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 공무수행에 협조 부탁드립니다 (35)화 (35/223)

34화

* * *

세헌이 본가를 방문한 건 출장 전날이었다. 남산, 이태원에서부터 꽤 높이 올라가야 있는 곳에 세헌의 본가가 있었다. 20살이 된 이후로 거의 오지 않은 곳.

“윤 앵커, 왔어?”

차고에 주차를 하고 계단을 오르자 머리를 고상하게 말아 올린, 중년이라기에는 젊고 세헌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자가 차고로 통하는 문을 열고 그를 맞이했다.

세헌은 무표정하게 입 열었다.

“김 관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여전히 잘생겼다, 윤 앵커는.”

김 관장이라고 불린 여자가 빙그레 웃었다. 큰 미술관 하나를 도맡아 경영하고 있기에 김 관장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사실 그의 새어머니였다.

“뭘 직접 내려오셨습니까.”

“얼마 전에 여의도에서 다쳤잖아. 걱정돼서 얼굴 좀 보려고 내려왔지.”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제 친아버지보다 훨씬 살갑게 구는 새어머니라니. 한숨이 나왔다.

김 관장이 먼저 올라가다 귀신같이 세헌의 한숨을 듣고는 타박했다.

“재수 없게 한숨 좀 쉬지 마. 멀쩡하게 잘난 남자가 여기만 오면 아주 한숨이 푹푹이야. 내 얼굴 보기 재수 없는 거 아니까 그만 티 내.”

“관장님 때문이 아닌 거 아시잖습니까.”

“그럼 내가 의원님 재수 없다고 말할까.”

김 관장이 샐쭉하니 눈을 흘겼다.

“자주 좀 와. 의원님이 그래도 윤 앵커 보고 싶어는 하셔.”

“글쎄요. 두 분이 오붓이 지내시는 게 좋지요.”

하나 마나 한 인사를 나누며 계단을 오르니 넓은 정원이 나왔다. 세헌은 새삼스럽게 정원을 바라봤다. 뉘엿뉘엿 해가 저무는 정원은 온통 잔디로 깔려 있었다.

어릴 적 세헌이 이 집에서 자랄 때는, 아름다운 꽃과 관엽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집도 마찬가지인가. 세헌은 집을 힐끗 올려다봤다. 20여 년 전에 통째로 부서져 다시 지은 집은 그 당시 가장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했다더니, 지금도 촌스러운 부분이 한 곳도 없었다.

전면 통유리로 된 거실이 바깥에서 그대로 들여다보였는데, 안쪽은 세련된 가구로 가득 차 있었다. 김 관장의 취향임이 분명했다.

세헌은 김 관장이 별로 싫지는 않았지만, 그 거실을 볼 때마다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식탁에 앉은 아버지는 본론부터 꺼냈다.

“너 박 차장 최근에 만난 적 있냐.”

“박 차장이요?”

“박영희 차장 말이다.”

자신이 아는 사람을 남들도 다 알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답게, 윤 의원은 늘 이런 식이었다. 어디의 누구, 가 아니라 이름만 달랑 말하는 것 말이다.

‘그게 누군데요?’라고 물으면 혀를 차며 ‘그것도 몰라서 어디 써먹겠냐.’ 하고 타박하곤 했다.

그러든가 말든가. 알 게 뭔가.

모른다 말하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세헌은 그 이름을 알았다. 헌터 본청의 차장이었다.

“만나 본 적도 없는 분입니다.”

“흠.”

“왜 그러십니까.”

“아냐. 모르면 됐다.”

그것 때문에 부른 건가. 세헌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으려는데, 김 관장이 눈치 빠르게 세헌의 앞에 등심 구운 것을 밀어 주었다.

이 부자 사이에서 10년을 지내며 김 관장은 두 남자 사이에 시비 안 걸리게 하는 요령만 늘었다.

“너 얼마 전에 여의도에서 게이트에 휘말렸다며.”

“괜찮습니다.”

“다쳤다며.”

사실 아직도 등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제 아버지 앞에서 약한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세헌은 피식하고 비웃었다.

“자식이 함묵증(말을 하지 않는 병) 걸린 것도 모르던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신선하네요.”

“너 이놈, 버릇없게.”

김 관장이 이마를 찡그려 보였다. 기껏 말려 놨더니 대놓고 시비를 거는 세헌이 조금은 미울 터다.

윤 의원은 기가 막히다는 듯 코웃음 쳤다.

“됐고, 너 그 선보기로 한 거 말이다. 심 의원 딸내미.”

“안 봅니다.”

윤 의원의 말을 세헌은 툭 잘라먹었다.

윤 의원은 작년부터 지겹도록 선보라고 그의 등을 떠밀었다. 어디 2선 의원 딸이라는 여자를 그렇게 들이미는데, 세헌은 알고 싶지도 않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윤 의원이 뜻밖의 대답을 했다.

“그래, 보지 마라.”

“……예?”

세헌은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러자 윤 의원이 심술궂게 웃었다.

“보지 말라고. 왜? 싫으냐? 그럼 보든가.”

“아닙니다.”

찝찝해졌다. 그렇게 끈질기게 선을 보라더니 갑자기 보지 말라고? 하지만 세헌은 곧 그 생각을 관뒀다.

늘 박쥐처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게 그 바닥이었다. 심 의원이란 양반하고도 틀어졌나 보지. 다음엔 또 누구 딸을 들이밀려고.

윤 의원은 미간을 찌푸린 세헌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구태여 들이밀어도 싫다니, 별수 있나. 네 마음 가는 여자랑 연애를 하든가, 결혼을 하든가.”

“…….”

“대신 어디서 이상한 거 끌고 이 집안에 들어오지만 말아라.”

이상한 거라……. 말하는 본새가 기가 막혔다.

윤 의원은 쯧 혀를 차더니 젓가락으로 잡채를 휘적거렸다.

“조신하고 집안 좋고, 하다못해 뭐라도 도움 되는 여자를 만나라 이거야. 어디서 굴러먹은 건지도 모르는 계집애들 말고. 요즘 것들은 아주 난잡해 가지고, 한가락 하는 남자만 보면 아주 뼈까지 발라 먹으려고…….”

기가 찼다. 내 어머니는 당신에게 도움이 안 되는 여자라 그따위로 굴었나. 세헌은 당장이라도 받아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지금 그가 여기서 소리 지르면 아마 그냥 끝나진 않을 테니까.

“던전에서 웬 나부랭이 같은 거랑 얽혀 가지고, 쯧. 나랏일에도 급이 있는 거다.”

나부랭이. 세헌은 윤 의원이 그제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아차렸다. 그가 여의도 던전에서 강하라에게 구해진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왜. 이제 와서 당신 아들이 어디 흔해 빠진 9급 공무원이랑 얽히기라도 할까 봐 걱정스러운가 보지.

윤 의원은 늘 세헌이 제 뒤를 이어서 정치하기를 원했다. 세헌이 20살에 집을 뛰쳐나온 것 따위는 신경도 안 쓰고, 그의 성취를 제 과시욕을 채우는 데 썼다.

세헌이 좋은 대학을 갔을 때, 그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을 때, 방송사에 취직했을 때와 메인 앵커가 되었을 때.

그는 세헌을 두고 ‘아비 말 안 듣는 척하면서 착실하게 아비 말 듣는 놈’이라고 바깥에 떠들었다. 그러면서도 세헌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세헌이 강하라의 병실에 사람만 한 꽃다발을 들고 들어간 걸 누가 말이라도 전했나 보지.

윤 의원은 자신이 세헌에게 가져다 대는 온갖 여자들 때문에 아들이 반감을 가지고 엉뚱한 여자라도 만날까 겁나는 모양이었다.

웃기는 일이었다. 제 아비의 억측은 들을 가치도 없는 소리였지만, 세헌은 그에게 똥물이라도 퍼붓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 못했다.

“며칠 전에 어머니 납골묘 다녀왔습니다.”

김 관장이 움찔했다. 윤 의원은 힐끗 김 관장을 보더니 버럭 짜증을 냈다.

“넌 밥상머리에서.”

“밥상머리에서 어머니 얘기가 못 할 말입니까?”

“너 지금 아비한테 일부러 이러냐?”

그럼 뭐, 제가 모르고 그러겠습니까?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목구멍 안으로 삼키고, 세헌은 젓가락을 내려놨다. 그리고 옆에 걸쳐 놓은 재킷을 들고 일어나 나왔다.

“야! 윤세헌!”

윤 의원이 뒤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 저, 저. 망할 놈.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세헌은 코웃음 치며 문을 열었다. 사용인들이 기웃거리는 건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정원을 가로지르는데, 뒤에서 누가 후다닥 쫓아오는 소리가 났다.

“윤 앵커! 얘!”

김 관장이었다. 그녀도 참, 세헌이 보기엔 불쌍한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그게 별로 와닿지도 않았다.

김 관장은 슬리퍼를 신고 뛰어나와 세헌을 붙들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가면 어떻게 해?”

“죄송합니다.”

“의원님도 참. 윤 앵커 그렇게 부르라고 야단할 거면 이렇게 싸우지나 말지.”

김 관장이 혀를 찼다.

뒤늦게 주방에서 일하는 사용인이 허겁지겁 문을 열고 따라 나왔다. 사용인의 손에는 바리바리 싸인 음식들이 들려 있었다.

김 관장이 한숨 쉬었다.

“내가 윤 앵커 때문에 한숨만 늘어. 한숨 한 번 쉴 때마다 1년씩 늙는다는데. 내 피부과 시술 비용 윤 앵커가 내야겠다, 응?”

“드릴까요.”

“미쳤니. 그냥 하는 소리지. 저거 김치 담근 거랑 반찬이야. 잘하는 집에서 한 거니 가져가.”

“저 집에서 식사 잘 안 합니다.”

“그럼 갖고 가서 버리든가. 출장 가는 거 알고 주는 거니까 썩히든 버리든 맘대로 해.”

김 관장은 이럴 땐 참 철면피였다. 그녀는 사용인의 손에서 가방을 받아 굳이 세헌의 손에 쥐여 주었다.

세헌은 한숨을 쉬었다.

“저 출장 가는 건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윤 의원님이 말해 주신 거지. 의원님 그래도 윤 앵커한테 관심 많아.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잖아. 오늘도 남이 하는 소릴 들으시고 저러시지만…….”

“저도 별로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고 싶진 않았습니다.”

“윤 앵커, 말에 씨가 있다, 응?”

김 관장이 씩 웃었다.

애를 만들겠다고 그녀가 몇 년을 강남 병원에 드나들면서 온갖 시험관 시술이며 뭐며 고생했음을 알고 있기에, 세헌은 그 표정을 보자마자 후회했다. 하지만 굳이 사과를 입 밖에 내고 싶지는 않았다.

김 관장은 사용인에게 턱짓하고는 세헌의 가슴팍을 가볍게 두들겼다.

“밉다.”

“…….”

“윤 앵커. 내가 살짝 팁 주는데, 지금 혹시 좋아하는 여자 있으면 그냥 결혼해. 알았어?”

“갑자기요?”

세헌의 물음에 김 관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의원님 저러다 갑자기 또 나보고 윤 앵커 선자리 만들라고 야단할 거란 말이야. 나 별로 미운 사람한테 떡 주고 싶은 스타일 아냐. 박 차장인지 뭔지가 뭔 바람을 불어넣은 거 같은데, 이러다 연말에 갑자기 호텔 로비로 불려 나온다.”

세헌이 이마를 가볍게 찌푸렸다. 김 관장이 슬쩍 힌트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남이 하는 소리, 박 차장.

김 관장은 사용인이 집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는 이어 말했다.

“내가 살아 보니까 여자는 좋아하는 사람하고 사는 게 최고야. 의원님 말 들을 윤 앵커도 아닌데, 내가 참 곤욕스럽다. 응?”

“만나는 여자도 없습니다.”

“아유, 그럼 얼른 하나 만나든가! 길바닥에서 윤 앵커가 아무나 붙잡고 사귀자 해도 다들 뛰어나오겠네!”

김 관장은 ‘얼른 가, 미워 죽겠다.’ 하고는 그의 가슴을 밀친 다음 돌아섰다. 세헌이 차고로 내려가는 건 신경 쓰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세헌은 음식 가방을 어쩔까 하다가 별수 없이 들고 제 차로 왔다. 조수석에 가방을 대충 실어 놓고 마른세수를 했다.

아무튼 욕심 넘치는 인간 하나 때문에 몇 사람이 고생하는 건지.

좋아하는 사람.

늘 세헌에게 얄밉단 소리나 하고 관두는 김 관장이 했다기엔 퍽 로맨틱한 이야기였다.

“호, 혹시 저랑 사귀어 주실 수도…….”

문득, 제 앞에서 말을 더듬던 여자가 떠올랐다. 용감한데 소심하고, 제게 이상한 소리나 뱉던 여자 말이다.

세헌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김 관장 말에 왜 그 여자 생각이 난단 말인가.

‘아무나 붙잡고 사귀자 해도 뛰어나오겠네.’ 아마 그 말 때문일 것이다. 처음 만난 여자도 그런 소리나 하는 걸 보니 말이다.

처음 만났다기엔 또, 너무 대단한 만남이기는 했지만.

그런데 본청의 박영희 차장이 강하라 씨와 내 이야기를 윤 의원에게 할 까닭은 또 뭐란 말인가. 그냥 뭐라도 솔깃할 소문을 가져다 바친 건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결국 세헌은 차고에서 한참 후에나 출발할 수 있었다. 어느새 하늘이 새까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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