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느슨하게 깜빡이는 빛
소 내에서 문과 문 사이의 간격이 가장 좁은 사동. 위치 또한 빛조차 구경하기 힘든 가장 안쪽, 음지에 박혀 있다. 이곳은 어둡고, 칙칙하며, 징벌을 위해 딱 한 사람만 수용하는 만큼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퉁, 퉁. 작게 두드리는 소리에 몇몇 방의 배식구가 열렸다. 그 작은 틈으로 날카로운 눈빛이 번뜩였다.
“야, 뻐꾸기 소리 들었냐?”
슬쩍 교도관의 눈치를 본 한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들었다는 대답에 그의 눈가가 섬뜩하게 휘어졌다.
“성원이 새끼가 아주 재밌는 소식을 물고 왔네.”
출역은 물론, 아침 운동조차 없는 곳에 있느라 지루하던 참이다. 오랜만에 접한 웃을 만한 일에 그의 입꼬리가 비죽비죽 올라갔다.
이제 정오가 되면 이 좆같은 방도 안녕이었다. 타이밍이 아주 좋았다.
뭘 해도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에 결국에는 웃음을 터뜨렸다. 징벌 사동이 떠나가라 웃는 소리에 교도관이 주의를 시켰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당한 만큼은 돌려줘야지. 안 그래?”
작게 중얼거리며 정오가 되기만을 기다렸다.
* * *
-추운 날일수록 힘차게 하루를 시작하는 게 좋겠죠? 사람의 온기만큼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건 없는 것 같아요. 춥고 힘들수록 더 힘차게! 내 옆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와 응원을 건네 보는 건 어떨까요? 오늘도 힘차게! 전국 수용자 여러분, 아자자! 파이팅!
오늘따라 보라미 방송이 활기가 넘친다. 평소 듣던 잔잔하고 점잖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문가에서 스피커를 올려다본 오 교도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나운서 선생님이 바뀌었나?”
전에 있던 분이 더 내 타입인데. 아무튼 아자자! 파이팅! 외치며 몸을 돌릴 때였다. 갑자기 열린 관구실 문에 등을 맞고 튕겨 나갔다. 몸을 꿈틀거리며 돌아보자 김 주임이다.
“아이, 김 주임님! 아, 사람 있는데!”
“사람 드나드는 데 서 있는 네가 잘못이지. 내 잘못이냐? 그나저나 오늘 보라미 방송이 아주 힘차네. 다들 활기차게….”
1사동 교도관들을 하나하나 보던 김 주임이 순간 멈칫했다. 그의 시선의 끝에 태주가 있었다.
“야, 남 부장 왜 저러냐? 왜 시든 콩나물마냥 축 늘어졌어. 어이, 남 부장. 괜찮아?”
“…예, 괜찮습니다. 별거 아닙니다.”
하지만 별거 아닌 게 아닌 목소리다. 탈이 나서 그런 거라는 태주의 힘없는 대꾸에 김 주임이 미간을 좁혔다. 웬만하면 아파도 아픈 티를 안 내는 인간이라는 걸 잘 알았던 탓이다. 어후, 진짜 안 좋나 보네. 쯧쯧 혀를 찼다.
“괜히 무리하지 말고, 오늘은 쉬엄쉬엄해. 저기, 오 교도 놈 다 시키면 되니까.”
“맞아요, 남 부장님! 오늘은 저한테 모든 걸 다 맡겨요! 그대의 아픔과 눈물까지도!”
“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태주가 작게 대답했다. 1사동 동료들의 배려에 희미하게나마 웃음이 나왔다. 든든한 그들을 믿고 잠시 의자에 몸을 기댔다. 느리게 눈을 감고 짧은 휴식이라도 가지려 할 때였다.
“아, 맞다! 내 정신 좀 봐.”
문득 생각난 게 있는지 김 주임이 중앙 테이블을 탁탁 쳤다. 다시 눈을 뜬 태주가 그를 보았다. 테이블 위에 작은 상자가 놓였다.
“요즘 독감 유행하는 거 알지? 위에서 다들 마스크 철저히 쓰라고 하더라고. 이건 1사동 거니까 다들 지금 하나씩 가져가서 해.”
상자를 열자 낱개로 포장된 마스크가 잔뜩 나왔다. 가장 먼저 일어난 오 교도가 마스크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런데요, 주임님. 우리 의무실에서 독감 예방 주사도 맞았는데 마스크까지 써요? 작년엔 안 이랬잖아요.”
“의무 사동이 지금 독감 걸린 수용자 천지래. 다른 사동에는 이미 많이 퍼졌나 봐.”
“응? 정말요? 어쩌다 퍼졌대?”
“아무튼 여기까지 퍼지면 우리만 더 골치 아파져. 연장 근무들 하기 싫으면 똑바로 잘 하고 다녀. 알았어?”
“예!”
힘차게 대답한 교도관들이 하나씩 마스크를 집어 들었다. 가장 나중에 자리에서 일어난 태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느릿느릿 끈을 귀에 걸고 코와 입을 가렸다. 의무 사동…. 독감 환자…. 지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 어젯밤부터 되는 일이 없네. 우리 선생님, 나 때문에 잠도 못 잤는데. 독감까지 걸리면 너무 미안하고 슬플 것 같은데.
기력이 없는 탓인지, 축 처지면서 우울한 감정이 몸에 꽉 들어찼다. 뭘 해도 되는 일이 없는 것 같고, 웃는 게 힘들었다. 언제부터 심해졌더라? 선생님이랑 주차장에서 헤어지고 나서부터?
…맞는 것 같다. 곁에 있을 땐 괜찮았는데, 떨어져 있으니까 괜히 불안하고 불쾌했다.
태주는 당장이라도 의무실로 달려가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어젯밤 일들이 떠올랐다.
거의 한숨도 못 자고 밤을 새웠다. 어지럽고, 울렁거리는 속에 먹은 것을 전부 토했다. 호텔에서 먹었던 마약의 금단증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잠을 자려고 눈을 감으면, 좁은 공간에 갇혀 억지로 약을 먹는 악몽을 꿨다. 악몽을 꾸면 온몸이 저리고 손발이 덜덜 떨렸다. 울고, 숨을 헐떡거리다가, 헛구역질을 하길 반복했다.
‘태주야. …태주야?’
‘우욱, 읏….’
‘잠깐만 눈 떠 볼까? 왜 이렇게 몸을 떨어, 응?’
‘선, 생님….’
‘옳지, 잘했어요. 이제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나한테만 집중하는 거예요. 알았죠?’
‘….’
‘금단증상일 뿐이에요. 태주 씨 몸엔 아무런 이상 없어요. 있어도 내가 고쳐 줄 건데 뭐가 걱정이에요.’
‘….’
‘나쁜 꿈을 꾸고, 불안한 생각이 밀려든다고 해서 힘들어할 것 없어요. 남태주의 세상은 지금 아주 무사하니까요. 잘 믿기지 않으면 한번 주위를 둘러볼까요?’
그 말에 천천히 눈동자를 굴렸다. 그리고 다시 그를 바라보면, 이번엔 가장 소중하게 아끼고 있는 것을 떠올려 보자고 했다. 말할 것도 없이 딱 하나뿐이라 연지호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내내 안정을 찾는 데 집중했다. 어느새 창밖은 점점 밝아지고, 결국엔 기상 시간에 맞춰 놓은 알람이 울었다.
그제야 미적미적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당연히 제대로 된 꼴로 출근하지는 못했다.
두 사람 다 교도소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외상외과 베테랑 의사였던 지호조차 지친 기색을 숨기지 못했을 정도이니 말 다 했다.
“후우….”
태주의 입에서 한숨이 샜다. 아아, 선생님한테 더 폐를 끼치면 안 되는데….
하지만 그러기엔 그가 이미 치료제였다. 잠깐 어젯밤의 연지호를 떠올렸다고, 다시 마음이 차분해졌다. 슬슬 밀려오는 졸음에 의식이 멀어졌다.
* * *
걱정돼 죽겠네.
지호는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잠시 딴생각을 했다. 눈꺼풀 위로 내려앉은 졸음에 반쯤 눈이 감긴 채였다. 먼발치에서 그를 지켜보던 의무과장이 말을 붙였다.
“교도소 일이 대학 병원 일보다 힘들어?”
그는 설탕과 크림이 듬뿍 들어간 자신의 커피를 보다가, 슬쩍 지호 앞에 놓았다. 그리고 장난스레 라이트를 비추며 동공반사를 확인했다.
“어어, 다행히 완전히 죽지는 않았네.”
“그 정도로 심하지는 않아요.”
지호의 입에서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몰골은 좋지 못해도 행동은 평소의 그와 다름이 없었다. 앞에 놓인 커피를 의무과장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안 마셔? 당 충전 좀 하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단 건 못 먹어요. 과장님도 설탕이랑 크림 좀 줄이세요. 몸에 안 좋은 거 뻔히 아시면서.”
“연 선생이 내 나이 돼 봐라. 이런 거 안 먹고 살 수 있나. 그보다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얼굴이 아주 반쪽이야.”
“그래요? 몸은 그다지 고생하지 않았는데, 마음고생을 해서 그런가 보네요.”
“아휴, 그런 거면 내 영역 밖이네. 피곤하면 안에 들어가서 좀 자요, 어?”
툭툭, 지호의 어깨를 두드린 의무과장이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지호의 자세가 느슨하게 풀렸다.
턱을 괸 자세로 볼펜을 들었다. 서류를 톡톡 두드리다가, 요즘 부적처럼 들고 다니는 수첩을 꺼냈다. 빼곡히 적은 태주의 상태를 눈으로 훑었다.
“역시 걱정되네….”
마약은 적은 양을 사용하더라도 이후에 지속해서 의존 증세가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올곧고 의지가 강한 태주의 평소 모습을 보면, 그 부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문제는 지금 겪고 있는 금단증상이었다. 이로 인해 겪는 불안감과 불쾌감은 자칫하다가 자살 사고를 일으킬 수 있었다.
부디 이런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말아야 할 텐데….
안 그래도 걱정이 어려 있던 얼굴에 그 색이 더 짙어졌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른 의무사무관이 들어오자마자 자리를 떴다.
* * *
커다란 창 너머에 시선을 던지며 눈으로 안을 먼저 살폈다. 다른 교도관들은 어디에 간 건지 태주 혼자뿐이었다. 지호는 조심스럽게 관구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은 태주는 잠이 든 듯했다. 밤새 토하고 힘들어하더니, 이제라도 편안한 얼굴이라 다행이었다.
발열이 있는지 손으로 살짝 얼굴을 만져 보았다. 뜨겁기보다는 오히려 차가운 느낌에 입고 있던 가운을 벗었다.
그런데 덮어 주려고 보니, 태주의 허벅지 위에 뭔가 이상한 게 있다. 해맑게 웃는 꽃 모양의 쿠션이었다.
“이런 거한테 함부로 다리 내 주는 거 아니에요.”
작게 속삭이며 쿠션을 집어 휙 던져 버렸다. 오 교도가 가끔 베고 자던 쿠션이라는 게 떠올라서였다. 딱 봐도 그가 멋대로 올려놓은 모양새였다.
눈엣가시는 저기 치우고 하얀 가운을 태주의 몸에 덮어 주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괜히 신경이 쓰여 떨어진 쿠션을 주웠다. 탈탈 먼지를 털고 테이블 위에 얌전히 올려놓았다.
조용히 다시 관구실을 나왔다. 무사한 것을 확인했으니 할 일은 끝났다. 이제 눈을 뜨면, 남태주는 곧바로 자신을 찾아 의무실로 올 것이다.
그러라고 두고 나온 가운이었다.
* * *
“우편물! 우편물이요!”
사동 도우미의 우렁찬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깼다. 정신을 차린 태주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깐만 눈을 붙인다는 게 얼마나 잔 거지? 시간을 확인해 보니 40분 정도 지나 있었다.
벌떡 일어나 주변을 정돈하려는데, 뭔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내리자 익숙한 가운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얼른 주워 탈탈 먼지를 털고 살폈다. 왼쪽 가슴에 붙은 세 글자를 보고 활짝 웃었다.
선생님이다.
꼭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알파나 오메가들은 가끔 연인의 옷으로 둥글게 둥지를 만든다고 하는데, 왠지 그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런 향도 맡을 수는 없지만, 포근하고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쭈욱 팔을 뻗어 간단한 스트레칭을 한 뒤, 가운을 차곡차곡 갰다. 돌려준 다음에는 제대로 일하자고 다짐하며, 관구실 문을 열었다. 때마침 돌아온 심 교도와 마주쳤다.
“아, 남 부장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네, 이제 괜찮습니다. 괜히 신경 쓰게 해서 죄송합니다.”
“에이, 죄송하다뇨. 저 독감 걸렸을 때는 남 부장님이 제 일 다 해줬잖아요. 김 주임님 말씀대로 오늘은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그럼 저 먼저 가겠습니다? 간단히 인사를 마친 심 교도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에는 노란색 수형표를 단 수용자 두 명이 따르고 있었다. 징벌 사동에서 원래 지내던 거실로 돌아가는 듯했다.
“방으로 돌아가면 이제 사고 치지 않는 겁니다? 다들 아시겠어요?”
“예! 심 교도님!”
그중 하나는 뒤에서 몰래 위화감을 조성하고, 멋대로 페로몬을 흘리던 그 수용자였다. 슬쩍 고개를 돌려 태주를 바라본 그는 별안간 풀린 눈으로 넋을 놓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약에 취한 사람을 과장해서 따라 하는 모양새였다.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태주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하지만 전혀 주눅 드는 법 없이 시선을 맞췄다.
“어이, 도련님. 나랑 같은 옷 입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도련님 정말 교도관 맞아?”
어. 교도관 맞아, 개새끼야.
속으로만 대꾸하며 계속해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상대가 비웃어도 표정 하나 변하는 법이 없었다. 그저 지그시 감정 없는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이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은 심 교도가 묘한 낌새를 감지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6837,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사고 치지 말라고 말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다시 징벌방 가고 싶어요? 얌전히 앞만 보고 걸으세요.”
“예, 교도관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가 다시 정면을 보았다. 이제는 더 돌아보지 않고 얌전히 방으로 가는 듯했다. 태주는 그가 방에 들어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수용자가 교도관을 향한 적대심을 대놓고 드러내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다.
교화를 위해서라도 기본적으로 교도관은 수용자에게 상냥히 대하는 편이다. 그러나 상냥히 대하되, 우습게 보여서는 안 되었다. 그들이 징역을 살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 또한 사실이기에.
“아, 왠지 또 조만간 사고 칠 낌새인데….”
보통 이런 감은 틀리지 않아서 피곤하다. 길게 하품을 한 태주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 자신을 조롱하던 그 얼굴을 떠올렸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 꼴을 보니 확실히 알겠다. 제게 억지로 약을 먹인 놈들이 조직폭력배였다는 걸.
* * *
슬그머니 의무실 문을 열고 고개부터 들이밀었다. 책상을 정리하고 있던 의무과장과 눈이 마주쳤다.
“어휴, 남 부장은 또 몰골이 왜 그래요?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상태 안 좋은 게 눈에 보이네. 어디 안 좋아요? 아니지, 칼을 맞지 않는 이상 어디 안 좋을 사람이 아닌데. 감기도 금방금방 낫잖아.”
별일이 다 있다며 의무과장이 허허 웃는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어서 태주도 멋쩍게 웃었다.
“예. 그냥 안색만 나쁘지, 별로 아무렇지 않습니다. 잠을 못 자서 그런가 봐요. 그런데 연지호 선생님은 어디 계십니까? 저희 사동에 가운 두고 가셔서 가져다드리러 왔는데.”
굳이 더할 필요 없는 사정을 덧붙이며 의무실을 두리번거렸다. 지호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다시 의무과장을 보았다.
“연 선생? 연 선생 창고에 있는데?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서 내가 잠깐 눈 좀 붙이라고 했어.”
그는 턱짓으로 창고를 가리켰다. 그러면서 가운이라면 자신이 전해 줘도 된다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곧바로 고개를 돌린 태주가 못 들은 척 걸음을 옮겼다.
“창고에요? 창고에 눈 붙일 만한 곳이 있었나?”
가운만 놓고 갈 거였으면 찾아오지도 않았다. 겨우 핑계 대고 온 건데, 그래도 연지호의 고운 얼굴은 한번 봐야 하지 않겠는가.
조심스레 창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곳과 달리 히터가 작동하지 않아 조금 서늘했다.
이런 곳에서 자면 감기 걸리지 않을까? 걱정하며 지호를 찾았다. 줄지어 늘어서 있는 철제 선반을 지나서 뒤로 들어가자, 뭔가를 가려 놓은 듯 세워진 파티션이 보였다.
지호는 그 너머에 있는 침대에 잠들어 있었다. 침대 옆에는 작은 전기난로가 붉은빛을 내고 있었다. 다행히 춥지는 않을 것 같다. 조용히 다가가 쪼그려 앉아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리저리 날뛰던 기분이 신기하게도 고요하고 차분해졌다. 이렇게 눈을 뗄 곳 없는 사람이 내 것이라는 게 실감이 안 났다. 답답하게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슬쩍 넘겨 주려고 할 때였다.
“왔어요?”
목소리에 한 번, 꼭 맞춘 듯 깍지를 껴 오는 손에 또 한 번 놀랐다. 느리게 올라간 눈꺼풀에 까맣고 또렷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미소 지은 지호가 그대로 태주를 끌어당겼다.
“이쪽으로 올라와요.”
자, 신발 벗고. 옳지. 뒤척이며 자세를 바꾼 그는 태주에게 옆자리를 내어 주었다. 좁은 1인 침대에 다 큰 성인 남자 둘이 딱 붙어 눕게 되었다. 어딘가 우스운 모양새에 태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좁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난 왜 좁은 게 더 편하죠? 남태주라서 그런가?”
팔을 벌린 지호가 태주를 끌어안았다. 순순히 안겨 준 태주가 작게 속삭였다.
“그냥 저 깨우지 그랬습니까. 가운만 놓고 가 버리고.”
“어제 한숨도 못 잔 걸 아는데 어떻게 깨워요. 대신에 이렇게 찾아오라고 가운 두고 갔잖아요. 몸은 좀 어때요?”
“이상하게 선생님이랑 같이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나 없을 땐 많이 안 좋았어요?”
“그냥, 뭐…. 불안하고 피곤했습니다.”
“금단증상이 원래 그래요. 그래서 그 기분을 잘 다스리는 게 중요하고요. 갑자기 자살 충동이 생긴다거나 그럴 수 있거든요.”
마음 편하게 먹고 똑바로 누워 볼래요?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간 지호가 공간을 더 내어 주었다. 팔을 뻗고 머리를 베라는 듯 툭툭 두드리자, 태주가 바로 머리를 대 왔다.
“나는 태주 씨처럼 누군가의 마음이나 생각을 어루만져 주진 못해요. 이왕 의사가 된 거,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고칠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지호는 부드러운 손길로 태주의 가슴을 토닥토닥 다독였다.
“그래도 내가 영 못 미더운 사람은 아니니까, 불안하고 힘들 때는 기대요. 내가 걱정하는 걸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
“어차피 요즘은 생각하는 것마다 다 태주 씨인걸?”
장난스레 말하고 있지만, 진심이었다. 요즘은 뭘 해도 전부 남태주였다.
지호는 태주의 머리카락에 살짝 입을 맞추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나긋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그의 귓가를 두드렸다.
“하나씩 작은 것부터 생각해 볼까요?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게.”
“그럼 어떤 것부터 생각하면 되는 겁니까?”
“음, 정말 간단하게…. 내일 저녁은 뭐가 먹고 싶어요?”
“저녁이요?”
“내일은 일찍 퇴근하니까, 태주 씨 먹고 싶은 걸로 해 줄게요. 잘 생각해 봐요.”
“…글쎄요, 뭐가 좋을까요? 그런데 또 선생님이 해 주시는 겁니까?”
“해 먹는 건 마음에 안 들어요?”
“아뇨. 그게 아니라, 저도 선생님한테 해 주고 싶습니다.”
“그래요? 그럼 나도 태주 씨한테 해 주고 싶으니까, 내일 저녁은 같이 만들면 되겠네요? 뭘 만들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요리는 잘하지 못해서…. 너무 어려운 거 말고, 쉬운 걸로요. 뭐가 있지?”
생각에 잠긴 눈동자가 천장으로 향했다. 다시 조용히 눈을 뜬 지호는 말끄러미 태주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보고만 있어도 좋다는 게 이런 거였다. 이 사람을 만나는 날이 늘어날수록 계속해서 새로운 설렘을 알게 된다. 가라앉아 있던 마음이 환해지는 걸 보면, 역시 넌 빛이었다.
따뜻하고 밝은, 나에게 있어서는 분명한 빛이다.
“오늘따라 내 태주 씨가 생각을 길게 하네?”
“이상하게 정신이 산만합니다. 뭔가 떠오르는 것도 없고…. 어쩌면 좋습니까?”
“어쩌면 좋긴요. 가끔은 이런 날도 있는 거죠, 뭐.”
하지만 내게 분명한 빛이라도 해서, 네가 늘 빛날 필요는 없어. 네가 힘들다면 그러지 않아도 돼.
“이런 태주 씨도 나쁘지 않아요, 난.”
말했잖아. 이제는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사랑하지 않을 자신 없다고.
* * *
“아아, 맞다. 남 부장 잘 왔네. 이거 1사동에 보낼 억제제인데.”
창고에서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온 대사였다. 창가 쪽에 놓인 상자를 가리킨 의무과장이 웃었다. 그는 사이좋게 한 상자씩 들고 가면 되겠다며 지호와 태주의 어깨를 두드렸다.
“별로 무겁지 않으니까 저 혼자서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상자를 드는 것은 태주뿐이었다. 크기에 비해 무겁지는 않아, 위아래로 쌓아 번쩍 들어 올렸다.
지호를 귀찮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창고에서도 저만 편하게 누워 있다 나오지 않았던가.
“스티커 붙어 있는 게 오메가 수용동 겁니까?”
“어어, 맞아요. 좀 비슷해 보이는 억제제도 있으니까 구분할 때 조심하고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아유, 잠깐만! 잠깐만, 남 부장!”
“어어? 태주 씨?”
걸음을 떼는 태주를 의무과장이 붙잡았다. 그사이 들고 있던 가운을 입은 지호가 말려 들어간 깃을 펴고 손을 뻗었다.
“왜 혼자 들고 가려고 그래요? 과장님은 나랑 사이좋게 하나씩 들라고 했는데. 하나는 내가 들게요. 아무리 가벼워도 혼자서는 위험해요.”
“예? 아니, 진짜 괜찮은데….”
“봐요, 시야 다 가리잖아.”
상자 하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가벼워진 무게만큼 앞을 가리고 있던 시야가 탁 트였다.
“그럼 다녀올게요, 과장님.”
의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어느 틈에 벌써 저기까지 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태주는 자신의 손에 남은 상자 하나와 지호를 번갈아 보다가, 얼른 뒤따라 의무실을 나섰다.
아이씨, 연지호 귀찮게 안 하는 거 너무 힘들다.
* * *
‘남태주 같은 그런 새끼는 스트레스가 좀 쌓여야 돼. 그래야 못 참고 약을 건드리거든. 약 구해서 나한테 넘기는 대로 그 새끼 살살 건드려 봐.’
징벌 사동에서 돌아오기 전, 남자는 자신이 맡은 역할을 떠올리며 조용히 눈을 굴렸다. 약을 크림빵으로 위장해 팔고 있다는 녀석을 찾았다. 다가가서 성의 없이 발을 뻗었다.
“야, 뭐 보냐? …이스라엘? 뭐 이딴 걸 보고 있어?”
툭, 손을 치는 발짓에 들고 있던 책이 날아갔다. 다니엘은 책을 들고 있던 자세 그대로, 눈동자만 위로 굴렸다.
씨발 새끼가,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나 보네. 그의 시선이 가슴에 붙은 수형표에 닿았다. 5814, 옆 방 조폭 새끼의 따까리였다.
굳이 다리를 펴고 일어날 가치조차 없었다. 책이 날아간 방향으로 턱짓한 다니엘이 나지막이 명령했다.
“가져와.”
“뭐래, 이 미친 새끼가?”
어이없다는 듯 웃은 5814가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았다. 다니엘과 눈높이를 맞추며 툭, 툭, 손으로 볼을 건드렸다.
“야, 야.”
“….”
“너 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냐? 가져와?”
“….”
“크림빵 좀 나른다고 네가 내 위에 있는 것 같냐?”
너 내가 누군지는 알고 뻗대고 있냐? 기분 나쁘게 건드려오는 말과 손길에도 다니엘은 표정 하나 변하는 법 없었다. 괜히 그가 이런 좆같은 임무를 받고 여기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라고, 옆 방 따가리.”
“뭐, 이 새끼야?”
“너, 옆 방 6837 똥꼬도 빨아 주잖아. 아니야?”
쿵, 동시에 다니엘의 손이 5814의 머리를 눌렀다. 그대로 바닥에 처박혀 고꾸라진 5814가 고개를 부들부들 떨었다.
보기와 다르게 다니엘의 악력이 너무 강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다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핏발선 눈으로 다니엘을 올려다보았다.
“책 가져와, 기어서.”
“이, 씨발….”
“짖지 말고 기라니까? 나 건드린 거 내 크림빵 먹고 싶어서잖아. 너희 형님이 시켰냐? 근데 너나 형님이나 그런 거 안 하는 범생이 같은데?”
“….”
“뭐, 아무래도 좋아. 지금 딱 하나 남았거든? 이거 하나라도 처먹고 싶으면 내 책 주워 와, 씨발아.”
낮게 읊조린 다니엘이 서서히 손에 힘을 풀었다. 평소에는 한량 같던 그의 낯선 모습에, 방 사람들 모두 놀란 얼굴로 숨을 죽였다.
“뭐 해? 안 기어? 크림빵 먹고 싶다며.”
다니엘의 조롱에 5814가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분하다고 한들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는 결국 천천히 책을 향해 기어갔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이쯤 되면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다니엘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조용히 한숨을 내쉰 방장이 시선을 내렸다. 하필이면 그 책이 이 앞에 떨어진 건 뭔지.
얼결에 너덜너덜하게 펼쳐진 페이지를 보았다. 이스라엘이란 제목이 국가의 이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사람의 이름이었다. 이스라엘은 또래 아이들에게 괴물이었고, 수수께끼였다.
꼭 지금의 다니엘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절대로 얌전히 약만 날랐을 녀석은 아니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이 안에서는 서로의 자세한 사정을 나누지 않는다.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방장은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 * *
“선생님.”
“네, 태주 씨.”
“혹시 뭔가…. 필요한 거라든가, 갖고 싶은 거 없으십니까?”
1사동으로 가는 길, 나란히 복도를 걷다가 흘끗 눈치를 본 태주가 물었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지호의 눈이 순간 부드럽게 휘었다.
“필요한 건 딱히 없고, 갖고 싶은 건 이미 가져서 없는데?”
“정말입니까?”
“태주 씨한테는 거짓말 안 한다니까 그러네?”
“아니, 믿기지 않으니까 그러죠. 사람이 얼마나 소박하면 가지고 싶은 걸 벌써 가집니까?”
“내가 소박한 편은 아닐걸요? 살면서 받을 행운이란 행운은 여기에 다 쓴 것 같은데?”
“…예?”
어? 어어? 어라?
지그시 맞춰오는 시선에 태주의 귀가 붉어졌다. 살면서 받을 행운이 무엇을 칭하는지, 왠지 알 것 같았다.
그 이후로 별 대화는 없었다. 걷다가 가끔 눈을 맞추며, 보는 것만으로 좋다는 듯 웃었다. 평소에는 오래 걸렸던 거실별 약 분리 업무도 지호와 함께하니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런데 이 많은 약을 다 관리하는 거예요? 보니까 억제제만 있는 게 아닌데요? 고혈압에, 당뇨에….”
“그날그날 필요한 약만 주고, 복용하는 것까지 확인하는 게 규칙이라서 그렇습니다. 가끔 수용자 간에 싸움이 나다 보면, 약을 빼앗는 경우가 생길 수 있거든요.”
약을 악용할 수도 없고, 악용하려고 드는 경우도 드물지만, 만약을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이 작업 때문에 되게 애먹었는데, 이제는 익숙해져서 괜찮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선생님이 도와주셔서 평소보다 더 일찍 끝났습니다.”
“그래요?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네요. 이건 카트에 실으면 될까요?”
“아, 네!”
분류를 마친 약을 각각 카트에 실었다. 하나는 오메가 수용동으로 갈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알파 수용동으로 갈 것이었다.
지호는 잠시 두 카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태주가 이것을 전담하기엔 양이 많은 듯했다. 가뜩이나 오늘 컨디션도 안 좋은 사람이.
“태주 씨, 알파 수용동은 제가 갈까요? 그 정도까지는 여유 있을 것 같은데.”
“이미 분류하는 것까지 도와주셨잖습니까. 선생님도 쉬셔야죠. 어젯밤부터 저 때문에 고생하셨는데…. 다른 하나는 이 부장님께 부탁하면 됩니다.”
태주는 거듭 괜찮다며 지호를 돌려보내려 애썼다. 내키지 않아 하는 표정을 보며 괜찮다는 걸 알려주려는 듯 밝게 웃었다.
“그럼 이 교사님 오시면 갈게요.”
결국 한발 물러선 지호가 마지못해 말했다. 그러자 곧장 움직인 태주가 조금만 기다리라며 관구실로 향했다. 서두르는 그의 모습에 지호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가는 게 그렇게 좋은가?”
고생시키기 싫은 마음을 이해하다가도, 역시 내키지 않아 말이 삐뚤게 나온다.
관구실에 쏙 들어간 모습이 사라지는 걸 보곤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창살 너머에 있는 알파 수용동을 보았다.
“도서 신청하세요! 도서 신청!”
사동 도우미가 각 방을 돌며 도서 신청을 받고 있었다. 별 의미 없이 그 광경을 주시하다가, 태주와 이 부장이 나올 즈음 눈을 뗐다.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눈 뒤 지호는 의무 사동으로 돌아갔다. 다만 문득 떠오르는 한 가지에, 자꾸만 걸음을 멈추고 뒤를 보길 반복했다.
낮에 징벌 사동에 있던 수용자가 돌아왔다고 했던가?
보통 돌아오자마자 사고를 치는 녀석은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태주가 걱정되었다. 하필이면 태주의 컨디션이 가장 안 좋을 때 이런 이슈가 생겼다.
* * *
“어이, 남 부장님?”
존댓말을 하고 있지만, 어딘가 껄렁한 말투.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에 약을 집어 들던 태주의 손이 멈췄다. 고개를 돌려 방을 확인하자, 다니엘이 수감되어 있는 방이다.
“무슨 일입니까, 5814?”
손을 살짝 옮겨 5814의 약부터 꺼냈다. 창문을 통해 내밀자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다가왔다. 휙, 빼앗듯이 약을 받아들곤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도 역시 조롱하는 듯한 웃음소리였다.
“용건 있으면 말하세요.”
이에 태주는 휘말리지 않고 덤덤하게 용건을 물었다. 창가에 기댄 5814가 삐딱하게 서서 말했다.
“오늘 우리 남 부장님이 꽤 오래 안 보이던데, 어디 갔었대요? 소지 말로는 그 오메가 선생이랑 같이 왔다는데…. 어디서 씹질이라도 하다 오신 건 아닌가 몰라?”
하하하하!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혼자서 웃는 소리가 수용동을 가득 메웠다. 태주가 별다른 반응을 내비치지 않자, 이번에는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신음을 내기 시작했다.
“흐읏! 아! 우리 남 부장님, 그 의사 선생 약점 잡아서 좆질 하신다며? 여기 소문 다 났어요? 어?”
순간 방 안 분위기가 싸해졌다. 의외로 멀찍이 앉은 다니엘은 지금 이 광경을 얌전히 지켜보기만 했다. 놀라서 벌떡 일어난 건 방장 하나뿐이었다. 그는 얼른 5814의 앞을 막았다.
“죄송합니다, 남 부장님. 제가 다시 잘 가르치겠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으니까 잠깐 물러나 계세요. 방장이 통제해도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 5814,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정확히 뭡니까?”
고개를 살짝 기울인 태주가 방장 뒤에 서 있는 그를 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묻고 있지만, 이는 질문이 아닌 경고였다. 한마디만 더 지껄였다간 소내 규칙대로 하겠다는 경고.
눈치로 이를 잘 아는 방장이 팔꿈치로 5814를 툭툭 건드렸다. 작은 목소리로, 지금이라도 사과하면 봐줄 사람이니 고개부터 숙이라고 했다.
그러나 5814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기어이 열리는 입에, 방장이 체념하듯 눈을 감을 때였다.
“그래서, 그 의사 선생 맛은 어땠….”
“씨발 새끼야.”
갑자기 달려든 다니엘이 5814의 옆구리를 발로 찼다. 꽤 덩치가 큰 거구임에도 구석에 있는 화장실 앞까지 날아갔다.
“6425, 그만하세요!”
놀란 태주가 얼른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수용자와 함께 다니엘을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너는, 어? 입이, 씨발, 걸레야? 왜 말을 그따위로 하는데, 쓰레기 새끼야. 뭐? 의사 선생 맛? 씨발, 진짜.”
수많은 사람이 뜯어말리는데도 다니엘의 발길질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게다가 또 요령 있게 보이는 곳은 안 건드리고, 안 보이는 곳만 잘도 건드렸다. 어디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많이 때려 본 솜씨다.
“그리고 너, 내가 이 방 돌아다닐 때 무릎으로 기어 다니라고 했냐, 안 했냐? 안 하면 네 정강이 부숴 버린다고 한 거 잊었어? 아니면 이제 무릎 아래로는 쓸모가 없어졌어? 머리에 좆밖에 안 들은 새끼가!”
아, 이젠 끝났다. 이 정도 소란이면 관구실에 있는 오 교도가 눈치챘을 게 뻔했다. 착잡한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오 교도가 부른 CRPT가 도착했다. 다니엘과 5814 모두 사이좋게 끌려 나갔다.
“남 부장님, 나 면담.”
다니엘은 그런 와중에도 할 말이 있다는 듯 면담을 신청했다. 하아, 또 한숨이 샜다.
* * *
행동 제약이 많은 징벌 사동을 피해 다니엘이 선택한 것은 자해였다. 절대로 이마만큼은 안 짚으려고 했는데. 눈앞이 어질해지는 느낌에 결국 태주는 이마를 짚고 말았다.
“지난번에 다친 거 아문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러십니까? 그리고 왜 또 머리인데요.”
손수건으로 다니엘의 머리를 지혈하며 의무 사동으로 향했다. 보는 사람은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아픈데, 다니엘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건조하게 말했다.
“팔다리가 내 재산이야. 행동에는 절대 제약이 생기면 안 되니까. 사지가 다치면 손이나 발이 느려질 거 아니야.”
“머리를 다치면 전체 행동이 느려집니다. 명령을 내리는 건 뇌니까요.”
“씨발….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네?”
“그럼요. 당연히 없어야죠. 그리고 징벌 위원회에 올라가도 제가 잘 말씀드리면 정상참작 됩니다. 조금만 견디지 그랬습니까.”
“나 정상참작 해 줄 생각이었어?”
“그럼 안 해 줍니까? 저한테 거는 시비 막아 준 건데.”
“…남 부장 착하네.”
“네, 다니엘 씨보다는 착합니다.”
“맞아. 그러네.”
정면을 향해 있던 다니엘의 고개가 살짝 내려갔다.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태주는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착실히 걸음만 옮겼다. 조금 후, 다시 다니엘이 입을 열었다.
“있잖아.”
넌지시 묻는 듯한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태주는 대답 대신 가만히 그를 바라봐 주었다.
“남태주 씨는 좋은 사람이야? 내가 지나치게 돈이 많은 인간치고 좋은 놈을 못 봐서. 꼭 탈세를 하거든.”
“탈세를 안 하는 게 좋은 사람의 기준이라면, 저는 정말 좋은 사람이겠습니다.”
“그래?”
“뭐, 진지하게 이야기하자면 좋은 사람이라기보단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죠.”
“그래서 노력은 잘 돼가고?”
“아직까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장난스레 웃은 태주가 슬쩍, 다니엘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찬 바람에 상처가 아플까, 나름대로 바람을 막아 준 것이었다. 그 모습에 다니엘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나랑 연지호도 그랬어.”
“뭘 말입니까?”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고.”
“아아….”
“그런데 그 결과가 썩 좋은 것 같진 않아.”
“어째서요?”
“어째서긴, 좋은 사람이 이렇게 감옥에 있을 리 없잖아.”
지금 내 꼴을 보라며 다니엘은 또 웃었다. 어쩐지 즐거워 보이지만은 않은 웃음이었다. 그래도 그가 원하는 분위기가 무엇인지 고스란히 느껴지기에, 태주는 함께 웃어 주었다.
“얼른 다시 사회로 돌아가세요. 일이 아직 많이 남았습니까? 다른 소에도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모르겠어. 명령이 안 떨어지니까. 어쩌면 연지호를 지키라고 여기에 남겨둔 걸지도 모르지.”
“선생님을요?”
“싸가지가 없어서 그러지, 고급 인력이거든. 부검을 기가 막히게 해. 그래서 위에서 예뻐하지. 다시 함께하고 싶어 하고.”
“….”
“그런데 걔는, 외과 의사가 좋나 봐. 중증 외상이라 수술하다가 죽은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도 연지호는 그게 좋대.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일이라 좋대. 수없이 좌절하는 게 태반인데도.”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응, 걔 되게 별로지?”
“아뇨, 알아 갈수록 좋아서 큰일입니다.”
마음이 계속해서 커지면, 나중에는 이 마음을 어떻게 감당하지? 하지만 그래도 행복할 것 같다.
태주의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는 듯한 미소였다.
다니엘은 그 얼굴을 가만히 숨죽여 바라보았다. 왜인지 저도 자꾸만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걸 꾹 참았다.
“이봐, 남태주 교사님.”
“네, 다니엘 씨.”
“그 새끼. 아니, 연지호…. 아니, 형한테 계속 좋은 사람으로 있어 줘. 형은, 교사님이 실망할 만한 짓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연지호를 믿어 줘. 작게 읊조리며 그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의무실 앞에서였다. 아직 할 말이 있다는 사인을 눈치챈 태주가 함께 걸음을 멈춰 주었다.
“이거는 교사님한테만 말하는 건데.”
“….”
“나는 줄곧, 아무래도 좋으니까.”
“….”
“형이 사랑하는 무언가가 생기기를 바랐어. 주변에서 남기고 간 것만 보듬느라 정신이 없었거든.”
아무렇게나 말하고 있지만, 힘들게 꺼낸 이야기. 그 이야기에 태주는 활짝 웃었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럴 것 같았습니다.”
사실 선생님을 가장 지키고 싶은 건 다니엘이잖아요. 선생님이 가장 정성 들여 보듬은 게 다니엘인 것처럼.
* * *
“착하네.”
“뭐?”
잉? 순간 태주와 다니엘이 잠시 굳었다.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대사였던 탓이다.
그러니까 연지호가, 다니엘을 칭찬했다. 다른 말도 아니고 ‘착하네.’ 세상 가장 다정한 말로. 지호와 다니엘의 관계를 잘 몰랐다면 질투할 뻔했을 정도로.
타이를 마친 지호는 거즈로 상처를 잘 덮은 뒤, 도구를 정리했다. 그 후에는 장갑을 벗고 다니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잘했어.”
“씨발, 거기까지 하자?”
결국 참다못한 다니엘이 소름 돋는다며 양팔을 문질렀다. 그 모습에 태주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지호의 시선이 태주에게로 옮겨갔다.
“태주 씨는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 없어요?”
“네, 저는 괜찮습니다.”
“온 김에 혈압이랑 맥박 한 번만 더…. 어? 귀밑에 상처 난 것 같은데? 이리 앉아 볼래요?”
“예? 아니, 이건 별거 아닌데….”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작은 상처였다. 어떻게 이걸 봤나 싶어 얼떨떨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조금 전까지 칭찬을 듣고 있던 다니엘은 어느새 옆으로 밀려났다.
“좀 전에 같이 있을 때까지는 이 상처 없었잖아요. 어쩌다 다친 거예요?”
“아, 그게…. 이러다 사람 죽이겠구나 싶어서요.”
5814를 때리는 다니엘을 말릴 때 생긴 상처였다. 손톱에 살짝 긁힌 것 같다고 하자, 지호의 눈빛이 변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정하게 칭찬하던 연지호는 어디 갔는지, 서늘한 시선이 다니엘에게 향했다. 당황한 다니엘이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 아니이! 아, 뭐 조금 긁은 것 가지고 죽일 듯이 노려봐?”
“정신 똑바로 안 차리죠? 이런 실수 잘 안 하잖아요.”
“씨발! 그러는 너도 이런 걸로 혼내는 캐릭터는 아니었잖아!”
아오! 저들 욕하는 거 응징해 줬더니만! 존나 서럽고, 있지도 않은 엄마가 또 보고 싶네! 벌떡 일어난 다니엘이 홧김에 의자를 찼다. 쿠당탕 넘어지는 소리에, 지호가 또 매서운 시선을 던졌다.
끄응. 난감해진 다니엘은 슬쩍 그 눈치를 보았다. 넘어진 의자를 다시 세운 뒤, 빈 침대로 가 드러누웠다. 그는 잠이나 자야겠다며 눈을 감았다가, 뭔가 떠오른 게 있는지 다시 눈을 떴다.
“아, 맞다. 이봐, 남 교사님.”
“예?”
태주를 불렀는데 지호의 고개까지 그에게 향했다. 왠지 모를 부담감에 다니엘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내 옆방에 있는 6837 있잖아. 얼마 전에 멍청하게 페로몬 흩뿌리다 징벌방 다녀온 놈.”
“네, 압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왜요? 무슨 일 있었습니까?”
“별일은 아니고, 그 새끼한테 크림빵이 하나 넘어간 거 같아. 우리 방에 있는 그 새끼 따까리가 소지 통해서 넘기더라고.”
비타민을 갈아 넣은 것이니 별일이야 없겠지만, 그를 주시하라는 것이 다니엘의 용건이었다.
과연 정말로 별일이 없을까? 그 아래에 있는 녀석조차 겁도 없이 남태주를 조롱하는데. 아마 그도 똑같을 것이다.
지호는 태주의 상처를 조심스레 치료한 뒤, 연고를 그의 정복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태주 씨, 그냥 오늘은 일 안 하고 여기 있으면 안 되겠죠?”
“당연히 안 되죠.”
“하아, 눈에 안 보이면 너무 불안한데.”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선생님께 오겠습니다. 이러면 됐죠?”
“그래도 부족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태주가 지호를 살포시 안았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토닥여 주고 다시 물러섰다.
“다니엘 씨는 당분간 의무 사동에서 살펴 주세요. 저는 징벌 위원회에 올릴 서류가 있어서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누누이 말하지만,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알았죠?”
“그럼요. 열심히 몸 사릴 겁니다. 퇴근하고 만나요, 선생님.”
미소 지은 태주가 의무실을 나섰다. 평소와 다름없는 남태주가 분명한데, 지호는 여전히 얼굴에 드리운 걱정을 거두지 못했다.
* * *
다니엘의 선처를 부탁하고 다시 업무에 복귀했다. 소동이 일어났던 방으로 가, 방장에게 상황 설명을 간략히 해 주었다.
“조금 힘들더라도 같은 방 사람들 신경 써 주세요.”
“저도 신경을 쓴다고 쓰는데…. 하아…. 조폭 놈들은 도저히 통제가 안 돼요.”
“문제가 너무 심하면 언제든지 교도관 면담 신청하셔도 됩니다. 아, 그리고 다른 분들은 다친 곳 없이 괜찮으십니까?”
“그냥 뭐, 멍 살짝 들고, 까지고, 그게 전부예요. 걱정할 거 하나 없어요.”
“그럼 다행이네요. 조금 있으면 점호 시간이니까 다들 준비하세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예! 고맙습니다, 남 부장님!”
사람이 둘이나 빠져서인지 수용자들의 표정이 한결 여유롭다. 오늘은 넓게 잘 수 있겠다며 기뻐하는 소리에 태주가 작게 웃었다. 그다음 방으로 가 수용자 상태를 확인할 때였다.
“남 부장, 남 부장!”
반갑게 태주를 맞은 방장이 설레는 눈으로 물었다.
“이번에도 전시회 열지? 그 왜, 우리가 작업 때 만든 거 구경시켜 주고, 파는 거 있잖아.”
“네, 이번에도 특별한 문제 없는 한 열릴 겁니다. 다음 주 즈음이면 일정 나올걸요?”
“일정 나오면 나 일등으로 알려 줘야 해? 어? 친구 놈이 꼭 보러 오겠다고 했거든.”
“알겠습니다. 질리도록 방송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뭐, 별다른 문제는 없죠?”
고개를 뻗은 태주가 창살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다들 앉아서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고 있었다. 그다지 눈에 띄는 일은 없어, 그다음 방으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문제? 문제야 당연히 있지. 그것도 무진장 심각한 문제가.”
역시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던 걸까. 화장실에서 나온 6837이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부스럭거리며 작게 소리가 나는 게, 무언갈 쥐고 있는 듯했다. 조금 후, 주머니 밖으로 그것이 나왔다. 하얀 가루가 든 투명 비닐이었다.
‘그 새끼한테 크림빵이 하나 넘어간 거 같아. 우리 방에 있는 그 새끼 따까리가 소지 통해서 넘기더라고.’
태주는 그를 주시하라고 했던 다니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야, 남태주. 다른 새끼도 아니고, 네가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되지.”
6837이 살살 태주를 도발하기 시작했다.
“이게 뭔 줄 알아? 입에 처넣고 싶어서 죽겠지?”
야, 참지 마. 내가 이거 공짜로 줄게. 그는 손에 든 비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태주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아이, 이 사람이 왜 또 그래애. 남 부장한테 장난 그만하고, 어? 점호! 점호 준비해.”
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까, 방장이 6837을 붙잡았다. 그러자 늙은이는 빠지라며 6837이 거칠게 그를 밀었다. 쿠당탕 넘어지는 소리에 태주가 곧장 문을 열었다.
“오올, 들어오는 거야? 역시 못 참겠어? 어?”
“어, 못 참겠어.”
형님이나 아우나 하는 짓이 똑같이 저급하네. 끝까지 조롱하는 6837의 멱살을 붙잡아 올렸다. 투두둑, 옷이 늘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까치발로 겨우 중심을 유지했다.
“야, 넌 교도관이 아주 우습지?”
태주는 그가 괴로워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밖에는 들리지 않게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인생 한번 망쳐 보겠다고 꾸민 게 고작 이거야? …재밌네.”
“윽, 씨발. 그럼, 재밌어야지. 너 좋으라고 내가, 약까지 구해왔는데, 이 좆같은 새끼야.”
“그런데 어쩌지? 내가 지금 조금도 좋지 않거든.”
“큭, 그래놓고 좋다고 빠는 게 아니라? 씨발, 약 빨아먹은 새끼가 교도관 해도 되는 거야?”
“너 같은 새끼가 하는 것보다 낫지, 뭘 그래.”
“큭, 큭큭…. 범죄자 새끼.”
“너는 피해자를 그렇게 조롱하는구나? 대단하다, 그럴 자격도 없는 주제에.”
“뭐, 씨발!”
“뭐야? 흥분했어? 왜지? 도발은 네가 시작했는데?”
태주가 씨익 웃었다. 무리하지 말라던 지호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밖으로 끌고 나가는 건 참았다.
“야, 내가 CRPT 두 번 부르기 싫어서 이번까지는 봐주는데. 봐줄 때 적당히 기어. 한 번만 더 이딴 짓 하고 거실 분위기 흐리면, 그다음은 내 차례인 거야.”
“….”
“나도 네 인생 조질 기회는 있어야지. 그래야 공평하니까.”
던지듯 멱살을 놓은 태주가 그의 손에서 가루가 든 봉투를 가져갔다. 전부 화장실 변기에 털어 버리고 물을 내렸다.
“방장은 괜찮습니까?”
“어? 어어, 괜찮아.”
“그럼 점호 준비하세요.”
서늘하게 말을 남기고 거실을 나섰다. 문을 닫다가 멈칫했다.
“아! 한 번만 더 이 방에 소란 생기면, 수용자 간에 부정 모의하는 걸로 간주하고 방 깨겠습니다.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엔 행형 점수 마이너스 되는 거 아시죠? 접견 횟수 줄어들 수 있습니다.”
차분한 말투로 경고한 뒤, 문을 닫았다. 남은 거실을 둘러보는 건 이 부장에게 맡기기로 하고 수용동을 나갔다.
이에 당황한 6837이 미간을 좁혔다. 젠장! 왜 멀쩡하지? 저 새끼 정말 금단증상 있는 거 맞아?
저 재수 없는 교도관 새끼를 어떻게 엿 먹여야 할까. 고민하며 작게 짜증을 낼 때였다.
“씨발, 우리가 여길 어떻게 적응했는데 이 방을 깨.”
늘 허허 웃기만 하던 방장의 표정이 돌변해 있었다. 다른 수용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원망 가득한 눈으로 6837을 보았다.
“에이씨! 난 다음 달에 모범수 심사 있다고! 행형 점수 깎이면 네가 책임질 거야?”
“야, 이 개새끼야. 너 한 번만 더 남 부장 건드려라? 어? 내가 너 죽여 버리고 무기징역 받을라니까!”
조폭 새끼인 게 자랑이야? 어차피 삐끼나 하고 있었다며! 화가 난 수용자들이 6837의 요와 베개를 저만치에 던졌다. 방장 다음으로 좋은 위치였던 그의 자리가 순식간에 화장실 옆으로 바뀌었다.
* * *
“하아, 하….”
수용동을 나오기 무섭게 태주가 벽을 짚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웠다. 헛구역질을 하다가 얼른 화장실을 향해 달렸다.
그 비닐 안에 있던 가루가 마약이 아닌 것을 안다. 그런데도 온몸이 울렁거리고, 밤새 꿨던 악몽이 떠올랐다. 방 안에 갇혀, 억지로 약을 먹은 그때로 몇 번이나 돌아갔다.
아, 내가 왜 이러지?
현실이 아님을 아는데 온몸이 떨린다. 결국엔 두 무릎이 무너지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식도가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신물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우욱…. 읍….”
게워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아가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 걸음씩 나아갈수록 땅이 꺼졌다. 몸이 괴로운 이유가 약 때문이라는 걸 아는 탓인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약을 먹으면 나아질 수 있다.
하지만 겨우 버티는 이성이 그건 죽기보다 싫다며 발악했다.
손톱을 세운 태주가 벽을 긁었다. 하얗게 질린 손끝이 완전히 꺾이려 할 때였다.
“분명 늘 열심히 가는데, 왜 매번 늦지?”
탁, 부드럽게 손등을 덮는 온기가 있었다. 그대로 손을 잡아 끌어당기는 힘에, 태주가 힘없이 끌려갔다.
고개를 겨우 들어 일렁이는 눈으로 그 주인을 확인했다. 흐려도 선명하게 보였다.
너무나도 아프고 슬픈 얼굴을 한 연지호였다.
“태주 씨, 나 봐요. 전부 망상이고, 환청이고, 환시예요.”
“우욱!”
결국엔 더 견디지 못한 태주가 지호의 품에서 토했다. 하지만 지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태주의 귀에 속삭였다.
“여기서 실재하는 건, 지금 이렇게 만져지는 나뿐이에요.”
“아…. 아아….”
“그러니까 진정해요. 태주 씨는 아무 문제 없어요. 스스로를 해하지 말아요. 아깝잖아. 이렇게….”
이렇게 사랑스러운 너인데.
오랜 시간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다독였다. 다행히 그 뒤로 더 토를 하거나, 괴로운 표정을 짓는 일은 없었다.
* * *
“선생님….”
아, 어떡해. 정신을 차리기 무섭게 태주는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다른 사람한테 토하는 실수를 저지른 적은 없는데.
지호의 셔츠에 선명하게 자국이 남았다. 급한 대로 화장실에서 대충 닦았지만 소용없었다. 간절히 바랐던 여분의 옷도 수용복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죄 없는 인간한테 수용복을 입힐 순 없지 않은가. 물론 입고 나가는 것도 소장의 허가 없이는 안 된다.
“그만 미안해해요. 이제 집에 다 왔다.”
지호는 정말 괜찮다며 여유롭게 주차를 마쳤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가방과 코트를 챙겨 들었다. 날이 춥지만 더러워진 옷 때문에 입을 수가 없었다. 이에 태주의 고개가 더 아래로 떨어졌다.
“하, 제가 진짜….”
이 죄를 어떻게 해야 할까? 잠깐 징벌 사동에 가서 나 좀 가둬 달라고 할까? 마땅히 나라에서 지켜줘도 모자랄 아름다운 남성을 더럽힌 죄.
쿵. 쿵.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창문에 머리를 박았다. 그런데 갑자기 ‘달칵’ 소리와 함께 차 문이 열렸다. 어어어어?
순간 중심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다행히 어깨를 잡아 준 지호 덕에 추하게 넘어지는 건 면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예요? 태주 씨가 빨리 내려야, 내가 빨리 가서 씻고 옷도 갈아입죠.”
“아.”
맞다. 그랬다. 지호의 말을 듣고 차에서 후다닥 내렸다. 더러워진 셔츠에 계속 눈길을 주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더는 못 보겠는지 지호의 손이 텁, 태주의 고개를 붙잡았다.
“그만.”
“히잉.”
“히잉? 강아지야? 아니면 애교 부리는 건가? 귀엽네?”
“저 같으면 그런 눈으로, 그런 소리 절대 못 할 겁니다.”
“내가 태주 씨 옷에 실례해도요?”
“아이, 선생님은 다르죠.”
“나도 남태주라서 다른 건데?”
“으아아아! 아, 진짜….”
눈을 꽉 감은 태주가 얼른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묻자 좋아서 죽겠단다.
“남태주가 웃으면 됐지, 뭐.”
“나중에 제가 꼭 옷 한 벌 해드리겠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풀세트로.”
“그거 기대되네요? 그런 거면 옷도 한 번쯤은 버릴만한데요?”
어차피 외상외과 의사였던 지호에게 옷을 버리는 일쯤은 별거 아니었다. 그때는 허구한 날 피가 묻고, 오물이 묻어서 한 번 입고 버리는 옷이 많았다.
“그런데 말이죠.”
“네, 태주 씨.”
도착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였다. 먼저 내린 태주가 지호를 돌아보았다.
“아까 소에서 머리 아프고 속 안 좋았을 때 있잖습니까. 그때 선생님이랑 같이 있으니까 금방 나았습니다.”
“….”
“진짜 신기하지 않습니까? 조금 낯간지러운 소리긴 한데, 이게 사랑의 힘인가?”
작게 웃음을 터뜨린 태주가 지호의 손을 잡았다. 집까지 몇 걸음 되지도 않는 걸, 굳이 손잡고 함께 걸었다. 다시 밝아진 태주의 모습에 지호도 함께 웃었다.
먼저 앞장서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비밀번호까지 척척 누른다. 지호는 아무것도 손을 대지 않았다. 문을 여는 것도 태주였고, 가방과 코트를 자리에 예쁘게 놔 주는 것도 태주였다.
그 후에는 곧장 지호를 이끌고 욕실로 향했다. 함께 손을 씻자는 건가 싶어 소매를 걷자, 세면대가 아닌 더 안쪽으로 끌려갔다. 어쩌다 보니 욕조 모서리에 걸터앉는 꼴이 되었다.
“음, 태주 씨 의도를 잘 모르겠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잠시 고민하던 지호가 넌지시 물었다. 태주가 별거 아니라는 듯 소매를 접어 올리기 시작했다.
“제가 버려놨으니까 제가 닦아 주려고요.”
“뭐를요? 나를?”
“응, 연지호를.”
“옷도 사 준다면서요. 서비스가 조금 과한데?”
“그래서 싫으십니까?”
“그럴 리가요. 무리시키는 게 싫어서 그러지.”
“전혀 무리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로 태주에겐 전혀 무리가 아니었다. 연지호의 옷에 시원하게 토를 한 후에는 곧장 퇴근했으니까. 거기다 차 안에서는 긴장이 풀려서인지, 운전하는 지호를 옆에 두고 잠들어 버렸다.
연지호는 나 때문에 어제부터 한숨도 못 잤는데, 나만….
이대로는 죄책감에 안 될 것 같아 이거라도 해야겠다. 그래도 봉사활동을 자주 다녀서 사람 씻기는 거 하난 자신 있었다. 손을 뻗어 지호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태주 씨.”
단추를 다 풀고 벗기려는데 갑자기 지호가 손을 붙잡아왔다. 왜 그러는지 눈으로 묻자 난감하다는 투의 목소리가 나왔다.
“조금 걱정되는데….”
“뭐가 말입니까?”
“태주 씨가 만지면 설 것 같아서요.”
“…예?”
어, 어디가? 뭐가 서는데?
모르고 싶지만, 그러기엔 눈치가 너무 빨랐다. 태주는 저도 모르게 슬쩍 시선을 옮겼다가, 아니! 아니!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다가 쿵, 저 혼자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정도로 적잖게 당황했다. 그리고 생각도 못 했다.
자신이라고 연지호의 벗은 몸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있는지.
“어, 그….”
“각자 씻는 게 좋겠죠?”
지호의 물음에 태주는 잠시 망설였다. 슬쩍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상관, 없습니다.”
그, 괜찮을 것 같은데. 선다고 해도.
멋쩍게 말을 건네자 지호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서로 조금 민망하긴 한데 상황이 웃겼다. 결국 태주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연지호와 함께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다. 불안한 것도, 불쾌한 것도 없다.
* * *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들어가 앉은 지호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쌓여 있던 피로가 서서히 풀리는 듯했다. 기분 좋게 미소 짓는데, 태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셔츠는 버리겠습니다.”
“버리게요? 그 정도는 세탁 맡기면 입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도 안 됩니다. 다른 게 묻은 것도 아니고.”
“왜요, 난 그것도 남태주의 흔적이라 좋은데.”
“이런 건 좋아하지 마세요.”
“먹은 것도 없어서 산패액만 나왔던데요, 뭐.”
“아무튼 버리겠습니다.”
“아아, 아까워라.”
“….”
“진짜 아까운데.”
“으음….”
대체 남이 토해 놓은 셔츠가 뭐가 아깝단 건지. 정말 아깝다는 듯 접혀 들어간 미간에, 태주는 괜히 망설여졌다. 그 속을 눈치챈 지호가 이제는 반 장난으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버릴 거예요?”
“….”
“정말?”
“….”
“태주 씨.”
“으, 진짜!”
태주가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 후, 뭔가 결심한 듯 다시 눈을 떴다.
들고 있던 셔츠를 저만치 던져 버리고, 지호의 고개를 붙잡아 들었다. 그대로 집어삼키듯 입술을 물었다가 놓은 뒤, 빗장뼈에 입술을 묻었다. 콱 깨물어오는 감각에 지호의 미간이 구겨졌다.
“으윽, 잠, 깐만요, 태주 씨.”
차마 밀지도 못하겠고. 어쩌지 못하는 손이 허공을 배회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태주의 등에 안착했다. 지호의 손 모양을 따라 물 자국이 셔츠에 짙게 남았다.
태주는 자신의 등이 젖든 말은 지호의 살결을 물고 빨아당겼다. 한참을 같은 자리만 못살게 굴었다. 붉게 울혈이 생기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들었다.
“자, 여기 있습니다. 사라지면 또 새겨 드리겠습니다.”
제 흔적은 여기에 아주 진하게 남겼으니까 셔츠는 버려도 되죠? 그 말에 지호가 바람 빠진 듯한 웃음을 흘렸다. 고개를 내려 잘 보이지 않는 빗장뼈를 슬쩍 보았다. 얼핏 봐도 붉은색이 시야에 걸릴 정도로 진하게도 남겼다.
“못 살아, 정말….”
“이제 버리겠습니다?”
“네, 내가 졌어요. 대신에 조금 나중에 버릴까요?”
“나중에요? 왜 나중에 버립…. 어어어?”
풍덩. 중심을 잃은 태주가 욕조에 빠졌다. 돌아서려는 그를 지호가 끌어당긴 것이었다.
푸하, 터뜨리듯 내뱉는 숨과 함께 태주의 얼굴이 밖으로 나왔다.
“내 옷도 모자라서 몸까지 이렇게 해 놓고, 그냥 가려고 했어요?”
얼굴에 흐르는 물줄기를 손으로 훑어 주며 지호가 말했다. 그대로 기분 좋게 손길을 받은 태주가 작게 웃었다.
“더 남겨 드려요?”
“그것도 좋지만, 공평하게 나도 남기게 해 줘요.”
그나저나 태주 씨도 옷 다 버려서 큰일이네? 얼른 벗어야겠다. 능청스레 걱정하는 표정을 지은 지호가 태주의 옷을 벗겼다. 물을 잔뜩 먹어 무거워진 옷이 욕조 밖으로 툭툭 떨어졌다.
옷을 전부 벗은 뒤, 태주는 지호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았다. 가만히 서로 눈을 맞추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입을 맞췄다. 장난치듯 서로의 입술을 살짝 깨물다가 혀로 핥았다. 매끄러운 살덩이와 점막이 짙게 닿을수록 몸이 더 가까이 붙었다.
“하아….”
입술이 떨어진 후에 지호는 고개를 내렸다. 태주의 턱과 목에 입을 맞추고, 똑같이 빗장뼈에 울혈을 남겼다. 붉어진 자리가 맞닿도록 서로를 끌어안고 웃었다.
그 후에는 계속 짓궂은 장난을 치며 함께 몸을 씻었다. 지호가 물로 거품을 씻어 내면, 온몸에 거품을 묻힌 태주가 찰싹 달라붙었다. 나이에 안 맞게 어린애처럼 장난을 치다가, 물기를 닦고 욕실을 나서면서 제대로 눈이 맞았다.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어떻게 할 새도 없었다. 입술을 맞대는 데 정신이 팔려 혀를 움직이는 데만 집중했다. 바닥에 떨어진 물을 밟고 미끄러져도, 맞물린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넘어진 그대로 또 서로 몸을 겹치기 바빴다.
“으읏, 흐, 선생님….”
성기를 잡아 쥐는 지호의 손길에 태주가 작게 신음을 터뜨렸다. 몇 번을 위아래로 문지르다가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지호가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태주가 다리를 벌렸다.
지호는 태주의 다리를 제 허리에 감았다. 그리고 손으로 등을 받친 뒤 안아 들었다. 아무리 급해도 딱딱한 바닥에서 허리를 흔들 수는 없었다. 태주를 침대에 눕히고, 서랍장에서 젤과 콘돔을 꺼냈다. 침대 한쪽에 대충 놓으며 다시 태주와 입을 맞췄다.
“으음….”
입술을 깨물며 손으로 유두를 건드렸다. 부드럽게 풀려 있던 꼭지가 어느새 딱딱해졌다. 태주가 살짝 몸을 비틀었다.
어느새 바짝 선 성기가 지호의 아랫배에 닿았다. 이상하게 닿은 곳 안쪽이 당기면서 뻐근한 느낌이 들었다. 또 이성 놓고 페로몬을 흘릴까,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하아….”
하지만 그런다고 한들, 그게 잘 될 리가 없었다. 눈앞에는 언제 봐도 사랑스러운 사람이 안아달라는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결국에는 오늘도 시트가 피로 물들겠거니 생각하고 다시 입술을 내렸다.
“흣, 으음….”
태주의 온몸을 전부 핥아 보고, 맛을 음미할 것처럼 곳곳에 꼼꼼히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피부와 잘 자리잡힌 근육이 촉각을 곤두세운 입술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면서 살결을 물고 빨다가, 허벅지 안쪽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으읏.”
작게 다리를 떤 태주가 허리를 들썩였다. 그대로 잡아 벌려 조금 더 짓궂게 혀를 놀렸다. 느리게 한 번 핥은 뒤 짧게 입을 맞추고는 바짝 선 성기를 입에 물었다.
“아흑! 선, 생님….”
그만하라는 듯 자신에게 향하는 손을 깍지 끼워 잡았다. 그대로 제자리에 내려주곤 다시 허벅지를 붙잡았다. 천천히 고개를 앞뒤로 움직이며 성기를 입에 넣었다가 뺐다. 혀로 길게 핥아 올리며 치아로 귀두 끝을 살짝 긁자, 태주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 아읏….”
시각적인 자극도 그렇지만, 청각적인 자극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아직 제 건 손을 대 보지도 못했는데 페로몬이 조금씩 샜다. 젤을 집어 들어 손에 들이붓다시피 한 뒤, 다시 한번 태주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읏, 차가워….”
“많이 차가워요?”
“조, 금요….”
볼기에 축축하게 젖은 손이 닿자 태주가 흠칫 몸을 떨었다. 이내 적응했는지 허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조심스레 갈라진 사이를 파고든 손가락이 입구를 비집고 들어섰다.
“으음….”
미간을 살짝 접은 태주가 작게 신음했다. 아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처음 할 때보다 조금 더 수월하게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품듯이 부드러웠다가, 가끔은 강하게 조여들었다. 지호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것을 넣고 싶은 걸 참으며, 손가락을 하나씩 늘였다.
곧게 뻗은 손가락을 느긋하게 밀어 넣은 뒤, 마디를 조금씩 움직였다. 천천히 젓듯이 손가락을 움직이며 내벽을 넓혔다. 얼핏 끝을 오므린 태주의 발이 보여 작게 웃었다. 곧게 서 있던 태주의 성기에서 조금씩 물이 샜다.
“아흣, 읏….”
붉게 남겨 놓은 자국들이 꼭 쾌감이 번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꺼풀을 반쯤 내린 채 젖은 입술을 벌린 얼굴이 야했다. 그대로 태주의 입술을 찾아 문 지호가 몸을 붙였다.
서로 몸을 맞댄 채 비비적거리면서도 지호는 태주의 뒤를 계속해서 만졌다. 이리저리 들썩이며 움직이다가 몸을 옆으로 굴렸다. 둘 다 모로 누운 채 서로를 끊임없이 탐했다.
어느새 꼿꼿하게 선 성기를 더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까지 닿았다. 이번에는 코피뿐일까, 그걸로도 모자라 각혈까지 할 것 같다.
지호는 태주가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그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급하게 콘돔 포장을 뜯은 뒤 성기에 씌웠다. 공기가 들어가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 태주의 뒤에 바짝 몸을 붙였다.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부드럽게 허리를 움직였다. 단단한 성기가 볼기에 문질러졌다. 귀두 끝을 입구 주변에 비비다가, 촘촘한 주름을 비집고 아주 조금 파고들었다.
“아….”
자그마한 교성이 태주의 입 밖으로 샜다. 다시 성기를 완전히 빼고 조금 더 밀어 넣었다.
“으응, 연지호….”
태주가 못 참겠는지, 힘겹게 그를 부르며 몸을 뒤척였다. 그때, 지호가 힘있게 밀어붙이며 깊숙이 삽입했다.
“아흑!”
태주의 손에 감겨 있던 시트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읏, 아파. 짧게 괴로워하고는 더듬더듬 손을 내렸다. 바짝 붙은 채 강하게 허리를 감싸고 있는 지호의 손을 잡았다.
“하아, 많이 아파요?”
지호가 넌지시 물었다. 태주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표정이 보이지 않아도 아픈 것을 참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가엾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가장 위에 있는 목덜미 쪽 척추에 입을 맞췄다. 그대로 얼굴을 묻고 허리를 움직였다.
“읏, 흐읏.”
“으읏, 아….”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눈앞이 잠깐씩 희미해졌다. 입안에서 비릿한 맛이 났다. 혈관이 터지고 피가 역류한 듯했지만, 지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로지 더운 숨소리와 신음만 부유하는 방 안에서 정신없이 몸을 움직였다. 손을 내려 태주의 뜨거운 성기를 붙잡았다. 그대로 계속해서 문지르고 자극하며, 절정을 향해 내달리는 데 집중했다.
“하읏, 으읏, 아! 아아!”
“하아, 하, 으읏.”
깊게 치고 들어갔다 빠지기를 반복했다. 나아지지 않는 빠듯한 느낌에 지호는 태주의 다리 한쪽을 잡아 벌렸다. 조금 더 움직이기가 수월해지기 무섭게, 미친 듯이 성기를 쑤셔 박고 빼길 반복했다.
“읏, 흐으….”
길게 늘어진 신음과 함께 태주가 먼저 사정했다. 뒤이어 지호도 짙게 허리를 쳐올리며 사정했다.
“아! 잠, 깐만요. 선생님!”
그런데 사정하는 지호를 태주가 조금 다급하게 불렀다. 분명 사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커지는 지호의 성기 때문이었다. 오르가슴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불쑥 겁이 밀려들었다.
“하아…. 움직, 이면, 위험해요, 태주 씨….”
뒤척이는 태주를 지호가 단단히 붙잡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작게 앓기 시작했다.
“괘, 괜찮은…. 으읏! 괜찮은 겁니까?”
말로만 듣던 노팅이었다. 안에서 점점 부풀어오는 꽉 찬 느낌에 눈치챘다.
점점 버거워지는 속에 태주가 밭은 숨을 뱉었다. 머뭇거리다가 손을 옮겨 아랫배를 만져 보았다. 설마 이렇게 만져질 정도로 커진 건 아니겠지. 그런데 그 설마가 맞았다.
베타한테 노팅하는 알파라니.
아니, 알파한테 노팅당하는 베타라니.
노팅 현상은 오메가한테만 가능한 게 아니었나? 이것도 연지호가 앓고 있는 병과 관련이 있는 건가? 이 남자, 이러다가 나중에는 내 옷으로 둥지까지 만들겠다.
대체 얼마나 걸리는 걸까.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한 적도 없다. 어차피 베타니까 겪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결합은 꽤 긴 시간 동안 이어졌다. 먼저 지친 태주가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 그가 깨지 않게 조용히 뒷정리를 마친 지호는 그 얼굴을 밤새도록 바라보았다.
이번엔 관계 도중에 또 쓰러지지 않을까 했는데, 다행히 멀쩡하다. 지난번까지 뚝뚝 흘렸던 피도, 이제는 입 안에만 조금 고이고 말았을 뿐이다. 물로 몇 번 헹구고 나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야 몸이 조금씩 나아지는 듯하다. 페로몬에도 잘 적응한 게 눈에 보였다.
“참 신기하지?”
모두 남태주를 만난 후에, 조금씩 나아지고 좋아졌다.
어쩌면 좀 전에 그가 했던 말대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조금 낯부끄럽지만, 이게 사랑의 힘인가?”
태주를 따라 하듯 뱉어 놓고 풋, 웃음을 터뜨렸다.
* * *
지이이잉. 핸드폰 진동 소리에 정신이 먼저 들었다. 태주가 느릿느릿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더듬더듬 손을 짚으며 핸드폰을 찾아 쥐었다.
눈을 비비며 지호가 깨지 않게 조심스레 침대에서 내려왔다. 느긋하게 하품을 한 뒤, 핸드폰 화면을 켰다. 상단에 메시지 표시가 뜬 것을 보고 메시지 함에 들어갔다.
[정정택]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 제일 위 칸에 떴다. 드디어 기원 약국의 약사를 찾은 건가? 서둘러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랜만입니다! 교도관님! 이번 주 내로 한 번 뵀으면 좋겠는데요! 언제 시간 되십니까?]
어쨌든 뭔가 유용한 정보를 얻긴 한 모양이다. 반가운 마음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 당장도 상관없다고 답장을 보낼 때였다.
지이이잉. 한 번 더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연달아 정택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그리고 그 의사 선생님 말인데요.]
[그 예전에 토끼굴 사건 용의자로 경찰 조사받았다 하더라고요.]
[암만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그 사건도 백날 사인 찾다가 흐지부지 종결되지 않았습니까?]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 이번엔 둘만 만나자는 메시지가 이어졌다. 태주는 답장하려고 띄워 놓은 키패드를 하나도 누르지 못했다.
토끼굴 사건이라면 7년 전에 일어난 그 사건 하나뿐이다. 지호의 책 사이에 껴 있던, 20대 알파 남성이 약물 중독으로 사망한 사건.
고개를 돌려 침대 위로 시선을 옮겼다. 얌전히 잠들어 있는 연지호의 모습이 보였다. 살인 사건이라든가, 용의자라든가, 그런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운 얼굴이었다.
뭐가 더 남은 걸까. 이게 다가 아니었나?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떨궜다. 토끼굴 사건과 비슷하게 사망한 염상훈 교도관을 떠올렸다.
[2] 동공 반사(瞳孔反射)
① 빛이 밝으면 동공이 작아지고 어두우면 동공이 커지는 현상.
② 가까이를 볼 때 동공이 작아지고 먼 곳을 볼 때 동공이 커지는 현상.
[3] 소지 일본어에서 유래된 단어로, 사동 도우미를 뜻하는 교도소 용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