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 공무수행에 협조 부탁드립니다 (96)화 (96/223)

94화

* * *

“뭐, 그렇게 스무스하게 보스 몬스터까지 끝.”

아까부터 기가 막혀 입을 벌리고 있던 정혁 앞에서 래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비행에 광역 스킬까지 있으니까 그게 되더라고요.”

말 그대로 이게 되네. 기가 막혔다. 직접 본 래영도 얼마나 어처구니없었는지. 그러니 말로만 전해 들은 정혁은 더할 것이다.

게다가 포션이라도 마시라고 건네줬더니, 하라는 헤헤 웃으며 옆의 깍두기 손을 꼭 잡았다.

“이거면 돼요.”

뭔데. 사랑의 힘? 그렇게 되묻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게 말이 되나…….”

“말이 되더라고요?”

“기가 막히군.”

정혁이 혀를 찼다. 그도 권욱을 옆에서 봐 왔으니 S급 헌터가 얼마나 센지는 알고 있었다. 다만 권욱의 경우에는 보조를 많이 받아야 하는 터라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혼자만 있어도 자연재해라고들 하는 게 S급이다.

한편, 주변은 어수선했다. 파주 던전이 공략 완료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고양지청 헌터들이 와서 게이트가 사라지고 난 주변을 수습 중이었기 때문이다.

바리케이드가 겹쳐 트럭 위에 쌓이는 분주한 모습을 보던 정혁은 한숨을 쉬었다.

“내 꼴만 우스워졌네.”

그러면서 그는 눈앞에 있는 박스를 흘끗 보다가 못 볼 걸 봤다는 듯한 얼굴이 됐다. 그 박스 안에 있는 건 다름 아닌 정혁이 가져온 포션과 장비들이었으니까.

그는 다른 이들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눈을 감고 한 발로 그 박스를 스윽 밀었다. 박스가 도달한 곳은 머쓱하게 옆에서 제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강하라 앞이었다.

“됐다. 간식 삼아 먹어라.”

“……포션을요?”

“마! 나 때는 하루에 포션 한 병씩 먹어야 키 큰다고 그랬어!”

머쓱하고 할 말 없으니 하는 소리가 엉뚱했다. 포션이 무슨 영양제냐, 한 병씩 먹어야 키 크게.

래영이 기가 막혀 뭐라 하려는데, 정혁이 다시 짜증을 냈다.

“사나이가 그러면 본새 없게 이거 도로 들고 가냐!”

“……1억 원어치는 돼 보이는데.”

힐끗 본 민호가 한마디 덧붙였다.

“뭐? 그렇게 많아?”

정혁이 당황해 안쪽을 들여다봤다가 아차 했다. 아무래도 손에 집히는 대로 던져 넣고 들고 온 게 그만큼이나 된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가져가세요.”

넌지시 하라가 다시 권했지만 정혁은 꿋꿋했다.

“사, 사나이가 한번 한 말 물릴 수는 없지!”

“그치만…….”

“그럼 잘 쓰겠습니다.”

서로 양보하려는 두 사람 사이에서 손이 뻗어 나왔다. 윤세헌이었다.

하라가 커다래진 눈으로 세헌을 보는데, 세헌이 뻔뻔하게 상자를 받쳐 들었다.

“준 거 도로 돌려주면 준 사람 마음도 상하는 법입니다.”

“그치만 그거 너무 비싼-”

“그렇지요? 김정혁 씨. 게다가 권왕이라는 별명씩이나 가진 분인데.”

세헌은 하라가 끼어들 틈을 안 주고 웃으며 정혁을 돌아봤다. 정혁이 헛기침했다.

“크흠. 그, 그럼! 돈 1억쯤이야…….”

그 말과 달리 정혁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이고, 빌어먹을. 집사람이 돈 아껴 쓰라고 했는데.

그렇지만 뭐 어쩌겠나.

정혁은 가까스로 마음을 다스렸다. 집사람도 딸 같은 애 용돈 줬다고 하면 등짝 몇번 때리고 말겠지!

물론 친딸에게도 용돈 1억씩 턱턱 주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하지만 강하라를 따돌려 사지에 혼자 가도록 만들었다는 자책을 하던 것에 비하면 마음은 한결 가볍긴 했다.

하라 또한 그런 정혁의 기색을 눈치채고 멋쩍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커흠! 그럼 나 집에 간다.”

“집이요?”

“그럼 내가 어딜 가리!”

정혁이 괜히 신경질 내며 쏘아붙였다. 그러나 하라는 눈을 깜박이더니 그에게 물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좀 있는데요, 혹시 팀 K가 없어지면 새 팀 찾아가실 건가요?”

“아, 거 재수없게 뭔 소리야!”

그렇게 말하던 정혁은 흠칫했다.

여태까지 팀 K의 존속 여부에 관해 다들 그렇게나 불안해하며 물어 댔으나, 막상 상암 던전에 관련된 사람들은 계속 입을 닫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본다는 건…….

“……권욱이 놈이 뭔가 거하게 사고 친 게 맞구만? 진짜 팀 K 없어져?”

“음, 아마 파주 던전도 끝났고 하니 슬슬 다른 분들께도 안내가 가겠지만, 그럴 거 같아요.”

어쨌든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키려던 사람이다. 여태까지 그가 지녀 왔던 권한이 그대로 유지되지 못하리란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 청장이 하라에게 왜 리더십 운운했겠는가. 하라는 대강 앞으로 펼쳐질 일들이 눈에 보였다. 강하라에게도 그녀의 팀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라는 지금 제 옆에 있는 사람들로 자신의 팀을 꾸리고 싶어졌다. 물론 김정혁은 하라로서도 의외였지만, 나쁘지 않은 선택 같았다.

‘언니 진심이에요? 저 아저씨랑?’

눈치 빠른 래영이 우웩 하는 얼굴로 강하라를 바라봤다. 하지만 하라는 그러고 싶었다. 정혁이 좀 거칠긴 해도 그들을 생각해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제가 팀 꾸리면 오시지 않을래요?”

“……이건 또.”

정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험악한 인상에 하라가 저도 모르게 우물쭈물했다.

“아니, 그게…… 저도 팀을 꾸리긴 꾸려야 하구, 그런데 음……. 간식 삼아 포션 주는 분 계시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설마 물주로 스카웃하는 거요?”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그렇게 말하며 하라가 씩 웃었다.

“새 팀 찾으실 때 한번 고려해 봐 주시면 감사하겠다는 말이에요. 제가 꾸릴 팀도 어쨌든 ‘새 팀’이잖아요.”

정혁은 이 아가씨가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하라가 ‘걱정해 주셔서’, ‘챙겨 주셔서’ 따위의 이유로 팀 제안을 했다면 정혁은 곧장 몸을 돌려 집에 갔을 것이다. 그런 건 정혁의 성격에 잘 맞지도 않았다.

그런데 하라는 정혁이 별말 한 것도 아니거늘- 제 면구스러운 속내를 알아듣고, 팀 제안을 담백하게 건넸다.

‘나랑 만나 본 사람도 아닌데…….’

물론 강하라가 권욱 때문에 팀 K 영상을 보며 김정혁 성향을 대강 파악해서 그렇다는 건 정혁은 몰랐겠지만.

“내가 와도 아무도 안 좋아할 거 같은데, 여긴?”

“알긴 아시네요?”

정혁이 되묻자마자 래영이 비아냥거렸다.

“래영.”

민호가 래영의 등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며 작게 제지했다.

하라는 헤헤 웃으며 안경을 벗어 소매로 대강 닦았다. 세헌이 그런 하라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안경을 받아 들고 다시 안경 닦이로 그것을 닦았다.

저 방송쟁이는 안경도 안 끼면서 안경 닦이는 왜 가지고 다녀. 정혁이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세헌은 안경을 깨끗하게 닦아 하라에게 건넸다. 하라 또한 자연스레 그것을 받아 들고 끼며 웃었다.

“김정혁 씨도 딱히 저희 중에 좋은 사람 없는데 여기 오셨잖아요, 그쵸.”

“……그건 그렇지.”

“원래 직장 일이 그래요. 아무리 싫어도 해야 할 일은 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그 직장은 그럭저럭 괜찮은 곳이 되더라고요. 전 그런 팀이 좋아요. 어떠세요?”

“……그게 좋은 팀이야?”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다들 할 일만 얼른 하고 집에 가는 팀이 얼마나 좋아요?”

조금 이상한 지론이긴 했지만 또 그럴싸하게 들리기도 했다. 정혁이 머뭇거리자 하라가 민망해했다.

“뭐, 인센티브도 제가 어떻게든 해 볼게요.”

이렇게 숙맥인 성격으로 무슨 인센티브람. 어떻게든 해 보긴. 아무리 노력해 봐야 그 여우 같은 권욱만큼 벌어 올 수나 있겠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싫다는 말이 대뜸 나오지는 않았다. 정혁은 결국 마지못해 답하는 양 말했다.

“뭐, 그러든가.”

“아, 잠깐만요, 누나. 조건 하나만 걸면 안 돼요?”

“무슨 조건?”

“저 형보고 제 본명 못 부르게 해요! 안 그럼 저 하라 누나 팀 안 들어갈 거야!”

복희가 끼어들자 정혁이 코웃음 쳤다.

“김성복보고 김성복이라고 부르는데 김성복이 못 부르게 하면 뭐 어쩌란 말이냐, 김성복아. 인마.”

“아!!!”

복희가 발을 굴렀다.

잠깐의 협의 끝에, 하라는 복희를 두고 ‘복복이라고 부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그렇게 복희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혁과 하라는 극적 타결을 해냈다.

“아오! 몰라, 아무튼 파주 던전 공략 끝! 기념사진 찍어요!”

복희가 진저리를 치면서도 휴대 전화를 들어 기념사진을 찍었다.

정혁은 엉겁결에 거기 끼어 사진을 찍고, 아주 한참 후에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서야 자신이 얼렁뚱땅 강하라 팀에 끼게 된 모양새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봉 협상 하나 없이 그렇게 사람을 채어 가다니! 그거 권욱보다 더한 여우 아닌가 싶었다. 물론 남들은 모르는 일이다.

* * *

- 야, 너네 복희슨스 업로드 봄?

- 권욱얼굴 유?

┗ ㄴㄴ 없음

┗ 권욱얼굴 있을때 다시와서 삐삐쳐라

- 가운데 있는거 새 스급 맞음?

┗ 헐 맞는듯

┗ 설마 김성복 새 스급팀으로 갈아타나?

┗ 설마 ㄷㄷ

┗ 김성복 둘기됨?

- 복희슨스 사진 실질적 둘기 라인업 아님?

┗ 택배랑 미노도? 설마

┗ 멤버 멸칭 노노해

- 권욱 개빡치겠네 키워놨더니 둘기 됨 ㅋㅋㅋㅋㅋㅋ

- 근거 없는 루머 그만 들고와

- 솔직히 지금 루머 판칠 만하지 요새 팀 K 브이로그도 매주 올라오던거 흔적도 없음 다 어디감?

권욱의 부재가 근 보름을 넘어 3주째였다. 권욱의 팬들로서는 짜증이 날 만도 했다. 팀 K는 활동도 없고, 권욱은 완전히 흔적이 소멸돼 있었다.

누군가는 상암 던전 공략 끝났으니 그걸로 바쁜가 보지, 하고 행복 회로를 돌렸지만 다들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건 슬슬 인지하고 있었다.

- 재난청 일처리 거지 같은 거 하루이틀 보냐?

- 재난청 구린거 누가 뭐래? 근데 세금으로 키운 아이돌 빨면서 제대로 된 상황 브리핑은 보고싶다 이거지

- 새 스급 계속 공개 안하는 것도 빡치는데

그 와중에 새로운 루머가 속속 떴다.

[야 나 팀 K 관계자가 친구 동생인데 팀 K 해체설 있던데]

새벽에 팀 K 게시판을 보고 있던 권욱의 팬은 짜증을 내며 그 글을 신고 처리했다.

‘권욱, 뭐 하냐. 네가 얼굴 안 보여 주니까 별 루머가 다 판치잖아. 빨리 오든가.’

평소에는 귀신같이 팬덤 눈팅해 가면서 관리하더니, 왜 3주째 태업인지 알 수 없었다. 지친다 생각하면서 침대에 누우려는데, 마지막으로 새로 고침 했더니 웬 글이 하나 새로 떴다.

[야 니네 이거 봄? 팀 K 둘기 맞는듯 ㄷㄷ]

클릭한 게시물 안의 동영상 제목은 놀랍도록 어그로성이 짙었다.

[파주 던전 두시간 만에 공략한 썰 푼다]

뭔데, 이거?

그녀를 비롯해 팀 K 게시판에 상주 중이던 팬들은 일제히 혼란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다. 잠을 잘 수 있을 리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