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XXXXXXXXXXXX
소내에 있는 직원 휴게실은 잠시 성경을 읽거나 눈을 붙이러 오는 직원이 대부분이었다. 이를 알게 된 후에는 지호도 가끔 휴게실을 찾았는데, 같은 의무사무관 동료인 차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말하기 좋아하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그를 피해 휴게실에 들렀다. 장기를 두는 교도관과 팔짱을 낀 채 졸고 있는 교도관을 지나, 조금 낡은 책상 앞에 앉았다.
가운 주머니에 손을 꽂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안에서 굴러다니는 약과 주사기를 만지작거리며 자는 척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병원 일에 비하면 지금 하는 일은 여유로운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부족했다. 여유로워진 만큼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나마 양지원은 정정택이란 사람이 찾고 있다니까…. 잠시 신경을 놔도 되려나?
그는 어제 오후 태주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차분히 떠올렸다.
‘양지원 씨를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날 강도 사건의 피해자는 저뿐이었다면서요.’
조용했던 6239는 남태주가 그의 딸을 돌봐주는 조건을 내놓자 입을 열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속으로만 품고 있던 의문이 모두 풀렸다.
왜 자신을 찌른 사람의 가족을 돕고 있나 했더니…. 하지만 정의감 넘치는 남태주가 그런 방법을 쓴 건 의외였다.
입에서 작게 웃음이 샜다. 이제는 그 갭조차도 매력으로 느껴진다.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커진 듯하다.
아, 벌써 이 사람 없이는 못 살 느낌이라 큰일인데?
잠시 다른 데로 샌 생각에 실없는 걱정을 했다. 탁, 나무판에 부딪친 장기 소리에 다시 정신이 들었다. 감았던 눈을 뜨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다시 차분히 앞으로의 할 일을 계획할 때였다.
“그런데 1사동 남 부장 말이야.”
조용히 장기만 두던 두 교도관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남 부장’이란 단어에 지호가 멈칫했다.
“요즘 들어 부쩍, 뭐랄까….”
“아아, 뭔지 알 것 같네. 평소랑은 좀 다르지?”
“어어, 맞아! 그, 뭐랄까. 뭔가 좀 사람이 말랑말랑해진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원래도 살갑긴 했는데, 더 살가워진 느낌도 들고.”
“거기다 요즘 부쩍 자주 안으려 들지 않아?”
“맞아, 맞아. 그 얼굴로 팔 벌리면서 인사하는데 나도 모르게 안아 주고 있더라고?”
뭐? 누가 누구를 안아? 가만히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지호가 미간을 좁혔다. 그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경기 남부 교도소 교도관 중 남씨 성을 가진 교사는 남태주뿐이었다. 그런 귀여운 짓은 자신한테만 하던 그 남태주.
대체 인류애가 얼마나 넘치면 만나는 사람마다 포옹까지 하는 지경에 이른 건데.
순간 앞으로의 계획이고 뭐고, 기분이 나빠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늘한 눈으로 두 교도관에게 짧게 시선을 던진 뒤 휴게실을 나섰다. 저도 모르게 손에 꽉 쥐고 있던 약과 주사기는 대충 셔츠 포켓에 넣어 두었다.
* * *
지호는 그 길로 곧장 1사동으로 향했다. 소내에 도는 소문 때문에 되도록 1사동엔 오지 말라고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 말을 따를 수 없었다. 금세 관구실에 다다라 꽉 닫힌 문을 활짝 열었다.
아주 가관이었다.
“제가 요즘 운동하잖아요. 그래서 가슴 펌핑이 아주…. 느껴지세요?”
태주를 끌어안은 오 교도가 가슴 근육을 자랑하고 있었다. 삐딱하게 서서 팔짱을 낀 지호가 문가에 기댔다. 어디 얼마나 더 저러나 두고 보았다.
“완전 장난 아니죠? 전 애인이 울면서 다시 사귀자고 돌아올 수준이죠?”
“너무 낮은 게 아쉽긴 하지만, 따뜻하고 좋습니다.”
“아니, 남 부장님…. 제 키 말고요. 제 가슴 근육이요.”
그런데 10초가 지나고, 15초가 지나도 둘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툭툭 문을 두드렸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상냥하지만 날이 서 있는 목소리였다. 그제야 지호를 발견한 두 사람이 바로 섰다. 둘 다 표정이 참 해맑다.
“어? 선생님, 언제 오셨습니까?”
반갑게 웃은 태주가 지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심각한 얼굴로 지호의 손을 잡았다. 그대로 오 교도에게 사동을 맡기고 관구실을 나섰다.
* * *
관구실을 나와 태주가 지호를 데리고 간 곳은 직원 상담실이었다. 그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1사동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소문 때문에 위험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걱정스러운 눈빛이 지호를 향했다. 지난번 알파 수용동에서 있던 일을 아직 마음에 두는 모양새였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 같아요?”
지호는 그런 태주를 자신의 품에 가뒀다. 느리게 등을 쓸어 주며 불만을 토로했다.
“나한테 진짜 위험한 건 지금 태주 씨 행동이에요. 아무리 사람 온기가 좋아도 그렇지, 그렇게 아무나 덥석 안으면 쓰나.”
“제가, 그랬습니까?”
“그럼 안 그랬어요?”
“음,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사람 애타는 꼴 보고 싶어서 이러나? 평소엔 눈치 빠른 남태주가 이번엔 왜 이러는지. 의사인 연지호는 그 이유를 알았지만, 질투에 눈이 먼 연지호는 몰랐다. 그의 미간이 움찔 떨렸다. 태주의 변명이 이어졌다.
“요즘 추위를 너무 타서 그런가 봅니다. 이렇게 서로 안고 있으면 따뜻하고 좋잖습니까.”
“따뜻해서가 아니라, 사람 심장 소리를 들으면 안심이 되니까 좋은 거겠죠. 지금 태주 씨 행동 많이 이상한 거 알아요? 처음엔 나한테만 애교 부리는 건 줄 알고 좋아했는데.”
“애교라니요. 그런 거 부린 적 없습니다. 제 모습에 그런 게 어울리기나 합니까?”
“뭐가 어때서요? 지나치게 어울리기만 하던데요.”
“그럼 선생님이 저를 지나치게 예쁘게 보고 있나 봅니다.”
우리 가족은 제가 조금만 귀여운 척해도 주먹 쥐거든요. 웃으면서 말한 태주가 지호를 마주 안으며 고개를 숙였다. 목덜미가 훤히 드러났다. 손을 펼친 지호가 그 위를 조심스레 덮었다.
“태주 씨는 괜찮다고 느낄지 몰라도, 태주 씨 몸은 아직 괜찮지 않아요. 무리하지 말라고 얘기했잖아요. 며칠만 더 쉬라니까 벌써 출근하고.”
“이 일이 제 일인 걸 어떡합니까. 자꾸만 제 일이 눈에 밟히는데.”
“하여간 못 살아. 그렇다고 출근해서는 아무나 껴안아요? 그것도 태주 씨 일인가?”
“근무 중에 잠깐 그러는 건데 뭐 어떻습니까? 선생님이 저랑 사귀어 주는 것도 아니라 애인도 없는데.”
장난 섞인 목소리가 품에서 샜다. 은근슬쩍 떠보는 말투에 지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어? 이것 봐라?
“태주 씨 진짜 이럴 거예요?”
“그럼 저처럼 괜찮은 남자가, 어? 언제까지 솔로로 있어야 합니까? 키 크지, 돈 많지, 머리숱 많지, 공무원이지.”
“그래서 앞으로도 그렇게 아무나 껴안겠다?”
왜 굳이 사이즈도 안 맞는 사람들을 찾아서 끌어안는 건지. 이게 다 그 냉동 창고 일 때문이다. 그때의 후유증으로 괜스레 마음이 불안해져서, 자꾸만 사람의 온기를 찾고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역시 그들의 숨을 끊어놨어야 했다. 속으로 후회한 지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슬쩍 눈치를 본 태주가 작게 웃었다. 걱정하지 말라며 지호를 다독였다.
“앞으로는 안 그러겠습니다. 대신에 오늘 또 선생님 집에 가도 됩니까?”
“우리 집이요? 태주 씨 내일…. 아, 비번이구나?”
“네, 그것도 이틀 연속이요.”
“그럼 우리 집에서 지내요. 태주 씨 상태 좀 지켜보게. 저녁에 같이 퇴근할까요?”
“좋습니다.”
이를 마지막으로 더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시간을 확인하자 자리를 비운 지 15분이 지나 있었다.
슬슬 돌아가야 할 텐데.
하지만 여전히 떨어질 줄 모르는 태주에 지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제 이 남자를 곁에서 떨어뜨리고, 밀어내는 방법 같은 건 하나도 모르겠다.
* * *
“내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그 임상 실험 약물이 뒤에서 유통되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유통하려면 꽤 많은 인력이 필요하니까, 센터장 말고도 그 약에 관여된 인간이 더 있지 않을까?”
스툴에 앉은 다니엘이 얌전히 이마를 내보이며 말했다. 조용히 실밥을 제거하던 지호가 그에게 대꾸했다.
“그걸 이제 알았어요?”
“조금만 생각해 보면 바로 답이 나오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태주가 지호를 거들었다. 두 사람 모두 평소보다 냉소적인 반응이었다. 다니엘이 주먹을 꽉 쥐었다.
“이것들이…. 지금 나 때문에 퇴근 늦어졌다고 시위하냐?”
씨발, 나는 퇴근도 없는데! 왠지 모르게 갑자기 사무치게 외로워지고, 있지도 않은 엄마가 그리워진다.
“아니, 따지고 보면 나 때문도 아니지! 뭔 놈의 교도소가 재소자 교육이 이렇게 많아? 내가 뭐 굼뜨다 퇴근 시간에 의무실 가자고 했어? 교육이 끝나니까 이 시간인 걸 나더러 어쩌라는 건데!”
길길이 날뛰며 억울한 감정을 내비쳤다. 그 모습은 정말 이자가 국가 기밀에 속한 것이 맞는가 싶을 정도였다. 결국에는 태주가 먼저 알았다며 그를 받아주었다.
“네, 네. 교육이 잘못했습니다. 다니엘 씨는 잘못이 없어요.”
“씨발, 그게 기분 더 나쁘거든?”
“저는 수용자를 교화하는 사람이지, 기분 좋게 해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섬세한 케어까지 원하시면 곤란합니다.”
“어후, 내가 어쩌다 이 교도소까지 와서는…. 아, 됐고. 교도관님이 해 줘야 할 게 있어.”
더 불만을 말해 봤자 자신의 손해라는 걸 안 다니엘이 말을 돌렸다. 최근 들어온 조폭들에게 접근하고 싶으니 좀 도와달란다.
“그렇게 날고 기던 새끼들이, 무슨 바람이 들어서 대거 자수했겠어? 위에서도 여기서 지내는 동안 알아보라고 하더라고. 혹시 그 녀석들 수용자 정보 본 적 있어?”
“음, 저희 사동 담당이 대부분이라 보긴 했죠. 그런데 기록된 건 별로 없었고….”
태주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었다.
“아! 듣기로는 이제 그 생활을 청산하고 싶다고 했답니다. 그리고 불구속 입건을 하겠다는데도 굳이 구속해 달라고 떼를 썼다 그러더라고요.”
“그래? 왜?”
“거기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반성하는 마음으로 자수했다고 보기에는 좀 석연치 않죠. 아무튼, 그래서 제가 해야 할 일이 뭡니까?”
조폭에게는 어떻게 접근할 생각이냐며 물었다. 실밥 제거를 마친 지호도 궁금했는지 가만히 대답을 기다렸다. 다니엘이 별거 아니라는 듯 씨익 웃어 보였다.
“그래도 같은 조폭끼리는 좀 얘기가 되지 않겠어? 교도관들 통해서 내가 어느 조직 마약 공급책이었다고 소문 좀 퍼뜨려 봐.”
이미 수형표의 색이 마약 범죄임을 증명하고 있으니, 그럴싸한 포장이었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한 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쪽에서 먼저 접근해 올까요?”
“소 내에서 몰래 마약 유통하는 척하면, 바로 접근할걸? 그 바닥에서 마약만큼 쉽게 돈 되는 게 없거든. 죄책감도 무기 밀매나 인신매매보다 덜하고 말이야.”
다니엘은 반드시 미끼를 물 거라면서 서늘하게 웃었다. 악당이 따로 없는 웃음이었다.
* * *
“이걸로 속을까요?”
“안 속아도 뒷감당은 다니엘이 할 텐데요, 뭐.”
전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거지만, 연지호도 보통 성격이 아니다. 특히 유독 다니엘한테는 가차 없는 느낌이다.
크림빵을 티 안 나게 반으로 가르던 태주가 멈칫했다. 지호와 나란히 앉아 작업 중인 테이블 위를 보았다. 괜히 죄책감이 들었다.
“태주 씨, 여기요. 티 안 나게 잘 넣어야 해요.”
지호가 작은 지퍼백에 하얀 가루를 담아 건넸다. 그러면 태주는 핀셋으로 그것을 집어 크림빵 사이에 티 안 나게 쑤셔 넣었다. 누가 보아도 범죄의 현장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걸 기대하고 이 집에 온 게 아니었다. 같이 저녁 먹고, 같이 씻고, 같이 자고…. 쉬는 이틀 동안 자신의 집에서 지내라는 말에 그렇게 설렜는데….
왜 거기에 이런 범죄자 같은 짓까지 껴 있어야 하는 걸까?
“태주 씨, 여기요.”
“…네.”
또 하나의 흰 가루가 도착했다. 이 위험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가루는 사실 억제제와 영양제 따위를 곱게 간 것이었다. 다니엘의 부탁이었다.
‘그리고 미끼로 좀 쓰게 약 몇 개만 구해 봐.’
‘무슨 약 말입니까?’
‘뭐긴 뭐야? 마약이지. 재벌가 도련님들은 다 한 번씩 하지 않아? 아는 공급책 있을 거 아니야?’
‘있겠습니까, 제가?’
재벌이면 다 마약 할 거란 생각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건지. 몇 번을 곱씹어도 기가 막혔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듣고도 이렇게 그를 돕는 자신은 더 기가 막힌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뭐. 우리 교도소와 관련된 일이니까.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마무리까지 티가 안 나게 공을 들여야 하는 작업이라 손이 많이 갔다. 크림빵 하나를 완성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반복되는 지루한 단순 노동에 서서히 정신이 나른해졌다. 크림빵 4개를 완성한 후에는 저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았다. 태주 씨, 여기…. 지호에게서 또 하나의 가루가 도착했지만 알아채지 못했다.
“태주 씨?”
반응이 없는 옆자리에 지호가 고개를 돌렸다. 꾸벅꾸벅 조는 태주를 보곤 미소 지었다. 이렇게 허술한 남태주는 또 처음이었다. 툭, 떨어지는 고개와 동시에 어깨 위로 기분 좋은 무게감이 내려앉았다.
크림빵 4개면 충분하지 않을까? 다니엘은 혹시 모르니 아주 넉넉하게 10개 정도를 준비해 달라고 했지만, 그런 것 따위 알게 뭔지. 내 태주 씨가 피곤하다는데.
지호는 태주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주변을 정돈했다. 그 후, 한동안 가만히 앉아 허공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태주를 깨워서 침대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너무 달게 자는 모습에 자꾸만 시간을 끌게 되었다.
한참 뒤에야 조심스레 태주의 손을 끌어와 장갑을 벗겨 주었다. 그 손길에 눈가를 움찔 떤 태주가 눈을 떴다. 화들짝 놀라며 바로 앉았다.
“저, 잤습니까?”
“그냥 살짝 졸았어요.”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이만 잘까요?”
“아직 여섯 개 남지 않았습니까.”
“조금 모자라도 괜찮아요. 나머지는 다니엘이 알아서 잘 할 거예요.”
“선생님은 다니엘을 믿는 겁니까, 아니면 크게 한 번 잘못되길 바라는 겁니까?”
“음, 둘 다요.”
일어나요. 시간도 늦었는데 자야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지호가 의자를 안으로 넣었다. 태주도 그를 따라 일어났다.
“선생님도 같이 잘 거죠?”
“연지호 침대에 연지호는 필수 옵션이라면서요?”
“이제는 꼬박꼬박 잘 자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또 논문이니, 뭐니 하면서 밤새우지도 않고. 만족스럽게 웃으며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 * *
태주가 먼저 침대에 누운 것을 확인한 뒤 지호는 리모컨을 들었다. 불을 끄려다가 멈칫하고 작은 조명등으로 바꿔 켰다. 너무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은은한 빛이 방 안에 내려앉았다.
혹시나 해서였다. 너무 어두운 건 냉동 창고를 떠올리게 할 것 같았다. 그 춥고 깜깜한 곳에 갇혔을 때의 불안감이 불쑥 튀어나올지도 몰랐다.
“어? 불 안 끄십니까?”
리모컨을 내려놓고 침대로 돌아오자 태주가 물었다.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며 장난스레 대꾸했다.
“오늘은 태주 씨 얼굴 좀 오래 보고 싶어서요.”
“흐음, 뭔가 그런 느낌이 아니지만….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그럼 잘 자요, 태주 씨.”
“선생님도요.”
빙긋 웃은 태주가 눈을 감았다. 얼굴에 남아 있던 미소가 서서히 여운을 그리며 사라졌다.
지호는 가만히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이대로 밤도 샐 수 있겠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선생님.”
평소였다면 자세를 잡자마자 잠들었을 남태주가, 졸음 하나 묻지 않은 맑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침대에 누운 지 벌써 15분 정도가 지난 상태였다.
“잠이 안 와요?”
혹시 조명 때문에 못 자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투로 물었다. 태주가 슬며시 눈을 떴다. 눈빛에 불만이 어려 있었다.
“선생님.”
“네, 태주 씨.”
“….”
불러놓고 한참을 뜸 들인다. 답답해하는 내색 없이 기다려 주자,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입을 연다.
“왜 요즘에는, 안 합니까?”
“…뭐를요?”
“그, 굿나잇 인사요.”
“네?”
“아니, 그러니까…. 아이, 씨.”
말을 꺼내 놓고 괜히 꺼냈다 싶었는지 표정이 좋지 않다. 한편으로는 민망하고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웬만하면 웃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기대했어요?”
“그럼 기대를 안 합니까? 키스까지 진하게 한 사이에.”
들러붙으면 한두 번 정도는 더 입술을 내어 주겠지 했건만. 중얼거린 태주가 됐다며 잊어달란다. 그러고는 잊어 주기도 뭐하게 몸을 돌려 누웠다. 어차피 잊을 생각도 없었지만.
“태주 씨.”
“….”
“태주 씨?”
“….”
“잠들지는 않은 것 같은데 왜 대답이 없을까?”
몸을 일으킨 지호가 옆자리를 보았다. 베개에 얼굴을 묻은 태주가 한탄하고 있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냥 잠이나 잘걸. 그런데 그냥 잠이나 잘 거면 내가 이 집에 뭐 하러 와?
생각을 입 밖으로 뱉어 내고 있다는 건 자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볼수록 웃기고 귀엽다.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그냥 잠이나 잘 거면 여기에 뭐 하러 와? 키스까지 진하게 나눈 사이에.
“태주야.”
나지막이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붙잡았다. 똑바로 눕힌 뒤 그 위에 자리를 잡았다. 가만히 내려다보자 조금 붉어진 얼굴이 눈에 박혔다.
부족한 것 하나 없는 이 남자가, 이렇게 정신없이 날 좋아하고 있다. 고맙고 사랑스러우면서도 가엾게도.
“오늘은 자지 마.”
“….”
“자면 안 되겠다, 태주야.”
그대로 고개를 틀어 입술을 머금었다. 처음엔 당황했는지 정신없이 지호를 따라 혀를 움직이던 태주가 나중엔 자연스레 그와 템포를 맞췄다. 어느새 올라온 팔은 지호의 목덜미와 허리를 감고 있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더운 숨과 젖은 혀가 엉겨들었다. 평소 다정하고 부드러웠던 그들의 대화와 정반대의 키스였다. 서로를 집요하게 파고든 탓에 갈수록 거칠어지고 깊어진다. 그 누구도 피하지도, 반항하지도 않는데 조금 아프게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까지 위태롭게 버티고 있던 둑이 와르르 무너진 듯했다. 더는 손을 쓸 새도 없이 흘러넘쳤다. 꼭 끌어안은 두 사람 사이에 틈은 없었다. 지호가 먼저 태주의 옷 속으로 손을 넣을 즈음에야 맞물려 있던 열기가 떨어졌다.
“으음….”
입고 있던 셔츠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아직 상처가 완전히 낫지 않아 조금 거친 손가락이 맨몸을 쓸었다. 아프기보단 간지러운 느낌에 태주가 살짝 몸을 뒤척였다. 잠시 입술이 떨어졌다.
“아파요?”
지호가 넌지시 물어왔다. 고개를 저으며 그의 상의를 벗겼다. 그러고는 잠시 멈칫했다.
하얗고 고울 거라고 생각했던 지호의 몸은 오래된 듯한 상처가 많았다. 모두 지금은 희미하지만, 결코 작은 상처는 아니었다. 언젠가 연지호를 알아갈수록 남태주는 많이 슬퍼질 거라고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진짜 이 사람을 다 알면 펑펑 울겠다. 사연을 알지도 못하는 이 상처들만 봐도 이렇게 가슴이 뻐근해지는데.
눈으로조차도 조심조심 훑다가 지호를 끌어안았다. 다시 입을 맞추고 촉감을 곤두세워 서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맞닿은 몸과 마음 사이로 계속해서 달라붙는 열기에 묘한 소유욕이 차오를 때였다. 슬슬 반응하려는 아래로 손을 가져가는데 별안간 일이 터졌다.
툭, 투둑.
잠시 입술을 뗀 사이였다. 자세를 조금 바꾸려는데, 태주의 몸 위로 붉은 피가 방울져 떨어졌다.
“서, 선생님?”
몸을 일으킨 지호가 코밑을 훑었다. 당황하면서도 놀란 태주와 달리 그는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흔하게 있는 일인 것처럼 ‘아, 또 이러네.’ 중얼거릴 뿐이다.
“이제는 좀 면역이 생긴 줄 알았는데. 아직은 조금 더 시간이….”
“선생님! …선생님?”
무어라 말하려다 더는 잇지 못하고 풀썩 태주의 품에 쓰러졌다. 놀란 태주가 다급하게 지호를 살폈다. 다행히 제대로 호흡도 하고 있고,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아니, 이게, 왜…. 이게, 참….”
하지만 이건 또 대체 무슨 경우일까. 관계 직전에 갑자기 쓰러지는 남자라니.
설마, 성생활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게 이건가?
“잠깐, 그러고 보니까 약은?”
지호를 조심스레 눕힌 태주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흐르는 피를 닦아 주곤 온 방을 뒤졌다.
지난번에 우리 집에서 투약하는 걸 봤는데, 내가. 그러면서 지호의 옷 주머니란 주머니는 다 뒤졌다. 세탁함에 있는 셔츠 주머니에서 포장을 뜯지 않은 약과 주사기가 나왔다.
라벨이 붙어 있지 않은 걸 보니, 이 약이 맞는 듯하다. 게다가 누가 봐도 투약을 잊은 모양새로 놓여 있었다.
이 인간이, 대체 어디에 정신을 놓고 다녔던 거야? 이렇게 어? 중요한 순간이 걸린 약까지 잊어버리고.
그 이유가 아무나 껴안고 다니던 남태주 때문이란 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걱정되는 마음에 지호를 바보라고 속으로 욕하며 침실로 돌아갔다.
일단 약을 가지고 오긴 했는데, 바로 놔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고민하던 태주가 머리맡에 약물과 주사기를 놓고 침대에 올랐다.
아쉬움과 걱정은 일단 뒤로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하염없이 지호의 얼굴을 보다가, 느릿느릿 그를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혹시나 갑자기 멈춰 위험해지지는 않을까. 심장 소리가 들리도록 가슴에 귀를 댄 채.
* * *
“왜 크림빵이 네 개밖에 없어? 내가 열 개라고 했잖아.”
“글쎄요? 네 개 아니었던가? 싫으면 두고 가든가.”
와, 개 뻔뻔해. 당당한 지호의 반응에 다니엘은 기가 막혔다. 기가 막혔지만, 크림빵 4개는 야무지게 챙겼다. 그래도 고맙긴 한데, 짜증도 함께 났다.
“내가 지금 수용자 신분만 아니었어도 너 쏴 죽였는데.”
“어딘가에 총을 숨겨 놓긴 했구나? 오랜만에 보물찾기 좀 해 볼까?”
“개새…. 남태주가 너 이런 놈인 거 알아?”
“차차 알아가는 중이죠.”
“그럼 차이는 날도 머지않았네.”
“그럴까요?”
“씨발, 존나 그래야 돼. 너 잘되는 꼴 보기 싫으니까.”
“여전히 잔인하네. 교도관 부를 테니까 방으로 돌아가요.”
1사동에 연락을 넣은 지호가 주변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크림빵을 품에 안은 다니엘이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남태주는 좀 어때? 해리성 기억 소실이라며?”
“사라진 기억이 돌아오는 건 거의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에요. 좋을 게 없는 기억이니까 떠올리지 않는 편이 더 낫기도 하고요.”
“냉동 창고에 어떻게 갇힌 건지 외에 또 잊어버린 건 없어?”
“네, 그런데 왜 자꾸 묻는 거예요?”
“흐음….”
턱을 매만진 다니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다니엘? 슬쩍 부르자 그제야 다시 눈을 바로 뜬다.
“있잖아,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데.”
“뭔데요?”
“남태주가 토끼굴 시신 부검 기록을 열람했단 보고를 받았어.”
툭, 순간 집어 들었던 가위가 손에서 미끄러졌다. 그러나 동요하는 건 잠시뿐, 다시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움직였다. 다니엘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알잖아. 그 집안 첫째가 능력 있고 발도 넓은 거. 웬만한 정보는 우리 조직 못지않게 손에 넣을 수 있을 거야.”
“….”
“형이 누구인지, 누구였는지 알아내는 건 시간 문제겠지.”
“….”
“정말 남태주를 끌어들여도 괜찮겠어? 남태주가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배경을 가진 건 맞는데, 그래도 그 일은 다른 일과 차원이 달라. 괜히 개입했다가 죽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반대로 남태주가 형을 잃게 될지도 몰라.”
남는 사람만 망가지는 일이잖아. 아주 처참하게. 차마 뒷말은 잇지 못했다. 때마침 도착한 교도관이 의무실 문을 연 탓도 있었다.
수용자를 데려가겠단 교도관의 말에 지호는 조금 힘겹게 미소 지었다. 애써 착잡한 마음을 감춰 보려고 했지만, 평소처럼 잘 되지 않았다.
“웬만하면 정리해, 그 감정.”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제게 던져진 목소리는 무겁고 날카로웠다.
* * *
갈수록 좋아져서 큰일이다. 살면서 이 정도로 누군가가 사랑스러운 건 처음이었다.
이 사람은 대체 부족한 게 뭘까? 돈? 재물? 하지만 그런 건 내가 채워 줄 수 있으니 상관없다.
“와….”
밥을 한 수저 뜰 때마다, 반찬을 집어 입에 넣을 때마다, 태주는 연신 감탄했다. 누가 봐도 무난하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음식뿐이지만, 이를 연지호가 차렸다는 점에서 남태주에겐 그 무엇보다 특별했다. 콩깍지가 씐 그에겐 세상에 이보다 맛있는 음식이 없었다.
“미쳤나 봐. 식당 차려도 되겠다. 나한테 장가 오면 되겠다.”
정말로 그 정도의 솜씨는 아닌데. 다시 외상외과로 못 돌아가면 식당을 차려 줘야겠단 생각이나 하고 앉았다. 심지어 음식이 줄어드는 게 아쉬워 조금씩 아껴 먹기까지 했다. 밥은 무조건 한 수저 가득 뜨던 남태주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평소였으면 10분 만에 끝났을 식사 시간이 1시간이나 걸렸다. 깨끗이 비운 접시를 보며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정리를 마치고 양치질을 한 후에 거실 소파에 드러누웠다.
선생님은 언제 오지?
한겨울이지만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정오였다. 아직 퇴근까지 한참 남았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희재와 영상 통화를 하다가, 또 벌러덩 드러누웠다가, 다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제 뭐 하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책이라도 읽을 생각으로 책장 앞에 가 섰다. 책등을 쭉 살펴보다가 아기자기한 장식품 칸에서 시선을 멈췄다.
작고 귀여운 찾잔 옆에 더 작은 도자기 인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가서 보는데, 저 안쪽에도 뭔가 있다. 오래된 듯 허름하고, 생활 기스가 많이 난 플라스틱 상자였다.
“뭐지? 열어 봐도 되나?”
잠시 고민하다가 지난번 지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 집에서 남태주에게 안 되는 건 없다고 했다. 기분 좋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달칵, 헐거운 뚜껑은 쉽게 열렸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장난감이 잔뜩이었다.
“어? 이거 선생님이 어릴 때 가지고 놀던 건가 보다.”
상자만큼 장난감도 오래된 티가 났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색연필을 따로 빼 두고, 장난감을 집어 들었다. 청진기, 체온계, 약통, 주사, 타진기…. 병원 놀이 세트 같은데 웬만한 건 다 들어 있다.
“와아, 어릴 때부터…. 아주 천생 의사네.”
청진기를 들어 귀에 걸었다. 장난스레 청진판을 가슴에 댄 채 미소 지었다. 쿵. 쿵. 장난감인데도 제법 소리가 들렸다. 슬며시 눈을 감고 심장 소리에 집중할 때였다.
‘아! 오른쪽 허벅지에 고무 같은 게 눌어붙어 있었는데, 이거를 그래픽으로 어찌어찌 유추해 보니까 장난감 칼인 것 같다더라? 그 왜, 의사 놀이 세트 같은 데 든 거 있잖아. 생긴 게 딱 의료용 메스야.’
왠지 모르겠는데 난데없이 떠올랐다. 토끼굴에서 발견된 사체. 혁주의 친구를 통해 전해 들은 부검 기록.
번쩍 눈을 뜨고 플라스틱 상자를 뒤졌다. 다른 건 다 있는데 장난감 메스만 없다.
하지만 왜.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세상에 병원 놀이 장난감이 한두 개도 아니고.
고개를 저으며 잡생각을 날려 버렸다. 장난감들을 상자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뚜껑을 닫기 전, 한 번 더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핸드폰이 진동했다.
[XXXXXXXXXXXX]
우주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내용을 확인한 태주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야, 오빠. 네가 장기를 못 찾은 날은 X로 사인을 보내라고 했잖아. 그럼 찾은 날은 어떻게 해? O로 사인 보내?’
‘아니지. 그때도 X로 보내야지.’
‘응? 둘 다 X로 보내면 어떻게 구분하게?’
‘대신 찾았을 때는 X를 딱 열두 개만 보내는 걸로 하자.’
‘열두 개? 왜 하필 열두 갠데?’
‘그냥. 갑자기 12가 생각나서. 아무튼 메시지 없으면 무슨 일 있는 걸로 알고 달려갈 거니까 되도록 잊지 마. 알았어?’
‘아아, 알았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몇 번이나 손끝으로 짚어 봐도 12개다. 벌떡 일어난 태주가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메시지가 몇 개 더 도착했다.
[오늘은 밖에서 같이 먹자]
[내 작고 귀여운 월급으로 살 테니까 혼자만 와]
[돈 없으니까 다른 사람은 안 돼]
[알았지?]
[절대 안 된다?]
* * *
차를 끌고 갔으나 병원 안으로는 들어가지도 못했다. 무슨 일인지 잘 차려입은 우주가 병원 앞에 서 있던 탓이다. 태주의 차를 발견하기 무섭게 손을 마구 흔들었다.
“어후, 추워. 왜 이렇게 늦게 와?”
“네 연락 받자마자 옷만 입고 바로 왔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왜 이렇게 힘줬어? 나랑 밥 먹는다고 이랬을 리는 없고.”
“너랑 밥 먹는 게 다였으면 가운도 안 벗고 갔지. 선보러 가. 정확히는 선 망치러.”
“뭐?”
신호가 걸려 멈춰 있는 상태라 다행이었다. 아니면 저도 모르게 액셀을 꽉 밟을 뻔했다.
‘선’이라는 낯선 단어에 태주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주가 피곤하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아아, 몰라! 일단 도착하고 나서 얘기해! 먹으면서! 그리고 남태주 너도, 어? 마음 단단히 먹어라?”
대체 어떤 사람과 선을 보기에 자신까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하는 걸까? 신호가 바뀌었다는 우주의 말에 다시 정면을 보았다. 하늘에서 뭐라도 떨어지려는 건지, 세상이 어둑어둑하다.
* * *
“말이 돼? 나도 똑같이 결혼을 한 번 해 봤으면 몰라. 아니면 내가 사랑에 빠질 만큼 괜찮은 사람이기라도 하든가.”
“그 사람은 두 번째 결혼이래? 이혼한 거야?”
“아니, 사별이래. 이제 1년 정도 됐나 봐.”
방어회를 크게 한 쌈 싼 우주가 입 안으로 마구 밀어 넣었다. 힘들게 일하는 걸 알아서인지 잘 먹는 게 보기 좋다.
얼른 우주가 찾은 장기를 화제로 돌리고 싶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기다렸다. 이 기특한 녀석의 배가 찬 뒤에 들어도 늦지 않았다.
“아무튼 마누라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선인지.”
“다 씹고 말해라. 어디 안 가고 다 들어 줄 테니까.”
“내가 오죽하면 이러겠어? 열받으니까 그러지. 하여튼 아버지나 아들이나 쌍으로 마음에 안 들어.”
“그런데 우리 집에서 순순히 선을 본다고 했어? 어머니도 그렇지만, 아버지가 노발대발하셨을 텐데?”
“당연히 화났지. 그래서 제대로 쪽팔리게 해 준다고 받아들인 거야. 이번에 뭐, 대선 출마한다고 난리인데, 그 얼굴에 제대로 먹칠해 줄 거라고. 어딜 감히 넘볼 게 없어서 나를 넘봐?”
“대선 출마? 국회의원 아들이라도 되나 봐?”
하긴, 그 정도는 되니까 감히 넘볼 생각을 하는 거지. 내가 열심히 먹여 키운 이 화상을.
“상대가 대체 누군데 그래?”
만났다 하면 언성부터 높이는 남매 사이지만, 웬 놈이 자신의 여동생을 넘본다니 기분이 나빴다. 괜히 열불이 나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켤 때였다.
“그 왜 있잖아. 백상중 의원, 그 인간 아들.”
“뭐? 윽, 잠깐, 큽….”
젠장! 잘못 삼켰다! 가슴을 친 태주가 소매로 입가를 막은 채 연신 기침했다. 어느새 두 눈이 울 것처럼 그렁그렁해졌다.
“괜찮아? 무슨 물을 그렇게 급하게 마셔?”
급하게 방어회를 쑤셔 넣던 녀석한테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겨우 속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렸다.
“백상중 의원 아들이면 백현수잖아.”
“뭐야? 아는 사람이야?”
“하아….”
어떻게 또 이런 우연이 찾아올까. 아무래도 백상중 의원의 대선 출마 때문인 듯하다. 선거 활동에 쓸 자금줄이 필요한 거겠지.
“그래서 언제 만나기로 했는데?”
“오늘 밤 아홉 시, 서울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호텔에서. 죽여주는 연출을 위한 투자라고 할까?”
오늘 밤 아홉 시라….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태주가 옅게 미소 지었다. 우주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는 백현수에게 다시 접근할 좋은 기회였다.
슬쩍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나지막이 자신도 같이 가자고 하려는데, 우주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남태주 너도 같이 가자.”
“응?”
뭐지? 웬일로 말하지 않았음에도 통했다. 반갑지만 의외의 제안에 잠시 멍해졌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우주의 말에 집중했다.
“내가 처음에는 백현수 그 인간이 누군지 잘 몰랐거든? 그래서 남혁주한테 알아봐 달라고 했잖아. 근데 백현수 그 인간이 누구였는 줄 알아?”
“…누구였는데?”
혹시 그가 오메가라는 걸 알게 된 걸까. 작게 긴장을 삼켰다. 그러나 이어지는 이야기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외상외과 박 교수님 조카였어.”
“뭐? 내가 아는 그 박 교수님?”
“응, 그 박 교수. 어쩐지, 매번 혼자만 여유롭더라. 수술실도 잘 안 들어가고.”
그 메마른 대학 병원에서 유일하다시피 지호를 챙겼던 사람이다. 지호의 전근 소식을 전해 주었던 것도 그였다.
쿵쿵 불안하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우주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있잖아, 놀라지 말고 잘 들어.”
꼭 혼자 오라고 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내가 연교진 씨 장기를 발견한 곳이 박 교수님 연구실이야.”
오늘 선 자리를 주선한 것도 그 사람이고. 말을 마친 우주는 젓가락을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42번 냉동고에 있는 연교진이 누구인지, 이제는 아는 눈치다. 태주는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연지호가 그곳에서 가장 기대고 믿었던 사람.
아마 단 한 번도 의심한 적 없겠지. 그렇기에 그 오랜 시간 동안 찾을 수 없던 거겠지.
“어떡할 거야? 연 교수님한테 이야기할래?”
넌지시 묻는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입술만 꾹 깨물 뿐이었다. 꼭 말아 쥔 손에 말려 들어간 옷자락이 볼품없이 구겨졌다.
어떻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이 상처받을 게 뻔한데.
* * *
“연구실에 표본이 엄청나게 많더라. 그중에서 찾는 것도 힘들었어. 상담 신청을 여러 번 할 수도 없잖아. 의심할 수도 있으니까.”
서울로 향하는 차 안 분위기는 무거웠다. 예상했던 일이기에 우주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정신 빼고 있는 거 아니지? 이럴수록 머리는 차가워야 한다, 어?”
“아는데, 오늘은 그게 좀 힘드네?”
“시간이 필요하면 당분간은 백현수가 마음에 드는 척해 볼게. 뭐, 당장 식 올리자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건 안 되지. 그러다 위험한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오늘 이후로 더는 엮이지 마.”
“그럼 넌 어떻게 하게?”
“나도 오늘 안에 끝장을 봐야지.”
아마 그쪽도 단단히 준비해서 나올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결혼을 성사시키려고 애쓰겠지. 지금까지의 일들을 봤을 때, 상식적인 방법을 쓰진 않을 듯하다.
“웬만하면 혼자 자리 옮기지 마. 화장실도 되도록 가지 말고, 음식도 먹지 마. 제대로 거절하고 나오는 게 최우선이야. 알겠어?”
“뭐야? 왜 이렇게 진지해? 설마 그 사람들이 나한테 무슨 짓이라도 하겠어?”
충분히 하고도 남는 사람일 수도 있다. 백현수의 아내였던 주유경의 죽음이 단순한 자살이 아니었다면.
* * *
[동생이랑 약속이 있던 걸 잊었습니다. 이만 돌아갈게요.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캐비닛 앞에 선 지호가 핸드폰 화면을 보았다. 늦은 오후에 온 메시지였다. 교도소는 이게 불편하네. 중얼거리며 옷을 갈아입었다.
겉옷까지 챙겨 입은 뒤 탈의실을 나섰다. 문득 의무실에 놓고 온 외장하드가 떠올라 방향을 틀었다.
1사동을 가로질러 의무사동으로 향하는 길, 다니엘이 대걸레를 들고 서 있었다. 흘끗 쳐다보니 벌써 작업에 들어가셨다.
“새끼, 수완이 좋네.”
다니엘이 건넨 크림빵에 한 수용자가 좋다고 웃는다.
“얼마나 더 들일 수 있냐?”
“그때그때 다르지 뭐. 근데 요즘은 좀 힘들어. 알잖아, 둥지까지 뒤숭숭한 거.”
“아, 하긴. 다들 목숨 걱정하느라 좆 빠지지. 너도 그래서 자수하고 들어왔냐?”
“아니? 난 제비한테 약점 잡혀서 재수 없게 들어온 건데? 넌 내가 그런 쫄보 새끼로 보이냐?”
“씨발, 그럼 난 쫄보 새끼라서 여기 있냐?”
“아, 미안. 그게 너였어?”
아주 그림이 따로 없다. 그쪽 길을 권유하고 싶을 정도로 제법 어울린다. 속으로 웃으며 그를 지나쳐 걸었다. 모퉁이를 돌아 의무사동으로 들어가자 기지개를 켜며 나오는 의무과장과 마주쳤다.
“어, 연 선생 아직 퇴근 안 했어?”
“놓고 온 게 있어서요.”
“가만 보면 남 돌볼 때만 꼼꼼하고, 자기 일엔 허술해?”
“아무래도 한쪽에 지나치게 신경을 쏟다 보면 그렇게 되더라고요. 과장님은 어디 가세요?”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어서.”
“의무실에 커피 머신 있지 않아요?”
“쓴 커피 말고, 달달한 다방 커피.”
“아아, 다녀오세요. 의무실엔 제가 잠깐 있을게요.”
“됐어. 사람 없으니까 그냥 가도 돼.”
그러면서 꼭 수고하라는 모양새로 어깨를 툭툭 치고 간다. 지호는 작게 웃으며 의무실 문을 열었다. 어차피 일찍 가 봤자 남태주도 없는 거, 언제 퇴근하든 상관없었다.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어 두었다. 또 잊을까, 외장하드는 겉옷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잠시 가만히 앉아 넋을 놓았다.
‘형이 누구인지, 누구였는지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겠지.’
문득 떠오른 목소리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남태주가 내 모든 걸 알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
그래도 내 곁에 있을 것이다. 내가 밀어내지 않는 한 함께하려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이니까.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피하거나 도망칠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다니엘의 말대로, 큰 상처가 되기 전에 접어야 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얻은 안식인데….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감은 눈앞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착잡한 마음에 입술을 말아 물 때였다.
“연지호!”
의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조금 전 복도에서 시선만 주고받으며 스쳤던 다니엘이다. 놀란 듯하면서도 다급한 표정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 있….”
“6425! 먼저 가면 어떡합니까! 아, 힘들어! 진짜 아픈 거 맞아요?”
뒤따라온 교도관이 헉헉거리며 들어섰다. 그를 본 다니엘이 짧게 눈짓으로 지호에게 신호를 보냈다. 단번에 그 사인을 이해한 지호가 얼굴에 미소를 걸었다.
“괜찮으세요, 윤 교사님?”
“아, 연지호 선생님…. 아직 퇴근 안 하셨습니까?”
“잠깐 두고 온 게 있어서요. 그보다 6425 수용자한테 무슨 일 있나요?”
“어휴, 갑자기 머리가 깨질 것같이 아프다고 난리여서요. 전에 다친 게 문제인 건지. 잠깐 좀 봐주시겠습니까?”
“어쩌죠? 저도 일이 있어서 오래는 못 보는데. 오늘 과장님이 당직이시니까, 과장님께 이야기하시면 될 것 같네요.”
“아, 그래요? 근데 의무과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휴게실에 계실 거예요.”
“그럼 제가 의무과장님 모셔 올 테니까, 그때까지만 6425 좀 부탁합시다.”
“네, 그러세요.”
“금방 올 테니까 부탁해요!”
교도관이 다시 헉헉거리며 의무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멀어지기 무섭게 지호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시간 없어요. 5초 줄게요.”
“뭐? 야, 이씨. 아무리 그래도 교도관 돌아오는데 5초는 더 걸….”
“5.”
“씨발! 조폭들이 단체로 자수하고 감방에 온 이유가 있었어.”
“4.”
“개, 썅…. 이 이유를 네가 알아야 하니까 내가 여기까지 달려온 거잖아!”
“3.”
“이쯤 되면 초 안 셀 때도 되지 않았냐? 씨발, 내가 무슨 랩 배틀 나온 것도 아니….”
“2.”
“아오! 알았어! 임상 실험을 지금 조폭 따까리들한테 하고 있대! 뭔지는 정확히 모르는데 들어보니까 딱 그거야! PL-0512!”
“…그게 정말이에요?”
휴, 다행히 1초를 남겨 두고 카운트다운이 끊겼다. 다니엘이 한숨을 내쉬다가 짜증을 부렸다. 아오, 씨! 내가 왜 이 새끼한테 휘둘려서 랩을 했지?
“아무튼! 부모 없고, 이렇다 할 친구도 없는 놈이 대부분이니까. 부작용이 심해지든,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지든, 아무도 신경 안 쓸 거 아니야. 마침 성인 대상자가 필요했다면 딱이지.”
“비밀스럽게 연구가 가능했던 이유가 있었네요.”
“동료가 하나씩 사라져서 다시는 안 돌아오니까 겁을 먹은 모양이야. 그리고 1년 전에 여기서 죽어 나간 녀석 하나 있지? 네가 남태주랑 심낭압전 응급 시술했던 놈 있잖아. 특수 강간 그 새끼.”
“그 사람은 왜요?”
“그 새끼도 그 임상 실험에 끌려갔었대. 그런데 어떻게 중간에 잘 도망쳐 나왔나 봐. 결국 감방에서 죽긴 했지만. 그쪽 바닥에선 아주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모양이야.”
“만약 그렇게 도망쳐 나온 사람이 한둘이 아니고, 그들이 생각한 도피처가 아이러니하게도 교도소였다면….”
“교도소 수용자들이 왜 죽어 나갔는지 알 것도 같지? 뉴스도 수용자가 죽어 나간단 이야기만 보도됐지, 누가 어떻게 죽었는진 보도되지 않았으니까.”
“전부 임상 실험에 쓰이고 버려진 거네요.”
갑작스러운 조폭들의 자수, 원인을 알 수 없는 수용자의 죽음, 그리고 임상 실험. 어쩌면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 * *
수용자가 죽어 나간단 뉴스가 난리였던 것도 한때뿐이었다. 수사도 진전이 없는 탓에 이슈가 되지 않아, 이제는 언론에서도 포기한 꼭지.
그러니 안전할 것이라 여겼을 터였다. 임상 실험에 끌려갈 바에는 감옥에서라도 숨을 붙이고 있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주차장에 들어서면서 지호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태주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임상 실험에 참여한 사람이 모두 죽는 거라면, 태주가 데리고 있는 6239의 아이도 위험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평소에는 이렇게 오래 걸리지 않는데 이상하다.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안 되겠는지, 끊고 다시 걸려고 할 때였다.
-여보세요? 교수님?
긴 신호음 끝에 들리는 목소리는 태주의 것이 아니었다. 동생과 약속이 있다고 했던 그의 메시지를 떠올렸다.
“남우주 선생님이에요?”
-어어, 네. 저예요.
“태주 씨는요? 지금 같이 있어요?”
-아, 그게….
“왜 그래요? 무슨 일 있는 거예요?”
-그게 그러니까…. 남태주, 아니, 우리 오빠요. 분명 조금 전까지는 같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핸드폰만 떨어뜨려 놓고 사라졌어요. 무슨 일 생긴 거면 어쩌죠?
불안한 듯 떨리지만, 침착하려 애쓰는 듯한 목소리였다. 이런 것마저 남매가 빼다 박은 건 참 다행이었다. 곧장 차에 타 시동을 걸었다.
“거기가 어디예요? 지금 갈게요.”
떨리는 손을 쥐었다 편 뒤 핸들을 붙잡았다. 위치를 듣기 무섭게 액셀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