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뭐?”
현숙 씨는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러는 사이 하라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혹시 몇 시인지 아세요?”
하라의 물음에 현숙 씨는 반사적으로 회의실 벽면의 시계를 봤다. 뉴스가 끝나 갈 시간이었다. 밤 10시.
하지만 하라는 현숙 씨가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말했다.
“시간이 궁금해서 여쭤본 건 당연히 아니에요. 엄마, 낮에 오셨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이 시간까지 계시네요.”
“…….”
“이 청장님이 직접 나와서 거절했는데 절 만나고야 말겠다고, 많은 사람들 번거롭게 하시면서 버티고 앉아 있으실 만큼 제가 불쌍하세요?”
현숙은 기가 찼다.
“너 지금 내가 너 망신 줬다고 시위하니? 엄마가 딸 만난다는데 안 된다는 사람들이 더 웃긴 거 아니니?”
“엄마. 제가 거절했다는 생각은 안 하세요?”
물론 하라가 거절한 건 아니다. 하라를 생각한 이 청장과 서울지청 사람들이 짐짓 거절한 거지.
하지만 하라는 그 지점이 미칠 듯이 부끄러웠다. 가족도 아닌 사람들은 이렇게 저를 배려하는데, 정작 가족은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다. 세헌의 앞에서 이미 인정한 사실이지만 새삼스럽게 다시 알게 되니 놀랍도록 비참했다.
“너…….”
“엄마 말씀대로예요. 아빠는 늘 그러시다가 나중에 모른 척 어물쩍 넘어가시죠. 사과 없이.”
“얘가, 부모가 자식한테 사과해야 되니?”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현숙은 말하자마자 아차, 하고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고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하라는 뭐라 말하기 어려운, 복잡한 얼굴로 현숙을 바라봤다.
“……하다한테 제게 사과하라고 말해 보실 순 있잖아요.”
“나이가 몇 살인데 부모가 사과하라니 마니 하는 게 더 웃기지, 얘. 둘이 잘…….”
둘이 잘. 웃음이 나왔다.
“하다가 국회 의원이니 뭐니 하면서 나댈 때는요?”
“얘, 걔도 잘해 보려고 한 건데…….”
“…….”
하라는 말없이 현숙 씨 앞에 가지고 온 여성 잡지를 내밀었다.
[내 자식 S급 만든 비결, 궁금하세요? 강하라 씨 모친 윤현숙 씨 인터뷰]
현숙의 인터뷰 헤드라인이 떡하니 실려 있는 그 표지에 현숙은 얼굴을 붉혔다.
하라는 그걸 밀어 놓고도 입을 열지 않았다. 현숙만 횡설수설했다.
“아니, 나는 너 S급 만든 건 내가 아니라고 말을 했지. 그런데 그 잡지 기자가 자기 마음대로 제목을 이런 식으로 내 가지구…….”
“……엄마가 절 키우신 건 사실이니까 이거에 관해서는 별로 말씀드리진 않으려고 했어요.”
정말이다. 하다나 재필에 비하면 현숙 씨는 욕심을 채웠다고 말하기도 뭐했다. 그냥 자식 자랑이 과했다,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렇잖은가?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첫째 딸이 공부 잘한다는 소리는 현숙 씨가 늘 돌림 노래처럼 하던 자랑이었다. 그러니 그간 쌓아 놨던 속상함을 풀었다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 제가 불쌍하다는 생각은 정말 단 한 번도 해 보신 적 없으신 것 같아서요.”
결국 현숙은 목소리를 높였다.
“얘! 네가 뭐가 불쌍하니! 이제 인생 펼 일만 남았는데!”
보통 때였다면 하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커지자마자 아이고, 하며 납죽 엎드렸을 것이다. 그게 하라가 집안에서 늘 고수해 온 자세였다. 큰소리가 길어져 봐야 늘 손해 보는 건 하라였기 때문이다. 싫은 소리나 잔뜩 듣지.
인생 펼 일만 남았다라. 하라는 하마터면 실소할 뻔했다. 하라도 큐피트를 만났을 때는 그런 줄 알았다. 이렇게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갈 줄 알았나.
“인생 펴질 수도 있었죠. 그런데 그 인생이 엄마, 아빠 때문에 도로 구겨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어요?”
동시에 신기했다. 인생이 펴지진 않았는데, 제 엄마에게 이렇게 따질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 회의실에 들어올 때부터 엄마 앞에서 말하다가 울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지금 하라는 자신이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말을 현숙 씨에게 따박따박 따지고 있었다.
“아니, 그건 오해라고 했잖니!”
“엄마. 저 정말 두 분께 착한 딸이었어요. 아시잖아요.”
물론 아빠가 앞에 있었다면 그건 잘 모르겠다. 하라는 아직 재필을 볼 용기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더 만만한 사람이 엄마라 내가 이러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래, 너 착한 딸인 거 알지. 그러니까 엄마는 더 이해가 안…….”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그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안 하려고요.”
하라는 현숙 씨와 이야기하며 깨달았다. 자신이 늘 그렇게 먼저 죄송하다, 잘못했다 숙였던 이유 말이다.
강하라가 엄마에게 원하는 건, 언제나 몇 마디뿐이었는데.
하라야, 사랑한다. 잘한다, 우리 딸.
잘하고 있어.
괜찮아.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하는 말.
스무 살에 재난청 공무원이 된 이후로 항상 꽉꽉 눌러 담아 왔던 마음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 아니, 적어도 괜찮은 애라는 말을 듣고 싶은 마음 말이다.
그래서 하라는 늘 착한 딸을 연기했다. 자랑스러운 딸, 법관 딸이 되지 못할 거라면 적어도 좋은 딸이고 싶었으며 말 잘 듣는 딸이고 싶었다. 하여 나가서도 좋은 사람을 연기했고, 먼저 사과하는 사람이 됐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찍어 누르는 부친의 말과 모친의 변명뿐이었다. 밖에서는 만만한 사람이 되었고, 나아가 ‘그냥 찐따’라는 별명이 붙었다.
꾹 눌러 담아 온 마음이 터져서 줄줄 흘렀다. 하라는 울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울고 싶지는 않았다. 돌아오는 건 위로가 아닐 테니까.
하라는 엄마가 할 말을 열 개도 읊을 수 있었다. 뭘 잘했다고 울어, 지금 너만 속상하니, 울면 해결돼?
“엄마, 저 궁금한 거 있어요. 제 적금 든 거 있잖아요, 갖고 계시죠.”
무표정하게 묻는 하라를 보고 현숙 씨는 당황했다가 이내 얼굴이 새빨개졌다.
“너 설마 그거 네 손에 없다고 엄마한테 뭐라고 하려는 거니? 엄마가 그거 모아 준다고…….”
“아뇨, 엄마.”
하라는 현숙 씨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늦었지만 그걸로 집수리하세요. 얼추 1억은 될 테니까 모자라진 않을 거예요.”
“뭐? 너 지금…….”
“그리고 하다가 쓴 돈 천만 원이요. 그거 되게 부끄러운 돈이었어요.”
말을 이으려던 현숙이 눈썹을 찡그렸다. 뭐라 묻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하라는 현숙이 제게 맘대로 질문하게 놔두지 않았다.
“돌려주려고 놔두고 있던 건데, 제가 운이 안 좋았으면 아마 평생 돌려주지 못해 부끄럽게 살았을 거예요.”
물론 S급이 되지 않았으면 평생 받을 일도 없는 돈이었지만, 앞뒤 관계를 따지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다.
“항상 엄마 아빠에게 부끄러운 딸은 아니고 싶어서 열심히 살았는데, 엄마 아빠는 절 부끄럽게 하시네요.”
“강하라!”
“도리는 할게요. 그런데 저희 서로 부끄럽지 않을 때가 되면요.”
현숙 씨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너 지금 말 다 했어? 부모한테 그렇게 싸가지 없이 말하는 거 아니다!”
사실 현숙 씨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다 알고 있었다. 하라의 말대로, 가족들 모두가 다 하라에게 조금씩은 폐를 끼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가족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닌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 아래, 서로의 실수를 약간씩은 다 용납하며 살아가는 것 말이다.
물론 미안한 마음도 있긴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이 되자, 현숙 씨는 하라에게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자식이 돼서 부모를 이겨 먹으려 든단 말인가? 제깟 게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어련히 알아서 부모도 미안하다고 할까 봐!
“저 더 이상 이야기하면 진짜 마음 상할 것 같아요. 갈게요. 다시 오지 마세요.”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데 현숙 씨가 입을 벌린 순간, 하라는 벌떡 일어나더니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강하라! 저게 부모 말 안 끝났는데 어디 싸가지 없이!”
현숙 씨도 바로 쫓아나갔지만, 소용없었다. 하라는 정말 빠르게 복도를 가로질러 곧장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애당초 일반인이 하라를 따라갈 수 있을 리 없었다.
현숙 씨는 복도에서 씨근거리다가, 다시 누구라도 마주치면 하라를 불러 달라고 할 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때마침, 회의실 복도 앞에 어리둥절한 듯 눈 껌벅이며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아니, 사람 하나와 새 한 마리.
권욱이었다.
“아이고, 가 버렸네?”
잽싸게 나와 버린 강하라 때문에 복도에서 삐약이를 달래 주던 권욱만 어쩐지 덩그러니 남아 버리고 만 것이다.
현숙 씨는 권욱을 보자마자, 그가 하라와 같은 S급 요원임을 알아봤다. 그뿐인가.
‘저놈이 하라가 쫓아다니던 그 아이돌인지 뭔지…….’
현숙 씨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라를 도로 불러오는 게 더 급했다. 결국 현숙 씨는 권욱을 향해 물었다.
“저기, 그쪽 말이에요. 우리 하라랑 같이 일하는 분 맞죠? 아니, 내가 강하라 엄만데…….”
“아, 예. 압니다. 어쩌다 대충 들어서…….”
회의실 문이 닫혀 있었다지만 권욱은 S급 특유의 기감으로 안에서 두 사람이 대거리하는 걸 다 들었다. 그야 강하라도 다 알고 데려온 것이니 새삼 훔쳐 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지만, 아무래도 어색한 상황이긴 했다. 현숙이 당황하더니 변명하듯 늘어놨다.
“아니, 애가 원래 저런 애가 아니었는데, 어째 요새 싸가지가 없어져서…….”
“음.”
옆구리에 삐약이를 낀 권욱은 목뒤를 긁적이며 멋쩍은 듯 웃었다.
“뭐, 싸가지는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고. 경우는 있는 사람이던데요.”
“……뭐라고요?”
당황스러운지 입만 뻐끔거리는 현숙을 보던 권욱이 픽 웃었다.
“자기 딸 칭찬하는데 이렇게 놀라는 분 처음 보네요.”
당연히 비꼬는 말이다. 그리고 더 할 필요도 없었다.
서울지청 야간 당번들 오늘 고생 좀 하겠네.
권욱은 삐약이를 옆구리에 낀 채 돌아서 빠르게 청장실로 향했다. 어쩐지 얌전하던 삐약이가, 복도 코너를 돌자마자 권욱에게 비장하게 지저귀었다.
“삐약!”
“어, 나 잘했다고? 알아. 오빠야.”
“뺙!”
“잘난 척하지 말라고? 오빠라니까.”
세 번 말할 필요는 없었다. 삐약이는 분연하게 날아올라 권욱의 머리를 쪼았다. 물론 이번에도 실패했다.
저 뒤에서 현숙이 뭐라 뭐라 큰소리를 내는 게 들렸지만, 권욱과 삐약이의 관심사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