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 * *
“얘, 너 보상금 나오면 그거 하다 좀 빌려줘라.”
“엄마. 그거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른대도.”
엄마가 하다 취직하자마자 월급 압수해서 모아다 너 줄게. 현숙 씨가 하라의 방에 들어와 한 말은 하나 마나 한 소리였다.
“그리고 엄마, 적금 만기되면 나 줘. 독립하게.”
하라는 현숙을 바라보며 말했다.
현숙이 이마를 찡그렸다.
하라가 사회 초년생이던 시절, 엄마는 사람이 꼬박꼬박 저축해야 한다며 하라에게 매달 80만 원씩을 받아 갔다. 애들 손에 큰돈이 있으면 금세 써 버린단 이유였다.
“얘, 다 큰 처녀가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살면 남들이 흉봐. 독립은 무슨 독립. 그냥 여기서 돈 아낀다 생각하고 살아. 그리고 하다, 쟤도 취직은 해야 될 거 아냐.”
돈을 아끼긴 뭘 아껴. 월 80만 원 적금하고 집에 생활비 50만 원 주면 하라 손에 남는 돈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
생활비 안 받겠다는 소리도 아니면서 엄마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다 하다 때문이다. 아무튼 현숙은 하다가 저렇게 떼쓰면 이기질 못했다.
“싫어. 나갈 거야.”
“너는 애가 왜 이렇게 매정해? 엄마가 돈 가져다 받아 준대도.”
받아 주긴 무슨. 다 안다. 강하다 성격에 안 갚고 버틸 거고, 엄마는 결국 ‘네가 이해 좀 해라.’ 하고 지나가겠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엄마, 막말로 걔가 취직 못 한 거지, 내가 못 한 건 아니잖아. 근데 그걸 왜 내가 도와줘야 해.”
말해 놓고 아차,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 말에 금세 현숙 씨가 눈을 뾰족하게 떴다.
“너야 졸업하고 바로 취직했으니까 모르지!”
“…….”
“얘, 됐다. 그깟 적금, 별것도 아닌 걸로 심보 고약하게 쓰네. 피곤해 죽겠다, 너희들 때문에, 아주.”
기가 찼다. 엄마만 피곤한 건 아닌데. 나도 피곤해 죽겠는데 왜 나는 집에 와서 이런 얘기를 들어야 돼……. 하라가 눈을 비비는데 밖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인 재필 씨였다.
‘나 왔어.’ 하는 소리에 엄마가 방금 한 얘기는 네 아빠한텐 비밀이다, 하며 입술 앞에 손가락을 세웠다.
아니, 그럴 거면 나한테도 그냥 비밀 해…….
그렇게 생각하는 하라도, 엄마도 나가서 인사 한 번 하고 들어왔다. ‘하다, 이놈은 아비가 왔는데 나와 보지도 않고!’ 하며 호통치는 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왔다.
이대로 불 켜고 자는 시간 미뤄 봤자 재필 씨가 들어와 잔소리나 할 기세라 하라는 얼른 씻으러 들어갔다. 샤워하고 방으로 들어오니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하라의 상사인 유정이었다.
그제야 하라는 오늘 간만에 출근하면서도 유정과 인사 한번 안 했다는 걸 깨달았다. 병원에서 안부 문자 정도는 나눴지만, 오늘 출근한다고 해 놓고 사무실에 안 들어갔으니 유정이 걱정할 만도 했다.
- 퇴원했다며 회사도 퇴사했어?
전화를 걸자마자 일부러 뾰족하게 꾸며 낸 말투의 유정이 전화를 받았다. 하라는 웃음이 터졌다.
“죄송해요, 관리관님. 제가 정신이 없어서…….”
- 얘기 들었어. 던전 후유증 때문에 서장님이 며칠 연가 줬다며.
얘기가 그렇게 됐나. 하라는 유정의 말에 긍정했다.
- 아, 그러면 당분간 출근도 안 하겠네?
아쉬운 말투라기보다는, 망설이는 듯했다. 하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세요?”
- 왜긴 왜야. 하라 씨 없으니까 심심해 죽겠어. 애 아빠 욕할 데도 없고.
유정의 웃음기 섞인 말이 들려왔다. 하라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마석관리과에서 유일하게 하라가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유정이었다. 하라와 연계 업무가 아니라서 가능할지도 모른다.
중간에 다른 지서에서 지역을 옮겨 온 유정은 빠릿빠릿하고 유능했지만 이혼한 아이 엄마라는 이야기 때문에 뒷말을 엄청나게 들었다.
듣다못한 하라가 유정의 뒷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소심하게나마 ‘그러지 마세요.’라고 하는 것을 유정이 우연히 듣게 된 게 친해진 계기였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강하다 욕할 데가 없다, 내가.”
- 강하다가 왜?
“그놈의 헤어라인 시술. 아직도 돈 빌려 달래.”
- 미친놈 아냐. 라인 정할 필요 없이 머리카락 다 뽑아 버려.
“아하하.”
유정이 시원하게 욕해 준 덕에 하라의 속이 그래도 개운해졌다.
- 엄마도 계속 그러시지?
“말해 뭐해요. 던전 보상금 나오면 그거 빌려주래.”
- 참 나. 던전에서 까진 상처도 아직 다 안 아물었겠다.
유정이 혀를 찼다.
- 그래서 언제 와.
“모르겠어요. 당분간은 출근 못 할 거 같긴 해요.”
- 오래 쉬어야 돼? 계장이 욕할 텐데.
툭하면 하라에게 미련하다며 면박을 주는 계장의 이야기가 나오자 하라는 아, 했다. 요즘 정신없어서 계장 생각 따위는 하지도 못했다.
“욕하라지, 뭐.”
- 오, 강하라 센데. 던전에서 간덩이가 각성해서 나왔어?
푸스스 웃음이 나왔다. 아마 마포지서 출근은 앞으로 못 하지 않을까.
아쉽진 않았다. 헌터 블라인드에 하라를 ‘걍 찐’이라고 비하한 분위기만 봐도 짐작할 만하지 않나. 마포지서에는 좋은 사람도 많았지만, 하라 같은 E급을 깔보고 비웃는 사람도 많았다.
다만 유정에게 제대로 상황을 설명할 수 없음이 미안했다. 하라에겐 언니 같은 사람인데.
전화를 끊고 내친김에 누워 휴대 전화를 보니 안부 문자가 가득했다. 대답한 문자도, 대답하지 못한 문자도 있었다.
퇴원은 했는데 지서로 출근하지 않았으니 지서 사람들이 이미 시끄럽게 떠들고 있을 터였다. 벌써 몇 명은 그간의 일을 캐묻고 있었다. 안부를 가장한 근황 탐색에 가까웠다.
‘일단 훈련이나 마저 받자.’
정 서장이 입을 다물라고 했지만, 하라는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분간이 안 갔다. 마음 편히 입 열 수 있는 건수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 거 신경 쓰지 마세요.”
권욱의 말도 떠올랐다. 그는 오후에 잠깐 쉬는 동안, 하라가 물어 온 말에 그렇게 답했다.
“전 하라 씨가 S급으로 각성하는 걸 도울 거예요. 정 서장님이 제게 하라 씨를 맡긴 건, 결국은 하라 씨를 도와주란 얘기거든요.”
“그, 그런가요?”
“네. 하라 씨가 S급으로 각성하면 어차피 일반 사람들하고의 인연은 없었던 것처럼 될 거예요. 지금 입 열어 봐야 하라 씨한테 도움 될 거 하나도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