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하다는 원래 태생부터 떼가 많은 성격이었다. 하라와는 사뭇 달랐는데, 아무튼 그런 성격인 덕에 강하다는 24년 짧은 인생으로 체득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이해보다 용서가 빠르다.
사례 1. 귀를 뚫고 싶다고 마구 졸랐으나 엄마는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뚫고 왔더니 현숙 씨는 하다를 마구 혼냈지만 결국 한숨을 쉬고 용서해 줬다.
사례 2. 염색을 하고 싶었으나 보수적인 아빠가 허락해 주지 않았다. 고2 방학, 빨갛게 염색했더니 아빠는 머리를 뜯으니 마니 죽일 놈이니 살릴 놈이니 했지만, 결국 개학식 전에 도로 까맣게 염색하겠다는 말에 용서했다.
아, 생각해 보니까 그때 아빠한테 머리 뜯겨서 헤어라인이 이 모양 된 거 같아. 아닌가?
아무튼, 강하다는 오늘 사례 3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돈 안 빌려주는 강하라 돈 쓰고 떼써 보기.
마음속에서 일말의 양심이 속삭였다. 하다야. 그거 범죄야.
하지만 강하다는 생각했다.
강하라가 이렇게 꿍쳐 놓은 걸 보면 이건 수상한 돈이 틀림없다. 그리고 뇌물 공여죄도 범죄다. 이 돈은 뇌물 공여의 증거품이 분명하니 내가 쓰면 증거도 사라진다.
‘나는 강하라의 뇌물 공여죄 증거 인멸 중인 것이다!’
이게 무슨 기적의 논린가 싶은데, 강하다가 그걸 해냅니다.
그래서 강하다는 뇌물 공여죄 증거를 없애러 강남으로 꽁지 빠져라 뛰어갔다. 헤어라인 시술을 받으면서 그는 생각했다.
‘팀 K 만나게 해 달라는 뇌물이라도 받았나? 알 게 뭐야. 앞으로도 더 받겠지? 좋겠다, 강하라. 아! 나도 헌터 하고 싶은데.’
그런 철없는 생각들이 입 밖으로 흘러나올까 봐 수면 마취 말고 부분 마취로 해 달라고 부탁한 게 강하다의 마지막 양심이라면 양심이었다.
물론 강하다가 정말 빡대가리라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그저 모르는 척하는 거지.
그 와중에 수술 결과는 너무너무 마음에 들었다. 수술 자국이 아무느라 헤어라인이 빨갰지만, 눈을 흐리게 뜨고 거울을 보니 잘생겨 보이기도 했다.
아, 몰라. 나중에 걸리면 그냥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빨리 갚는다 하지, 뭐. 이대로 며칠만 들키지 말자, 했는데 고작 이틀 만에 강하라에게 들킨 것이다.
막상 하라가 방문을 두들기며 큰소리를 내니 겁이 났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가 어쩌겠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받아 버린 시술인데.
그렇지만 우지직 소리를 내며 손잡이가 뜯기는 순간, ‘아, X 됐다.’라는 직감이 강하다를 습격했다.
맹세코 하다는 강하라가 저렇게 구는 걸 본 적이 없었으니까.
강하라의 헌터로서의 능력은 E급. 일반인보다 조금 더 강한 정도다. 하지만 그 ‘조금 더 강한’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는 몰랐던 하다는 진짜, 완전, 쫄았다.
강하다는 다시 자신에게 되뇌었다.
이해보다 용서가 빠르다. 그리고 강하라 같은 찐따 호구가 화내 봤자, 화낼 줄도 모르는 강하라는 조금 화내다 말 것이다.
하지만 강하다가 미처 몰랐던 것이 있었으니.
법보다 주먹이 빠르다. 그리고 강하다는 강하라의 남동생이다.
혈육이라는 건 정말로 놀라운 관계라서, 바깥에서는 실실 웃는 호구 누나라도, 남동생이 빡치게 하는 순간 악역에게 약혼녀 빼앗긴 미친 북부 대공으로 변모하는 것이 가능하다.
약혼녀 뺏긴 북부 대공이 악역 용서하는 거 본 사람?
없다.
북부 대공 강하라는 두말하지 않았다.
뻑, 소리가 났다.
“이런 미친.”
강하다는 제 눈을 의심했다. 강하라가 강하다 옆의 벽을 내려친 것이다.
벽이 주먹 모양으로 파였다. 곱하기 스킬 덕분이었다. 20년 된 주택이 비명을 질렀지만 하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원래 북부 대공쯤 되면 벽 좀 부수는 거다.
“똑바로 얘기해, 강하다. 그래서.”
“그그, 그 뭐!”
“그 돈 다 썼어?”
합죽이가 됩시다, 합.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하다는 합죽이가 되었다.
강하라의 눈매가 험악해졌다.
“똑바로 말하랬다.”
“어…… 어어.”
그렇다. 강하다는 뇌물 공여죄 인멸을 너무나 확실하게 했다.
원래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정말 딱 500만 원만 쓰고 끝내려고 했다.
근데 헤어라인 시술을 하고 집에 가려니 지하철 타기가 좀 창피한 거야. 누가 내 머리 볼까 봐. 그래서 5만 원짜리 1장 빼서 택시를 타려는 와중에 눈앞에 또 백화점이 있는 거지.
아, 그럼 저기서 모자 사서 쓰고 갈까? 하고 백화점에 잠깐 들어갔다.
하지만 백화점이라는 건 원래 고도의 소비를 위한 치밀한 설계가 되어 있는 현대 상업 시설의 정점이다. 강하다보다 머리 백배는 좋은 사람들이 돈 쓰라고 만든 건물인 것이다.
그리하여 모자만 사러 들어간 강하다는 머리어깨무릎발무릎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사서 나왔다.
‘500만 원 꼭 갚아야지.’가 ‘550만 원 갚아야지.’, ‘600만 원 갚아야지.’ 됐다가, ‘아, 몰라. 천만 원 갚자. 나 취직하면 그거 갚는 거 일도 아닌데.’ 같은 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꼴에 치밀하기까지 했다. 혹시라도 환불해야 되는 불상사가 생길까 봐 택을 다 뗐다.
강하라는 강하다가 주섬주섬 옷장에서 끄집어낸 500만 원어치 쇼핑 리스트를 보고 넋이 나갔다.
“너 진짜 미쳤어? 그게 무슨 돈인지도 모르고 이렇게 써 대?”
“아, 무슨 돈인데?!”
“빌린 돈이야! 돌려줘야 되는 돈이라고!”
“근데 왜 옷장 속에 넣어 놓는데?!”
안타까운 것은 강하라가 임기응변에는 약하다는 것이었다. 딱히 설명을 할 이유가 없는데, 강하라는 또 거기서 잠깐 멈칫했다.
그러자 하다는 너 잘 만났다는 듯이 뻔뻔하게 소리쳤다.
“야! 나도 헌터 누나 덕 좀 보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소리였다. 저게 근데. 뒤늦게 정신 차린 하라도 큰소리를 냈다.
“강하다, 네가 내 덕을 안 봤어? 너 군대도 안 갔잖아!”
“그거 남들도 다 안 가는 거거든? 10년째 생색내고 있네!”
생니 하나 안 뽑고 군대 면제받은 놈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하라는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야, 강하다.”
“왜!”
“내가 지금 너 패고 형제간 폭행으로 공무원 품위 유지 규정 위반하면 나 짤려. 그럼 어떻게 되는지 알아?”
강하다가 그걸 알 리가 없다.
말없이 눈알만 굴리는 강하다의 앞에서 하라는 환히 웃었다.
“넌 나한테 맞고 군대도 가는 거야.”
그때였다.
“뭐야? 무슨 소리야?”
“엄마야, 이게 뭐니.”
두 사람의 부모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집에 오자마자 큰 소리가 나서 들어와 본 재필 씨와 현숙 씨 내외였다.
재필은 인상을 잔뜩 썼고, 현숙은 부서진 벽을 보고 기함했다.
“뭐야, 왜 또 싸워!”
‘폭행 후 군입대’ 위기를 극적으로 벗어난 강하다가 거의 기듯이 뛰어가 현숙에게 매달렸다.
“엄마! 쟤가 나 패고 군대 보낸대!”
두 내외의 시선이 하라에게 향했다. 하라는 어이가 없었지만 곧장 맞받아쳤다.
“그게 아니라 하다가-”
“엄마, 이거 봐. 쟤가 나한테 스킬 썼어.”
하지만 하다가 더 잽쌌다. 하다는 새빨갛게 변한 제 손목을 부모에게 보여 주며 징징댔다.
재필이 기가 막혀 ‘뭐 하는 거야? 강하라! 동생을 왜 패!’ 이러는데, 하라는 입을 딱 닫았다.
그러자 하다도 눈알을 굴리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강하다는 눈치만 빨라서, 여기서 본인이 강하라 돈을 빼다 썼다는 사실이 걸리면 끝장이라는 생각은 있었던 것이다.
그에 두 내외 모두 알아차렸다.
‘강하다, 이게 뭔가 또 지 누나한테 잘못했구만.’
지 누나에게 맨날 깝죽대는 강하다 스타일을 그 부모가 모를 리 없었다.
다만 원인을 모르는 내외는 결괏값에 주목했다. 다름 아닌 뽀개진 벽 말이다.
지어진 지 20년이 넘어 하자 보수가 한 달에 한 번인 주택이다. 당연히 예민해진다. 그렇잖아도 겨울을 맞아 지붕 보수를 빨리 해야 되는데 돈이 없다고 노래를 부르던 현숙 씨가 먼저 하라를 나무랐다.
“하라, 넌 그렇다고 헌터가 민간인한테 스킬을 쓰면 어떡하니.”
그러곤 하라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재빠르게 하다의 등짝을 두 번 때렸다.
“넌 그리고 누나한테 쟤가 뭐야, 쟤가!”
“아, 쟤- 아니, 누나가 지금 벽을 뽀갰는데! 그게 문제냐고!”
재필 씨가 눈을 부라렸다.
“강하라. 너 이거 벽 어쩔 거야.”
“…….”
쟤가 먼저 잘못했는데요. 뺨이 부루퉁하게 퉁퉁 부었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고 넘쳤다.
강하다, 저게 간도 크게 제 옷장에서 천만 원 빼다 썼다고요. 돈 천 원 안 벌어 본 애가. 그리고 그 돈 제 돈 아니에요. 직장 동료 돈이에요. 갖다 줘야 되는 돈이라고요.
“말 안 해?”
그러나 말 대신 울컥하고 서러워서 눈물이 나왔다. 원래 하고 싶은 말을 못 하면 대신 다른 거라도 튀어나오게 돼 있지 않은가. 동생인 강하다에게는 주먹이 튀어 나갔지만, 부모님한테는 눈물이 튀어나왔다.
울컥해서 하라는 자기도 모르게 발을 쿵 굴렀다. 다음 순간 쩌적 소리가 났다. 재필 씨의 눈이 커졌다. 현숙 씨도 기함했다. 하다가 ‘헐.’ 하고 탄성인지 당황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하다의 방바닥이, 하라의 발뒤꿈치 모양으로 뻥 하고 구멍이 뚫려 버린 것이다. 그뿐만 아니었다. 빠지직, 소리가 나더니 치이이……. 하며 뒤늦게 바닥에서 작은 분수가 용솟음쳤다. 집 방바닥에 깔린 온수관이 파손된 것이다.
현숙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재필 씨는 훤칠한 이마를 부여잡았다.
“너 말 안 할 거면 내 집에서 나가!”
그러니까 실로 한국적인 호통이었다.
몇 번이고 들어도 당황스럽고, 듣는 자식 놈으로 하여금 정말 나가야 되는 건가, 아니면 여기서 순순히 욕만 먹으라는 소린가 갈등하게 하는.
하라는 순간 생각했다.
아, 그냥 청장님 카드 받을걸.
그럼 완전 멋있게, ‘나가면 될 거 아니에요!’ 하고 박차고 나가서 특급 호텔에 카드 긋고 묵는 건데. 그러면 내 인생이 완전 드라마 같을 텐데.
넋 놓고 서 있는 하라에게 재필 씨는 다시 한번 일갈했다.
“당장 안 나가?!”
아무튼 청장님 카드는 없다. 보통 때라면 여기서 일단 죄송하다고 빌어야 할 타이밍이었다. 재필 씨는 한번 성이 나면 죄송하다는 말 말고는 아무것도 안 통하는 성질 머리의 소유자였으므로.
하지만 도무지, 강하라는 지금 이 순간 죄송하다고 하고 싶지 않았다.
“나갈게요.”
“야, 강하라! 나가란다고 진짜 나가?!”
나가래서 나간댔더니, 나가란다고 진짜 나가냐고 한다.
행동파인 재필 씨가 하라를 붙들었으나, 하라는 성질이 나서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 곧장 아차 했다.
맞다, 곱하기.
그에 응답하듯 재필 씨가 무슨 종잇장처럼 옆으로 픽 쓰러졌다.
“엄마야!”
현숙 씨가 얼른 재필을 받아 냈다.
거기서 또 돌아서면 모양새 빠지니 하라는 일단 현관으로 쿵 쿵 쿵 쿵 발걸음에 힘주며 직행했다. 쩍 쩍 쩍 쩍. 강하라 가는 길마다 발자국이 났다.
이제 뛰쳐나가면 되는데.
“아, 맞다. 타조알.”
현관으로 향하다 말고 브레이크 밟고, 제 방으로 가서 에코백을 챙겼다.
드르륵, 쾅!
현관 중문도 일부러 세게 닫았다. 깨장창, 유리만 깨져 나갈 줄 알았는데 현관문 샷시가 통째로 우그러졌다. 거기에는 하라도 움찔했다.
“강하라 미쳤니!!!”
따라 나온 엄마가 큰소리를 냈다.
“나 아니거든! 바람이거든!”
그렇게 안 하느니만 못한 변명을 하고, 현관 철문은 조금 살살 닫았다. 그래 봤자 이미 집이 통째로 와르르맨션이 됐다는 건 외면하고.
이제 길바닥에는 강하라랑 타조알뿐이었다.
휭.
11월 바람이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