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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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새벽에 일어나 출장을 가려니 힘들긴 했다. 그렇잖아도 등 때문에 앉아서 뉴스 진행하는 것도 힘들 지경인데, 울산 근방까지 출장이라니.
교양팀 봉고차에 끼어 앉기 싫다며, 대신 운전하겠다고 자원한 박 PD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택시라도 탈 뻔했다.
“앵커님 안 힘드세요?”
“괜찮습니다.”
물론 박 PD의 말에는 그렇게 대답했다. 남에게 죽는소리하는 건 죽기보다 더 싫었다. 게다가 일이다. 복귀했으면 핑계 대지 말고 일하는 게 가장 좋은 그림이다.
일하면서 인상 찡그리고, 남들 불편하게 하는 게 대체 뭐가 좋은가. 세헌은 그런 성격이었다.
가는 내내 잠을 청할 법도 하건만, 세헌은 차에서도 내내 인터뷰 준비를 했다. 그러면서도 약간은 불안했다. 하라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맨 처음 스튜디오에서 만나 마석관리 방송을 찍으려 할 때의 하라 반응이 기억나서였다.
하라는 그때 굉장히 거북한 얼굴이었다. 방송을 불편해하는 사람일수록, 함께 방송하기가 참 어려운데.
하지만 막상 다큐 촬영에 들어가자, 강하라는 생각보다 무난하게 해냈다. 때론 원하는 대답을 받기 위해 멍청한 질문을 일부러 할 때가 있는데, 그런 질문들에도 하라는 퍽 괜찮은 대답을 했다.
제일 재미있었던 건, 언양의 자수정 이야기를 할 때였다. 마석 이야기를 하다 말고 하라는 훌쩍 뛰어올랐다.
PD들이 오, 하고 감탄했다. 하라가 정말 별것 아닌 듯 날아 천장에 붙어 있는 수정을 떼서 건넸기 때문이다.
손에 든 검으로 수정을 무 자르듯 잘라 온 그녀는 세헌에게 ‘이거 보세요. 이렇게 마석이 계속 나온대요.’ 하고 내밀었다.
세헌은 눈을 껌벅이다가 물었다.
“예전보다 익숙해지셨군요.”
“어? 네, 맞아요. 맞다. 앵커님 그때 저 때문에 고생하셨지.”
하라가 민망해하며 웃었다. 세헌 또한 저도 모르게 웃었다.
여의도 던전에서 세헌만 두고 하라가 휙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을 때는 정말 황당했는데. 이상하게 지금 돌이켜 보니 웃음이 나왔다.
하라를 찍는 PD가 재미나다는 듯 여러 가지를 물어보라고 신호했다.
“비행 스킬만 얻으신 건가요?”
“아직 훈련 중이라 다 말씀드리진 못해요.”
그렇게 말하며 하라는 자연스럽게 세헌의 손에 마석을 들려 주었다. 자연스레 취한 행동이었고, 세헌은 그 마석을 받아 들고는 잠시 얼떨떨해졌다. 제게 선물이라도 주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촬영이 끝나자마자 팀 K의 래영이 다가와 세헌의 손에서 마석을 가져갔다. 그제야 마석이 정부 소유물이라는 걸 깨달은 세헌은 조금 머쓱해졌다.
“강하라 씨처럼 스킬만 각성하는 경우가 흔합니까?”
껌을 씹던 래영이 풍선을 뽁, 터트리고는 답했다.
“막 흔하진 않죠. 근데 없지는 않아요.”
미리 맞춘 말이었다. 물론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필드 보스를 잡았을 때 그런 일이 생기기도 해요. 필드 보스의 스킬을 익히는 거죠. 권욱 헌터처럼 화염 반지 같은 아이템을 얻으면 아이템 장착으로 스킬을 쓸 수도 있고요.”
“재미있네요.”
“던전이라는 게 원래 좀 그래요. 무슨 일이 일어날진 아무도 모르죠.”
“예상할 수 없는 일들만 일어나서 불편하진 않습니까?”
껌을 두어 번 씹은 래영이 피식 웃었다.
“아저씨는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 알아요?”
24살짜리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어른스러운 대답이었다.
세헌이 의도한 답이기도 했지만 그래서 조금 씁쓸해졌다. 눈앞의 래영에 대한 뒷소문이 떠올라서였다.
그녀는 가출 청소년이었는데, 부친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갔다. 주민 등록증 발급을 위해 들른 주민 센터에서 각성 등급 A가 나오지 않았다면 아무도 래영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들은 거지만 래영을 찾기 위해 그 지역 공무원들이 다 투입됐다나.
“그리고 전 제가 일한 만큼 좋은 보상이 떨어지는 이 일이 좋아요.”
일한 만큼이라……. 하지만 평생 일해도 좋은 보상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도 있지 않나. 세헌은 저도 모르게 하라를 떠올렸다.
그때 래영이 힐끗, 권욱 쪽을 바라봤다.
“저 인간, 또 저러네.”
뭔가 하고 따라서 그쪽을 봤더니 권욱이 강하라에게 뭔가 소곤거리고 있었다. 하라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웨어울프 쪽을 가리키는데, 아마 훈련 관련한 일이리라.
“……팀 K분들은 다들 많이 친하신가 봅니다.”
질문하면서도 세헌은 어쩐지 민망해졌다. 자신이 너무 보수적인가 싶기도 했다. 직장 동료라고는 해도 어깨를 막 짚고 그래도 되나.
그에 래영이 코웃음 쳤다.
“제가 저 언니랑 더 친할걸요.”
그러면서 래영이 휘적휘적 걸어갔다. 세헌도 함께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권욱은 하라에게 그 웨어울프를 잡아 보라고 독려하고 있었다. 문제는 맞은편에서 쉬기 시작한 스태프들이 테이블을 펴고 도시락을 나누고 있다는 것이었다.
뭐, 거기까지는 그럭저럭 오케이. 하지만 세헌이 보기엔 하라는 좀 불편해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도 각오하고 왔을 건데요, 뭘.”
“각오하고 왔다고 해서 다 괜찮은 건 아닙니다.”
세헌은 부드럽게 손을 뻗어 하라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권욱의 손을 잡아 올렸다.
그러자 권욱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와아, 악수.’ 하고는 자연스럽게 세헌의 손을 잡아 악수했다.
이거 고단수인데. 세헌은 권욱을 보며 생각했다.
“다들 도시락 드시고 있는데 나중에 하시죠.”
“저게 좀 위험해서.”
“S급 헌터님이 하시기엔 좀 약한 소리 아닙니까?”
“아,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또 민망해지네요?”
권욱이 눈을 휘며 웃었다.
눈웃음을 살살 치는 게, 가까이서 보니 팬이 그렇게 많은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식사 먼저 하시죠.”
“그럼 같이 먹을까요? 사실 저 윤세헌 앵커님 평소에 존경했답니다.”
존경은 무슨. 세헌은 코웃음 치고 싶은 것을 참으며 돌아섰다. 그때 하라가 얼른 따라붙었다.
“아, 그러고 보니 윤 앵커님 제가 드릴 게 있는데요…….”
“뭡니까?”
“어…….”
하라는 어째서인지 권욱의 눈치를 보더니 목소리를 줄였다.
“조금 있다 드릴게요. 별건 아니고…….”
하지만 권욱이 냉큼 끼어들었다.
“뭔데요, 뭔데. 나도 줘.”
“아니, 그게 아니라. 윤 앵커님 물건이에요.”
내 물건? 세헌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넥타이 주셨잖아요…….”
“아.”
그제야 세헌은 자신이 로퍼를 잃어버린 하라의 발에 감아 주었던 넥타이를 떠올렸다. 아예 잊고 있었다.
“웬 넥타이?”
“그게요.”
하라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권욱이 오, 하고 입술을 오므렸다.
“대박 로맨틱해.”
“……그런 거 아닌데요…….”
“뭘 아니야. 윤 앵커님 너무 멋있다. 형님이라고 부를래요. 여자 발에 넥타이 감아 주기. 대박적.”
“…….”
세헌은 권욱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권욱은 한술 더 떠 박수 치며 사귀어라, 사귀어라 하는 소리까지 흥얼거렸다. 뒤에서 크르릉……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방송 스태프들 있는 곳까지 콧노래를 하며 걸어갔을 것이다.
뒤를 돌아본 권욱은 웨어울프가 바르작거리며 사람들을 노려보는 걸 알아차리곤, ‘어이쿠. 곧 따라갈게요.’ 하며 다시 그쪽으로 다가가 웨어울프를 걷어찼다.
깨갱, 소리를 내며 웨어울프가 자지러졌다.
저거 분명 D급이라고 했는데. 같은 등급인 육식 토끼에게 자신과 하라가 애먹었던 것을 기억해 낸 세헌은 어쩐지 허무해졌다.
결과적으로 하라는 세헌에게 넥타이를 전달해 주지 못했다. 식사 장소에 의외의 인물이 와 있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마포지서장 정유진이었다.
“서장님!”
“오냐.”
정 서장이 짙은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너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오고 이게 뭐냐. 서장을 오라 가라 하고.”
“헉, 죄송해요. 그런데 저는 오시는 줄 몰랐는데.”
하라가 머뭇거리자 정 서장은 하라의 머리를 흩트리며 껄껄 크게 웃었다.
“농담이다, 인마. 우리 지서 직원이 방송에 나오는데 와 봐야지.”
보통 서장이 방송까지 챙기던가. 세헌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정 서장에게 묵례했다.
정 서장이 ‘오, 윤 기자. 오랜만에 보네.’ 하고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두 분 원래 아는 사이세요?”
“윤 기자가 마포지서 출입할 시절에 봤었지.”
박 PD가 정 지서장의 방문에 당황해 뒤늦게 쫓아왔지만, 그저 둘러보러 왔다는 사실을 알고 안심하며 마저 식사를 하러 갔다.
정 서장이 혀를 찼다.
“찍지 말라고 할까 봐 놀라서 뛰어오기는.”
헌터들 관련 콘텐츠는 대외비가 워낙 많아, 촬영이 다 끝난 것도 가끔은 방송 중지가 되니 박 PD가 놀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박 PD는 멀리서 식사를 하면서도 힐끗힐끗 유진과 세헌이 이야기하는 것을 봤다.
결국 정 서장이 세헌에게 손짓을 했다.
“윤 기자 붙들고 있지를 못하겠다. 가서 촬영 이상 없다고 전해 줘.”
“그러겠습니다. 나중에 한번 뵙죠.”
“오케이. 이거?”
정 서장이 술잔을 꺾는 시늉을 했다. 세헌이 피식 웃고는 제작진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 서장은 그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팔짱을 꼈다.
“야, 하라야.”
“예?”
정 서장 몫의 도시락까지 받아 와 두 개를 들고 있던 하라가 화들짝 놀라 답했다.
“내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무슨 생각이요?”
“그 성좌가 말한 연애하는 조건 말이다. 그거 꼭 사랑에 빠져서 고백을 받고 사귀고 그래야 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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