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아무튼, 강하다 씨 영상은 가능하면 지금 막는 게 좋을 테지만…… 그만두지 않겠죠.”
“예? 아, 예.”
세헌의 말에 하라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세헌은 하라가 건네준 자료를 훑어보고 있었다. 하라를 위로해 줄 때와는 사뭇 다른 사무적인 눈빛이었다. 일할 때의 윤세헌과, 강하라를 볼 때의 윤세헌은 그렇게 달랐다. 그게 새삼스럽게 의식되자 가슴이 뛰었다.
“저희 아버지든 강하다 씨든 손쉽게 영상 내릴 사람들이 절대 아닙니다. 강하다 씨는 제가 만나 본 적 없지만, 이런 영상을 찍을 분이면 강하라 씨가 겪을 곤란함에 관해서도 이미 알고 있었겠죠.”
“그…… 렇겠죠.”
마음을 설레게 하는 남자가 제 창피한 가족을 샅샅이 해부하는 걸 듣고 있자니 민망하기도 했다.
하필이면 마음을 자각한 순간, 두 사람 사이 가장 큰 화제가 망할 강하다라니. 하라는 정말이지 지금 이 순간 강하다를 던전 한가운데에 내버리고 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희 아버지도 같습니다. 설득으로 될 사람이 아니죠.”
그렇게 말하던 세헌은 말 없는 하라를 슬쩍 살피더니 씩 웃었다.
“힘들었겠죠?”
“예? 윤 기자님이요?”
“예. 저 말입니다.”
장난스럽게 웃는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하라는 슬그머니 함께 웃었다.
“네, 힘드셨겠어요…….”
가족 때문에 너무 창피해하지 마라, 나도 같은 결점을 가지고 있다는 윤세헌 나름의 위로일 테다.
하지만 하라가 거기 감사를 표하기도 전에 세헌은 마저 말을 이었다.
“아마 예상하시겠지만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 겁니다. 강하라 씨 가족은 지금 공무원 가족이 하면 안 되는 것만 골라서 하고 있으니까요.”
“그 정도인가요?”
세헌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희 뉴스부장이 이 문건 보면 환호성을 지를 겁니다. 단독 보도감이라고.”
“……그럼.”
“강하라 씨.”
세헌이 그녀를 힘주어 불렀다. 하라는 물끄러미 세헌을 바라보며 뒤이을 말을 기다렸다. 세헌이 별 의미 없이 그녀를 부른 건 아닐 테니까.
세헌은 하라를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가족 많이 사랑합니까?”
“……사랑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죠.”
세헌은 일순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가, 손에 들린 서류를 뒤집어 책상에 내려 뒀다.
“그럼 어떻게든 방어할 걸 찾아보는 걸로…….”
“아뇨, 윤 기자님.”
하라는 서류 위에 놓인 세헌의 손을 다급히 잡았다. 세헌이 움찔했다.
“사랑해요. 아마 저희 가족들도 절 사랑하겠지만, 제가 가족을 사랑하는 것과는 좀 다른 방식인 걸 어렴풋이 느끼곤 있었어요.”
“…….”
“절 배려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는 건 기만이죠.”
“……”
“저희 가족들은 절 기만해요.”
세헌이 왜 그 질문을 했는지 하라는 알 것 같았다. 네가 가족을 사랑한다면, 그래서 이런 흠조차 감싸겠다면 자신은 그걸 도와주겠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하라는 세헌이 그러길 바라지 않았다. 우습지만 지금 막 든 생각이었다. 정확히는 하라가 세헌을 좋아한다고 자각한 순간, 강하라는 다른 것도 깨달았다. 눈앞의 남자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 말이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남에게 이렇게까지 하진 않으니까.
하라의 가족조차 하지 않는 배려를 숨 쉬듯 하는 사람이다. 세헌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이런 종류의 여론전에 가장 능숙한 사람이다. 아마 강하다 정도는 우습지도 않겠지. 하지만 그는 강하라에게 대응하겠냐, 혹은 화나지 않느냐는 말 대신 가족을 사랑하느냐고 물어봤다.
그리고 그건 강하라를 오히려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하라는 더 이상 기만당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자신이 우물쭈물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마저 기만당하게 만들 테니까.
하여 하라는 솔직하게 말했다.
“도와주세요.”
“……괜찮습니까?”
“네.”
“가족 얼굴을 영원히 못 보게 될 수도 있고, 특히 아버님 같은 경우엔…… 최소 벌금, 최대 복역입니다.”
하라는 움찔했지만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세헌이 그런 하라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다시 서류를 쥐고 웃었다.
“좋습니다. 강하다 씨부터 처리하죠. 영원히는 어렵겠지만 당분간 입을 닫게 만들어 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처리. 제 가족에게 붙는 그 무자비한 단어에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두근거렸다.
“당분간이면 얼마나요……?”
“글쎄요. 한 1년 반 정도?”
“이상하게 구체적인 기간이네요…….”
세헌이 빙그레 웃었다. 여태까지의 시원시원한 웃음과는 달리 꿍꿍이가 있는 듯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말씀하세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뭐든지 할게요.”
“뭐든지라.”
뭔가 말하려던 남자는 잠시 입을 닫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말을 들으니 두 가지를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세 가지도 괜찮아요!”
하라가 불끈 주먹을 쥐었다.
세헌은 뭘 생각하는지 서류로 입을 가리고 한참 웃다가, 곧이어 성큼 한 발자국 하라에게 다가섰다.
하라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틀렸다. 남자가 워낙 교묘하게 다가선 탓에 하라의 뒤는 너른 책상이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세헌은 하라의 위로 몸을 슬쩍 기울였다. 하라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는 뒤로 최대한 몸을 뺐다. 하지만 노력한 보람도 없이 더 요상한 그림이 되어 버렸다.
“그럼 먼저 한 가지. 쉬운 것부터.”
“어, 예?”
“하라 씨.”
“으아아아, 네, 말씀하세요…….”
이거 너무 가깝지 않나? 세헌의 얼굴은 고작 주먹 한 개 정도 거리를 두고 하라의 얼굴 바로 앞에 있었다.
하라는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세헌이 빙긋 웃었다.
“권욱은 오빤데, 저는 왜 윤 기자님입니까.”
“……어어어.”
세헌의 얼굴이 아주 조금 더 가까워졌다. 손톱만큼인데 놀랍도록 거리감이 좁혀지는 기분이었다.
세헌은 작게 속삭였다.
“지금은 괜찮습니까, 학생?”
“……예?”
“학생네 오빠는 십 년째 무사하기 그지없어 열 받을 지경인데, 학생은 괜찮느냐 이 말입니다.”
학생? 이상한 호칭에 하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곧이어 떠오른 생각에 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으헝허허엏엏엏, 아저씨, 우리 우기 오빠 무사하대요? 네?]
[학생, 미안하지만 지금 내가 곧 생방송이라서, 응?]
[아저씨, 기자잖아요. 으헝허ㅓ헝ㅇ헝. 우리 오빠 소식 좀 알려 주세요, 제발요.]
[그래그래, 학생네 오빠 무사하실 거야. 콧물 닦고. 흥, 옳지. 일단 진정하고.]
[……윤세헌 기자?]
[아, 예. 윤세헌입니다. 지금 여기는 사고가 발생한 쇼핑몰 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