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그 준비가 외워 말하기라서 그렇지.
“저는 재난청의 민영화를 간곡히 바라는 마음으로 입당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저희 누나만 해도…….”
천연덕스럽게 강하라의 사연을 끼워 팔며 재난청 민영화 사안을 이야기하는 모습.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나름 열심히 준비했네 싶겠지만, 조정실의 세헌은 알 수 있었다.
강하다가 하는 말은 윤순현이 하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걸 말이다.
“네 엄마 이야기가 뭐 어때서 그러냐? 네 엄마이기 전에 내 집사람이기도 했다. 너한테만 가족이야?”
그렇게 말하던 제 아비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세헌은 마른세수를 했다. 불쾌감이 사라지지 않아서였다.
저 앞에서 윤 의원의 말을 녹음기처럼 재생하고 있는 강하다의 얼굴을 보니, 도저히 그 강하라와 친남매 사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도 있나.
세헌은 어젯밤 새어머니인 김 관장과 했던 통화를 떠올렸다.
무슨 일이냐 물었더니, 웃으며 ‘내가 윤 앵커한테 뭔 일 있어야 전화할 수 있는 사람인가?’ 하며 되묻던 그녀는 진지하게 자신을 걱정했다.
- 나한테 할 말 없어, 윤 앵커?
김 관장도 옆에서 주워듣는 게 있을 테다. 강하라와 강하다, 그리고 윤세헌의 이야기를 자세히는 몰라도 윤 의원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대강 알고 있어 전화한 것이 분명했다.
세헌은 전화를 끊는 대신 그녀에게 권했다.
“저희 아버지한테서 독립하시는 거 어때요. 요즘 독립이 유행이라던데.”
- 아유, 독립운동엔 원래 자금줄이 중요한데 내가 아직 윤 의원님 재산 덜 해 먹었어. 기다려 봐.
그렇게 웃던 그녀는 이내 진지하게 물었다.
- 그 아가씨랑 정말 그런 사이 맞아?
‘그 아가씨’가 누구를 말하는지는 분명했다. 세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제가 좋아합니다.”
- 어머, 윤 앵커 의외네.
잠시 놀라던 김 관장은 다시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 윤 의원님은 윤 앵커가 지금 자기한테 반항하느라고 그러는 줄 아시더라고. 윤 앵커, 회사에 그 아가씨가 여자 친구라고 말하고 다닌다며.
웃음이 나왔다. 정말이지,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다웠다.
자신에게 반항하기 위해 그런다니. 자식이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아예 안중에도 없는 게, 정말로 그 사람이나 할 법한 생각 아닌가.
- 동생은 좀 안 착해 보이던데. 원래 그런 남동생 가진 여자애들이 착해. 누나가 착하니까 자기 마음대로 사는 거거든. 나 봐. 엄청 착하잖아.
웃음이 나왔다.
- 난 잘 모르지만, 아무튼 엄청 세다며. 센 사람이 착하면 손해 많이 봐. 그러니 윤 앵커가 잘 지켜 줘.
“……예.”
- 윤 앵커도 이제 좀 즐겁게 살란가.
내가 걱정할 필요도 없었네, 하며 끊어지던 전화.
웃기는 일이었다. 피가 이어진 아비는 윤세헌을 어떻게든 이용할 생각만 하는데, 정작 피 하나 안 섞인 김 관장이 저를 걱정하다니.
그러니 남매가 저렇게나 다른 건,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닐 테다.
세헌은 그렇게 생각하며 가볍게 발끝에 걸리는 스위치를 눌러 껐다.
강하다가 움찔했고, 스튜디오에 있던 FD도 당황하며 이쪽을 돌아봤다.
FD가 뛰어오기 전에, 세헌은 발끝으로 다시 스위치를 눌렀다. FD가 휴, 한숨 내쉬며 다시 스튜디오를 바라봤다.
콘솔 앞의 PD가 헤드셋을 통해 물었다.
“뭐야?”
- 프롬프터 잠깐 꺼졌었어요. 지금은 괜찮아요.
“진짜?”
PD가 이쪽을 바라봤다. 진작에 스위치 근방에서 멀리 떨어진 세헌은 시치미를 뚝 뗐다.
그 와중에도 방송은 잘 진행되고 있었다. 노련한 앵커들은 프롬프터가 꺼진 티는 조금도 내지 않고 계속해 말을 이었다.
“다음은 조금 조야한 질문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강하다 씨는 누나인 강하라 씨의 장기 복무로 병역을 면제받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재난청으로 인해 미래를 빼앗겼다는 강하다 씨의 말은 어폐가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제 누나는 20년을 빼앗겼습니다. 그에 비해 제가 번 기간은 고작 2년…… 아니, 1년 반에 불과하죠. 고작 1년 반 때문에 20년을 복무해야 한다면 미래를 빼앗겼다는 말을 쓸 수 있지 않을까요?”
고작 1년 반이라. 본인이 막상 군대에 가게 되면 그런 말은 쓸 수도 없을 텐데. 균종은 능숙하게 프롬프터에 쓰인 말을 읊었다.
“그럼 강하다 씨. 재난청이 민영화된다면, 국민의 안전은 더 이상 공평한 자원이 아니게 된다는 의견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
하다가 멈칫했다.
왜 저러지. 균종은 힐끗 다시 프롬프터를 보고 말했다.
“조금 쉽게 풀어 말씀드리자면, 돈을 더 낸 국민이 더 안전한 나라는 결코 좋은 나라가 아니라는 의견을 드리는 겁니다.”
“……그.”
강하다는 움찔거리다가 프롬프터를 훑어봤다. 강하다가 받은 질답지와 미묘하게 달랐다.
그나마 다행히도 프롬프터에는 답변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그럴싸한.
“원래 안전은 공평한 자원이 아닌데요? 튼튼하고 좋은 집에 사는 사람과 다 허물어지는 집에 사는 사람이, 같은 대한민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똑같이 안전하다고 할 수 있나요? 만약 제가 후자의 사람이라면, 더 노력해서 좋은 집에 살고 싶어질 테니까 좋은 동기 부여가 될 수 있겠죠!”
민영의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녀 또한 자신이 가진 질문지와 이 프롬프터가 다르다는 걸 눈치챈 터였다. 방금 프롬프터가 꺼졌을 때 뭔가 문제가 생긴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 쳐도 이거 빡대가린가. 저 대답을 그대로 읊는다고?
민영은 다시 조정실을 바라봤다. 희미하게 웃고 있는 윤세헌이 보였다. 때마침 눈이 마주친 윤세헌은 여유 있는 태도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 인간이. 방송으로 장난을 쳐?
민영은 처음으로 존경하고 좋아하는 선배였던 윤세헌이 괘씸해졌다.
민영은 잠시 고민했다. 저 인간을 놔둬, 말아.
하지만, 민영도 알고 있었다.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이런 장난 따위에는 넘어가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윤세헌이 늘 제 아버지를 엿 먹이고 싶어 했다는 걸.
‘아오, 윤세헌, 저 미친 인간. 선배가 내 앵커직 밀어준 빚 갚는다.’
“동기 부여를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강하다 씨의 입당과 재난청 민영화 입법 추진은 또래 청년들에게 어떤 동기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어…….”
또다시 마가 떴다. 강하다는 슬쩍 프롬프터를 커닝했다.
[자유 답변]
이런 게 어딨어요. 객관식으로 해 줘.
그사이 시간은 계속 흘렀다. 1초, 2초, 3초. 마음이 급해진 윤 의원의 비서관이 카메라 뒤에서 빠르게 손을 흔들었다.
‘답변 얼른!’
“타의 모범이 되고…….”
어리바리한 강하다를 보며 균종이 뭐라 말하려는데, 민영이 끼어들었다.
“정치를 어렵게 생각하는 청년들에게, 생활 안에서 정치가 꼭 필요한 이유를 찾아볼 수 있게 만들어 주실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네요.”
“네, 그거! 그렇죠! 하하.”
“강하다 씨의 입장 잘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벼운 질문 하나 여쭙겠습니다. 만약 재난청이 민영화되면 강하다 씨 또한 병역을 이수해야 하는데요, 그렇다면 강하다 씨는 군대에 기꺼이 입대하시겠습니까?”
민영의 질문에 강하다가 움찔하며 질문지와 프롬프터 사이로 눈동자를 굴렸다. 질문지에는 없는 질문이었지만 프롬프터에는 있었다. 그리고 대답은…….
“네! 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하겠습니다!”
저도 모르게 프롬프터를 그대로 읊은 강하다가 뒤늦게야 제가 뱉어 놓은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고 눈을 부릅떴다.
민영은 부드럽게 웃었다.
“보수당의 청년 인재로서 타의 모범이 되겠다는 말씀 잘 들었습니다.”
“아니, 저!”
하지만 방송 시간은 이미 끝이었다. 조정실에서 PD가 5초 전, 하는 메시지를 띄웠다. 균종이 능숙하게 끼어들었다.
“강하다 씨 의견 들었습니다. 라이브 초대석 이만 마칩니다. 저는 방균종.”
“저는 이민영이었습니다.”
3, 2, 1, 끝.
스튜디오에서 일제히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말들이 터져 나왔다.
책상에 앉은 강하다만 멍하니 넋 놓고 있다가 황급히 의자에서 내려와서, 대본을 정리하고 나가려던 민영을 붙들었다.
“아, 아나운서님! 그거 뭐예요, 방금? 없는 질문이었잖아요?”
“아, 네. 그거요.”
민영이 힐끗 조정실 쪽을 쳐다보다가 다시 하다를 보고 웃었다.
“원래 생방송이 그래요. 방송 중간에 바뀌는 경우가 많아요. 특히 뉴스는 더 그래요. 속보나, 여론 때문에 질문이 추가되는 경우도 많죠.”
“아니, 방금 그건…….”
“고생하셨어요. 저는 다음 방송 준비해야 해서.”
민영은 하다의 말을 툭 자르고는 곧장 스튜디오를 나갔다. 하다는 균종을 붙들려 했으나, 방균종은 민영보다 더 빨리 스튜디오를 떠난 뒤였다.
하다는 저도 모르게 조정실 쪽을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조정실에 있던 한 사람이 없었다. 윤세헌.
하지만 그는 윤세헌을 찾아 떠날 수 없었다. 분주한 스튜디오에 넋 나간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윤 의원의 비서관이었다.
비서관들 중에서도 가장 막내인 그녀는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기를 붙들고 있다가, 허탈한 듯 하다에게 물었다.
“……하다 씨, 왜 그러셨어요…….”
“제가 왜, 왜요.”
물론 하다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주 조금 X됐다는 사실 말이다. 하지만 그건 아주 조금이니까, 어떻게 만회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그냥 방송에서 가볍게 한 대답이었잖아요. 괜찮지 않을까요? 군대 꼭 안 가도…….”
그러나 비서관은 여전히 울상이었다.
“제가 뭐라 말씀드릴 순 없지만, 군대 얘기만 문제가 아니에요. 오늘 하신 대답 다 문제 여지가 너무 많아요……. 아, 오늘 의원실 들어가면 미친 듯이 깨지겠다…… 뭐 했냐고…….”
“…….”
“연락드릴게요…… 안녕히 가세요…….”
비서관은 그 말을 끝으로 터덜터덜 스튜디오를 나갔다. 하다가 당황해 비서관의 등 뒤에 소리쳤다.
“저기요? 방송 끝나고 같이 가는 거 아니에요?”
그러나 비서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방송을 본 윤 의원이 노발대발해서 ‘그 돌대가리 자식, 한강에 밀어 버리라’며 온갖 욕설을 하고 있다는 걸 굳이 전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욕설을 전달하는 것도, 필요한 사람에게나 하는 것이다.
윤 의원은 다시는 강하다를 찾지 않을 것이다. 이 시간 이후로.
결국 분주한 스튜디오에는 강하다만 남겨졌다. 뚜루루루, 뚜루루. 뒤늦게 강하다의 전화기가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관종 강하다에게 쏟아지는 관심이었다.
물론 강하다가 원하던 종류의 관심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