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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공무수행에 협조 부탁드립니다 (109)화 (109/223)

107화

* * *

율리의 개인 콘서트라 초대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초대객 대기실에는 중년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먼저 들어서려던 세헌의 어깨 너머로 그녀를 본 하라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 어머님이시네…….”

세헌은 조금 놀라 하라를 돌아봤다.

“율리 어머님 아십니까? 아는 사이세요?”

“어, 아뇨.”

“그럼 어떻게…….”

율리의 어머니를 대체 어떻게 아느냐는 반문에 하라는 눈알을 굴리다가 다시 답했다.

“그냥 알아요…….”

그냥 알지. 율리가 나온 온갖 영상에서 조금씩 나오시니까…….

하지만 ‘그냥 안다.’는 말뜻을 짐작도 못 한 세헌은 그게 대체 뭐냐는 얼굴로 하라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세헌의 의문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어머, 세헌!”

율리의 어머니가 세헌을 발견한 것이다. 우아하게 트위드 정장을 차려입은 여인이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다가와 세헌의 어깨를 붙들었다.

“너무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루킹 굿. 오늘도 너어무 핸섬하다. 율리 보러 온 거지?”

“어머님도 잘 지내셨어요?”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사이, 얼굴이 익숙한 율리의 매니저가 들어왔다.

“어머님 모시러 왔어요. 율리 리허설 곧 시작하는데 보셔야죠.”

“아유, 그럼. 우리 딸 콘서트 리허설인데 내가 봐야지. 세헌, 같이 갈래?”

여인은 부드럽게 세헌에게 함께 갈 것을 권유했다.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일행이…….”

그녀의 권유를 거절하려던 세헌이 문득 뒤에서 미묘한 낌새를 느끼고 돌아봤다. 거기에는 그 어느 때보다 반짝거리는 눈을 한 강하라가 있었다.

세헌은 아주 잠깐 침묵하다가, 다시 율리의 어머니를 돌아봤다.

“혹시 제 일행도 같이 가도 될까요?”

“오브콜스. 업투유. 안녕하세요, 율리 엄마예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하라에게 인사를 건넸다.

경쾌한 말투에 하라가 ‘어어어, 네, 어머니 안녕하세요! 저저저저는 강하라예요!’ 하고 황급히 답했다.

“어머! 봤어요. 우리 율리 좋아한다면서요. 세헌이랑 같이 올 줄은 몰랐네.”

“어, 어, 어, 네…….”

세헌이 미간을 좁혔다. 이제 확실해졌다. 강하라가 예쁘게 하고 온 것도, 뺨이 저렇게 붉어진 것도 자신 때문이 아니란 걸 말이다.

* * *

리허설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제저녁에 동선 등의 최종 점검은 이미 끝마쳤기 때문이다. 사실상 사운드 체크만 하러 나온 거라 할 수 있다.

율리는 사운드 스태프에게 제 마이크를 건네며 뒤를 흘끗 다시 돌아봤다.

거기에는 여전히 웬 핑크 공주가 손을 꼭 모아 쥐고는 뭐라 뭐라 자신의 어머니와 재잘대고 있었다. 심지어 그 손에는 율리의 개인 응원봉까지 들려 있었다.

율리는 이마를 찡그렸다.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 율리는 대기실에서 그 핑크 공주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강하라였다. 빼도 박도 못하는.

“아유, 우리 딸! 오늘 너무 예쁘다, 그치?”

평소라면 어머니의 호들갑에 맞장구쳐야 했으나, 율리의 신경은 온통 강하라에게 집중돼 있었다. 두꺼운 뿔테 안경을 꼈던 멍청한 얼굴은 오늘은 놀랍도록 드레스업한 모습이었다.

‘화장도 좀 한 것 같고.’

바둑이도 아니고 공무원처럼 흑백 정장 입었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핑크색. 온통 핑크색이다.

‘그런데 분홍색 더럽게 안 어울리네…….’

사실 강하라가 그렇게 꾸며 입은 건 전부 율리 때문이었지만, 율리는 이 순간 윤세헌과 놀랍도록 같은 착각을 하고 있었다.

‘윤세헌하고 데이트한다고 나름 꾸며 입은 거야? 어이없어…….’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으나, 율리의 대기실 장면을 찍기 위해 사방에 카메라가 포진해 있었다.

게다가 정작 윤세헌마저-

“오빠, 뭐 해?”

“영상 찍어.”

정장 빼입고 저 뒤에서 휴대 전화 카메라로 이쪽을 찍고 있었다. 율리는 황당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무슨 영상?”

“강하라 씨 영상. 우리 회사 영상 봤을 거 아냐.”

“…….”

율리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가 10년 넘게 봐 온 윤세헌은 차가운 도시의 남자였다. 휴대 전화는 그저 통화를 하고 취재를 하기 위한 도구로 취급하던 사람이었으며, 평소 기념사진도 잘 안 찍던 사람이라 이 말이다. 율리가 셀카 같이 찍자고 하면 열 번 졸라야 한 번 들어줄까 말까 하던 양반인데.

‘윤세헌이 이 여자 영상 셔틀을 한다고?’

당연하지만 얼굴이 절로 굳었다. 그러자 율리의 매니저가 재빨리 옆에서 속삭였다.

“율리야, 저 채널 첫 영상 4천만 뷰야. 웃어.”

4천만 뷰.

“어머나, 그렇구나. 안녕하세요! 저번에 저희 뵀죠?”

율리 얼굴에 화사하게 꽃이 피었다. 4천만 뷰면 없던 웃음도 어디서 만들어 올 수 있었다.

율리는 어머니 옆에서 저를 숨죽인 채 보고 있던 하라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그날은 제가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했어요. 그때 말씀 좀 해 주시지! 제가 몰랐잖아요, S급이신지도.”

“아…….”

“그거 아세요? 저 이분 예전에 뵀는데, 그때 저한테 그냥 재난청 소속 공무원이라고 하셔서 그냥 그런 줄만 알았잖아요.”

율리가 카메라를 보며 분홍색 입술을 삐죽였다.

“고, 공무원이 맞긴 맞으니까요…….”

그 앞에서 붉어진 얼굴로 중얼거리는 하라를 보고 율리는 시종일관 웃었다.

“저 좋아한다고 해 주셨다면서요. 그때 그 말도 해 주시지.”

“아, 불편하실까 봐…….”

율리에게 잡힌 손은 꼼지락거리지도 않고 굳은 채다. 율리는 하라의 손가락을 펴서 깍지 껴 잡은 다음에 마구 흔들었다. 카메라 뒤의 세헌이 희미하게 웃고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그 와중에 윤세헌이 절 그런 눈으로 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새빨간 얼굴로 ‘저저저저 그 이이이번 앨범 너무 좋고요, 오늘 너어어무 예쁘신데…… 어…….’ 하며 얼뜨기처럼 중얼거리고 있는 강하라가 제일 마음에 안 든다.

‘팬 코스프레 진짜 잘하네.’

제게 이러는 것도 윤세헌에게 잘 보이려는 걸 텐데. 그날 세헌 앞에서는 조용하더니, 뒤늦게 윤세헌과 자신이 오래된 사이라는 걸 알고 자신을 좋아하는 척하는 것이리라.

실제로 예전 세헌의 여자 친구들 중에 그런 타입도 있었다. 자신을 좋아하는 척하면서 친해져서 어떻게 무마해 보려던 타입. 물론 신율리 때문에 치를 떨며 떨어져 나갔다.

“저 정말 좋아하세요?”

“네!!!”

뭐, ‘거짓말인데요~’라는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다만.

그때, 율리의 어머니가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아이, 율리야, 뭐 하니. 사인이라도 해 드려.”

“사사사사사인이요?”

강하라가 사시나무처럼 떨며 되물었다.

그 와중에 매니저가 재빨리 새 싱글 앨범과 커다란 유성 사인펜을 가져다주었다.

율리는 그 사인펜을 받아 들고 뚜껑을 뽑았다. 뽁. 그리고 환히 웃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앨범만 드릴 순 없고.”

“어어어.”

가볍게 눈앞의 강하라 옷자락을 붙들어 끌고 왔다. 신축성 좋은 맨투맨이 죽 늘어났다.

엉겁결에 뒤돌려진 강하라가 ‘어어? 어?’ 하고 바보 같은 소리만 연발하는데, 율리는 미소 지은 채 강하라 등에 그대로 크게 사인했다.

‘내가 좀 못돼 처먹은 거 같지만 어쩌겠니. 네가 이해하렴.’

그러게 누가 드럽게 안 어울리는 핑크색 옷 입고 데이트하래? 나는 오늘 일하는데! 내가 일하는 데서 너랑 오빠 연애하는 꼴 내가 두 눈 뜨고 못 본다.

뭐, 그런 생각을 하며 ‘신 율 리’ 크게도 사인했다. 그 와중에 윤세헌은 그 모습을 참 열심히도 찍고 있었다.

둘 다 꼴 보기 싫어 죽겠다. 윤세헌 정강이도 차 버리고 싶다 생각하며 율리는 사인을 끝내고 하라를 다시 돌려세웠다.

강하라는…….

“아.”

입을 막고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어머, 이건 좀 심했나. 율리는 아주아주 조금 미안해졌다. 사인할 때 보니까 새 옷 같던데. 어쩌겠니. 그러게 왜 윤세헌이니. 윤세헌만 아니었어도.

“저희 사진도 같이 찍을까요?”

“어, 어어어, 사진이요? 진짜요?”

“그럼요. 언니, 우리 좀 찍어 줘.”

율리는 반짝반짝한 핑크색 휴대 전화를 매니저에게 건네주었다. 늘 찍는 셀카 앱 말고 기본 휴대 전화 카메라로.

보정 하나 없는 카메라를 보고 매니저가 의아한 눈치였지만 곧장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찍을게요.”

“잠시만요. 언니, 저랑 손잡아요.”

“어어어, 어, 네.”

강하라 손깍지 끼고, 얼굴을 맞댔다. 뺨이 찰싹 붙었다. 누가 보면 세상 절친처럼. 공연용 메이크업 다 한 얼굴로 일반인 얼굴이랑 찰싹찰싹 붙어서.

그제야 매니저가 ‘요놈의 계집애…….’ 하는 얼굴이 됐다.

흥칫핏. 왜뭐왜. 내가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때리는 것도 아닌데.

옆의 강하라가 발발발 떠는 게 뺨으로 느껴졌다. 사진까지 다 찍고 난 율리는 사진을 확인했다. 음. 예쁘게 나왔군.

“언니, 이거 제가 SNS에 올려도 되죠? 아, 맞다. 언니라고 부르는 거 기분 나쁘시면 안 할게요.”

“어, 아니에요, 아니에요. 너무 좋아요.”

말도 제대로 못 잇던 강하라가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율리는 입술을 올리고 웃었다.

“진짜요? 저도 좋아요. 언니 진짜 좋은 분 같아요. 우리 친하게 지내요. 네?”

‘[스타 포토] 율리-강하라, 아이돌과 S급의 미모 대결’ 같은 기사 백만 개 뜨면 울기나 해라.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그런 율리를 지켜보던 매니저가 빠르게 덧붙였다.

“율리야, 이제 대기해야 돼. 팬들 입장 시작했대.”

이대로 상황이 길어지면 율리가 실수할까 봐서였다. 윤세헌 앞에선 오만 패악을 다 부리는 신율리를 그간 지켜봐 온 것도 한몫했다.

“아, 그래? 그래요. 엄마 언니 오빠 이따 봐요, 알았지? 사랑해요, 엄마.”

그 와중에 S급 상대하느라 자기는 쳐다도 안 본다고 서운해할 엄마를 한 번 안아 주고. 율리는 인사를 꾸벅꾸벅하고 가는 강하라, 그리고 그런 강하라를 옆에서 찍으며 나가는 세헌을 째려보다가 갑작스럽게 큰소리로 하라를 불렀다.

“하라 언니!”

“어, 네?”

하라가 이쪽을 황급히 돌아봤다. 율리는 가볍게 손을 입 앞에 모았다.

“언니 핑크보다 그린이 더 잘 어울릴 거 같아요!”

암만 봐도 핑크색은 강하라한테는 안 받는 색이었다. 아니, 저거 보라고. 보니까 피부는 하얀 편인 거 같은데 죽어도 안 받잖아. 저런 얼굴은 그린 계열이 예쁘다고. 지나치게 심술부리고 난 신율리의 양심이 뒤늦게 일한 결과였다.

물론 대기실을 나가는 강하라 심정은 모르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 오늘부터 초록색 옷만 입어야지…….’

초록색 티셔츠, 초록색 바지. 얼굴도 초록색으로 칠할까? 초록 마녀 엘파바처럼? 오늘 시위대에 마녀니, 악마니 하는 소리도 들은 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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