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다행인 것만은 아닌
“어디 있어요?”
“뭐, 뭐가.”
앞뒤 다 자르고 묻는 말에 다니엘이 식은땀을 흘렸다.
오전 2시 44분. 갑자기 교도관이 들어와 자신만 깨운 게 시작이었다. 면담이 있으니 따라오라는 말에 하품을 찌익 하며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텅 빈 샤워실. 안으로 들어가란 말에 미간을 좁히자 갑작스럽게 옷깃을 붙잡혔다. 어떻게 손을 쓸 새도 없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끌려갔다.
“연지호?”
아직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아 잘 보이지 않았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화를 주체하지 못한 듯 우악스러운 손길은 다니엘의 등이 벽에 닿을 때쯤 멈췄다.
불을 켜지 않아 어두운 샤워실 안, 섬뜩한 지호의 눈만 고요히 빛났다. 그가 다시 한번 물었다.
“어디 있어요?”
“글쎄, 뭘 자꾸….”
“맨몸으로 교도소에 들어오지는 않았을 거 아니에요.”
“야.”
“교도소 어딘가에 숨겨뒀죠?”
“정신 차려, 인마.”
그다음 단어를 내뱉기 전에 다니엘이 지호의 입을 막았다. 두리번거리며 누군가 있는지 살피다가 조용히 속삭였다.
“미쳤어? 누구 쏴 죽이기라도 하게?”
“교화가 안 되는 범죄자를 살려 둬서 어디에 써요. 죽이는 게 사회에 이로워요.”
“하아…. 이거 아주 돌아 버렸네….”
그렇다고 별것도 아닌 의무사무관의 손으로 죽이면 되겠냐고. 감방 엔딩 맞고 싶어서 환장했나.
“총 같은 거 없어. 있어도 지금의 너한텐 안 줘. 이럴 시간에 남태주나 한 번 더 보지 그래?”
“그러고 싶은데 역시 숨을 끊어 놓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될 것 같아서요.”
“허어….”
어쩌다가 그런 대단한 집안 아들한테 빠져서는. 아주 정신을 못 차린다. 대체 어떤 매력이 있길래? 잘생긴 거 빼면 딱히 모르겠더만.
밀려오는 피로에 다니엘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마음을 가다듬으며 지호를 설득했다.
“야, 교도소에 사각지대 없는 건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잘 아니까 사각지대를 잘 만들 수도 있겠죠.”
“아니…. 하…. 그래, 그 새끼들 쏴 죽였어. 그다음엔 어쩔 건데? 네 자리가 철창 안으로 옮겨지는 거라니까? 아직 해야 할 일도 많은데 감방에서 썩을 거야? 그리고 네가 사람 죽이면 남태주가 참 좋아하겠다.”
다행히 남태주를 들먹이자 서서히 잠잠해진다. 한참을 침묵만 머금다가 한숨을 뱉은 지호가 이마를 짚었다.
“그래도 그 수용자들, 이렇게 둘 수 없어요.”
“걱정하지 마. 남태주 집안에서 가만히 안 있을 테니까. 그 집안이 좀 대단한 집안이야?”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래, 그러니까 네가 괜히 나설 거….”
“또 이렇게 내가 무력한 것만 알게 되네.”
나는 왜 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아니, 그 사람뿐만이 아니다. 다른 때도 언제나 이렇게 무력했다.
상처투성이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이렇게 해져 있는 손이 아무것도 못 했을 리는 없는데. 지호의 눈에는 그런 것 따윈 보이지 않는 듯했다.
“야. …형.”
다니엘의 손이 조심스럽게 지호에게 닿았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만 닿을 뿐, 더 다가가지 못하고 주먹을 쥐었다. 툭 떨군 지호의 고개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차라리 재수 없는 연지호가 훨씬 더 나은데.
* * *
“아, 연 선생님!”
슬그머니 의무실 문을 밀고 들어온 오 교도가 지호를 보며 활짝 웃었다. 오전 운동 시간, 운동장에서 재소자를 감시해야 할 그가 나타나자 지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자인가요?”
“네, 발목이 퉁퉁 부었는데 벌에 쏘인 것 같더라고요. 한번 봐주세요.”
들어오세요. 오 교도가 열린 문 너머를 향해 손짓했다. 조금 후, 수용자 하나가 어색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약국 강도 사건의 범인인 6239였다. 조금 피곤한 듯 지쳐있던 지호의 눈에 잠시 이채가 어렸다.
“이쪽 침대에 앉아 볼래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침대를 가리키자 대답도 없이 조용히 이동한다. 다른 교도관의 말대로 그런 일을 벌였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얌전했다.
지호는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아 조심스레 바짓단을 올렸다. 복사뼈 쪽이 퉁퉁 부어 있었다.
“아, 선생님.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사이 갑자기 배를 감싸 쥔 오 교도가 멋쩍게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잠시 자리를 피하게끔 할 생각이었는데 잘됐다. 부어오른 자리를 살피던 지호가 고개를 들 때였다.
“남태주 부장님이랑 친하시다고 들었어요.”
의외로 먼저 입을 연 것은 6239였다.
“오늘 남태주 부장님이 안 보이는데….”
“….”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조금 떨리는 목소리.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떨리는 눈동자. 마른침을 삼키는 목울대가 오르내리는 게 눈에 보인다. 뭔가를 두려워하고, 긴장하는 모양새였다. 위험한 일이 닥칠 것을 예감하고 있던 것처럼.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고 생각하나 보죠?”
다시 고개를 내린 지호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장갑을 낀 손으로 그의 발목을 붙잡고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거, 정말로 벌에 쏘인 건가요?”
얼핏 봤을 땐 그런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뭔가 이상하다. 6239의 신발을 벗긴 지호가 손끝을 세워 발바닥을 살살 간질여 보았다. 아무 반응이 없다. 이번엔 꾹꾹 눌러 보았다.
“이상해요. 왜 제 눈에는 6239가 아무것도 못 느끼는 것 같죠?”
“선생…. 크윽, 컥!”
순간이었다. 갑작스럽게 발작을 일으킨 6239가 울컥 피를 토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든 지호의 얼굴 위로 핏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얼른 가운을 벗어 눈가를 닦은 지호가 벌떡 일어났다.
“6239! 6239!”
“뭡니까? 어떻게 된 거예요?”
때마침 돌아온 오 교도가 화들짝 놀라며 침대로 달려왔다. 지호가 서둘러 6239의 호흡 상태를 살핀 뒤 인튜베이션을 시작했다.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어요. 이 수용자, 다른 병력 있어요?”
“아, 아뇨. 그런 거 없는데….”
“그럼 며칠 사이에 별다른 이상한 점은요?”
“밥도 잘 먹고 작업도 잘 나갔어요! 모범수 돼서 하루라도 빨리 나가야 한다고 얼마나 열심히 생활했는데요! 어디 아파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요? 하지만 갑자기 이럴 리가 없는데….”
뭐지? 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며칠 전 형질 조사 때는 분명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였다. 이렇게 많은 양의 피를 토할 이유가….
설마, 발목이 부어오른 것과 연관이 있는 건가?
6239의 가슴에 전선을 붙이며 발목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어 있던 발목이 멀쩡해졌다. 놀란 지호가 다시 꼼꼼히 그의 발목을 살폈다. 붓기가 사라진 자리에 아주 작은 붉은 반점이 있었다. 순간 1년 전 일이 머릿속을 스쳤다.
혜성대 병원으로 실려 왔던, 이송 도중 사망한 경기 남부 교도소 재소자. 다니엘이 지금 이 교도소에서 수감자로 있는 이유.
“서, 서서서, 선생님!”
오 교도가 떨리는 목소리로 지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고개를 돌린 지호가 6239의 얼굴을 확인했다.
괴로운 듯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점점 그 정도가 심해지면서 기괴해지고 있었다. 손을 뻗은 지호가 6239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근육이 돌처럼 딱딱하다. 손을 떼고 조치를 취하려 하자, 탁! 손목이 붙잡혔다.
“아, 아으, 아….”
흰자만 보이던 눈에 가까스로 검은자가 드러났다. 6239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필사적으로 지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얼굴이 굳은 시점에서 무슨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그는 검지로 지호의 손목을 긁었다. 너무 힘을 준 탓에 껍질이 까지고 피가 맺혔지만, 지호는 고스란히 그 손길에 집중했다.
PL-0512 내 아이가 위험해.
마지막 유언이었다.
* * *
“씨발! 이게 뭐냐고!”
다니엘이 분하다는 듯 벽에 주먹을 내리쳤다. 잔뜩 지친 기색의 지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테이블에 걸터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어디든 갈 수 있는 건 다니엘만이 아니었나 봐요.”
“좆같네, 진짜. 우리가 쓰레기 청소할 때 쓰는 수법을 아주 그대로 쓰고 있어.”
“조직 내부에 범인이 있는 거 아닐까요?”
“그러기엔 사용하는 약품이 완전히 달라. 효과가 확실한데 약을 쓴 흔적도 남지 않잖아. 이런 독약은 우리 조직에도 아직 없다고.”
“…6239가 유언을 남겼어요.”
“뭐라고 남겼는데?”
“아이가 위험하다고 했어요. 그 사람의 아이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있을까요?”
“아이?”
턱을 매만진 다니엘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내 곧 생각이 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 애라면 남태주가 어디 숨겼을걸?”
“태주 씨가요?”
“네가 너 없는 동안 남태주 지켜보라고 했잖아. 늘 보던 애 말고 새로운 애랑 손을 잡고 백화점에 가더라고. 누군지 궁금해서 알아봤지. 근데 자길 죽이려고 했던 새끼의 애더라?”
자기 배를 칼로 쑤신 놈의 자식과 쇼핑 삼매경이라니. 뭐 저런 또라이가 다 있나 싶어서 기억에 선명하게 박혀 있단다.
지호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남태주다워서 픽 웃음을 터뜨렸다. 굳이 보지 않아도 그 모습이 어땠을지 알겠다.
“할 일이 또 늘어났네요. 아이가 위험하다고 한 거 보면, 6239의 사망과 연결되어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가 맨 처음에 남긴 유언, PL-0512.
이 PL-0512에 관한 거라면 지호도 잘 알고 있었다.
PL-0512와 6239의 죽음이 연관되어 있거나, PL-0512로 인해 아이가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거나.
아니면, 그 둘 다이거나.
어쩌면 이 모든 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조용히 생각을 정리한 지호가 손을 말아 쥐었다.
역시, 남태주 그 사람까지 위험해지는 건 싫은데. 하지만 그 사람을 멀리하는 게 무척 힘들다.
종일 내 품에 끌어안아도 모자랄 정도로, 나는 너를….
* * *
태주는 잠으로 하루를 꼬박 보내다가 다음날 낮에 눈을 떴다. 빛에 익숙해지자 낯익은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본가에 있는 자신의 방이다.
“일어났니?”
침대 옆 소파에 앉아 있던 결영이 책을 덮고 일어났다. 이런 사고를 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어서 그런지 표정이 태연하다.
태주는 결영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눈만 굴렸다. 방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마지막에 시선이 닿은 곳은 링거를 꽂은 팔이었다. 튜브를 타고 혈관으로 들어가는 링거액의 색이 노랗다.
“이거, 비타민 아니에요?”
작게 웃은 태주가 튜브를 가리키며 물었다.
“내가 어떻게 낳아 준 잘생긴 얼굴인데, 너는 그걸 막 굴리고 말이야. 꼴이 말이 아니라서 내가 비타민 좀 놔 달라고 했어. 이거 다 맞을 때까지 움직일 생각하지 마, 알았어?”
“아, 화장실 가고 싶은데.”
“화장실도 안 돼. 조금씩 싸서 말려.”
“서른 넘은 아들한테 그게 무슨 끔찍한 소리예요, 어머니.”
“열심히 대꾸하는 거 보니까 정말 괜찮긴 하구나?”
침대에 걸터앉은 결영이 태주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웃었다. 그 손길이 좋은지 태주의 눈이 기분 좋게 감겼다.
“선생님이 잘 고쳐 주셨을 테니까요.”
눈을 감기 전, 지호의 품에 안겨 있던 것을 기억한다. 그래, 연지호가 아니면 누가 나를 이렇게 살리겠는가. 뿌듯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응? 너 치료해 준 거 지호가 아니라 장 박사님인데?”
“예?”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연지호가 아니라 장 박사님이라니?
잠시 혼란이 찾아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혼란은 금세 잠잠해졌다. 눈을 가늘게 뜬 태주가 결영을 보았다.
“에이, 거짓말.”
“어머, 얘가? 진짜야.”
“안 속아요. 나한테 링거 주사 이렇게 꽂은 사람, 선생님밖에 없었거든요?”
“치, 안 속네? 그래, 지호가 너 한참 살펴보다가 갔어. 저녁에 또 올 거야.”
하는 수 없다는 듯 결영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지호 좀 그만 고생시키라며 나무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벌써 너 고쳐 준 게 몇 번째냐고 한다.
딱히 반박할 수 없는 사실에 태주가 멋쩍게 웃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한번 팔의 링거로 향했다. 강도 사건으로 입원했을 때가 문득 기억났다.
‘태주 씨, 적어도 병원에선 아픈 거 참지 않아도 괜찮아요.’
‘예?’
홀로 회진을 온 지호의 얼굴을 넋 놓고 보는데, 뜬금없이 그런 말을 했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제 손을 잡았다. 링거를 고정하기 위해 붙인 반창고를 슬슬 문질렀다.
‘손 저리죠? 자주 쥐었다 펴던데.’
‘…눈치채셨습니까?’
‘그럼요. 내 환자인데.’
반창고를 뗀 지호가 조심스레 링거를 제거했다. 그리고 옆 수납장을 열어 새 링거 주사를 꺼내 포장을 뜯었다.
‘가끔가다 이런 환자분을 종종 만나요. 그리고 다들 태주 씨처럼 크게 불편한 것도 아니라면서 참고요.’
‘그렇, 습니까?’
‘위치만 바꿔도 훨씬 나을 거예요. 잠깐 소매 좀 걷을게요.’
병원복 소매가 깔끔하게 접어 올라갔다. 손끝으로 팔을 살짝 만져 본 지호가 손목보다 조금 위쪽에 링거 주사를 꽂았다. 고정하고 튜브를 연결하자 저린 게 많이 나아졌다.
그때를 떠올리며 느리게 눈꺼풀을 내렸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머니, 저 조금만 더 잘게요.”
선생님 오시면 그때 깨워 주세요. 작게 중얼거리며 잠에 빠져들었다.
* * *
“지호 왔니?”
현관문을 활짝 열며 지호를 맞이한 결영이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자식에 기뻐하는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거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혁주는 픽 웃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매번 고마워요, 지호 씨. 간단한 인사를 남기면서였다.
“저녁은? 먹었어? 엄마가 뭐 해 줄까?”
“괜찮아요. 먹고 왔어요.”
이렇게까지 남의 어머니한테 애정을 받아도 되는 걸까? 심지어 ‘엄마가 뭐 해 줄까?’라고 묻는다. 그 다정함에 지호는 어깨를 짓누르던 피로가 사르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남태주가 이렇게 사랑받으며 자랐을 걸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먹고 왔는데 왜 이렇게 야위었어? 교도소 일이 힘들지?”
“다들 잘 도와줘서 힘든 건 없어요. 태주 씨는요?”
“낮에 일어났어. 그런데 밥도 거의 안 먹고 계속 잠만 자네? 방에 있으니까 들어가 봐.”
어서 가 보라는 손짓에 고개를 꾸벅 숙인 지호가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오르며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더 점검했다.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결영은 그런 지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천천히 내려간 시선이 상처투성이 손에 머물렀다.
* * *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간 방은 은은한 조명만 켜져 있었다. 지호는 가장 먼저 링거액이 얼마나 남았는지부터 확인했다. 홀쭉해진 팩에 새 링거액을 꺼낼 때였다.
“이제 괜찮습니다.”
눈을 뜬 태주가 나지막이 말했다.
“괜찮으니까 이것 좀 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차피 비타민이잖습니까.”
“밥도 거의 안 먹었다면서요.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 둔 지호가 태주의 곁에 앉았다. 이리저리 상태를 살피며 청진도 해 보고, 혈압도 재 보았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정말로 회복이 빠르다.
“밥은 왜 안 먹었어요? 입맛이 없어요? 아니면 속이 안 좋아요?”
“선생님 오시면 같이 먹으려고 했습니다.”
“그랬어요? 그럼 지금 밥 먹을까요?”
지호는 최대한 태주의 몸에 자신의 손이 닿지 않게끔 하면서 링거를 제거했다. 상처로 거칠어진 손에 놀랄까 봐 신경 쓴 것이었다. 하지만 그 낌새를 빠르게 눈치챈 태주가 덥석 손을 붙잡아 왔다.
“뭐 어떻습니까. 저 때문에 다친 손인데.”
그대로 상처투성이의 손이 태주의 품으로 끌려갔다. 이렇게 망가지고 해졌음에도 그는 소중한 것을 대하듯 군다.
“많이 아팠겠습니다, 저 때문에.”
차가웠던 몸에 다시 온기가 생겼다. 지호는 잠시 눈을 감고 태주의 체온을 느꼈다.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전혀 아프지 않아요. 아픈 줄도 몰랐어요.”
“에이, 거짓말.”
“내가 태주 씨한텐 숨기는 건 있어도 거짓말은 안 한다고 했는데?”
“그럼 이번에 처음 하신 겁니다. 손이 이 지경이 됐는데 어떻게 안 아픕니까?”
“음, 그건…. 내가 예전에도 이런 말 하지 않았어요?”
“어떤 말이요?”
“태주 씨한테 온 신경이 쏠려서 아픈 것도 몰랐다고.”
‘태주 씨한테 온 신경이 쏠려서 아픈 것도 몰랐어요.’
퇴원 후 다시 재회했을 때, 카페에서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호가 했던 말이다. 해사하게 지어 보이는 미소가 여전했다. 왠지 모르게 심장이 간질거리는 기분에 태주는 지호를 좀 더 끌어당겼다. 옆에 누워 달라는 뜻이었다.
“태주 씨 밥 안 먹어도 돼요?”
“지금은 이게 더 급합니다. 빨리요.”
조금 추워서 온기가 필요하니 나눠 달란다. 그다지 생각한 기색조차 안 보이는 변명에 지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조심스레 태주의 곁에 누웠다.
“이번 일은 제가 너무 부주의했습니다.”
지호를 끌어안으며 그 품에 고개를 묻은 태주가 말했다.
“선생님 손이 그렇게 되게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전문가를 찾아서 꼭 원래의 부드럽고 고운 손으로 되돌려 드리겠습니다.”
정말로 그럴 모양인지 목소리가 결의에 차 있었다. 지호도 조심스레 태주를 마주 안았다.
“그럼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겠네요. 태주 씨 탓 아니니까 미안해하지 말아요. 난 정말 괜찮아요.”
“하지만 괜찮은 사람치고 좀 야위어 보입니다.”
“이건 태주 씨 걱정하느라 야윈 것 같은데…. 어쩌다가 그런 곳에 갇힌 건지 물어도 될까요?”
지호의 손가락이 태주의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쓸어 주자 슬쩍 고개를 든다. 뭔가 망설이고 있는 듯한 눈과 마주쳤다.
이거 설마….
느낌이 좋지 않다. 말을 하지 않아도 왠지 알 것 같다.
“혹시,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환각을 볼 정도로 혼란이 찾아왔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뇌 기능에 문제가 생기면서 해리성 기억상실증을 앓는 환자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어디서부터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얘기해 줄 수 있어요?”
거의 확신하는 투로 지호가 물었다. 이에 살짝 미간을 좁힌 태주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그게…. 다니엘 씨를 데리러 의무실에 가려고 했던 것까지만 기억합니다. 그런데 왜 제가 의무실에 안 가고 그런 창고에 있었을까요?”
“심 교도님 말로는 오전에 행사 준비로 태주 씨가 무리했다고 했어요. 그래서 태주 씨는 쉬게 두고 대신 의무실로 온 거라고요.”
“…아, 그랬구나. 심 교도님이야, 원래 사람을 잘 챙기니까요.”
“그 이후엔 아예 기억나는 게 없는 거예요?”
“네,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떠오릅니다. 선생님이 문 열고 들어오신 것 말고는….”
“그래도 그 정도뿐이라 다행이네요.”
어차피 좋은 기억도 아니니 차라리 삭제되는 것이 더 나았다.
그 후 지호는 태주에게 또 다른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살폈다. 다행히 별다른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선생님.”
“네, 태주 씨.”
“자고 가면 안 됩니까? 이렇게 있으니까 따뜻하고 좋은데.”
다만 조금 어리광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계속 이러고 있을 거예요? 밥 먹어야죠.”
“안 먹어도 될 것 같습니다. 따뜻하니까 다시 자고 싶습니다.”
내일 아침에 오늘 못 먹은 몫까지 몰아서 먹을게요. 실없는 소리를 뱉는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진다. 태주가 다시 지호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가슴께에 귀가 가까이 닿아 있는 게 심장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후, 잔인하네….”
일정하게 흐르는 숨소리를 들으며 지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잠이 든 태주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잠만 잘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면서 조용히 눈을 감는 게, 일단 오늘까지는 잠만 잘 생각인 게 분명해 보였다. 그는 태주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잘 자요, 내 태주 씨.”
반짝이는 온기가 내려앉은 밤이었다. 이 순간을 위해 오늘이 그렇게 힘겨웠던 걸지도.
* * *
“6239의 아이라면, 양주 세움 병원 VIP 병실에 있습니다.”
지호에게 교도소 이야기를 전해 들은 태주는 곧장 몸을 움직였다. 아직 안정을 더 취했으면 좋겠다는 말은 역시 듣지 않았다.
조금 더 늦게 이야기할 걸 그랬나? 하지만 자신이 아니더라도 남태주가 먼저 오 교도나 심 교도에게 연락해 물었을 것이다. 지금 교도소 상황은 어떠냐면서.
한숨을 내쉰 지호가 앞장서는 태주의 어깨를 붙잡았다. 현관문 밖으로 나가기 전, 그는 짧게 당부했다.
“조금이라도 몸이 안 좋으면 꼭 나한테 얘기해요. 알았어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선생님이 있어서 걱정 안 하니까요!”
그럼 갈까요? 환하게 웃은 태주가 현관을 나섰다. 지호는 그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있어서 걱정을 안 한다니. 지금까지 나 때문에 걱정이라는 사람만 잔뜩이었는데.
하여간 별나다.
그리고 특별하다.
* * *
거리상 중간쯤 위치한 호텔에 차를 세우고, 이후 병원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혹시 몰라서 6239를 만나러 갈 땐 늘 이렇게 이동했다고 한다.
“아이가 이상하게 자주 앓습니다. 툭하면 고열에 시달리고, 소화도 잘 못 하고…. 한 달에 두세 번은 심하게 앓아서 어쩔 수 없이 병원에서 지내게 한 겁니다.”
조금 불편할 수 있지만, 그래도 있을 건 다 있어서 생활은 가능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태주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아무 반응이 없는데도 ‘남태주입니다.’라고 목소리를 내자 문이 열렸다. 중년의 여자가 태주와 지호를 맞이했다.
“교도관님 오셨어요?”
“그동안 제가 좀 뜸했죠? 잘 지내셨습니까?”
병실 문이 열리고 안의 전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동시에 지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태주처럼 아무렇지 않게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고개를 돌리며 병실 곳곳을 눈에 담았다.
세움 병원의 VIP 병실이 상상 이상으로 좋다는 소문을 듣긴 했다. 그런데 이건…. 병실이 아니라 하나의 집이나 다름이 없었다. 주방에, 욕실에, 보호자 침실까지 전부 갖추고 있었다.
“연화는 좀 어떻습니까?”
“오늘은 기운이 좀 없는지 계속 잠만 자요.”
“그렇습니까?”
우리 연화, 언제쯤이면 벌떡 일어나서 삼촌이랑 놀아 주려나?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린 태주가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전보다 조금 더 야윈 듯한 아이가 얌전히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마음이 좋지 않다. 지금 상황만으로도 힘든 아이의 어머니한테 남편의 사망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 하염없이 아이의 얼굴을 보며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연화라고 했나요?”
어느새 병실을 다 둘러보고 온 지호가 물었다. 그는 아이의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다가 미간을 좁혔다.
“페로몬이 심하게 불안정해 보여요. 발육도 다른 아홉 살 또래와 비교하면 많이 더딘 것 같고요. 발현기는 언제 왔었죠?”
“네? 아, 그게…. 여섯 살 때였던 것 같아요.”
아이의 어머니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지호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러면서 눈은 태주에게 향했다. 이 사람은 대체 누구냐는 물음이었다. 태주는 뿌듯하게 웃으며 아주 유능한 의사라고 지호를 소개했다.
그사이 지호는 가방 안에서 청진기를 꺼냈다. 계속해서 아이를 살피며 물었다.
“발현기가 오기 전에도 아이가 이렇게 자주 앓았나요?”
“아뇨. 그전에는 활발하고, 친구들과도 곧잘 놀았어요. 지금처럼 또래보다 왜소하지도 않았고요.”
“그럼 혹시, 발현기 때 아이가 크게 앓았나요?”
“어, 그건….”
“발현기는 어디서 보냈죠? 가정에서? 아니면 병원에서?”
“그게, 그러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이의 어머니는 말끝만 늘이고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눈치를 보니 곤란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돌아온 대답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때 제가 아이의 곁에 별로 있어 주지 못했거든요. 안정이 최우선이라고 해서, 하루에 한 번 얼굴 보는 게 고작이었어요.”
어렵게 대답을 마친 그는 울음을 참듯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뭔가 말하고 싶은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호는 잠든 아이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태주와 눈을 맞췄다. 더 들어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그 또한 눈치채고 있었다.
* * *
혹여나 아이가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을지도 몰랐다. 세 사람은 병실에 딸린 다이닝룸으로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지호는 먼저 6239의 사망 소식부터 전했다.
“남편분이 사망 전에 저한테 아이가 위험하단 말을 남겼어요. 그래서 어머님께 따로 연락드리지 않은 거고요.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어요.”
장례는 6239의 모친과 동생이 치르는 중이었다. 다행히 그들도 강도 짓이나 한 아들을 둔 게 미안해서 얼굴을 못 보겠다며, 며느리가 오기를 바라지 않았다.
지호의 한마디 한마디에 아이의 어머니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은 충분히 이해했다며 고맙다고 말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한 눈은 일렁이기만 할 뿐,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마음껏 슬퍼할 수조차 없는 그에게 조금 미안한 일이었지만, 지호는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남편분이 아이가 위험하다는 말과 함께 남긴 글자가 있어요.”
“그게, 뭐죠?”
“PL-0512 혹시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나요?”
“글쎄요. 뭔가 낯선 것 같지는 않은데….”
“어? PL-5012면, 예전에 임상 실험했던 신약 아닙니까?”
그런데 대답은 의외의 인물에게서 튀어나왔다. 왠지 모르겠는데 남태주가 PL-0512를 알고 있었다.
“태주 씨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어요?”
지호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임상 실험’이라는 것과 그다지 관련 있는 일이 없을 것 같은데. 어디서 무슨 정보를 얻었던 걸까?
태주는 보여 줄 게 있다면서 가방에서 태블릿 PC를 꺼냈다. PDF 파일을 열어 지호에게 건넸다.
[PL-0512 임상 실험 보고서]
[보고자 이진목]
[진료과 외상외과]
전 약혼자인 소윤에게 받은 서류였다. 태주는 그 임상 실험에 관해 설명했다.
“발현기를 맞은 백 명의 아이가 실험 대상이라고 했습니다. 약물 투여량에 따라 특정 형질이 결정된다고 했는데, 아마도 그걸 실험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지호는 이 파일이 태블릿 PC에 저장된 날짜를 확인했다. 1년 전이다. 이때라면 우리가 함께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었을 때가 아닌가?
“태주 씨는 이걸 언제부터 알았어요? 왜 나한테는 얘기하지 않은 거예요?”
지호가 물었다. 태주 또한 그게 마음에 걸렸는지 살짝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전 약혼자한테 받은 거라서요. 소윤 씨의 개인적인 일까지 제가 함부로 말하게 될까 봐 혼자 조용히 알아봤습니다.”
남태주다운 배려 가득한 이유였다. 지호는 거기에 대고 뭐라 더 할 수 없었다. 태주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약물은 임상 실험 결과가 좋았는데도 윤리적인 문제로 승인을 받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PL-0512가 약물 이름이 아닌 프로젝트 이름이라서 따로 더 찾아보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고요.”
“그러고 보니 그런 임상 실험이 있었다는 게 기억나네요. 그런데 그 명칭이 PL-0512인 줄은 몰랐어요.”
턱을 매만진 지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태주 또한 생각에 잠긴 건 마찬가지였다. 사건의 타래가 이렇게 이어져 있을 거라곤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다.
임상 실험…. 그 이후 눈에 띄게 상태가 달라진 아이….
한참을 그러고 있었을까. 어느 순간 뭔가 떠올랐는지,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오늘따라 서로를 많이 쳐다보게 된다. 시선이 또 한 번 맞닿았다.
“선생님.”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이 이상 별다른 대화는 없다. 지호가 다시 아이의 어머니에게 물었다.
“연화가 그 임상 실험 대상이었던 거죠?”
“….”
“발현기 때 그 임상 실험에 참여했던 거죠?”
“…역시 그게 문제였던 건가요?”
조금 후에야 무겁게 입이 열렸다. 간호사의 설득에 못 이겨 참여했다고 한다. 그 약물을 사용하면 발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면역력도 월등히 좋아져 아이의 성장에 도움이 될 거라고. 아무한테나 권하는 것이 아니며, 유통될 시 약의 가격을 예상할 수 없을 거란 말에 동의서에 사인을 했단다.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형편이 좋지 않아 아이에게 좋은 걸 안겨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발현기라도 조금 더 편하게 보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말하며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지호는 아직 확실한 게 아니라며 그를 다독였다. 조금 후, 밖에서 엄마를 찾는 아이의 목소리에 그는 얼른 눈물을 닦고 다이닝룸을 나갔다.
“임상 실험에 참여한 사람이 더 있는지 봐야겠어요.”
둘만 남은 방, 머릿속을 정리한 지호가 말했다.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인 태주가 잠시 멈칫했다.
“그런데 보고서에 참여자 명단은 없었습니다. 명단도 없는데 어떻게 찾죠?”
“명단 이전에, 우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형질이 변한 사람을 몇 알고 있잖아요.”
알 수 없는 이유로 형질이 변한 사람….
‘이상해요. 성인이 된 후에 발현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거든요. 우리나라에서 나온 사례만 해도 반세기 동안 고작 두 건이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 주유경 씨도 그렇고, 이번에 한소윤 씨도 그렇고, 게다가….’
‘게다가 오늘 낮에 응급실에 왔던 외상 환자도 최근에 발현한 오메가였어요.’
언젠가 지호가 했던 이야기. 태주는 그 이야기 속 세 사람 중 가장 의아한 부분이 많았던 인물을 꼽았다.
“지금으로서는 주유경 씨가 가장 의심스럽습니다.”
“네, 게다가 주유경 씨는 오메가인 걸 감추고 있던 백현수 씨한테 장기 기증까지 했으니까요.”
정신 병동에 밥 먹듯이 드나들었던 백상중 의원의 며느리. 갑자기 오메가로 형질이 변한 베타.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사망했다. 남편인 백현수가 사고로 목숨이 위험해진, 바로 그날에. 사망한 주유경의 장기는 기다렸다는 듯 백현수가 받았다.
“잘하면 큰돈이 될 수 있는 약이에요. 그 임상 실험 이후로도 계속해서 약을 연구했다면….”
“발현기의 아이뿐만이 아닐 겁니다. 발현기에 상관없이 형질을 변형시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죠. 역시 내 태주 씨네.”
지호가 장난스레 대꾸하며 웃었다. 하지만 마냥 밝지만은 않은 웃음이었다.
“그럼 갈까요?”
“네.”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은 곧장 병실을 나섰다. 이제부터 할 일을 차분히 계획해야 했다.
* * *
꽉 막힌 도로 위, 한참을 기다려도 길이 트이지 않았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차분히 추리하며 퍼즐 조각을 맞추듯 사건의 윤곽을 그렸다.
“아이가 위험하다는 내용과 함께 PL-0512를 적은 걸 보면, 분명 그 임상 실험에 문제가 있었을 거예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건 예전에 6239가 했던 이야기인데, 특정 억제제가 아니면 안 되는 알파와 오메가가 있다고 합니다.”
“그 억제제라는 게 프레드닐렉신을 말하는 건가요?”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연화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억제제를 복용하고 있는 걸 봤거든요.”
“그 말을 들으니까 임상 실험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알 것 같네요.”
“…혹시 면역력과 관련이 있는 걸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 없어 보여요. 약물 분석도 해 봤는데, 그 외엔 정말 다른 기능이 없거든요.”
프레드닐렉신. 억제제이긴 하지만 주로 면역력 강화제 대용으로 이용된 약이다. 게다가 의사의 처방 없이는 구매가 어려웠다.
잠시 생각하던 지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요즘엔 잘 사용하지 않는 약이라 처방을 받기 쉽지 않았을 거예요. 병원에 데리고 가도 면역력 치료만 따로 받아야 했겠죠. 형편이 어려운 만큼 매번 치료비를 내는 데도 한계가 있었을 거고요.”
“약 하나면 되는 일인데 너무 어렵게 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강도 사건을 일으킨 거겠죠. 약을 처방받으려면 임상 실험과 면역력 저하의 연관성을 밝혀야 하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임상 실험의 책임자인 센터장이 기를 쓰고 막았을 것이다. 약의 허점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나하나 퍼즐을 맞춰 나아가다 보니, 새로운 의문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그보다 업계에서 그다지 사용하지 않는 약을 기원 약국에서만 그렇게 많은 양을 보유하고 있던 것도 이상해요.”
약사인 양지원 또한 어딘지 의심스럽다며 지호가 미간을 좁혔다. 이에 잠시 망설이던 태주가 조심스레 말했다.
“선생님, 그…. 양지원 씨와 관련된 건데요. 선생님한테 아직 말씀드리지 못한 게 있습니다.”
피해자는 남태주 하나뿐이라고 했던 6239의 말. 동시에 정정택과 연락이 끊긴 양지원.
일부러 감출 마음은 없었고, 갑자기 사라져 버린 양지원을 찾은 뒤에 지호에게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태주가 계속해서 말을 이으려 할 때였다.
“우리가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이 길었죠?”
액셀을 지그시 밟은 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표정도 여러 가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일단 우리 정보 공유부터 할까요? 저도 가만히 앉아서 공무원 준비만 하지는 않았으니까요.”
태주 씨도 그렇죠? 그러면서 어디로 핸들을 돌리면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다른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었다.
“우리 집으로 가죠. 거기가 가장 적당해 보이네요.”
이에 태주가 조금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사 마치신 겁니까?”
“잔짐은 아직 정리 못 했는데, 그래도 청소는 깨끗이 해 뒀어요. 게다가 이번에는 식탁도 제대로 있고요.”
“그럼 진작에 말씀하시지! 제가 짐 정리 도와드리겠습니다!”
조금 전까지 심각했던 표정은 어디 갔는지, 태주의 표정이 밝아졌다. 꼭 이런 날이 오길 손꼽아 기다린 사람 같아서 지호는 웃음이 나왔다.
내내 심각한 것도 피곤하니 이것도 나쁘진 않았다. 잠시 태주를 따라 기분을 환기했다.
“짐 정리는 됐어요. 태주 씨 다 나아서 나온 지 하루도 안 지났잖아요. 내가 해 주는 밥 먹고 얌전히 이야기만 나누다 가는 거예요. 알았어요?”
“그래도 도와드리고 싶은데. 안 됩니까? 저 이제 진짜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요. 이미 다른 일로 태주 씨 고생시키고 있는데, 그런 자잘한 일까지 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아니, 그것도 다 제가 좋아서 하는 거….”
“그리고 태주 씨 상태는 태주 씨보다 의사인 내가 더 잘 아니까, 내 말 들어요. 응?”
“와, 정말 맞는 말이라 반박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이상의 고집은 포기한 태주가 몸에 힘을 빼고 시트에 기댔다. 운전 중인 지호의 옆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작은 일이라도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모르는 건가?
하지만 이것도 좋다.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걱정해 주는 연지호.
아, 걱정 끼치면 안 되는데, 더 걱정시키고 싶기도 하네!
아이러니한 기분을 끌어안은 태주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입고 있는 겉옷에 코를 묻었다.
그 모습을 흘끗 본 지호는 신호가 걸린 틈을 타 뒷좌석으로 손을 뻗었다. 벗어두었던 겉옷을 가져와 태주에게 덮어 주었다.
“잠깐 눈 좀 붙여요. 도착하려면 이십 분은 더 걸려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태주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동시에 언제나 빠르고 거칠었던 지호의 운전도 눈에 띄게 얌전해졌다.
지호는 신호가 걸리는 종종 태주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바라보는 눈동자에 걱정이 한가득 스며 있었다.
* * *
“와, 확실히 저번 집보다는 뭔가 더 있습니다.”
칭찬이라 보기 힘든 말을 칭찬처럼 내뱉으며 태주가 집안으로 들어섰다. 지호는 새 실내화를 꺼내 태주의 발 앞에 놔 주었다.
“태주 씨, 이거 신어요. 방금 보일러 켜서 아직 바닥이 차요.”
차에서도 추운 것처럼 움츠리고 있더니, 이러다 감기라도 오는 건 아닐까. 요즘 또 독감이 유행이던데. 속으로 걱정하며 얼른 물부터 끓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속을 모르는 태주는 이리저리 집을 구경하기 바빴다.
“선생님, 방도 구경해 봐도 됩니까?”
“그럼요. 이 집에서 태주 씨한테 안 되는 건 없어요.”
“그거 제집처럼 돌아다녀도 된단 소리죠? 구석구석까지 다 보고 오겠습니다.”
지호가 차와 간단한 간식을 준비하는 동안 태주는 이 방 저 방을 오갔다. 그러더니 어느 방에서는 지호의 모자를 쓰고 나오고, 또 어느 방에서는 닳을 대로 닳은 의학 서적을 들고 나타났다. 몇 번을 그러다가 침실에 들어간 뒤로는 한참을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태주 씨. …태주 씨?”
남태주의 오피스텔에 비하면 그다지 볼 게 없을 텐데. 뭐에 그렇게 빠진 건지 불러도 대답이 없다.
지호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티팟을 식탁에 놓고 침실로 향했다. 한 뼘쯤 열려 있는 문을 조금 더 밀자, 골똘히 생각에 잠긴 태주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태주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손에 쥔 보드 마커 뚜껑을 뽁, 열었다. 그의 손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 지호의 시선이 옮겨갔다.
그동안의 사건들을 나름 보기 좋게 정리해 놓은 보드였다. 간단한 개요와 함께 연관이 있는 사건을 묶어 놓았는데, 그 도식을 금세 파악하곤 부족한 부분을 덧붙였다. 그중엔 지호와 떨어져 있던 1년 동안 홀로 조사한 내용까지 있었다.
그 짧은 새에 이걸 다? 괜히 기특한 마음이 들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조용히 곁에 다가가 보드를 쭉 살펴보았다. 조금 후, 뿌듯한 표정으로 마커의 뚜껑을 닫은 태주가 몸을 돌렸다. 코앞에 지호가 있는 걸 확인하곤 깜짝 놀라 멈칫했다.
“아, 깜짝이야. 놀랐잖습니까. 기척도 없이.”
“기척을 내도 태주 씨는 몰랐을 것 같은데요? 엄청나게 집중하고 있던데?”
“와, 또 맞는 말하는 것 봐. 한 번은 그냥 넘어가 주시지.”
“할 말 잃은 태주 씨 표정이 좀 귀여워야죠.”
“으, 됐습니다. 귀여워하지 마세요.”
“그보다 손이 조금 찬데, 아직 추워요?”
마커를 가져간 지호가 걱정스레 물었다. 마커는 선반에 대충 올려놓은 뒤 태주의 손을 붙잡았다. 이제 보일러를 튼 지도 꽤 돼서 집도 훈훈해졌는데 이상하다.
“태주 씨 원래 손이 이렇게 차갑지 않았는데….”
“계속 뭘 썼더니 그런 것 같습니다. 보드가 좀 차가웠거든요.”
너무 걱정하는 거 아니냐며 태주가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요, 선생님.”
“네, 태주 씨.”
“부탁 하나만 해도 됩니까?”
“뭔데요?”
남태주가 어려운 부탁을 할 사람은 아니다 보니, 지호의 입에서도 흔쾌히 긍정의 목소리가 나왔다. 미소 지은 얼굴로 바라보자, 슬쩍 태주의 눈동자가 옆으로 이동했다. 침대가 놓인 자리였다.
“한 번만 누워 봐도 됩니까?”
눈치를 보는 게, 누가 보면 천만 원 정도를 빌려달라고 한 줄 알겠다. 귀여워하지 말라는데 자꾸 귀엽게 굴면 어쩌나 싶다.
너무나도 별거 아닌 부탁이었다. 지호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몸이 끌려갔다.
어어?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태주가 침대로 몸을 던졌다. 하지만 누워 있는 건 태주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끌려온 지호도 그 옆에 누워 있었다.
“태주 씨만 눕는 게 아니었어요?”
“연지호 침대인데, 연지호는 옵션이죠.”
“그럼 남태주 침대는 남태주가 옵션인가?”
“원하시면 그렇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잠깐만 선생님 좀 빌려주세요.”
말을 마친 태주가 조용히 지호를 끌어안았다. 어젯밤처럼 또 가슴에 귀를 붙이고 눈을 감았다. 지호는 가만히 그가 원하는 대로 따라 주었다.
쿵. 쿵. 쿵. 쿵.
심장이 뛴다. 태주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고스란히 제 심장 소리를 내어 준 지호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더듬더듬 태주의 어깨와 등을 만져 보다가 소중하게 마주 안았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선생님이 있어서 걱정 안 하니까요!’