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 공무수행에 협조 부탁드립니다 (51)화 (51/223)

49화

세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성좌를 가진 헌터들에 관해 떠올려 봤다.

가장 유명한 것은 라농 우타이타니.

그녀의 성좌는 태국의 창세 설화와 관련 있는 퀘스트를 요구했고, 라농은 그것을 수행했다. 하여 성좌를 만난 헌터들이 퀘스트를 수행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널리 알려지게 됐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강하라의 성좌는 너무 제멋대로였다. 사랑의 신이니까 연애를 하라니.

“어쩌다 그런 성좌를 만난 겁니까? 아니, 어쩌다 제가 강하라 씨의 퀘스트 상대로 지목되었는지가 궁금하네요.”

풉. 하라는 물을 마시다 말고 뿜었다. 다행히도 세헌의 쪽은 아니었다.

세헌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하라는 아하하, 웃으며 입가를 닦아 냈다. 땀이 삐질삐질 났다.

당신이 제 흑역사의 주인공이라서…… 라고 설명할 수는 없고.

권욱은 자신을 알아봤지만 윤세헌까지 자신을 알아보게 할 순 없다. 그건 하라의 마지막 남은 보루나 다름없었다. ‘제가 그때 그쪽 정장 재킷 붙들고 울던 여고생이에요…….’라고 말하면 내가 얼마나 우스워질 것인…….

아닌가?

하라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여태까지 세헌을 봐 온 건 며칠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윤세헌은 생각보다 더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녀가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냐.’며 선선히 퀘스트를 수락해 주기도 했다.

물론 세헌의 입장에서는 절대 호락호락하게 들어준 건 아니었으나, 상황을 비관적으로 생각하던 하라에게는 굉장히 선선한 흐름이었다.

게다가 토크 쇼에서도 세헌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나. 한 번쯤은 만나 보고 싶다고. 그게 방송사 카메라 앞이라면 곤란하지만, 일대일로 만난 상황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하라의 회피 본능이 먼저였다. 하라는 저도 모르는 새에 입을 열었다.

“그게 그날 너무 위급해서, 하나님, 부처님, 그리스 로마 신이든 누구든 아무나 나와 주세요, 하고 기도했거든요…….”

“아하. 그리고 정말 그리스 신이 나타났다?”

세헌은 기막혀하다가 아, 하고 뭔가 납득했다.

“그리고 때마침 옆에 있던 게 저였다, 이거군요.”

“…….”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지. 하라가 필사적으로 눈치를 봤다.

세헌은 부드럽게 웃었다.

“무슨 삼류 소설 같네요.”

“그쵸.”

하라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맞장구쳤다.

“어쩌겠습니까. 삼류 소설 같아도 일단은 벌어진 일이니 수습은 해야죠.”

“아하하하…….”

그때였다. 누군가 룸 안으로 들어왔다.

코스를 가져온 직원이겠지, 하고 고개를 든 세헌이 눈썹을 찌푸렸다. 하라도 흠칫 굳었다.

여자였다. 그것도 아주 예쁜.

길게 길러 세팅한 머리가 부드럽게 진 굴곡을 따라 흔들렸다. 갸름한 얼굴선은 포토샵한 거 아니냐는 소리가 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도톰한 입술. 물 찬 제비처럼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며 빠진 눈꼬리. 11월인데도 하늘하늘한 민소매 원피스 차림인 여자는 팔다리도 가늘었다. 아니, 뼈대 자체가 가늘어 보였다.

“오빠!”

너 방금 봤어? 율리 지나갔어. 대박.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룸 바깥에서 들려왔다.

하도 오래 활동해 전 국민이 대충 다 아는 여자 연예인. 그리고 세헌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여자애이기도 했다.

세헌은 갑자기 두통이 저를 엄습하는 기분이었다.

“……너도 여기 약속 있었어?”

너래. 눈앞에 앉은 하라의 눈이 엄청나게 커지는 게, 곁눈질로도 보였다.

여자, 율리는 환히 웃었다.

“응, 나 오늘 오빠네 방송국에서 녹화 있어서 여기 밥 먹으러 왔지이.”

그러면서 여자는 가볍게 세헌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향긋한 꽃냄새가 확 풍겨 왔지만 세헌은 정색하고 물었다.

“시간도 없는 애가 여기서 밥을 먹는다고? 여기 코스 2시간이야.”

즉, 밥 먹으러 이곳에 왔다는 건 개소리라는 말이었다. 초 단위로 돌아가는 아이돌 스케줄 때문에라도 불가능했다.

게다가 율리가 얼마나 적게 먹는지 세헌은 무척이나 잘 알았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그녀는 새 모이만큼 먹었다.

율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눈치 깠어?”

“빙빙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아니이. 나는 여기서 도시락 시켜 먹으려다가, 오빠가 예약 잡았단 얘기를 들었잖아. 그런데 어떻게 내가 안 와.”

그제야 세헌의 눈길이 룸 바깥쪽으로 향했다. 룸 문 옆에 서 있던 낯이 익은 율리의 매니저가 머쓱하게 시선을 피했다.

율리가 사르륵 눈을 접으며 웃었다.

“너무 혼내지 마아. 내가 알려 달라구 했어. 막 직원한테 전화로 졸랐단 말이야. 사인해 드릴 테니까 알려 주시면 안 돼요? 그러구.”

율리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짚었다.

그사이 소식을 들은 식당 매니저가 룸에 들어와 물었다.

“의자 잠깐 가져다드릴까요?”

“네!”

“아뇨.”

대답이 교차했다. 매니저가 혼란스런 표정을 했지만 율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뭐야. 오빠, 나 싫어?”

“응, 싫어.”

“어우, 또 이래. 오빠 나한테만 꼭 그러더라.”

그러더니 그제야 율리가 넋 놓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하라를 향해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어어어, 안, 안녕하세요…….”

“저 오빠랑 잠깐 얘기해도 괜찮죠? 우리 친하거든요.”

하라가 멍하니 있다가 답하려는데, 세헌이 더 빨랐다.

“안 된다고 했다.”

그는 단호하게 율리 쪽을 노려봤다. 사정 모르는 식당 매니저마저 윤세헌이 너무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차가운 대답이었다.

그러자 율리는 이잉, 하고 애교를 부렸다.

“오늘 오빠 왜 이렇게 차가울까? 잠깐은 괜찮잖아. 우리 오랜만에 봤단 말이에요. 그죠.”

마지막은 하라에게 묻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대답은 세헌이 했다.

“안 돼. 나 데이트 중이야.”

순간 율리의 얼굴이 웃던 그대로 굳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세헌을 돌아봤다.

그러나 세헌은 율리에게서 이미 시선을 거두고 식당 매니저에게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식당 의자 모자랄 겁니다. 그렇죠?”

괜찮다고 말하면 가만 안 두겠다는 어조였다.

“아니? 의자 남을걸? 그쵸?”

율리도 만만찮았다. 그녀는 곧장 매니저에게 그리 물었고, 친절하게 서비스하려던 매니저만 민망해져 식은땀을 흘렸다.

두 사람 다 유명인이었고, 지금 자칫 잘못하면 레스토랑의 대처가 입소문을 탈 가능성이 너무나 높았다.

그때였다. 의외의 구원 투수가 등장한 것은.

“어어, 그럼 여기 앉으실래요?”

좀처럼 속내를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율리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이건 또 뭐야.’

그리고 그 순간 세헌의 감상 또한 동일했다.

‘이 여자 뭐야.’

율리에게 자리를 내준 건, 방금 전까지 세헌의 앞에 앉아 있던 강하라였다.

세헌이 여태껏 본 적 없는 환한 얼굴을 한.

하지만 세헌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율리는 냉큼 자리에 가 앉았다.

“어머나, 감사해요.”

비켜난 하라에게 성의 없이 감사의 인사를 던진 율리가 손을 맞잡고 세헌을 바라봤다.

“오빠 오랜만에 보니까 너어무 좋다. 그치.”

이 철없는 게. 세헌은 찌푸려지는 미간을 문지르며 하라 쪽을 바라봤다.

하라는 어쩐지 주먹을 꽉 쥔 채로 벽에 기대어 율리를 또렷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이 이상하게 열렬해 보이기도 했다. 혹시 연예인에 열광하는 타입이었나?

세헌의 시선에 율리도 가볍게 눈을 찡그리더니 그제야 하라를 쳐다봤다. 물론 하라를 바라볼 때쯤에는 다시 환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었지만.

“저 오빠랑 옛날부터 친했거든요. 저희 어릴 때 같은 동네 살았어요.”

“아아…….”

그때, 매니저가 뒤늦게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하라가 조심스럽게 율리 옆에 앉으려고 하자, 세헌은 충동적으로 일어났다.

“여기 앉으십시오. 그리고 의자는 이쪽으로 주세요.”

그리고 덧붙였다.

“제 여자 친구라.”

율리의 눈이 사나워졌다. 매니저는 어머, 하는 얼굴이 됐다.

하라는 조금 당황한 눈치였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으므로 머뭇거리다가 세헌의 자리에 앉았다.

세헌은 매니저가 가져다준 의자를 끌어 하라의 옆에 앉았으므로, 결과적으로.

강하라가 율리를 마주 보고 앉은 모양새가 됐다.

제 앞에 앉은 하라를 본 율리는 좀처럼 눈매를 둥글게 만들지 못하더니 결국 세헌에게 톡 쏘고 말았다.

“언제 여자 친구가 바뀌었대. 난 몰랐네.”

“바뀐 게 아니라 생긴 거지. 말 똑바로 해라, 신율리.”

“치.”

한편 강하라는 지금 이 순간이 꿈만 같았다.

휴대 전화로 한참이나 ‘콘서트 티켓 양도’ 따위를 검색하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눈앞에 내 아이돌이 서 있다니.

자신이 하도 티켓에 집착하니까 꾸는 꿈인가 싶었다. 그다음엔 성좌가 특별 보상이라도 준 줄 알았다.

[성좌 ‘큐피트’가 뜻밖의 라이벌 등장을 싫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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