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사실 정부 창고를 쓰는 게 제일 편한데.”
“정부 창고요?”
“장비 창고.”
“아.”
권욱이 허공을 휘젓는 걸 보니 인벤토리를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그는 시스템 창을 뒤지면서도 유려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당분간 하라 씨 능력치는 대외비니까, 정부 창고도 못 쓰죠. 제 권한으로 빼 오기엔 사용처 소명해야 되는데, 저희 팀 장비 리스트도 정부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있어서.”
숨 막히는 공직 사회. 정부에서 던전을 독점 관리하고 있으니, 나오는 장비들도 괜찮은 건 어지간하면 정부 창고행이었다. 던전 공략팀들이 각자 맞는 장비를 대여해 쓰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은 정부 귀속템인지라 장비 사용처를 소명해야 했다.
팀 K도 예외는 아니었다. 팀 K의 인원은 총 12명. 12명의 팀원들 장비가 죄다 헌터청 창고 장부에 기록돼 있는 데다가, 추가 장비도 누가 쓸지, 얼마나 쓸지를 기록하고 가져가야 했다.
“하라 씨한테 딱인 장비가 지금 정부 창고에 있는데. 아깝다, 정말.”
“뭔데요?”
“그게 언제더라. 한 2년 됐을걸요. 부여 던전에서 칠지도가 하나 튀어나왔거든요. 다들 땅 잘못 파여서 유물이 튀어나온 줄 알았는데, 감정해 보니까 헌터 장비라 기함을 했지.”
아. 하라도 어렴풋이 기억해 냈다. 부여 외곽의 작은 논에서 열린 게이트였다. [‘유물인 줄 알았더니……. 던전에서 튀어나온 ‘칠지도’] 어쩌고 하는 기사를 본 것 같기도 했다.
“지금 우리나라에 있는 S급 중에는 그거 쓸 사람이 없어서 킵해 놨는데, 에이. 뭐, 못 쓰는 거 생각해 봐야 뭐 해.”
그래도 팀 K에 마침 아이템 제작 스킬을 가진 헌터가 있었다. 안타까운 건 그 헌터의 등급이 A라서, 하라의 스킬과는 격이 맞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겠나. 있는 거 써야지.
“제작 아이템이 문젠데. 이건 상암 던전 한번 털어 봐야겠어요. 제작 아이템이 그렇게 쉽게 떨어지는 건 아니라……. 헌터 마켓을 뒤져 봐야 하나.”
“저어, 이건요?”
고민하던 권욱에게 하라는 조심스럽게 자신이 게오르그에게서 얻은 부리와 발톱을 내놨다. 권욱이 눈을 크게 떴다.
“그 던전 채집했어요?”
“그……. 그러게요.”
그사이에 던전을 채집했냐, 너도 참 대단하다. 뭐, 그런 비난조로 들려 하라는 괜히 민망해했다.
하지만 권욱은 손을 내저었다.
“민망해할 필요 없어요. 아주 좋은 자질이에요. 그 던전 보스 공략하고 남은 시간도 5분밖에 안 됐잖아요? 전 기대도 안 했는데. 부리랑 발톱은 놔둬 보세요. 한번 잘 써 볼게요.”
“저, 그럼 이것도…….”
하라는 조심스럽게 마석을 꺼냈다.
정유진에게도 미리 얘기해 뒀다. 아무리 그래도 마석을 몰래 처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 서장은 마석의 처분 문제를 고민하다가, ‘권욱에게 일임해라.’라고 말했다.
권욱은 그 이야기를 듣곤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우리 서장님, 나를 너무 사랑하시네?”
“아, 안 될까요?”
“아녜요. 이건 제가 사죠, 뭐. 2개라고 했죠?”
“예?”
하라가 눈을 깜박이는데, 권욱이 자신의 사무실 책상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아래 있는 금고를 돌려 연 후, 안에서 지폐 뭉치를 꺼내 들고 와 하라 앞에 턱턱 쌓기 시작했다.
5만 원권, 그것도 완전히 저들끼리 달라붙어 있는 걸 보니까 신권이다. 하나 둘 셋. 그렇게 몇십 개를 쌓아 놓은 권욱이 탁, 하고 돈뭉치를 두들겼다.
“3억 원이에요.”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저기요, 세상 어떤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3억을 가지고 와서 턱 얹어요.
권욱은 입만 벙긋거리는 하라를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저한테 일임하라는 거 보니까 마석은 하라 씨한테 주기로 한 게 맞고. 어차피 오픈 마켓에서 팔지도 못할 거고. 저희 팀도 맨날 마석관리과에 눈치 보면서 공략에 필요한 마석 땡겨 가느니, 이렇게 돈 주고 사는 게 마음 편하죠.”
마석관리과에서 일하는 하라도 대충 아는 사실이기는 했다.
던전 공략을 하는 팀들은 통상적으로 게이트가 더 넓어지는 걸 막기 위해 게이트 주변에 마석을 동그랗게 박아 넣는 게 가장 먼저 하는 일이다.
하지만 던전의 등급이 높을 경우 그 박아 넣은 마석들이 툭하면 깨져 나가곤 했다. 팀 K가 맡고 있는 상암지구 던전의 경우 S급이니, 당연히 마석이 수십 개는 필요하다.
“원래 한 알에 2억이 시세인 거 저도 아는데, 이건 암거래 매입이니까 한 알에 1억 5천으로 퉁칩시다. 시세가 그래요. 안 믿기면 바깥에서 시세 알아보고 오셔도 되고.”
그렇게 쾌활하게 암거래 운운하지 말아 주실래요……. 하지만 여전히 놀라운 금액이기는 했다.
하라가 넋을 놓고 고개를 끄덕이자 권욱이 환히 웃으며 마석을 챙겼다.
“나머지는 천천히 처분해 봅시다. 어차피 하라 씨도 돈 더 줘도 다 어찌 못할 거고요. 통장에 넣지도 못하는 돈인데.”
“예? 왜요?”
“왜냐뇨. 다음 달이 11월이잖아요.”
권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직자 재산 신고 안 해요?”
“아.”
“거기다 하라 씨 원래 마석관리과라며.”
“아아.”
하라가 박 터지는 소리를 냈다. 연말마다 하는 공직자 재산 신고를 생각 못 했다. 계좌 내역을 싹 털어 가는 바로 그 신고. 하라야 항상 이달 벌어 다음 달 먹고사는 형편이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심지어 마석관리과는 공직자 재산 신고 외에도 1년에 한 번 무작위로 직원들 계좌를 공공재처럼 털어 조회했다. 비싼 마석을 횡령하는 직원이 실제로 심심찮게 나왔기 때문이다.
“통장에 큰돈 오가는 거 걸리면 출처 소명하셔야 돼요. 1억만 넘어도 소명해야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되게 잘 알고 계시네요…….”
“아시면서. S급들은 훨씬 더 자주 털려요.”
훨씬 더 자주 털리는데 이 돈을 절 주신다고요? 하라가 테이블 위에 놓인 3억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권욱이 능글맞게 웃었다.
“팀 운용하려면 적당히 횡령하고, 적당히 암거래도 해야 되고. 딴 주머니 차는 건 어쩔 수 없어요.”
그런가.
“네…….”
그래도 어쩐지 망설여졌다. 하라는 소시민이었다. 돈 300원도 아니고 통장에 넣지도 못하는 돈 3억 원이라니. 마석만 2개 가지고 있을 때는 얼마든지 팔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눈앞에 지폐가 쌓여 있는 걸 보니까 마음이 좀 그랬다.
“왜요, 마음에 걸리세요?”
권욱은 하라가 망설이는 걸 귀신같이 눈치채고 다시 마석을 내놨다.
“전 상관없어요. 나중에 파셔도 되니 하라 씨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네…….”
멍청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하라가 꾸물대는 와중에 권욱은 지폐 두 뭉치는 남겨 두었다.
“부리랑 발톱값이에요.”
어차피 건강원에 팔려고 했다면서요, 라며 씩 웃는 말에 하라는 당황했다. 분명 부리와 발톱은 하라의 무기를 만드는 데 쓴다고 했는데.
하지만 권욱은 고개를 저었다.
“하라 씨 무기를 못 만들 수도 있고. 뭐, 뇌물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예? 무슨 소리세요?”
“그게 제가 생각을 좀 해 봤거든요.”
권욱이 씩 웃었다.
“하라 씨는 아무튼 윤세헌 씨랑 사귀어야 S급이 되는 거죠?”
“아, 네…….”
“근데 사실 전 하라 씨가 되게 탐이 나거든요.”
하라는 무슨 소리인지 몰라 멍하니 권욱의 말을 들었다.
권욱은 아주 좋은 생각이 났다며 자신의 계획을 설파했다.
하라에게 그 계획은 꽤 당황스럽긴 했지만, 괜찮게 들리기도 했다. 아무튼 윤세헌이 그녀의 퀘스트 지정 사용자인 이상, 어떻게든 연을 이어 가긴 해야 했으니까 말이다.
* * *
세헌은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던전에 휘말려 들어갔다 나온 게 꿈 같을 정도였다.
그가 근무하고 있는 방송국은 별관이 무너진 탓에 엄청나게 복잡해졌다. 별관에 있던 라디오국이며 뭐며, 온갖 방송팀이 본관으로 임시 대피해 있는 까닭에 난민촌 같아진 본관 로비를 통과하며 인사를 수십 번 받았다.
본래 평일 저녁 9시 뉴스를 맡으니 오후에나 출근해도 됐지만, 그간 자리를 비웠기에 할 일이 많았다. 그가 없는 동안의 뉴스를 모니터링하고, 던전에 빨려 들어간 탓에 비운 날의 연차계를 냈다. 어이가 없었다. 사람이 사고를 당했는데 연차계를 내다니!
잠시 숨 돌리고 1층 로비 카페에 커피를 사러 다녀오는 길, 제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윤의원]
아버지라는 이름도 아니고 윤의원이라고 저장한 이름을 보다가 전화를 끄려는 차였다.
“선배.”
“아, 균종이.”
방균종. 세헌보다 한 기 아래인 주말 뉴스 메인 앵커였다. 세헌이 없는 동안 평일 뉴스를 맡아 준 후배기도 했다.
“나 없는 동안 고생했어. 안 힘들었고?”
“매일 하는 뉴스 뭐 힘들 게 있어요. 선배는 몸은 괜찮으시고?”
세헌은 입꼬리를 올렸다.
“주말만 하는데 뭘 또 매일 해. 난 괜찮아. 일주일에 이틀 일하는 분 고생시키니 내가 미안하지.”
균종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랬다. 사회부 시절부터 세헌과 엇갈려 툭하면 기 싸움을 하던 후배. 세헌보다 나이는 많았지만 입사가 늦어 세헌에게 존대말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야 이 바닥이 다 그렇다지만, 그는 유독 세헌에게 날을 세웠다. 오죽하면 입사 후 이른바 ‘라인’을 타야 할 상황에서 일부러 세헌과 다른 라인으로 빠지기까지 했다. 집안으로 따지면 사실 세헌과 동고동락해도 모자랄 처지이거늘.
물론 그건 세헌 입장에서 사절이었지만.
“커피 한 잔?”
“괜찮아요. 많이 마셨어요.”
사이좋게 커피 마실 이유가 없는 사이지만 예의상 건넨 말에 곧장 거절이 돌아온다. 세헌의 눈도 웃지 않았다.
“평일에 하니까 할 만해?”
“선배 존경스럽던데요.”
“그럼 민영이한테 맡기지 그랬어.”
평일 뉴스 메인 앵커 자리도 사실 서브인 다른 후배가 메우면 될 일이다. 애당초 이곳이 그렇게 타이트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부득불 주말 뉴스 메인 앵커가 평일까지 하겠다 나섰다는 게, 균종의 욕심을 보여 주는 부분이었다.
“에이. 민영이도 힘든데 도와줘야죠.”
“민영이 그렇게 생각해 주는 줄은 내가 또 몰랐네. 민영이 곧 결혼하는데 조심하고.”
평일 뉴스 서브 앵커, 민영을 좋아한다며 3년이나 따라다니다 결국 회식 자리, 남들 다 보는 앞에서 거하게 차인 역사가 있는 균종의 이마가 일그러졌다.
“아, 선배. 남들 들을까 무섭네요.”
“농담이지. 죽다 살아왔는데 이 정도 농담은 하게 해 줄래?”
겉으로 보기에는 젊은 앵커 둘이 하하호호 하는 흐뭇한 모습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서로만 아는 불꽃이 튀겼다.
사실 세헌 입장에서는 굳이 균종의 견제를 받아 줄 이유가 없다. 이달의 기자상 20여 회 수상, 올해의 기자상 수상, 평일 9시 뉴스 메인 앵커 파격 발탁, 기타 등등.
전력만 해도 방균종은 윤세헌에게 시비 걸 군번이 못 됐다. 하지만 아득바득 따라오면서 계속 사람 귀찮게 하니 세헌 또한 굳이 굳이 일부러 균종을 한 번씩 긁는 것이다.
하지만 균종은 갑작스럽게 활짝 웃었다.
“뭐, 그래요. 선배도 힘 빼고 웃는 일 필요하겠지.”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 정도 긁으면 보통 버럭 짜증을 내다가 뒤늦게 정신 차리고 가 버리는 게 균종의 패턴이었는데. 세헌이 눈을 가늘게 떴다.
“쉬엄쉬엄하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예?”
그러더니 덧붙였다.
“아, 불조심하시고.”
마지막 말이야 균종이 늘 세헌에게 덧붙이는 것이었으니 무시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굳이 저렇게 비아냥댄다는 건…….
무슨 속셈이 있든가, 아니면 다른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세헌은 곧 그 일이 뭔지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