으로 모른 척하는 걸 보니 그만해야겠다 싶어졌다.
하지만 윤 의원은 멈추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윤 의원이 으르렁거렸다.
- 이 빌어처먹을 후레자식이, 아비한테 막말이나 할 거면 입은 왜 텄어!
“당신 때문에 입 닫았는데, 입 열었으니 욕설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만합시다, 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어진 윤 의원의 말에 세헌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 네 어미가 네 앞에서 죽어 자빠진 게 왜 내 탓이야!
머릿속에서 뭔가가 툭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정제되지 않은 말이 고함으로 둔갑해 입 밖으로 막 밀고 나오려는 그때.
빠르게 뛰어온 강하라가 그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손가락은 차가웠으며 그의 입을 가린 손에는 힘이라고는 요만큼도 실려 있지 않았다. 하지만 표정만은 간절했다.
하지 마세요. 후회하실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세헌은 눈을 크게 떴다가, 그제야 겨우 정신 차렸다.
윤 의원에게 막말을 하는 것, 그런 건 후회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강하라 앞에서 제가 돼먹지 못한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만은, 아마 평생토록 후회할 일이 될 것이다.
애당초 전화를 끝까지 받지 말았어야 했다 생각하며 세헌은 전화기를 귓가에서 뗐다. 윤 의원이 저편에서 계속 소리 지르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통화를 끊고 전화기를 아예 꺼 버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저한테 미안하실 게 뭐가 있어요. 제가 엿들은 것 같아서 죄송하지…….”
하라가 겸연쩍게 답했다. 세헌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는 휴대 전화를 집어 던지고 싶은 심경이었는데, 하라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창피한 꼴을 두 번이나 보였군요.”
“그렇게 따지면 저는요.”
머쓱한 대답에 웃고 싶었다. 그런데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가드레일에 기대섰다. 졸음 쉼터 건너편으로 차들이 여전히 쌩쌩 달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밤의 인적 없는 고속 도로는 사람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간신히 그럴싸한 척했는데, 엉망진창인 걸 들키니까 뭐라고 해야 할지.”
세헌이 허탈히 말하자 하라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열다섯 살 때, 집 근방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터졌습니다. 그때 일이 자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아요. 많이 어두웠고, 저희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분이었습니다. 저를 낳은 이후로 쭉 집에 계셨으니 더 그랬겠죠.”
“…….”
“하루빨리 대피하라는 말을 들었을 텐데도, 집 안에서 놀고 있는 어린애들이 놀라지 않게 하려고 놀러 가는 것처럼 짐을 싸셨던 게 기억나요. 기껏 중학생이었던 저는 던전 브레이크가 터진다는 말에 신나 할 정도로 철이 없었고.”
“가까이서 구경하면 안 되나요?”
전교 1등을 매번 한다고 해서 성숙한 아이는 아니었다. 그때의 소년은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어렸다.
‘글쎄, 구경은 좀 높은 데로 대피하면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세헌이가 율리를 챙겨 줘야지.’ 하던 세헌의 어머니는 그때 무슨 생각이었을까.
“결국 던전 안에 고립됐을 때…….”
말을 잇던 세헌은 잠시 멈췄다. 그리고 이마를 약간 찌푸렸다. 뭔가가 생각날 듯 말 듯 해서였다. 그러더니 하라 쪽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하라는 세헌이 저를 쳐다보자 의아한 눈으로 그를 마주 봤다. 안경이 없어 그런가. 세헌의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세헌은 희한한 것을 보는 듯, 혹은 당혹스러운 듯 굴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잠깐 다른 생각 좀 하느라고요.”
“아, 네…….”
세헌은 다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 던전 안에서 세헌의 어머니가 어땠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난다. 벌써 20여 년이 넘었다.
길었는지 짧았는지도 이제는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 동안 시야가 어두웠던 것, 율리가 쉼 없이 울었던 것……. 그리고 점점 지쳐서 그의 등 뒤에서 느리게 걷고 있던 어머니가 어느 순간 그를 가로막은 것.
“너무 지친 나머지 움직이기 어려운 상태였는데도 그때의 어머니는 기묘하도록 민첩하게 저를 가로막았어요. 그리고 갑자기 불이 번졌죠.”
미안해, 세헌아. 엄마가 좀 움직이기 힘드네.
소리 지르지 마. 율리가 놀라…….
어두운 침몰형 던전의 몬스터들은 눈이 퇴화된 대신 청각에 예민했다. 비명을 지르면 당장이라도 몰려올 것이 뻔했기에 그의 어머니는 끝까지 세헌의 입을 막았다. 불길 때문에 세헌을 밀어낸 다음에도 끝까지 조용히 하라고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가, 스러졌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면 누군가가 곧 구해 주러 올 거야.
그게 마치 환상 같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는 재도 남지 않고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를 구하러 사람이 올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지 못했다.
“구해 주러 온 사람이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전 그게 얼마나 늦은 건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넋 놓고 올려다봤더니 불쌍했는지 안아 주더라고요. 그때에서야 이상하게 덜컥, 실감이 났습니다. 비명을 지르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안 나왔다.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말들은 입 안을 맴돌기만 할 뿐이었다.
율리가 울부짖으며 작은 주먹으로 그 사람을 때렸다. 상대는 사과만 했다.
남산 게이트는 던전 브레이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후에도 여러모로 대처가 미흡했다. 구조가 끝난 뒤에도 몇 년이 지나서야 원인 규명과 사과, 보상이 이뤄졌다.
거기엔 세헌이 함묵증에 시달렸던 것도 한몫했다. 그때 세헌을 구한 헌터가 누군지 찾기도 어려울 정도로 아득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세헌의 입은 트였다.
그동안 윤 의원은 승승장구했다. 던전 안에서 죽은 아내와 함묵증에 걸린 아들을 팔아 선거에서 이겼으나, 뒤늦게 따지고 드는 세헌에게는 부정했다.
본디 자신의 집안은 의원 집안이었으며 그건 그저 불행한 사고였다는 식으로 얼버무렸다.
“가끔 웃기기도 합니다. 말 한마디 못 하던 게, 말로 일하고 있으니까…….”
하라는 그런 세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의 팔을 잡아당겨 그대로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