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일찍 찾아뵀어야 하는데, 저도 어제 퇴원한 참이라. 죄송합니다.”
“아아아, 아녜요. 죄송해요. 아이고야…….”
하라는 민망해 엄마를 힐끗 쳐다봤다. 엄마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반색하며 윤세헌을 반기고 있었다.
“아유, 아팠구나. 그럴 수도 있지. 이게 다 뭐예요?”
“아, 이건 너무 감사해서…….”
정장을 차려입은 세헌은 과장을 조금 보태 하라만 한 꽃다발을 하나 들고 있었다. 게다가 다른 손에는 과일 바구니에, 커피까지.
창피해하는 하라와 달리 현숙은 곧장 넉살 좋게 세헌이 들고 온 과일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뭐 이런 걸 다. 어서 들어와요.”
“감사합니다.”
세헌이 고개 숙이며 들어왔다. 하라는 쭈뼛거리며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가 ‘왜, 뭐, 왜.’ 하는 눈으로 하라를 바라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헌은 가지고 온 꽃다발을 병실 협탁에 내려놨다. 하라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감사해요. 몸은 좀 괜찮으…… 세요?”
“아, 저는 괜찮습니다. 덕분에 살았지요.”
“아이고, 예…….”
현숙 씨가 가늘게 뜬 눈으로 하라를 바라보더니, 다가와 하라의 등을 가볍게 때렸다.
“너는 젊은 애가 허리 좀 펴라.”
세헌 앞에서 괜히 자꾸 몸이 굽는 하라가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러고는 웃으며 세헌을 향해 칭찬을 연발했다.
“세상에, TV에서 볼 때도 잘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잘생겼네. 이게 무슨 일이래. 퇴원은 금방 한 거 보니 몸이 많이 괜찮았나 봐요.”
“아, 예. 덕분에요.”
“우리 하라는 아직 검사 좀 더 해 봐야 한다고 해서 붙들려 있어. 그래도 그쪽은 금방 퇴원했다니 다행이네.”
하라가 약간 입을 벌렸다. 말이야 다행이라고 했지만, 엄마의 말뜻이야 자명했다. ‘넌 먼저 퇴원해서 좋겠네. 우리 애는 네 목숨 구하느라 아직 입원해 있다!’라며 세헌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애당초 현숙은 늘 저런 식으로 남을 에둘러 비난하곤 했다. 그건 현숙 씨가 동네 통장을 역임하며 생긴 버릇이었는데, 보통 사람들은 그 뜻을 쉬이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저럴 때마다 현숙 씨의 말투는 답지 않게 고상하고 다정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세헌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더니 현숙에게 다시 고개 숙여 인사했다.
“따님 덕에 제가 목숨을 구했는데 일찍 오지 않아 면목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입원도 같은 병원에서 했는데, 워낙 기자들이 기웃거려 제가 일찍 찾아뵙는 것이 방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정중한 사과에 현숙이 어머 하며 웃었다.
“아유, 내가 사과받자고 한 말도 아닌데, 뭘.”
사과받자고 한 말 맞잖아, 엄마…….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하라는 얼른 엄마를 밀었다.
“엄마, 잠깐 자리 좀.”
“아유, 알았다, 알았다. 너는 허리 좀 펴라니까!”
현숙이 하라의 등을 한 번 더 때리고는 지갑을 챙겼다.
“그렇잖아도 엄마 밥 좀 먹고 오려고 했다. 그 윤세헌 씨? 거기 있는 사과 좀 먹어요. 방금 깎은 건데 아주 맛있어. 감홍 사과라고…….”
또 한바탕 사과 얘기를 떠든 현숙은 문밖으로 나가기 직전까지 ‘아- 아까 내가 한 말은 마음에 두지 말아요. 알았지?’ 하는 말을 덧붙이고 나서야 사라졌다.
하라는 괜히 민망해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는 안경을 고쳐 썼다.
“죄송해요.”
“아, 아닙니다.”
서 있던 세헌이 사람 좋게 웃었다.
“덕분에 살아 돌아왔는데, 여태까지 인사도 안 오니 화날 만도 하시죠. 제가 너무 늦었습니다.”
“아아, 예…….”
세헌이 들고 온 커피 캐리어에서 커피 하나를 뽑아 내밀었다.
“커피 좀 사 왔는데 드시겠어요?”
“앗, 예…….”
캐리어에는 따뜻한 커피 하나, 차가운 커피 하나가 있었다. 세헌이 내민 건 따뜻한 커피였다.
하라의 시선이 방황하자 잠깐 멈칫하던 세헌이 웃으며 차가운 커피를 다시 뽑아 내밀었다.
“찬 거 드셔도 됩니다.”
“어어어어…… 네……. 감사합니다.”
내심 얼음이 든 커피를 마시고 싶어 하던 하라가 화들짝 놀라 허리를 숙이며 받아 들었다. 곧장 빨대로 커피를 쭉 빨아 마시니 살 것 같았다. 잊고 있었는데, 아침마다 마시던 커피가 좀 그립긴 했나 보다.
“커피가 맛있네요…….”
“다행입니다.”
두 사람은 잠시 멋쩍어했다. 하라는 뒤늦게 병실 소파에 앉으시라고 자리를 권했다. 세헌이 감사를 표하며 소파에 앉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단순히 감사만 표하러 온 게 아닌 건 분명했다.
하라는 세헌을 슬쩍 쳐다봤다. 본래 눈치를 보려고 그랬던 건데, 하라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약간 감탄했다. 이야, 끝내준다.
조금 낮은 소파에 앉은 남자의 다리는 기가 막히게 길었다. 던전 안에서는 경황이 없어 그가 멋지고 아니고에 대해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찾아온 남자는 정말이지 대단히 잘생겼다.
훤칠하니 영준한 얼굴과 늠름한 어깨. 깔끔히 빗어 넘긴 머리카락. 다리를 꼬고 앉은 위에 올린 손.
어깨, 손, 발, 다리, 상체. 아무튼 다 컸다. 거기에 얼굴만 작아 웬만한 모델 뺨쳤다.
방송하는 사람이라 그런가……. 저도 모르게 넋 놓고 남자를 감상하던 하라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아이고, 이럴 때가 아닌데.
“……저!”
“그!”
동시에 입을 열었다가, 민망한 ‘너 먼저.’, ‘아이고, 그쪽 먼저.’ 같은 이야기가 몇 번 오갔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세헌이었다.
“감사한 것도 있지만 여쭐 게 좀 있어서요.”
“아, 예…….”
“어제 퇴원하자마자 제가 경찰 조사도 그렇고 헌터청 조사를 좀 받았어요. 아시겠지만.”
통상적으로 던전에 휘말린 사람들은 사건 조사를 받는다. 보험도 보험이지만 정황 청취 때문이다. 그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하라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세헌이 손깍지를 끼고 말했다.
“그런데 헌터청 조사 전에 저한테 연락 오신 분이 두 분이 계세요.”
“어…….”
하라가 눈알을 굴렸다. 세헌은 무표정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한 분은 마포지서장님.”
“아, 예.”
예상은 했다. 정유진 서장이 하라의 입을 막으면서 세헌의 입을 막지 않았을 리 없었다.
세헌이 마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분은 서울지청장님.”
하라가 눈을 껌벅였다. 서울지청장 이은주. 하라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세헌은 달랐다.
“개인적으로 인연도 있긴 한데, 의외이긴 했습니다.”
‘개인적 인연’이라는 말에 하라는 저도 모르게 입을 약간 벌렸다.
윤세헌이 유명해진 이유야 여러 가지가 존재했다. 하라가 그 처음을 장식하긴 했지만, 그 뒤에도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헌터청장 맞짱 사건이다.
인터넷에 윤세헌, 이름 치면 꼭 따라오는 사건. 거기에는 서울지청장도 긴히 얽혀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을 그런 말로 퉁칠 수 있다니.
“강하라 씨?”
“아, 예.”
잠깐 넋 놓고 있던 하라가 뒤늦게 정신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헌이 눈을 가늘게 떴지만 그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마포지서장님께서 먼저 전화 주셨습니다. 제가 사회부 소속이었어서 마포지서장님하고도 인연이 좀 있습니다. 던전 안에서 새로 알게 된 것들에 관해 절대 말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더군요.”
“…….”
새로 알게 된 것들. 하라가 침묵했다.
사회부 소속이라 함은, 던전 관련 사건들에는 아주 베테랑이라는 뜻이다. 아마 정유진 서장이 암시한 건 하라에 대한 일이겠지.
“서장님이…… 뭐라고 하셨는데요?”
“예?”
“혹시 어디까지 말씀하셨는지…….”
하라의 말에 세헌이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단언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나중에 설명하겠다고만 하셨습니다.”
“아…….”
그제야 하라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성좌 계약 퀘스트 : 사랑과 전쟁]
[목표: 지정 사용자 ‘윤세헌’과 연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